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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누스의 사무실 문에는 작은 종이쪽지가 붙어있다. 그 쪽지에는 ‘남자친구, 옷, 부모님, 우정, 맥주, 건강, 학교, 짝사랑, 성적, 예상치 못한 시험, 아이~씨 프랑스어 숙제 또 있어’ 등등, 읽고 있으면 웃음이 나오는 ‘고민거리’들이 쭉 나열되어 있다.
‘큰 고민, 작은 고민, 나에게 와서 이야기하세요.’란 글에 용기를 얻어 나 역시 그 문을 두드린 적이 있다. 지루하리만큼 긴 쉬는 시간이 올 때마다 기웃거리다가 결국 1교시 수업을 빼먹고 그 곳에 들어간 것이다. 원래는 스웨덴어 수업을 들었어야 했지만, 그 문을 보고 충동적으로 ‘땡땡이’를 쳐버렸다.
에즈베리는 각자의 시간표에 따라 본인이 해당 교실을 직접 찾아가는 방식이기 때문에 상습적으로 ‘땡땡이’를 치는 학생들도 가끔 있다. 물론 나는 모범적인 축(스웨덴 선생님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것이다)에 속하는 학생이라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스웨덴어 선생님 마르가레타가 내 빈자리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할 지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몇 주 전의 나는 누군가를 앞에 세워두고 이야기를 하고 싶어 병이 날 지경이었다. 갑자기 어두워지고 쌀쌀해진 스웨덴의 날씨가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고, 리누스는 내 맞은편에 앉았다. 아직 능숙하지 못한 스웨덴어 실력으로 인해 영어로 대화를 하기로 했다.
“여기서 하는 말은 선생님이라거나 부모님 같은 다른 사람에게는 전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정말로 걱정이 되는 심각한 문제의 경우에는 이야기를 해야 할 때도 있어.”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다고 살살 꼬드겨 놓고 부모님에게 전부 고자질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말할 수도 있다고 하는 것에 더 믿음이 갔다.
적어도 처음 대화를 시작할 때는 내 이야기가 ‘심각한 문제’라고는 생각 하지 않았다. 내가 가장 먼저 꺼낸 이야기는, 학교의 규모에 대한 불평이었다.
“너무 커서 교실을 찾을 수가 없다고요. NO(물리, 생물, 화학 등) 교실들은 다들 건물 A에 있는데, 그 A3 복도 찾는데 1주일이 걸린 거 아세요? 교실 이름만 써 두면 뭐해요, 못 찾겠는데! 게다가 같은 시간대에 수업이 6개인가 7개라고 써져 있는데, 어떤 교실에 들어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번에는 A301인지 A306인지를 찾는다고 십 분을 넘게 헤매다가 겨우 찾으니까 문이 잠겨 있어서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친구랑 같이 가면 안 되니?”
“제가 제 2의 스웨덴어를 듣기 때문에 다른 애들이랑은 쉬는 시간이 달라요. 늦게 시작해서 늦게 끝나거든요. 세상에 지도가 필요한 학교가 어디 있어요? 제가 에즈베리에 다니는 건지, 호그와트에 다니는 건지 헷갈릴 때도 있다는 말이에요.”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쉬는 시간, 버스 카드를 잃어버려서 매일 왕복 10km를 걸어야 한다는 것, 자전거가 너무 비싸다는 것, 부모님과의 마찰, 고등학교를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 장래의 희망이 자꾸 바뀐다는 것……. 나는 장장 1시간 30분 동안 내 이름에 관한 불평에서부터 진정한 친구는 언제쯤 생길지에 관한 고민까지 늘어놓았다. 지루할 만도 하건만 리누스는 불평이나 잔소리 한 마디 하지 않고 그 이야기를 끝까지 참을성 있게 들어 주었다.
“시간을 예약 해 둬도 되고, 그냥 원하는 때에 와도 되는데, 어떻게 할래?”
나는 그냥 오고 싶을 때 오겠다고 대답했다.
가슴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처럼 내 고민을 해결해 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 좋았다. 가끔은 그냥 누군가에게 미주알고주알 이야기 하고 싶을 때가 있고, 그런 이야기는 으레 부모님이나 친구들에게는 하기 힘들기 마련이다. 그런 것을 이해해줄 수 있으면서 언제나 대화를 할 수 있는 믿음직한 상대가 늘 학교에 있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안심 되는 일인지는 직접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실컷 떠들어대다 나오는 내 손에, 수업에 빠졌다고 선생님에게 야단맞지 않도록 편지를 쥐어 주는 리누스는 또 다른 천사였다.
‘LOVE BOX’

‘솔렌투나에 사는 여자아이들의 모임’ 광고물 아래에 있는 그 상자 옆에는 말하자면 안내문 같은 것이 붙어 있었다. ‘사랑, 몸, 성(性)에 관한 질문을 써서 상자에 넣으면 대답해 드립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대답’들이 인쇄된 종이가 붙어 있었다.
나는 일바와 함께 그 질문과 답변을 읽어 내려갔다.
모두 읽었을 때쯤에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일바, ‘att knulla’가 무슨 뜻이야?”
