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이 연재는 매주 월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미국의 정책 전환과 남한 단정 수립 결정

미국은 일본의 진주만 공습(1941.12.7.)으로 초기에 밀렸으나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을 통해 전세를 역전시킬 계기를 잡았다. 이후 미국은 일본이 점령한 태평양 지역의 섬들을 차례로 회복하며 일본을 수세로 몰았다. 미국은 일본과의 전쟁을 시작하면서 전후 구상을 준비하였는데 일본제국의 해체를 기본방침으로 정했다. 그 핵심은 일본이 침략을 통해 장악한 만주, 대만은 중국에 되돌려주고, 한반도는 일본과 분리시켜 4강대국에 의한 신탁통치를 거쳐 독립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 등 유럽제국주의국가들은 일본이 떠나면 다시 자신들이 과거 식민지를 장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후 구제국주의 국가들 과거처럼 식민지를 유지할 수 없었다. 영국은 인도, 파키스탄, 버마(미얀마)를 포기해야 했고, 프랑스는 인도차이나(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에 재차 발을 들여놓았다가 비엔비엔푸의 굴욕적인 참패(1953.3〜5.) 후 떠나야 했다. 프랑스의 뒤를 이어 미국이 뒤를 이었으나 역시 참혹한 패배를 경험해야 했다.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재점령에 나섰으나 끝내 패배했다.

한반도는 이례적으로 1943년 11월 카이로 선언에서 비록 유보조항을 달기는 했지만 독립을 명시적으로 확인받았다. 그 유보조항은 미국의 기본방침인 신탁통치를 의미했다. 한반도가 유일하게 강대국의 독립 대상으로 그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일본 이전에 이곳을 지배한 제국주의 국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조소앙 등의 요청에 따라 미국에 한국의 독립조항을 넣자고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그 결과 ‘일정한 과정을 거쳐(in due course)’ 한반도를 독립시킨다는 카이로 선언이 나왔다.

미국은 일본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연합국가인 소련과 이 문제를 논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루스벨트)의 기본방침은 신탁통치 실시였지만 소련(스탈린)은 한반도의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 그러나 소련도 만주와 일본 북방영토에 대한 발언권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일본이 예상보다 빨리 항복하자 미국은 소련에 한반도의 분할점령을 제안하였고, 소련이 이의 없이 받아들였다.

38선 분할 점령은 일본군의 무장해제라는 군사적인 목적을 내세웠으나 정치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기 전부터 미국 내에는 군부를 중심으로 대소 강경노선이 등장하고 있어서 정치적 분할선, 국경처럼 될 가능성이 높았다. 전후 미국의 외교를 총괄하고 있던 국무성은 소련과의 협력을 통해 일정기간의 신탁통치를 거쳐 통일국가로 독립시킨다는 방침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군부에서는 대소 강경노선을 주장하며 이에 반대하였다. 일본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와 남한 점령군 사령관 하지 중장은 소련과의 협력 노선인 신탁통치 구상이 비현실적이라고 보았다. 신탁통치를 실시하게 될 경우 한반도는 좌익이 주도하는 친소국가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들은 미군 점령지역에서 우익세력이 주도하는 친미정권을 수립해 소련 공산주의 세력의 팽창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가운데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국외상 회담이 개최돼 미국과 소련의 입장을 절충한 임시정부 수립 및 신탁통치 실시 방안이 결정되었다. 미국과 소련은 모스크바 결정에 따라 1946년과 1947년 1, 2차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최, 타협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미소의 이해관계는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협의대상 문제에서 첨예하게 부딪쳤고, 남한 내 우익의 강력한 반탁운동까지 겹치면서 미소공동위원회는 해결방안을 찾지 못하였다. 미소 냉전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1947년 7월 미국은 소련과의 협력노선을 폐기하고 대소 강경 노선으로 전환하였다. 미국은 소련과의 협력을 통한 한반도 통일정부는 불가능하다고 보고 미군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만이라도 선거를 실시해 친미정권을 수립하는 단독정부 방침을 결정하였다.

