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강성주 (KAL858기 사건 연구자)

 

1987년 11월 29일, 중동지역 승객 115명을 태우고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 858편 비행기가 통째로 흔적없이 사라졌다. 대통령선거를 하루 앞두고 KAL858기 폭파범으로 지목된 북한 공작원 김현희가 서울로 압송됐고, 87년 6월항쟁으로 쟁취한 첫 대통령 직선제는 전두환의 후계자 노태우 후보의 승리로 귀결됐다.

안전기획부(안기부)의 수사결과 발표 당시 안기부가 제시한 김현희의 어린시절 화동(花童) 사진부터 거짓으로 드러났고 숱한 의혹이 제기됐지만 결국 김현희의 자백 만으로 이 사건은 마무리됐다. 그러나 실종자 가족들과 시민사회단체들은 이 사건에 대한 의혹을 지속적으로 제기해왔고, 오는 29일에도 오전 11시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어김없이 29주기 추모제를 열어 진상규명을 촉구할 예정이다.

KAL858기 사건을 주제로 석.박사 논문을 쓴 박강성주 박사는 그동안 우리 정부와 외국 정부를 상대로 KAL858기 사건 관련 행정정보 공개 청구를 꾸준히 진행해왔고, 일정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관련기사 보기] 박강성주 박사는 이번에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재조사 관련 자료를 열람하고 그 내용에 대해 기고문을 보내왔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천안함사건과 세월호사건에 대한 숱한 의혹에도 불구하고 진상규명이 속시원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답답한 상황은 이미 KAL858기 사건이 의혹에 묻힐 때부터 예고된 것인지도 모른다. KAL858기 사건 30주기 전에는 이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기를 기대하며, 박강성주 박사의 기고문을 몇 차례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 주

“국정원의 그림자는 너무 짙었다"
KAL858사건 과거사위원회 기록 열람 (1)

“김현희 사면, 국제법 위반 명백”
KAL858사건 과거사위원회 기록 열람 (2)

안기부는 김현희를 알고 있었는가?
KAL858사건 과거사위원회 기록 열람 (3)

“수색 노력을 포기한 것처럼…”
KAL858사건 과거사위원회 기록 열람 (4)

“배후관계부터 단정...비정상적”
KAL858사건 과거사위원회 기록 열람 (5)

김현희 대선 전 압송과 미국
KAL858사건 과거사위원회 기록 열람 (6)

김현희와 ‘온달장군과 울보공주’
KAL858사건 과거사위원회 기록 열람 (7)

 

공식 수사결과에 따르면 김현희는 115명을 죽인 ‘테러범’이다. 그런데 수많은 남성들이 그녀에게 구혼편지를 보냈다고 알려진다. 이번에 자료를 살펴보면서 그 일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서울에 살고 있던 한 남성은 최소한 두 번의 연락을 시도했다. “김현희씨가 안전기획부 보호실에서 조사를 받고 있을 때 편지를 보냈던” 이로 “그녀를 연민하는 청년”이다(DA0799716, 6-8쪽). 이 남성은 1988년 11월 24일자 편지에서 재판 담당 판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녀에게 연민의 정을 끈[끊]을 수 없는 것은 제 자신의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 판사님 그녀가 현량한 사람이 되어 거듭나서 다시 깨어나는 생애가 될 수 있도록 훈계하여 주십시오. 이 다음에 그녀와 교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9-10쪽).

‘온달장군’의 구혼편지

1989년 4월 8일 서울에 살던 또 다른 남성은 “국가에서 선처를 해주신다면 과감하게 보호자 내지 반려자가 될 수도” 있다고 편지를 보내왔다(269쪽). 그는 “온달장군과 울보공주 얘기”를 꺼내며 “법원에서 이 옛날 이야기를 실현시켜보시지” 않겠느냐고 묻는다(270쪽). 이처럼 남성들은 고구려 시기의 설화까지 인용하며 적극적으로 고백을 해왔다.

그런데 역사를 넘나드는 김현희에 대한 구혼은 국경 역시 넘나들었다. 일본 남성에게서 온 편지를 보자. “석방후 김현희가 한국에서 생활하게 되면 폭사한 한국인 유족들의 원한이 대단할 줄 압니다. … 본인은 현재 53세로서 동인 평화스럽고 자유의 나라 일본에 와서 본인과 결혼할 수 있도록 되기를 절실히 희망하고 있습니다”(DA0799717, 285쪽). 구혼을 해온 것은 아니었지만 네덜란드에서도 “제발 그녀를 용서해 주십시오”라며 남성이 편지를 보내왔다(DA0799720, 77쪽).

위와 같은 편지들은 실종자 가족들이 바랐던 것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예컨대 당시 ‘희생자 유족회’ 회장은 “정부당국은 김현희를 하수인 및 정상참작이라는 이유로 불구속 및 공소보류 운운하고 있다는 신문보도를 접하고” 재판부에 연락을 해왔다. 1988년 11월로 표기되어 있는 이 탄원서에는 김현희를 “공개재판을 하여 법정 최고형에 처하여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 담겨있다(DA0799716, 4쪽). 어느 실종자의 친형 역시 김현희가 “국가최고형”을 받아야 한다며 편지를 보내왔다 (DA0799717).