“그거.”
일바의 짤막하고 심드렁한 대답을 이해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뜻을 문장에 대입해 보니 학교에 왜 이런 것이 붙어 있는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는 이상한 질문들이었다.
‘Q: 평생 그거 하고 살면 불법인가요?’
‘A: 아뇨.’
개방적인 스웨덴(스웨덴 사람들은 이런 평가에 질색을 한다)에서 ‘아기는 어디에서 오나요?’ ‘황새가 물어다줍니다.’와 같은 질의응답이 오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상당히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Q: 여자애들끼리 키스해도 돼요?’
‘A: 네.’
‘Q: 내가 여자애 동그라미에 그거 하면 애가 생겨요?’
‘Q: 여자애 동그라미가 뭔데요?’
이런 둘째가라면 서러울 괴상한 질문들 사이에서도 압권인 질문(?)이 있었다.
‘Q: 나 심심한데, 나랑 그거 할래요?’
‘A: 싫어요.’
이런 질문을 진지하게 한 학생은 별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그렇게 믿고 싶다), 질문에 걸맞은 답변을 여과 없이 게시판에 붙여 놓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못해 황당할 지경이었다. 한국 같으면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고 학교가 뒤집어질 일일 것이다.

스웨덴은 이런 것에 굉장히 개방적이다. 어린 아이들도 남녀 간의 스킨십을 아무렇지 않게 여긴다. 영화의 경우도 폭력적인 것은 높은 관람 등급을 받지만, 성적인 묘사가 나오는 것은 상대적으로 낮은 등급을 받는다. 그런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기 때문이라나? 일부러 쉬쉬하며 숨기는 일은 거의 없다.
얼마 전 NO 수업을 하다가 잠시 삼천포로 새는 바람에 화제가 되고 있는 임신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원래 여자로 태어난 사람이 성형수술을 하고 가슴을 없애는 등 이런 저런 과정을 거쳐서 남자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이라고 했다.
가장 앞줄에 앉아있던 예니페르(Jennifer)란 여자아이가 손을 번쩍 들고 질문했다.
“그럼 그 남자가 여자 친구랑 그거 해서 아기를 가진 거예요?”
NO와 수학을 가르치는 선생님 망누스(Magnus)는 진지한 표정으로 잠시 고민했다. “원래는 여자였고, 자궁은 그대로 있으니까 다른 남자 친구의 도움을 받던가 해서 아기를 가진 것이 아닐까?”
“그야 당연하지. 여자랑 여자가 그거 한다고 애가 생기냐!” 다른 남자아이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수학 시간에 방정식을 설명하던 망누스의 입에서 불쑥 “그러니까 뇌를 쓰면 되는 거야, 뇌를!”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남자 제군들은 자네들의 뇌 말고 어깨 위의 뇌를 사용하도록!”라고 말해 우리 반은 수업 진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웃음폭탄을 맞았다. 나는 일바에게 다시 설명을 들은 뒤에야 그 농담을 이해할 수 있었다.
청소년 잡지에 나타난 성 개방

‘Glöd’라는 이름의 잡지 표지에는 웃고 있는 여자아이들의 얼굴이 커다랗게 나와 있었고, ‘여자아이들!’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차례대로 ‘여자들의 수다’ ‘질문 상자: 여자 친구가 아기를 가졌어요.’ ‘요한나 & 찰리: 헤어졌다가 다시 시작했어요.’ ‘첫 경험: 어땠는지 에멜리에가 설명합니다.’와 같은 타이틀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기사의 제목들은 ‘낚시’가 아닌 진짜였다.
무슨 익명 취재 같은 것도 아니었다. 지난 호에는 한 남학생이 나와서 여자 친구를 어떻게 만났는지, 첫 경험이 어땠는지, 그 후로 어떻게 헤어졌는지를 아주 평범한 일기처럼 설명하더니 이번에는 그 여자 친구의 입장에서 설명하는 것이다. 얼굴, 이름, 나이, 학교까지 당당하게 밝히는데 있어서는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질문과 답변 코너에는 독자들이 편지를 써서 보내면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답변을 쓰는 형식이 있었다. 부모님과의 불화,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의 슬픔, 부모님에게 이성친구들을 숨겨야 하는 상황 등등. 실제로 임신한 여자 친구에 관한 고민을 설명한 남학생의 경우에도 친절한 답변을 받았다.
참고삼아 ‘가브리엘라’라는 이름의 여자아이가 보낸 질문과 마르가레타 베리그렌(Margareta Berggren)이라는 심리학자의 답변을 번역해 보았다.
안녕하세요?
아빠가 무서운 것이 정상적인 건가요? 아빠가 저한테 소리를 지르는 게 싫어서 잘못된 행동을 안 하려고 늘 노력해요. 아빠 자신도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데 문제가 있다고 고백하셨어요. 아빠가 부순 리모컨만 몇 개에, 전에는 제 옷장 문까지 부쉈어요. 제 남동생의 머리를 벽에다 몇 번이나 찧기도 했고, 엄마는 아빠 때문에 자주 우세요. 도와주세요, 정말 무서워요!
