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경우(통일연대 전 사무처장)


박노자 씨는 특이한 인물이다. 러시아에서 태어나 한국으로 귀화해 동서양을 넘나드는 폭넓은 주제를 가지고 글을 쓰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가 쓴 글은 양도 많고 젊은 식자층을 중심으로 큰 호응을 얻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박노자 씨의 견해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그것은 극복해야할 대상, 가령 미국, 파시즘, 소비문화 등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지적하지만 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위험한 생각을 유포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아래에서는 “하얀 가면의 제국”(박노자, 한겨레신문사)의 서문을 중심으로 박노자 씨의 견해를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겠다.

1. 자유에 대하여

박노자 씨는 서문에서 서구의 자유를 “소비주의 이념과 몇 개 안되는 독점자본이 지배하는 ‘선진 세계’에서 국가와 자본(즉 체제)이 생산 내지 공인한 물질적/사상적 상품을 선택할 자유를 의미할 뿐, 소비주의와 근대 국가/시장의 규율을 탈피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하지 않는다”라고 쓰고 있다.(‘ ’는 박노자 씨가 한 것인데 선진 세계에 ‘ ’를 친 이유는 그들이 선진 세계라고 불릴만한 자격이 없다는 뜻인 듯 하다)

예리하고 적나라한 비판일 수 있겠다. 문제는 그 다음 구절인데 그러면서 그는 “소비주의적이지 않고 근대 국가/자본과 무관한 대안적 생활양식을 선택함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체험한 사람들은 서구 사회에서 극소수일 뿐이다”라고 적고 있다.(밑줄 필자)

위와 같이 근대와 무관한 대안적 생활양식을 선택하여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맑스에 따르면 근대 세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은 노동 계급이다. 이들은 근대 세계에 포함되어 있고 근대 세계의 모순을 가장 집중적으로 체현하고 있기 때문에 대안 세력이 된다. 반면 근대의 소비적이고 폭력적인 체질에 항거하여 근대와 무관한 대안을 찾으려 했던 사람들이 있다. 흔히 공상적인 사회주의자들로 불렸던 사람들인데 이들은 근대 세계를 벗어나 소비와 폭력에 찌들지 않는 이상향을 현실 세계에서 구현하고자 했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이들의 노력은 대부분 허망하게 끝났다.

근대와 무관한 대안적 생활양식을 현실 세계에서 구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정신 세계에서 구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적 갈등과 모순이 첨예화된 조건에서 정신 세계의 평안을 구하는 경향은 인류 역사 전체에서 너무나 흔히 있는 현상이다. 그러나 이런 경향은 현실 세계는 그대로 둔 채 일부 사람들이 탈사회적인 형태로 현실 세계를 벗어나는 것이다.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지사적인 삶보다는 민중적이고 서민적인 활동이 중시되어야 한다. 개인의 지사적 선택보다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다수의 사람들이 각성되고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민족/국민국가 그리고 국가 일반

다음으로 박노자 씨는 “긍정적으로 보기 쉬운 ‘민족/국민국가 건설’은...... 기존의 전통에 대한 미증유의 폭력을 의미하기도 하고 19세기 중반 미국의 ‘명백한 운명’ 논리와 같은 공격적이며 폭력적인 ‘민족 신화’의 생산과 주입을 의미하기도 한다”며 민족/국민국가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한다.

필자가 보기에 위의 서술은 객관적으로 틀리지 않다. 박노자 씨의 지적처럼 민족/국민국가는 민족과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통일성과 일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강한 통합력을 발휘한다. 이 과정에서 토착 전통이 사라지기도 하고 제도적 폭력이 행사되기도 한다.

이를 지적하고 이것의 폐해를 시정하는 것은 앞으로의 과제일 것이다. 가령 민족어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부차적인 씨족ㆍ부족의 언어가 말살되었다면 앞으로는 수많은 방언들이 보존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러나 민족/국민국가의 그러한 부작용과 폐해는 사물의 한 측면이다. 크게 보면 인류 역사가 민족/국민국가 단위로 구획되는 것은 역사발전의 합법칙적인 과정이다.

그러나 박노자 씨는 민족/국민국가의 공과를 균형있게 보기보다는 국가 전체를 부정한다.

“우리의 사회ㆍ정치적 현실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기구인 국가는 사회적 폭력을 독점하는 만큼 늘 각종 폭력을 행사하거나 잠재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위험하고도 몰도덕적인 것이다.”

본 연재물에서 여러 차례 지적했듯이 최근에는 한국사회에서도 민족/국민국가는 본질적으로 박노자 씨처럼 “위험하고도 몰도덕적”이라는 따위의 생각들이 많아지고 있다.

민족/국민국가는 사회역사적 실체이다. 그것은 일정한 역사 발전 단계에서 만들어졌으며 역사 발전 과정에서 그에 상응하는 공과가 함께 있기 마련이다. 구체적인 사회역사적 상황을 고려하여 공과를 따지려 하지 않고 덮어 놓고 민족/국민국가는 잘못되었다는 식의 발상 자체가 오히려 대단히 관념적이고 폭력적인 것이다.