미국이 방침을 전환함에 따라 1948년 8월 제2차 미소공위도 최종 결렬되었다. 이는 한반도에서 평화적인 방법으로 통일적인 독립자치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었던 모스크바 협정이 파기되었음을 의미했다.

미소공동위원회는 1947년 8월 완전히 결렬되었다.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넘겼고, 한반도의 분단은 가시권에 들어갔다.
미소공동위원회는 1947년 8월 완전히 결렬되었다.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넘겼고, 한반도의 분단은 가시권에 들어갔다.

유엔의 결정과 유엔한국임시위원단 결성·활동

1947년 9월 미국은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하였다. 유엔에서 미국과 소련은 유엔이 한국문제를 다룰 권한이 있는가를 두고 대립했다. 소련은 유엔 총회가 국제평화와 안전보장 유지에 관한 모든 문제를 토의할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한국문제는 국제조약(모스크바협정)이 이미 존재하고 또한 전쟁의 직접적인 결과물이므로 유엔의 권한 밖에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미국은 한국은 적국이 아니기 때문에 유엔에서 다루는 것이 유엔헌장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양측의 다른 주장으로 유엔에서 논란이 벌어졌고 “한국의 독립 문제를 유엔총회 안건으로 상정하자”는 미국이 제안이 9월 21일 운영위원회에서 가결되었다. 이어 9월 23일 유엔총회는 이 제안을 찬성 46표, 반대 6표, 기권 7표로 가결하여 한국문제를 제1분과위원회 정치위원회에 회부하였다.(주1)

유엔의 조선위원단 파견 결정 언론 보도(조선일보 1947.11.16.일자)
유엔의 조선위원단 파견 결정 언론 보도(조선일보 1947.11.16.일자)
유엔한국위원단 환영 선전 포스터
유엔한국위원단 환영 선전 포스터

한국문제가 유엔의 정식안건으로 채택되자, 미국은 10월 17일 유엔에 제출한 한국문제에 관한 결의안을 통해 한국문제 해결의 구체적 방안을 제시했다. 미국은, 미소 양국이 1948년 3월 31일까지 각각의 점령지역에서 유엔 감시하에 선거를 실시하여 인구비례에 따른 국회의원을 선출하고 전국적인 국회와 정부를 수립하며, 새로 수립된 한국정부와 합의해 미소 양군이 철수한다는 방안을 제안하였다. 미국의 제안에 대해 소련은 10월 28일 유엔에서 한국문제를 토의할 때 남북한 대표를 초청할 것과 1948년 초까지 미소 양국 군대를 남북한에서 동시에 철수하여 한국인 자신이 정부를 수립하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유엔토론에 한국 대표를 참석시켜야 한다는 소련측 제안에 반박할 근거가 없었으나 문제는 누구를 대표로 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소련의 제안에 대해 미국은 한국민의 대표 참가를 촉진하기 위해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설치할 것을 요구하는 수정안을 제출했다. 유엔총회 제1분과위원회(정치위원회)는 10월 28일부터 한국문제를 토의하였고, 10월 30일 표결에 붙여 소련측안을 부결시키고 미국측 수정안을 찬성 41표, 반대 0표, 기권 7표로 채택했다. 미국측은 11월 4일 선거가 점령지구별로 시행되는 것이 아니라 유엔 감시하에 전국적으로 시행되어야 한다는 중국(국민당)과 인도 등의 의견을 반영한 수정안을 다시 제출했다. 11월 14일 유엔총회는 정치위원회가 상정한 안을 찬성 43표, 반대 0표, 기권 6표로 통과시켰다.(주2)

그러나 소련측이 이러한 결정을 받아들일 리 없었다. 결국 미국측안이 통과됨으로써 남한 단독선거와 단정정부 수립이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947년 11월 14일자 유엔총회 결의에 따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만들어졌고, 1948년 1월 7일 호주, 인도, 시리아 대표를 필두로 1월 말까지 서울에 들어오게 되었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유엔한위)은 애초 9개국이었으나 소련의 입장에 동조, 위원단 참여를 거부한 우크라이나를 제외한 8개국(호주, 캐나다. 중국, 엘살바도르, 프랑스, 인도, 필리핀, 시리아) 대표로 구성되었다. 유엔한위의 처음 최대 관심사는 어떻게 한반도 전체에서 활동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1948년 1월 22일 유엔 소련대표 그로미코를 통해 이북지역에서 유엔한위의 활동을 보장할 수 없다고 했고, 이로써 남북한에 걸쳐 유엔 감시하의 총선 실시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는 유엔결의안 통과 때부터 예견되었던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유엔감시하의 전국총선거란 사실은 남한 단선안을 의미했다.(주3)