가브리엘라에게
아이들은 부모를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아이들의 권리 중 하나는 편안하고 마음이 놓이는 곳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아빠를 무서워해야 할 이유 역시 없습니다. 어른스럽게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것을 배워야 하는 것은 아빠 쪽입니다. 물건을 부수거나 문을 걷어차는 것은 어른스러운 것이 아니죠. 자신의 아이들을 신체적으로 해하는 것 역시 금지되어 있습니다. 물론 벽에다가 아이의 머리를 찧는 것 역시 그렇습니다. 학생과 학생의 가족은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엄마와 대화하는 것으로 시작하세요, 이곳에 보낸 편지와 제 답변을 보여주세요. 엄마는 가브리엘라가 이 상황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알아야하고, 가브리엘라의 남동생과 가브리엘라의 부모로서 어떤 행동을 취해야만 합니다. 아빠 역시 자신의 행동이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어떻게 아이들을 아프게 하는지 알아야합니다. 엄마가 돕지 못할 것 같다면, 복지국 직원이나 학생 상담소에 도움을 요청하세요. 참지 마세요, 가브리엘라의 동생도, 자기 자신도, 부모님에게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마르가레타
여성과 아이들의 천국이라는 스웨덴에도 자신의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난동을 부리는 부모가 있기는 한 것 같아 마음이 씁쓸했다. 리누스가 말한 ‘심각한 일’은 이런 것이 아닐까? 그래도 고통 받는 아이들이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을 곳이 있다는 것은 정말 다행이다.
‘여자들의 수다’
내가 흥미롭게 본 것은 ‘여자들의 수다’였는데, 세 명의 십대 여학생들이 남자 독자들로부터 진솔한(?) 질문을 받아서 대답하는 방식이었다.
‘어째서 여자들은 나쁜 남자를 좋아하나요?’
‘여자들은 짧은 옷을 자주 입는데, 왜 우리가 쳐다보면 기분 나빠해요?’
‘이성과 친구로 지내는 게 힘드나요?’
‘성에 관해 많이 생각해요?’
‘포르노그래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남자 친구가 그런 걸 본다면 어떻게 할 거예요?’
‘왜 분홍색을 좋아해요?’
‘원래부터 그렇게 예쁜데 왜 화장을 해요?’
‘왜 털을 깎아요?’
‘깎는 거랑 정글인 거랑 어느 게 더 나아요?’
‘남자의 뭘 제일 먼저 보세요?’
지나가는 여자를 붙잡고 물어 보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는 질문에 대답한다는 이와 같은 발상은 어떻게 보면 조금 진부하지만, 한국 여자아이들과 스웨덴 여자아이들의 생각이 얼마나 다른지를 비교하면서 보니까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스웨덴 여자아이들은 어째서인지 남자의 팔뚝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왜일까?
연예인과 옷 이야기로 범벅이 된 잡지만 보다가 이런 것을 보니 조금 신선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외국에 나와 살면서, 가끔은 문화의 차이를 온 몸으로 느끼고는 한다. 성이나 남녀 관계에 대해 폐쇄적인 한국에서 살다가 스웨덴 사람들을 보면 당황스러울 때도 있다. 적어도 한국은 학교에 상주하는 카운슬러를 찾아가서 이성 친구와의 문제에 대해 한 시간 삼십분 동안 이야기를 늘어놓기는 힘들 것이다.
한국의 선생님들을 나쁘게 평가할 생각이 전혀 없을 뿐더러, 그런 것이 한국의 선생님들 잘못만은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리누스에게 말하듯이 했다면 십분도 지나지 않아 ‘너는 왜 쓸데없는 일로 걱정을 사서 하는데? 빨리 가서 수업이나 받아!’라는 구박이나 받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촛불집회에 대한 반응은 어떨까?

아마도 스웨덴 선생님은 그 집회에 참석하려는 정확한 이유를 물을 것이고, 본인의 주관과 의지가 뚜렷하다면 말리지 않을 것으로(아니 말리지 못할 것으로) 믿는다.
한국의 언론보도에 나오는 것이 사실이라는 전제 하에 하고 싶은 말이지만, 선생님이 정부의 입장에 서서 학생들을 회유하고 협박하는 비민주적이고 비신사적인 행동을 한다는 것은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그것은 폭행에 가까운 체벌을 가하고 ‘사랑의 매’라고 우기는 억지 논리와 다를 것이 없다. 채찍이 필요한 것은 말(馬)이지 사람이 아니다.
한국의 뉴스를 보고 있으면 보다 정확하고 실질적인 성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부쩍 많이 든다. 내가 한국에서 받았던 성교육이라고는 ‘이상한 사람들을 조심하자!’ 정도밖에 없었다. 무작정 숨기고 부끄러워하는 것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숨기기만 하면 결국은 그릇된 방법으로 정확하지 못한 상식을 갖게 될 뿐이니까 말이다. 상처가 났을 때 대일밴드를 바르면 우선은 상처가 가려지고 덜 아픈 것처럼 느껴지지만, 결국 그 상처가 짓물러져 상처를 더 악화시킬 뿐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이하영
sweko@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