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경우(통일연대 전 사무처장)
박노자 씨는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를 주로 다루곤 한다. 박노자 씨가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를 주로 다룬 논문을 엮어 출판하면서 낸 책의 하나가 『나를 배반한 역사』(‘인물과 사상사’, 2003)이다. 박노자 씨는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를 일관하는 관점으로 ‘나를 배반한 역사’라는 표현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아래에서는 위 책의 서문을 중심으로 박노자 씨의 견해를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겠다.
박노자 씨는 제국주의와 국가, 집단주의 따위를 비판하면서 일제에 맞서 싸운 민족주의자들의 철학과 사상까지도 함께 비판하곤 한다. 가령 일제가 나쁘지만 이에 맞서 집단주의, 폭력을 동원하는 행위 또한 제국주의의 논리를 내면화한 것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박노자 씨의 논리대로라면 항일 운동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이러한 의문에 대해 위 책 서문에서 박노자 씨는 다음과 같이 자문( 自問)한다.
“제국주의를 빼박은 이차적 민족주의의 패러다임을 비판적으로 이야기할 때 꼭 들어오는 질문은 과연 그 상황에서 다른 대안이 있었느냐는 것이다.”
1. 이는 필자가 박노자 씨의 글을 읽을 때마다 들었던 의문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박노자 씨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물론 제국주의에 의해 魔窟이 다 된 세계에서 한 국가의 운명을 책임진 사람의 입장이라면 부국강병을 유일한 생존법으로 선택하는 것이 어느 정도는 당연하다”고 전제한 뒤 그렇다고 하더라도 “국가의 입장만을 생각해야 된다는 논리는 부당하다.” 왜냐하면 “부국강병은 나라 밖의 타자에 대한 배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라는 피라미드를 받쳐주는 노동자와 농민에 대한 무한한 세뇌와 착취를 의미하기도 하다”고 쓰고 있다. (밑줄 필자)
위 밑줄 친 부분은 갑신정변의 폭력성을 비판한 바 있는 철저한 비폭력, 무정부주의자인 박노자 씨의 솔직함에 비하면 다소 실망스러운 표현이다. 필자가 보기에 박노자 씨 또한 어느 지점에서 자신의 논지를 일관되게 견지하지 못하고 적당히 상식과 타협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일제를 타도하기 위한 무기로서의 부국강병.국가가 “노동자와 농민에 대한 무한한 세뇌와 착취를 의미한다”고 한다.
문제의 초점은 일차적으로 일제에 맞서 싸우기 위해 부국강병.국가를 동원하는 것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이다. 그런데 박노자 씨는 살짝 논점을 피해 반일의 도구로서의 국가가 아니라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의 국가 또는 국가 일반(일제시대의 국가와 해방 이후의 국가)을 다루고 있다.
또 다른 문제는 대단히 상식적인 의문이다. 일제시대에 살았던 노동자와 농민이 국가(일반적인 표현을 빌리면 자주독립국가)를 자신을 ‘세뇌하고 착취하는 도구’로 생각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당신의 생각은 어떠한가? 이런 황당한 결론에 도달하는 이유는 박노자 씨의 신념인 무정부주의 때문이다.
2. 박노자 씨가 다음으로 내놓은 대안은 이렇다.
“비록 한 국가의 울타리 안에서는 제국주의에 대응할 수 있는 대안이 없다 해도 지구 전체의 차원에서는 대안 마련이 꼭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그 예로 이라크 침략 과정에서 수렁에 빠진 미국을 예로 들고 있다.
박노자 씨가 이라크의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이라크의 상황은 “비록 한 국가의 울타리 안에서는 제국주의에 대응할 수 있는 대안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일국적 차원에서 제국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유력한 사례로 보인다.
이라크에서 미국이 수렁에 몰린 것은 UN의 노력도, 중.러.독.프 등 국제 열강의 개입도, 세계 반전운동의 성장도 아닌 바로 이라크 민중의 저항 때문이다. 이라크 민중은 사담 후세인 정부가 무너진 조건에서도 불요불굴의 투지로 부시 행정부를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다. 이는 정부, 정규군을 갖지 못한 일국 차원의(강조 필자) 민중 투쟁만으로도 미국을 궁지로 몰아갈 수 있다는 훌륭한 사례이다. 이것은 일찍이 베트남 민중이 보여주었던 업적이기도 하다. 이것이 일국 차원에서 제국주의에 대응할 수 있는 대안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다소 논점을 확대해 보자. 미국을 궁지로 몰아넣고 있는 차원에서 본다면 베네주엘라는 어떠한가? 북과 이란은 어떠한가?