유엔임시위원단 내한 환영(1948.1.14.)(사진=국사편찬위원회)
유엔임시위원단 내한 환영(1948.1.14.)(사진=국사편찬위원회)

1월 말 소련의 비협조로 북한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자 유엔한위는 총선거를 남한지역에서만 실시할 것인지 여부를 두고 내부적으로 의견이 갈렸다. 미국의 대한정책에 우호적인 중국, 프랑스, 필리핀은 위원단이 접근 가능한 지역에서 선거를 실시하여 남한단독의 독립국가를 건설하자고 주장했으나 시리아와 호주·캐나다·인도 등 이른바 영국블럭의 국가들은 남한단독선거는 한국을 영구분단시킬 것이므로 유엔한위는 그러한 임무를 수행할 수 없음을 소총회에 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한 내의 우익진영도 입장이 갈렸다. 이승만과 한민당은 남한 단선을, 김규식과 김구는 유엔 협조 아래 남북요인회담을 통해 전국총선거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주4)

당시 김구·김규식의 남북요인회담 주장은 유엔한위 내에서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국민들로부터 가장 높은 지지를 받았다. 1948년 1월 16일 유엔한위 메논 의장은 유엔소총회에 문의할 내용으로 1)남한 지역 선거와 정부수립, 2)남한지역 선거와 협의대상이 될 대표 선출, 3)남북조선의 지도자 회담, 4)유엔임시위원단의 철수 등을 제시했다. 당시 조선여론조사협회가 2.21〜22일 이틀 동안 조사한 바에 의하면 4가지 방안 중 단선·단정 11.5%, 단선 5%, 남북회담 71%, 위원단 철수 12.5% 등으로 나타나 남북회담이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주5)

한국내 지도자들 사이에 의견이 갈리자 유엔한위는 1948년 2월 6일 한국문제를 유엔소총회에 회부하기로 결정했다. 이런 가운데 유엔한위 중국 대표 유어만(兪馭萬)의 주선으로 2월 10일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 이른바 ‘민족진영 3거두’가 중국영사관에서 회동했다. 같은 날 오후에는 이들이 국제호텔의 유엔한위를 방문하고 의장 메논과 사무총장 호세택과 회담하였다. 김구나 김규식은 이를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유엔한위측에 부각하려 하였으나 이승만과 유어만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유엔소총회를 앞두고 유엔한위에 한국 정치지도자들의 분열이 화해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한 쇼 연출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었다. 이승만은 중국 대표 유어만의 충고에 따라 김구·김규식과 일시적으로 제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실제로 협력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유엔소총회를 앞둔 2월 16일에는 미군정 당국으로부터 ‘북조선 국가수립설’ ‘20만 북한 군대설’ 등이 흘러나왔다. 이 또한 모두 유엔소총회 결의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선전 공작이었다.(주6)

단선 결정과 미군정·경찰·우익의 선거 참여 강요

2월 19일부터 유엔소총회에서 한국문제가 다루어졌다. 유엔한위 의장 메논은 한국내의 여론을 반영하여 1)남한지역 선거와 정부수립, 2)위원단이 협의할 대표 선출을 위한 제한된 목적의 선거 실시, 3)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조선의 지도자회담 등 3가지 방안을 제시하였다. 처음 단선 반대 입장이었던 인도의 메논이 찬성으로 돌아섰으나 캐나다와 호주가 계속 남한 단선안을 반대하자 미국은 모든 외교적 수단을 총동원해 다른 회원국들의 입장을 미국안 지지로 만들었다. 미국의 이같은 외교적 노력 덕분에 2월 26일 “위원단이 접근 가능한 한국의 지역에서 11월 14일 총회결의안에서 설정된 계획을 이행하는 것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에 부과된 의무”라는 결의안을 찬성 31표, 반대 2표, 기권 11표로 통과시킬 수 있었다. 이는 남북총선을 통한 단일정부 수립이라는 유엔총회 결의안의 내용을 남한단선을 통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변화시킨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호주와 캐나다 대표는 끝까지 반대했고, 중남미 3개국, 중동 5개국, 스칸디나비아 3개국은 기권하였다.(주7)

