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경우(통일연대 전사무처장)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하 ‘재인식’)에는 편집위원을 대표하여 박지향 서울대 교수가 쓴 머리말이 있다. 이 머리말에서 박지향 교수는 재인식을 내게 된 동기에 대해 “『해방전후사의 인식』(이하 ‘인식’)이 드러낸 두 가지 문제점, 즉 민족지상주의와 민중혁명 필연론이 우리 역사 해석에 끼친 폐해”를 바로 잡기 위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본 글에서는 이 중 민족지상주의에 대해 비판한 부분을 중심으로 검토해 보겠다.
박지향 교수는 인식의 민족지상주의에 대해 두 가지로 비판한다. 첫째는 “민족지상주의로는 고난의 우리 현대사를 제대로 인식하고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고 둘째는 민족지상주의의 연장선에서 “‘우리 민족끼리’라는 기상천외한 이념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쓰고 있다.
박지향 교수의 주장을 근거로 두 가지 문제에 대해 검토해 보도록 하자.
먼저, 박지향 교수는 일제 시대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에 대해 “우리는 남 탓을 하기 전에 우리 잘못이 무엇이었나를 자성해야 하고, 그럴 때 우리가 참으로 많은 것을 잘못했음을 깨닫게 된다. 100년 전, 국가의 생존이 걸린 절체절명의 순간에 위정자들은 무엇을 했는지, 사회 지도층은 또 무슨 노력을 했는지에 생각이 미칠 때 우리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민족지상주의는 일제 식민지가 되는 과정에서 우리 민족이 잘못했던 문제점을 자성하기 어렵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본다면 조선이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다음의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일제의 제국주의적 침략성과 이에 저항하는 반일운동 즉 <제국주의-민족>의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봉건성과 당리당략에 빠져 들어 자체 개혁을 지체시켰던 민족 내부의 문제일 것이다.
일제로부터 교훈을 얻는다는 것은 이 양자를 균형있게 고려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런 면에서 박지향 교수의 위 서술이 후자의 문제를 강조한 것이라면 큰 문제는 없다. 문제는 박지향 교수가 <일제-조선>이라는 사고의 틀 전체가 틀렸다고 주장하고 있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은 박지향 교수를 비롯하여 ‘재인식’ 전반에 흐르는 핵심적인 문제 의식인 데 ‘재인식’은 일제 시대는 일제-조선이라는 침략자와 피침략자의 세계가 아니라 조선이라는 전근대 문명과 일본이라는 근대 문명이 만나 상호 결합하고 소통하는 과정으로 일제로부터의 침략과 해방이라는 단선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긴 호흡을 갖고 일제 시대를 조망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박지향 교수는 머리말에서 “한편으로는 일제에 종속된 위치에 분노하면서, 동시에 처음 맞부딪힌 근대성에 환희를 느낀 식민시기를 산 우리 선조들의 복잡한 심사가 마음에 와 닿으며” “나라 만들기의 첫 삽을 뜬 우리 할아버지-아버지 세대를 따뜻하게 이해하고 싶다”며 소회를 밝히고 있다.
인텔리들 특히 이론과 논리를 먹고 사는 고급 인텔리들은 자기의 관념에 싸여 상식을 벗어난 주장을 할 때가 있다. 박지향 교수의 글이 그런 류의 주장이라면 필자 또한 굳이 반박 할 이유는 없다. 필자가 보기에 박지향 교수는 자신의 독특한 논리와 관념의 세계에 휩싸여 위와 같은 기괴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나라의 보수기득권층 상당수의 정서와 논리를 대변하고 있다. 박지향 교수는 머리말에서 정치적 성격이 없는 학술적인 주장이라고 강조하고 있지만 머리말에는 자신의 감정과 정치적 지향이 가감없이 솔직하게 묻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박지향 교수가 자신의 감정을 실어서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문제 의식은 무엇일까? 그것은 김대중-노무현 정권으로 이어지는 신 주류세력이 진행하고 있는 과거청산 작업 중 친일파와 관련된 부분이다.
논의를 진척시키기에 앞서 전제할 것이 있다. 필자 또한 민족이라는 잣대가 모든 것을 초월하는 절대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 과거에 있었던 일을 무리하게 들추어내어 사단을 만드는 것에도 반대한다. 핵심은 2006년의 한국사회에서 친일파를 둘러 싼 쟁점이 객관적으로 어느 지점에서 형성되어 있는가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김대중-노무현 정부로 이어지는 신주류세력이 친일 잔재 청산을 과거의 문제로 제한하여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본의 보수우경화와 군사대국화를 적당히 눈감고 있는 것이 문제이고, 대중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스포츠나 영화와 같은 느슨한(?) 공간에서 반일감정이 드러나는 반면 정치ㆍ경제ㆍ군사 등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영역으로까지 이를 강제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 나라의 보수기득권층은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벌이고 있는 지극히 낮은 수준의 과거 청산 작업에까지 제동을 걸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수세력의 기득권에 대한 집착은 놀라운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 민족끼리’에 대한 성토이다.
이는 명확히 남북 정상회담과 6.15 선언에 대한 반발이다. 박지향 교수는 머리말에서 남북정상회담과 6.15 선언 이후 조성된 정세를 “그들은 ‘우리 민족끼리’라는 기상천외한 이념을 국민 앞에 내세우면서 그에 대한 반대 목소리를 짓누르고 있다”고 쓰고 있다.
한번 돌아보라. 2006년의 한국 사회가 정말 그런가? 우리 민족이 절대선이라는 배타적 이념이 상황을 압도하면서 마치 파시즘과 같은 광기가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가? 통일 과정에서 드러날 여러 가지 복잡한 요인들을 간과하고 통일만이 살 길이라며 저돌적인 정치 행동들이 무작위로 표출되고 있는가? 남북간 교류와 협력이 확대되면서 봇물이 터지듯 여타의 문제를 배제하고 통일로 매진하자는 비이성적인 민족주의가 이 사회를 압도하고 있는가?
남북관계와 관련해서 말한다면 지난 7년간 국민들의 정서는 어느 때보다 차분하고 편안해 보인다. 필자의 관점에서 보면 예상보다 통일 열기가 작고 6.15 선언에 대한 이해가 엶은 것이 안타깝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1998년 김대중 정부의 출범,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의 국민 정서 변화에 분노하고 있는 세력들이 있다. 박지향 교수 또한 그러한 부류에 속하거나 그런 부류의 정서에 익숙한 사람이다. 자신의 주변 세계가 느끼고 있는 분위기를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재인식’의 정서와 논리는 일반 국민의 정서와는 많이 다르다. 박지향 교수는 보편적인 국민 정서와는 한참 다른 보수기득권층이 김대중-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갖고 있는 분노를 가감없이 보여 주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국민 다수가 읽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박지향 교수의 머리말, 이영훈 교수가 쓴 첫 번째 논문 「왜 다시 해방전후사인가?」 그리고 4명의 편집진의 대담 기사는 꼭 읽어 보기 바란다.
- 기자명 민경우
- 입력 2006.03.22 11:03
- 수정 2013.05.12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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