차베스가 국가권력을 장악하여 베네주엘라의 석유와 정부기구를 장악하지 못했다면 미국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저항은 어려웠을 것이다. 북, 이란의 경우 핵무기를 갖지 않았다면 이라크와 비슷한 상황에 몰렸을지 모른다.
이미 세계적인 상황은 정부와 국가권력을 활용한 강력한 반제 운동의 위력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노자 씨는 정부와 국가권력을 활용한 반미 운동은 무시하고 주로 이라크 민중의 비정부적 저항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미국과 싸우고 있는 이라크 민중에게 물어 보라. 당신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당연히 제대로 된 정부와 국가 권력이다. 이라크 민중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비정부적인 원시적 저항이 아니라 정부와 국가 권력이 동원할 수 있는 역량을 총동원한 과학적이고 집체적인 저항이다. 이것은 제국주의와 맞서 싸웠던 전 세계 수천만, 수억 민중의 피맺힌 염원이기도 했다.
그런데 박노자 씨는 이라크 민중의 비정부적인 저항(박노자 씨는 이를 어떻게 볼지 모르나 이것도 당연히 일국적 차원의 국가 권력을 지향하는 저항이다)은 옹호하면서도 정부를 활용한 저항은 부정한다(박노자 씨와 같은 극단적인 무정부주의의 관점에서는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형태라도 국가.집단은 나쁜 것이다). 그러면서 애써 비주류적 저항인 일제 시대의 무속인, 여성, 탁발승 따위에서 희망(?)을 구한다.
박노자 씨가 자신의 사명을 역사학자에 국한한다면 비주류적 저항을 탐구하려는 그의 태도는 높이 살만 하다. 그러나 그는 시종일관 일제에 맞서 싸웠던 주류적 저항, 즉 민족주의, 국가를 비판적 입장에서 보고 있다. 비주류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권장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일제를 몰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몽상에 불과하다. 주류적 저항을 기본으로 놓고 이를 긍정하는 토대위에서 비주류적 저항에 관심과 애정을 두는 자세가 올바른 것이다.
3. 끝으로 박노자 씨가 찾은 대안은 다음과 같다.
“제국주의적 폭력이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시대에 우리의 이상이 온전히 실현되는 역사를 기대한다는 것은 과욕일 것이다. 제국주의 논리의 내면화라는 과정은 한국의 한 세기(근대화가 강제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1894년부터 분단이 지속되는 현재까지의 시기)를 특징짓는 현상”이라고 쓰고 있다.
박노자 씨에 따르면 근현대사는 물론 현재까지 집단으로 결속하여 제대로 된 정부를 구성하고 이를 통해 자주와 통일, 근대화를 추구하려는 노력은 “제국주의 논리를 내면화하는 과정”이고 진정한 이상은 “민중 구성원 각자를 억압으로부터 보호하는 개인주의”라고 주장한다(위 책 95쪽에서).
최근에는 이런 류의 주장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데 필자가 보기에는 대체로 다음의 세 가지 부류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박노자 씨와 같은 진보적 좌파 일부이고, 둘째는 임지현, 권혁범 씨와 같은 극단적인 자유주의자들이고, 셋째는 뉴라이트이다.
터놓고 말하자면 박노자 씨나 임지현 씨와 같은 견해는 학술적인 주장이다. 필자는 현실 정치, 운동과 밀접한 연계가 없는 진보적인 인텔리들의 낭만적인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류의 견해가 어떤 경우에는 역사의 순방향에 서기도 하지만 또 어떤 경우에는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역사의 역방향에 동조하기도 한다. 1970년대 유신시절이라면 개인주의ㆍ자유주의ㆍ무정부적인 견해가 진보적인 색채를 띠었다면 현재는 다소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이를 명확히 하기 위해 뉴라이트의 대표적인 논객의 한 사람인 이영훈 씨의 역사관을 소개한다.