유엔소총회 결정이 있자 2월 28일 유엔한위는 비공식회의에서 1948년 5월 10일 이전에 위원단이 접근 가능한 한국의 지역 내에서 선거를 참관하기로 결정했다. 3월 1일 주한미군사령관 하지는 남한 내 선거를 5월 9일로 결정, 발표했다. 후에 이 날짜는 5월 10일 바뀌었다. 5월 9일에 일식현상이 있을 것(일식현상은 불길한 징조라는 오래된 사고가 있었다)이라는 점과 일요일이란 이유로 기독교인들의 강한 반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군정당국에 의해 3월 3일 국회선거위원회가 설치되었고, 3월 17일에는 국회의원선거법이, 3월 22일에는 국회의원 선거법 시행세칙이 각각 공포되었다. 논란이 되었던 선거권과 피선거권 연령은 각각 남녀동등하게 21세와 25세로 결정되었다.(주8) 비록 미군정 아래서 시행되는 단선이었지만 보통, 평등, 직접, 비밀 투표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실시되게 되었다.

선거와 관련해 가장 논란이 되었던 것은 선거 시행에서 ‘자유분위기’ 문제였다. 유엔한위는 한국 입국 후 제1분과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계속 검토했고, 3월 17일 ‘자유분위기 양성 건의안’을 작성, 미군정당국에 전달했다. 이 문서를 통해 법률문제, 강박문제, 언론자유, 정치범 석방 등을 언급한 유엔한위는 평화적 합법적 수단에 의한 투표 또는 기권의 권리 보유, 경찰과 청년단체에 대한 조치, 정치범 석방 등을 강조하였다. 유엔한위의 건의에 따라 미군정은 3월 31일 특사령을 내려 3천여명의 정치범을 석방했다.(주9)

그러나 미군정당국과 이승만, 군정경찰, 우익청년단체 등은 유엔한위의 자유선거 분위기에 대한 문제제기해 강한 불만을 표출했다. 하지는 “참가 불참 여부는 자유지만, 만일 불참한다면 전조선을 혼란과 공산주의와 외국의 노예로 도입할 위협에 봉착할 것”이라며 노골적으로 협박했다. 이승만 등 우익세력은 자유선거 분위기를 저해하는 위협세력은 경찰과 우익청년단체가 아니라 단선반대 진영, 특히 남로당 중심의 단선저지투쟁이 가장 심각하다고 보고 있었다. 극우진영은 “(단선) 반대의 자유가 없는 자유분위기”를 원했다.(주10)

미군정의 5.10선거 포스터(자료: 일민미술관)
미군정의 5.10선거 포스터(자료: 일민미술관)

이와 함께 미군정은 선거를 앞두고 매각을 통한 부분적인 농지개혁에 착수하였다. 해방 직후부터 농지개혁 문제는 대중의 가장 큰 관심사였고, 농민이 대다수를 차지한 상황에서 사회개혁의 핵심과제였다. 미군정의 여당 역할을 하고 있던 한민당 등 지주세력의 방해로 농지개혁은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정은 총선을 두 달도 남겨놓지 않은 3월 22일 남조선과도정부 법령 173호를 공포, 신한공사가 소유하고 있던 토지의 매각에 나섰다. 미군정은 한 농가당 2정보(6,000평)를 넘지 않는 선에서 해당 토지를 경작하는 소작인 등에게 매각하였는데, 농지가격은 연간 생산량의 30할(300%)로 매년 2할(20%)씩 15년 동안 분할 상환하도록 하였다. 당시 신한공사(미군정청이 일제의 귀속재산을 소유·관리하기 위해 만든 회사)가 소유한 토지는 남한 전체 경지면적의 13.4%를 차지하였다. 이 토지를 소작하는 농가호수는 전체 농가호수의 27%를 차지해 55만4천여호나 되었고, 그에 딸린 가족수만 해도 300여만 명에 달했다. 당연히 미군정 농지개혁의 정치적 효과가 클 수밖에 없었다. 미군정이 총선을 앞두고 신한공사 소유 토지를 매각, 분여한 것은 이러한 정치적 목적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미군정은 5.10선거 포스터와 농지개혁을 알리는 포스터를 나란히 부착해 정치적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했다.(주11)