박노자 씨는, 견해를 극단으로까지 발전시키면 다음과 같이 된다.

“유대인과 집시, 슬라브인들을 계획적으로 학살한 파시스트 독일과 인정사정없이 망명신청을 거절당했거나 망명 허가가 만료된 약 5만 명 정도의 외국인들을 매년 추방하는-그리고 이 과정에서 최근 10년 동안 99명의 자살자를 낸-오늘의 민주적 독일은 정도 차이가 있을 뿐 질적으로는 차이가 없다”는 따위의 주장으로 발전한다.

위와 같은 서술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박노자 씨는 솔직하면서도 무책임하다.

3. 근대적 패러다임

박노자 씨는 서문에서 “근대의 서구 중심 세계 전체가 문제시된다면 근대 패러다임속의 대립적 개념의 이분법들-예컨대 ‘반동’과 ‘혁명’의 이분법-도 상대화, 지양돼야 할 것이다. 근대 패러다임 속의 혁명과 진보 같은 상대적인 선-즉 지배담론보다 더 미래 지향적이며 민초적이며 인륜적인 것-을 찾을 수는 있어도 전적으로 긍정할 수 있는 개념이나 이념은 찾을 수 없다.”

“하얀 가면에 갇힌 눈들은 늘 ‘중심’-즉 서구적인 부강.과학.합리성을 가장 가시적으로 표상하는 쪽-을 향하고 있다. 그러나 하얀 가면을 벗어던지려면 ‘중심’의 주술에서 깨어나고 지배 체제에 균열을 일으키는 ‘반란적 주변’으로 시선을 돌려야 할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요즘에는 사회를 <자본과 노동>, <제국주의-식민지> 따위와 같이 거시적으로 세상을 보지 않고 <근대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 박노자 씨의 견해도 이런 범주의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위와 같은 발상은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그것은 <자본-노동>, <제국주의-식민지>이든 주류 사회에서 소외된 소수자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키는 것이다. 만약 우리 사회가 안정되고 성숙된 사회로 진입하여 그동안 버려두었던 장애인, 이주노동자, 여성, 노인 등에 두루 관심을 둘 수 있다면 대단히 좋은 일이다. 그리고 설사 <자본-노동>, <제국주의-식민지> 따위의 주제가 미해결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런 류의 관심과 고민이 성장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박노자 씨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이들을 “지배 체제에 균열을 일으키는” 역사의 주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사회를 <자본-노동>, <제국주의-민족>으로 갈라 보는 것은 자본과 제국주의를 극복하는 힘이 노동과 민족에서 나온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노동과 민족은 반란적 중심(주변이 아니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박노자씨는 자본과 제국주의는 나쁘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본-노동>, <제국주의-민족>이라는 근대적 패러다임은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이 위험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일제시대를 예로 들어 보겠다.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서는 당연히 일제가 왜 나쁜 것인가를 가르쳐야 하고 이와는 다른 우리민족의 기원과 문화를 강조해야 하며 일제와 그 앞잡이들을 제외한 모든 조선 민족은 지도자를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 제국주의와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구분과 분리가 필수적이며 아(我)는 주변이 아니라 중심을 지향해야 한다.

노동운동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가능한 가장 사회적으로 중요한 공공부문, 기간산업의 대기업 노동자들을 중심으로(주변이 아니라 중심) 처음에는 개별 노동자와 개별 노동자가, 다음에는 노조와 노조가 그리고 그 다음에는 전체 노동자와 여타 근로 대중이 시간이 흐를수록 중심을 향해 결속되어야 한다. 반란적 주변은 반란적 중심에 비해 더욱 소외되어 있지만 사회를 바꿀 힘이 없고 중심으로 결속되지 않으면 노동운동은 언제까지라도 승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인 판도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미국을 물리치기 위해서 선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민족국가 단위의 반제역량과 열강사이의 역관계이다. 현 시점에서 본다면 베네주엘라나 이란의 대미 저항이 중요하고 미국의 일방주의에 반대하는 중러, 독프 등의 동향을 주시해야 한다. 그리고 이와 함께 이라크 민중의 저항,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세계민중의 투쟁 등 전세계적인 판도에서 보면 반란적 주변이라 할 수 있는 대상도 고려되어야 한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반란적 주변이 아니라 반란적 중심이 먼저 서야 하고 반란적 중심이 먼저 서기 위해 필요한 각종 기제들을 고무하고 격려해야 한다. 그런데 박노자 씨는 이른바 반란적 주변을 발굴하기에 바쁘다. 물론 이것 자체는 격려할 일이다. 문제는 반란적 주변의 관점에서 반란적 중심이 서기 위한 기제들, 가령 개인적 자유가 아니라 집단적 단결, 민족과 국가 단위의 저항, 미묘하지만 의미있는 국제 역학 따위를 해체시키고 있는 점이다.

요즈음에는 제 정신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미를 이야기한다. 문제는 미국이 왜 나쁜가가 아니라 반미를 누가, 어떻게 할 것인가에 있다. 박노자 씨는 반미를 이야기하지만 정작 반미할 수 있는 기제들을 해체시키기에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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