이영훈 씨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민족과 혁명 중심의 역사관이었다고 비판하면서 「왜 다시 해방전후사인가?」(『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중에서)에서 자신의 새로운 역사관, ‘문명사’를 제창한다.
이영훈 씨의 문명사관은 다음과 같다.
“문명사의 출발점은... 분별력 있는 이기심을 본성으로 하는 .....인간 개체”이고 “문명사는 이기적 본성의 인간 개체를 출발점으로 하여 그 인간을 둘러싼 가족과 친족의 역사, 마을과 단체의 역사, 사유재산과 화폐의 역사, 재분배와 시장의 역사, 문학과 예술과 사상의 역사 등의 문명소의 역사소로 구성”된다.
“토대가 허약한 구조물이 붕괴하고 말듯이 문명소의 역사학에 튼튼히 기초하지 않은” 국가만의 역사학과 민족의 역사학은 “공허하며 위태롭고 위험하다.”
이영훈 씨의 주장은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 다루고자 했던 친일파 문제와 그 연장선하에서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추진했던 역사 재평가 작업에 대한 정치적 대응이다. 이영훈 씨가 이른바 문명사라는 이름하에 주장하고 싶었던 바를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해 이영훈 씨의 주장을 더 추적해 보도록 하자.
이영훈 씨에 따르면 일제시대는 “조선의 전통문명과 일본을 통해 들어온 서유럽 기원의 근대문명이 상호 융합하는 시대”인데 상상의 공동체인 민족이라는 잣대로 이를 재단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항일운동이란 상상의 공동체를 위해 조선이라는 전통문명을 고수하기 위해 근대문명인 일본과 싸운 반문명적인 정치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는 최근 뉴라이트 세력의 공통된 역사 의식이기도 하다. (밑줄 필자)
그러면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의 필진들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 책이 추구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균형 잡힌 역사관으로 역사에 대한 편협하지 않고 조급하지 않은 태도이다. 유럽은 전제왕정으로부터 시민사회의 발달과 민주주의의 성립에 이르는 과정을 수세기에 걸쳐 겪었다. 반면 우리는 그런 나라 만들기 과정을 단 수십년만에 치러야 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무리가 따랐다” 따라서 민족이니 반민족이니 따지지 말고(밑줄 필자) “아직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국민국가가 무엇인지, 그리고 시민의 권리와 의무는 무엇인지를 모른 채 나라 만들기의 첫 삽을 뜬 우리 할아버지-아버지 세대를 따뜻하게 이해하고 싶다”(이 내용은『해방전후사의 재인식』책 뒷면에 이 책 전체의 주장을 요약하는 부분으로 강조되어 있다).
이 글은 나찌 잔재를 청산하고 이제는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야 하는 독일의 지식인이 쓴 글이 아니다. 이 글은 한번도 제대로 된 일제를 청산한 바 없고 새로이 권력을 잡은 신흥 정치세력(노무현 정부)이 친일 잔재를 다루고자 하는 민감한 정치적 시기에 일류 대학의 필진들이 쓴 글이다.
위 글은 사실상 친일세력과 현재의 보수수구 세력에 대한 지지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지식인으로서 손색없는 지식과 안목을 갖고 있는 박노자 씨의 주장과 이영훈 씨가 노골적으로 친일세력과 보수수구세력을 옹호하기 위해 동원한 역사관을 비교해 보라.
<개인과 자유주의를 중심으로 한 역사관.............우여곡절을 거쳤던 근현대사 심지어는 통일을 향한 현재의 운동>
박노자 씨는 민족을 두고 분투했던 선혈들의 역사를 “제국주의 논리를 내면화하는 과정”으로, 이영훈 씨는 전통문명과 근대문명이 융합하는 시기로 묘사한다. 이 세련되고 고매한 역사관의 와중에서 결국 민족의 존엄과 자주를 위해 분투했던 선열들의 업적은 사라지고 현재의 통일운동은 무가치하는 것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박노자 씨는 미국과 제국주의 심지어는 자본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그런 면에서 그는 분명 진보적인 지식인이다. 그러나 그의 진보성이 민족과 국가, 집단과 조직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결합되지 않으면 미국과 자본주의의 충실한 옹호자인 뉴라이트의 생각과 같아질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 기자명 민경우
- 입력 2006.05.24 09:41
- 수정 2013.05.12 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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