그러나 이같은 미군정의 농지개혁에 대해 우익세력은 ‘월권행위’라며 강한 불만을 표출했다. 특히 이승만은 미국내 자신의 로비집단을 동원해 미국무성에 항의를 제기하는 등 강하게 반발했다. 이승만은 정부 수립 후 농지개혁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정통성을 높이려는 생각이었는데, 미군정이 선수를 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입지에 타격이 될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5.10 단정 선거 모습(사진=국가기록원)
5.10 단정 선거 모습(사진=국가기록원)

이런 가운데 3월 30일부터 4월 8일까지 사이에 선거인 등록이 실시되었다. 전국에서 21세 이상의 유권자 중 91.8%인 8,055,295명이 선거인 등록을 했으며, 특히 충북은 98.4%나 되어 가장 높았다. 반면, 제주도는 64.9%로 선거인 등록률이 가장 낮았다. 제주에서 이처럼 선거인 등록률이 낮았던 것은 4.3제주항쟁의 여파 때문이었다. 미군정은 이처럼 전국적으로 높은 선거인 등록률이 나오자 대단히 고무되었다. 처음 미군정은 등록률이 50% 미만으로 나올 것을 우려했으나 기대 이상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약간의 통계상의 함정이 있다. 당시 인구 조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정확한 인구 통계가 집계되지 않고 있다. 미군정의 유권자수 산출은 1946년 8월 25일 시점을 기준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후 인구 증가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미군정 자료에 의하면 1948년 3월 말 남한 인구가 대략 20,100,000명이고, 그 45.2%인 9,085,000명이 유권자가 되는 셈이었다. 이를 기준으로 하게 되면 앞의 등록률은 88.6%로 낮아진다. 더욱이 전체 인구중 유권자 비율 45.2%는 통상적인 인구 대비 유권자 비율인 48〜50%에 비해 너무 낮은 것이다. 이 때문에 유엔한위는 훨씬 사실적인 통계자료를 제시하였다. 유엔한위는 1948년 4월 1일의 인구를 19,947,000명으로 파악하여, 그 49.3%인 9,834,000명을 유권자수로 잡았고, 이들 유권자 가운데 79.7%인 7,837,504명이 등록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결국 실제 유권자 등록률은 80% 내외로 볼 수 있다.(주12)

유권자 등록과 관련해 또 한 가지 문제는 등록 과정에서 강제성 여부였다. 한국여론협회가 1948년 4월 12일 종로와 충무로의 통행인 1,26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등록률은 74%이고, 이중 자발적 등록 9%, 강요받은 등록 91%로 나타났다고 한다.(주13)

선거감시에 나섰던 유엔한위 또한 “불(不)등록자에 대한 위협과 폭력 행사에 관하여 하등의 구체적 증거를 수립할 수 없었으나 … 미곡배급 통장을 몰수하겠다고 위협함으로써 강제등록을 시킨 사실이 있었고, … 경찰 및 청년단체가 등록을 권유한 것은 일제통치의 잔재로서 일종의 강제”라는 불만이 접수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미군정과 경찰, 청년단체의 등록 강요는 상당한 수준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주14)