한편으로 가족들은 “재수색”과 “올림픽 희생의 유공자 대우”를 바라기도 했다(266쪽). 또한 동생이 실종된 어느 가족은 “김현희를 직접 대면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270쪽). 한 문장 한 문장에서 가족들의 분노와 슬픔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된다. 참고로, 당시 미국 뉴욕에 살고 있던 어느 교포는 김현희에게 “천주교 수녀가 되는 것이 어떨까 하고” 권해오기도 했다(DA0799719, 266쪽).

▲ 김현희는 김대중 대통령 당선 열흘 만인 1997년 12월 28일 안기부 직원과 결혼했다. 사진은 동아일보 1999년 1월 22일자.
[자료사진 - 통일뉴스]

그렇지만 남성들의 구혼편지와 실종자 가족들의 탄원서는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김현희는 특별사면을 받았고, 안기부(현 국정원)의 촉탁직원으로 일하다가 1997년 12월에 사라졌다. 이와 관련된 공식적인 이야기를 짧게 하면 다음과 같다.

안기부 직원 한 명이 김현희와 “1996.5월부터 결혼을 전제로 교제해” 오고 있었다. 정씨 성을 가진 이 직원은 1997년 12월 20일 안기부에 “최근 KAL기 유족회 복지재단 기금 출연(8억 5천만원)이 매듭 단계에 있으니 대공연구위원직을 사직하고 연말 내(1997.12.31) 결혼하겠다며 결혼의사를 강력히 피력”했다(DA0799650, 46쪽). 그리하여 두 사람은 12월 28일 결혼식을 올리고 사라진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결혼 시점과 관련해 그동안 의문을 제기했다. 핵심은 15대 대통령 선거다. 곧, 1997년 12월 18일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최초의 ‘정권교체’를 이루며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라는 얘기다.

다만 사건을 재조사했던 국정원 발전위에 따르면, 안기부는 1997년 5월 “김현희를 보호 관리 중인 외고종조부”의 요청에 따라 그해 “12월말까지 김현희의 완전 사회배출을 위한 방안을 마련”하려는 계획을 이미 세우고 있었다(<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주요 의혹사건편 下권(III)>, 548-549쪽).

이 말이 맞다손 치더라도 결혼식은 대선 열흘 뒤에 열렸고, 앞서 나온 대로 임시 결혼 일정이 통보된 날은 ‘공교롭게도’ 대선 이틀 뒤다. 또한 김현희의 결혼 상대가 안기부 직원이라는 점도 민감한 해석을 낳게 했다.

이에 대해 국정원 발전위는 (결혼 부분을 포함한) 관련부서의 핵심자료를 모두 열람한 뒤, 2005년 5월 2일 주간보고에서 “김현희 결혼은 정략적 목적이 아닌 것으로 판단”했다(DA0799650, 22쪽). 하지만 사안의 성격상 이 결론이 충분한 공감을 얻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참고로 나는 발전위 판단의 근거가 되었던 “김현희 활용 및 정착지원 마스터플랜”, “김현희 결혼 관련 대책보고” 등의 문건에 대해 국정원에 정보공개를 청구했지만 기각된 바 있다(<슬픈 쌍둥이의 눈물: 김현희-KAL858기 사건과 국제관계학>, 167쪽).

김현희에 대한 출석요구서 발부

한편 국정원 발전위는 비록 성과는 없었지만, 김현희와 면담을 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였다. 발전위의 이러한 면담 시도에 대해 진실위원회가 확인하는 작업을 했던 듯싶다. 2009년 3월 16일 진실위원회는 국정원에 자료협조를 요청했다.

그 목록은 “발전위에서 2006.2.27 오충일 위원장 명의로 김현희에게 발송한 서신 사본 1부, 2006.6.26 주거지 방문하여 전달하려 하였던 ‘진실위’[발전위] 명의 면담요청 서신, 2007.2.9 주거지 방문하여 전달하려고 하였던 원장 명의 서신 사본” 등이다(DA0799651, 57쪽). 하지만 문서상 국정원이 협조를 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 김현희는 20091년 3월 11일 부산 벡스코에서 일본인 납북자 가족들과 함께 기자회견장에 나타났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이와는 별도로 진실위원회 역시 김현희 면담을 추진하려고 했던 듯하다. 2009년 3월 11일, 결혼과 함께 사라졌던 김현희가 처음으로 기자회견을 했다. 부산 벡스코(전시회의장)에서 열렸는데 북쪽의 일본인 납치문제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이와 관련해 3월 4일 진실위원회 위원장은 담당 조사관에게 “회견장에 참석하는 것은 적절치 않으며, 김현희에 대한 출석요구서 발부 등은 4월 이후에 정식 절차를 밟아” 진행하라고 지시했다(52쪽). 그러나 출석요구서가 발부됐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참고로 당시 “기자회견의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사항은 전적으로 국가정보원과 일본측에서 준비”했는데(51쪽), 진실위원회 조사관이 국정원 수사관에게 “김현희의 주소지에 대하여 문의하였으나, 국정원에서도 알고 있지 않다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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