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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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
‎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
‎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
‎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
‎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
‎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
‎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범죄가 개인을 사회로부터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사회 속에서 이방인처럼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범죄가 발생한다. - 미셸 푸코

 

가끔 언론에 ‘내의만 입히고 쫓겨난 아이’가 오르내린다. 한 여자 아이는 추운 겨울에 내의만 입은 채로 길에서 헤매다 발견되기도 했다.

국민학교 시절이 생각난다. 2학년 때였다. 담임선생님은 남자 아이들을 혼내기 위해 교실 앞문으로 나가 바지와 팬티를 내리게 하고서는 복도를 걸어가 뒷문으로 옷을 입고 뒷문으로 들어오게 했다.

그 해괴한 풍경을 남자 아이들은 킥킥거리며 흘깃거리고 여자아이들은 조용히 앞만 보고 앉아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며,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를 생각했다.

고대 로마법에는 ‘호모 사케르’라는 특이한 존재가 있었다고 한다. 라틴어로 ‘신성한 인간’이란 뜻이다.

그는 사람들이 그를 죽이더라도 살인죄로 처벌받지 않는 ‘저주받은 인간’이다. 하지만 그는 희생재물로도 쓸 수 없다.

희생재물은 ‘정상적인 인간’만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상한 과일은 제사상에 올리지 않는다.

내의만 입히고 쫓아내는 부모는 아이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너는 어느 언제고 발가벗겨서 쫓겨날 수 있어!’

아이는 부모에게 복종하면서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게 된다. ‘발가벗은 아이’를 통해 가정은 유지된다.

담임선생님의 왕국, 교실도 ‘발가벗은 아이’를 통해 질서가 유지된다. ‘언제고 너희들은 발가벗겨서 쫓겨날 수 있어!’

이 ‘발가벗은 아이’가 호모 사케르다. 그들은 부모, 담임선생님 같은 최고 권력자의 대척점에 있기에 ‘신성한 존재’인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삶을 두 가지로 나눠서 생각했다. 하나는 조에(zôé), 다른 하나는 비오스(bíos)다. 조에는 생명 그 자체인 ‘발가벗은 삶’을 뜻하고, 비오스는 정치적 동물로서 인간의 ‘가치 있는 삶’을 뜻한다.

고대에는 조에와 비오스의 구별이 뚜렷했지만, 근대에 들어 그 구별이 무너지면서 정치적 삶(비오스)이 생체적 삶(조에)를 지배하게 되었다.

우리는 왜 직장에 그리도 목을 매는가? 직장이 주는 ‘비오스’ 때문이다. 사회에서의 ‘정치적 사회적 지위(생명)’ 때문이다.

일자리를 잃어도 생명은 살아 있지만, 세상이 사람 취급을 안 하지 않는가? 인간은 ‘조에’ 만으로는 살 수 없는 것이다.

더더구나 나중에는 조에마저 위태로울 수 있다. 생명은 끊임없이 먹어야 하는데, 문명사회에서 어디서 먹을 것을 구한단 말인가?

옛날엔 산에 들에 강에 먹을 게 있었다. 생명(조에)은 부지할 수 있었다. 이제는 굶어죽게 생겼다.

가끔 언론매체에 나오지 않는가? 굶어죽는 사람들이? 그들은 다들 멀쩡한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언제 ‘발가벗은 삶’이 될지 모르는 공포, 이것으로 국민을 지배하고 통제한다는 게 미셸 푸코의 근대생명정치이론이다.

그런데 그들을 버리고서 우리는 잘 살아갈 수 있을까? 푸코는 말한다. “사람들이 사회 속에서 이방인처럼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범죄가 발생한다.”

오래 전에 대구의 지하철에 불을 지른 한 생명, 그는 우리더러 함께 저승으로 가자고 한 게 아니었을까?

그들은 나중에는 살인 자체를 즐기는 ‘연쇄 살인범 괴물’로 진화해간다. 소외된 인간은 점점 인간을 버리고 ‘사물화 된 인간’이 되어가기 때문이다.

사물화 된 인간은 타나토스(죽음의 본능)에 휩싸인다. 살인의 쾌락에 젖어든다. 우리는 왜 잔혹한 미드(미국 드라마)를 그리도 즐기는 걸까?

우리는 발터 벤야민이 말하는 ‘스스로의 파괴를 최고의 미적 쾌락으로 체험’하는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 아니겠는가?

예수가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품었듯이 우리는 길을 잃어버린 모든 사람들을 품어야 한다.

그래야 모든 생명체가 갖고 있는 ‘에로스(삶의 본능)’가 우리 가슴에 충만해진다. 조에와 비오스는 비로소 하나가 된다.

 

부르는 이름에
신이 들려서
밤새도록
너는 부른다.
네 목숨 위에 있는
깊고 먼
그 이름을

                                                                      - 차옥혜, <序詩―개구리> 부분

 

원효 선사는 헐벗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박을 치며 나무아미타불을 암송하게 했다고 한다. 그러면 극락에 간다고.

아마 그들은 ‘신이 들려서’ 염불을 했으리라. 그들의 목소리는 ‘목숨 위에 있는/ 깊고 먼/ 그 이름’에 닿았으리라.

원효 선사는 개구리 같은 미물에게서 그런 비법을 배우지 않았을까?

 

고석근 시인 약력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중학교 졸업 후 고향을 떠나 철도고등학교 운전과를 졸업한 후 기관조사로 근무하다 충북대학교 사회교육과에 진학했습니다.

졸업 후 중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동안 잠시 전교조 활동을 했습니다. 교직을 떠난 후 빈민단체(주거연합)에서 활동하다 한길문학예술연구원에서 시 창작을 공부했습니다. ‘리얼리스트 100’에서 주는 제6회 민들레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지금은 경기도 부천에서 살며 글을 쓰고 인문학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시집 ‘나무’ 산문집 ‘명시 인문학’ 에세이집 ‘숲’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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