유혈충돌 속에 치러진 5.10총선거

선거인 등록에 이어 4월 16일 입후보자 등록이 마감되었다. 200개 선거구에서 총 938명의 후보자가 입후보했는데, 대한독립촉성회 239명, 한민당 91명, 대동청년단 89명, 민족청년단 21명, 대한노총 22명, 무소속 413명 등이었다.(아래 <표11> 참조) 이승만은 동대문 갑구에 입후보했는데, 그에 대항하기 위해 입후보자로 나섰던 전 경무부 수사국장 최능진은 등록 관련서류를 이승만 지지자들에게 탈취당해 입후보 등록을 마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최능진은 한국전쟁 중인 1951년 2월 헌병사령부에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5.10 선거를 앞두고 남로당을 중심으로 한 단선저지투쟁이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남로당은 전평의 총파업을 앞세워 ‘2.7구국투쟁’을 전개하였고, ‘남조선 단선반대투쟁 전국위원회’를 조직해 총력투쟁을 전개하였다. 1948년 2월부터 5.10선거 때까지 남한 전역이 비상상황이 되었다. 곳곳에서 좌익의 경찰서 습격, 투표소 파괴 등의 공격과 이에 대응하여 경찰과 우익청년단의 좌익 습격도 일상적으로 벌어지면서 이남 전역에서 피 냄새가 진동하였다. 가장 격렬한 사태가 벌어진 곳은 제주도였다. 4월 3일 제주에서는 단선반대 민중봉기가 일어났고 제주도 전역의 경찰서, 지서, 우익인사들이 공격을 받았다. 결국 제주도 2곳의 선거가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못했다. 이 사건이 발생하자 미군정과 경찰, 우익세력은 강경 일변도의 공세를 폈고, 무장대와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국방경비대 9연대장 김익렬 중령의 시도는 미군과 경찰의 음모로 무산되었다. 이후 무장봉기를 주도했던 남로당이 지도하는 무장유격대가 한라산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고 유격전을 전개하면서 사태가 장기화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0월 19일 제주도의 토벌에 동원되는 것을 거부한 여수주둔 14연대 병사들이 봉기를 일으키자(여순사건 또는 여순항쟁) 이승만 정권은 계엄령 선포를 선포하고 무차별적인 토벌작전을 전개, 수많은 인명의 학살되었다.

<표1> 5.10단선 정당·단체별 후보 등록 상황

출전: 호광석, 한국 정당체계의 유형변화 연구, 동국대 박사논문, 209쪽
출전: 호광석, 한국 정당체계의 유형변화 연구, 동국대 박사논문, 209쪽

미국(미군정)과 이승만·한민당의 단선 추진에 반대하던 김구와 김규식 등은 남북협상을 추진하였다. 이승만과 결별한 김구는 김규식과 손잡고 북측에 남북요인회담을 제안하였고, 북측에서 남북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로 수정 제안하였다. 이렇게 해서 분단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김구·김규식·홍명희 등의 민족주의세력과 중도좌파, 남로당 등 남측 정당·사회단체 대표들과 주요 정치인사들, 그리고 북측의 정치세력과 주요인사들이 1948년 4월 19일부터 5월 3일까지 평양에서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 연석회의를 비롯하여 남북요인회담 등을 개최,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남북연석회의 개최는 남측의 단선추진세력에게 정치적으로 큰 타격이 되었다. 결국 김구·조소항 등의 임정계열과 김규식·홍명희 등의 중도우파, 근로인민당 등 중도좌파, 좌파인 남로당 등 남북협상에 참여한 세력을 제외한 이승만과 한민당 등 우익진영만 5.10단선에 참여하였다.

5.10선거를 앞두고 주요 시설 경비를 서고 있는 의용경찰.
5.10선거를 앞두고 주요 시설 경비를 서고 있는 의용경찰.

