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경우(통일연대 전 사무처장)
하인스 워드가 방한하면서 혼혈아, 이주노동자 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관심이 우리 사회가 보다 포용적인 사회로 발전하는 데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몇 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함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래에서는 2월 15일자 한겨레신문 기사를 중심으로 논해 보도록 하겠다. (보다 풍부한 논의들이 많지만 모두 읽어 볼 여력이 없어 2.15 기사를 중심으로 의견을 제출하는 방식을 택했다.)
첫째, 민족 문제에서 혈연이 갖는 지위의 문제이다.
민족 문제를 논하는 과정에서 제기되는 혈연은 생물학적인 개념이 아니다. 즉 유전자 구성을 따져 어떤 특징을 갖는 민족은 어떤 민족이고 그와는 다른 특징을 갖는 민족은 다른 민족이라는 식으로 구분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만약 민족을 이런 식으로 구분하게 된다면 우리 민족 구성원 중 상당수가 우리 민족보다는 한(漢)민족이나 일본민족, 심지어는 중동아랍계통과 유사한 경우가 있을 것이다.
민족은 혈연을 기초로 하면서도 본질적으로는 정치사회적인 개념이다. 즉 어떤 지역을 토대로 혈연관계를 유지하면서 발전해 왔던 일정한 인간집단이 정치사회적 힘에 의해 언어와 문화, 역사와 소속감을 같이 하는 공동체로 결속되면 민족이 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을 단일민족이라고 부를 경우에도 우리 민족이 하나의 조상으로부터 단일한 혈통을 물려받아 여타의 혈연이 섞이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은 한반도와 중국의 동북지방을 무대로 명멸해 갔던 수많은 씨ㆍ부족이 고조선-고구려(삼국시대)라는 정치적 공동체를 거치면서 독자적인 문화와 언어, 소속감을 갖게 되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당연히 여러 계통의 피가 섞였지만 고조선-고구려 과정에서 형성된 민족이라는 틀이 현재까지 큰 변화없이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단일민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단일민족성을 순혈과 같은 개념과 혼동하고 후자의 관점에서 전자를 비판하는 것은 피해야 할 듯 하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단일민족이라고 할 때 다분히 순혈을 의미하는 어감을 가질 때가 있다. 여기에는 역사적인 근원이 있다.
단일민족론이 가장 융성했을 때는 아마도 조선조 말기 일제로부터 국권을 빼앗길 무렵일 것이다. 일제로부터 나라를 빼앗긴 조건에서 나라에 대한 충성심, 즉 애국심(애국이란 조선총독부에 대한 충성을 의미하므로)을 갖기는 어려웠다. 이 과정에서 항일을 고취하는 사조는 당연히 민족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때의 민족은 일본 민족과는 시원을 달리하는 독자적인 뿌리와 역사를 강조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경향이 부족한 것일 수는 있어도(관념적으로 민족성을 강조하는 것보다는 지주-소작관계와 같은 구체적인 사회역사적 문제를 가지고 민족ㆍ민중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옳다) 해당 시대와 부합하는 노선이었다. 20세기 초반 가장 격렬한 항일투쟁의 진원지가 단군을 중시하는 대종교 계열이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셋째, 지금 시기 단일민족이 갖는 현재적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모든 개념은 해당 시기의 역사적 과제와의 관련성 속에서 재평가ㆍ재음미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현 시기 가장 중요한 역사적 과제는 통일이다. 따라서 통일을 위해서는 남북이 그리고 해외에 떨어져 살고 있는 재외동포가 하나의 민족임이 강조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세계사적으로도 희귀하게 혈연의 일치성이 높은 민족성 특성을 중시하는 것이 그다지 문제일 수 없다.
그런데 한겨레신문의 2.15 기사를 비롯 최근의 한겨레신문의 각종 칼럼들을 보면 마치 작심한 듯이(?) 민족 문제를 순혈ㆍ배타적 국가주의 따위로 몰아가는 글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한겨레신문이 현재의 역사적 과제를 자율적이고 개방적인 시민사회로 본다면 동의할 수는 없어도 토론하면 될 문제일 것이다. 그런데 <하인스 워드-순혈과 혼혈-단일민족-배타적 국가주의>로 이어지는 연결은 무리하거나 우려스럽다(이에 대해서는 넷째와 다섯 번째를 참조).
넷째, 민족이나 민족주의가 현 세계사에서 갖는 지위에 대한 문제이다.
현 세계사는 여전히 민족, 국가 단위로 협력ㆍ갈등하는 단계이다. 따라서 역사가 더 발전하여 민족ㆍ국가보다는 인류공동체로서의 가치가 보다 중요한 시대가 된다면 민족을 구성했던 여러 기제들, 혈연과 단일민족성 등에 대한 강조는 상대적으로 작아질 것이다. 필자는 그런 시대가 빨리 오기를 바란다. 그리고 하인스 워드 사건에서 보듯 우리 사회에서 관용의 문화가 성장하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민족ㆍ국가 단위의 갈등 구조라는 현실과 민족ㆍ인종ㆍ국가를 뛰어 넘어 공존공영하는 구조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미래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혼혈이나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문제가 그저 민족과 혈연이 다른 것으로부터 비롯된 문화적 차이의 산물일 수 있는가? 당연히 거기에는 강대국 미국과 약소국 한국 사이에서 비롯된 민족적 문제가 있고 역으로 경제적 여유가 생긴 한국과 경제적으로 궁핍한 동남아시아 국민 사이의 관계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겨레신문의 기사에서는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사이에 놓인 갈등 관계가 사라져 있다는 생각이다. 프랑스에서 벌어진 이슬람계 청년들의 소요나 미국에서 라틴계 민족의 시위를 돌아보라. 민족ㆍ인종 사이의 갈등이 그저 관용과 연대라는 문화와 정서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민감한 정치사회적 문제가 있는 것이다.
다섯째, 한국에서 이주민 노동자, 국제 결혼 따위의 문제는 민족, 혈연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계급적ㆍ사회적 모순의 표현이기도 하다.
한겨레신문 기사에도 이러한 사정이 잘 녹아 있다. 한겨레신문 기사에는 “외국인과 결혼 사례가 많은 전남의 경우 2005년 7월 말 현재 12살 이하 코시안 어린이가 2천여명이나 된다”라고 적고 있다.
이 현상은 국제 결혼에 따른 민족, 혈연의 문제인가 아니면 농촌의 몰락을 반영한 사회적 현상인가? 물론 양자는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굳이 비중을 따진다면 후자의 문제가 보다 핵심이다. 전남에서 유독 국제 결혼이 많은 것은 전남 도민이 특별히 개방적인 문화를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고 농촌이 몰락해 가는 조건에서 결혼할 처녀를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결책 또한 농촌을 되살리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지 이를 두고 배타적 민족성 운운하는 것은 아귀가 맞지 않는 접근이다.
- 기자명 민경우
- 입력 2006.04.19 10:34
- 수정 2013.05.12 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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