한편, 38선 이남에서는 5.10 단선을 앞두고 좌익의 반대투쟁을 저지하기 위해 경찰, 우익청년단이 총동원되었다. 또한 경찰은 3만5천명의 경찰관만으로는 전국 13,800개소의 투표소를 지켜낼 수 없다고 보고 선거 때 향토 치안을 지키기 위해 ‘향보단’을 조직, 운영했다. 18세 이상 55세 이하의 남성들은 모두 의무적으로 향보단에 가입해야 했고, 투표소 등의 경비를 서는데 동원되었다.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일반 통행인은 절대로 가로에 서 있어서는 안 된다고 발표하고 경찰의 지시에 불응하면 체포, 조사하라고 명령하였다. 아예 사람들이 거리에 모이는 것을 원천봉쇄한다는 것이 경찰의 기본방침이었다. 5월 3일 경무부 내에 비상경비총사령부가 설치되었고, 5월 8일에는 미군당국의 지시로 특별경계령이 내려졌다. 5월 8〜10일 사이에 단선단정 반대투쟁 과정에서 경찰관과 민간인 등 총 80여명이 사망하고, 경찰서와 투표소 90여 곳 이상이 습격을 받았다.(주15)

좌익과 남북협상파들이 불참한 가운데 치러진 5.10총선에서 유권자 등록률 91.8%, 등록자 대비 투표율 93.2%, 유권자수 대비 투표율 85.6%를 나타내 예상보다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는 실제보다 높게 계산된 것이었다. 실제로 유권자 등록률을 80% 내외라고 볼 때 실제 유권자 대비 투표율은 74%정도 될 것으로 파악되었다.(주16)

5.10 선거 때 투표소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사진=국가기록원)
5.10 선거 때 투표소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사진=국가기록원)

단정 수립 후 이승만과 결별하고 야당이 된 한민당

5.10선거는 남한 전역에서 유혈충돌 속에서 진행되었지만 그래도 애초 선거가 제대로 치러질 수 없을 것이라는 예상에 비한다면 성공적이었다. 북제주군 2개 선거구를 제외한 전국 선거구에서 선거가 결정적인 차질 없이 진행되어 198명의 제헌의원이 선출되었다. 선거에서 당선된 인물들이 공개적으로 밝힌 정당소속을 살펴보면, 한민당 29명, 대한독립촉성국민회(독촉국민회) 55명, 한독당 1명, 대동청년단 12명, 민족청년단 6명, 조선민주당 1명, 기타 정당 10명, 무소속 85명 등이었다.(<표2> 참조) 그러나 이는 공개적으로 표명한 것일 뿐 실제 내용은 좀 달랐다. 무소속으로 당선한 후보들 다수가 우파 또는 중도우파 성향의 인물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한민당 사람들이 많았다.(주17)

<표2> 5.10선거 당선자의 당·단체 소속

출처: 김득중, 제헌국회의 구성과정과 성격, 석사논문, 1993, 80쪽
출처: 김득중, 제헌국회의 구성과정과 성격, 석사논문, 1993, 80쪽

한민당이나 독촉 인사들이 무소속으로 출마한 것은 “우익정당의 공천으로 출마하는 것이 당선에 유리하기보다는 짐이 된다”고 여긴 것이 하나의 중요한 이유였다. 미군정의 여당 노릇을 했던 한민당의 경우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고 친일파의 온상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이 팽배해 이를 회피하기 위해 위장출마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극우단체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공천에서 탈락해 무소속으로 출마한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지역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무소속으로 출마해도 큰 문제가 안 되었다. 한독당 등 남북협상파에 우호적이었던 인사들의 경우 선거참여가 이들 단체의 원칙과 어긋났기 때문에 무소속으로 출마하기도 했다.(주18)

이런 사정을 감안해 제헌의회 선거 결과를 분석해 보면, 무소속 중에서도 33명 정도가 한민당, 독촉국민회, 청년단 등의 극우 단체와 연관이 있는 인물들이었다. 이들을 빼고 나면 순수 무소속은 50명 남짓 되는 셈이었다. 한민당과 관련을 가진 무소속은 11명 정도 되고, 이밖에도 다른 단체의 이름으로 당선된 인물 중에도 7명 정도가 한민당 계열이었다. 따라서 한민당은 제헌국회의원 47명 정도를 확보하고 있었다.(주19) 미군 정보보고는 실제 정당 소속의원을 한민당 76명, 독촉국민회 61명, 한독당 17명, 대동청년단 16명, 민족청년단 10명, 중도파 10명, 기타 10명 등으로 파악하였다.(주20) 반면, 『조선중앙연감』(1949년판)은 한민당 세력을, 한민당원이면서 독촉으로 당선된 사람이 22명, 족청으로 4명, 대동청년단, 유도회, 민통, 농총으로 나온 당선자가 각각 1명에 이르러 총 55명이 한민당 또는 무소속이나 기타 단체의 당적을 가지고 당선되었다고 파악하였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당시 5.10선거에서 무소속이 약진하고 한민당이 예상외로 저조한 성적을 냈다고 평가한 것은 다소 무리가 있는 판단이었던 셈이다.(주21) 한민당은 실질적으로 의회 다수당이었던 셈이다.

<표3> 5.10 선거에서 당·단체들의 득표 상황

출처: 호광석, 한국 정당체계의 유형변화 연구, 동국대 박사논문, 1996, 212쪽

5.10선거에서 가장 ‘진보적’이었던 중간파 세력의 경우는 당 차원에서는 선거참여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과 한민당이 조직적인 차원에 선거전을 치룬데 비해 이들은 완전히 개인적으로 활동해야 했다. 또한 한독당의 경우는 공식적으로 단독선거 참여를 거부하였고, 선거에 입후보한 자는 제명처분하기로 결정하는 등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그럼에도 지방에서 상당수가 출마해 10명이 당선되었다. 오택관은 한독당 당적을 공식적으로 내걸고 당선된 유일한 인물이었다.(주22)

제헌국회에서 한민당세력이 실질적으로는 국회의 최다수였다. 그러나 한민당은 여당이 되지 못하였다. 권력을 잡을 때까지 한편이었던 이승만이 내각 구성에서 한민당을 배척하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권력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하면서 이승만과 한민당이 갈라섰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한민당은 이승만 정권에 도전하며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싸우는 야당이 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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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박찬표, 대한민국의 수립,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52-대한민국의 성립』, 386〜387쪽

2) 박찬표, 위의 글, 387〜388쪽

3) 박찬표, 위의 글, 389〜390쪽

4) 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서울대출판부, 1997, 205〜206쪽

5) 『우리신문』 1948.2.23. ; 도진순, 위의 책, 211쪽

6) 정해구, 남북한 분단정권 수립과정 연구 1947.5〜1948.9, 고려대 박사논문, 1995, 148〜149쪽

7) 박찬표, 위의 글, 391〜392쪽

8) 정해구, 위의 논문, 150〜151쪽

9) 서울신문 1948.4.7.

10) 정해구, 위의 논문, 152쪽

11) 정해구, 위의 논문, 153쪽; 박찬표, 위의 글, 401〜402쪽

12) 정해구, 위의 논문, 154〜155쪽

13) 조선일보 1948.4.15.

14) 정해구, 위의 논문, 155쪽

15) 정해구, 위의 논문, 156쪽

16) 정해구, 위의 논문, 158쪽

17) 정해구, 위의 논문, 158쪽

18) 김득중, 제헌국회의 구성과정과 성격, 성균관대 석사논문, 1993, 83쪽

19) 김득중, 위의 논문, 84쪽

20) 정해구, 위의 논문, 158쪽

21) 김득중, 위의 논문, 84쪽

22) 김득중, 위의 논문, 83〜85쪽

 

 

임영태 필자 약력

출판기획자, 저술가. 청년시절 민주화․사회운동에 관계했으며, 한국 근현대사와 세계사, 인문․사회 관련 대중서의 기획․집필에 힘쓰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공식 보고서 발간을 총괄했으며, 지금은 평화박물관의 ‘반헌법행위자 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에서의 학살-한국현대사, 기억과의 투쟁』, 『새로 쓴 한국현대사-해방부터 촛불항쟁까지 35장면』(공저), 『솔직하고 발칙한 한국 현대사』(공저), 『스토리 세계사 1~10』, 『두 개의 한국 현대사』, 『산골대통령, 한국을 지배하다』, 『국민을 위한 권력은 없다』, 『대한민국사 1945~2008』, 『대한민국50년사』, 『북한50년사』, 『거꾸로 읽는 한국사』(공저), 『거꾸로 읽는 통일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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