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전 경희총민주동문회 사무국장)

지난 2008년 가을 평양과 백두산 등을 참관했던 이창훈 전 경희총민주동문회 사무국장이 방북기를 본사로 보내왔다. 필자는 뒤늦은 방북기를 쓰게 된 이유를 나날이 악화되고 있는 남북관계 탓에 혹시라도 새 세대들이 통일에 무관심하게 될까 하는 우려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연재는 매주 토요일에 걸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1편 : 프롤로그 - 나와 DPRK
2편 : 인천공항과 순안공항
3편 : 평양이야기 (상/하)
4편 : 백두산이야기 (상/중/하)
5편 : 묘향산과 못 다한 이야기들
6편 : 에필로그

C’est Si Bon 천지!

▲ C’est Si Bon 천지! [사진-이창훈]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천지에서 한발 두발 내려온다. 떠나려니... 아니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현실! 길바닥에 나 뒹구는 저 돌 하나도 예사롭지가 않다. 가만 보니 현무암 돌 틈으로 이끼류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하찮아 보이는 저 이끼조차 부럽다.

▲ 천지의 돌과 자생식물 - 저 마른 풀과 이끼가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곳에 그리고 가장 춥고 험한 곳에서 살아가는 식물이다. [사진-이창훈]

여기서 다시 천지의 물을 만지려면 2~3km 정도 되어 보이는 비탈길을 내려가야 한다. 바쁜 일정 때문인지 안내원들이 거기까지는 안내하지 않는다. 게다가 위험해 보이기도 하다. 방문객들 중에는 나이든 분들도 있기에 가지 않는다고 한다. 아쉽다.

아니, ‘인간의 욕심이 끝이 없다. 기어코 천지에 손을 담가 그 파란 물이 투명한 물색임을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가? 아니 차라리 아쉬워해라. 분단선도 끊어내지 못하는 주제에 그 더러운 손으로 어디 천지의 깨끗한 물에 손을 담그려하는가? 백두산에 오른 것 만해도 너에게는 감지덕지다. 천지에 손을 담그려면 통일된 후에나 찾아 와라.’

다시 현무암 포장도로를 타고 버스는 미끄러지듯 내려온다. 백두역에서 향도역으로 오르는 기찻길이 보인다. 그 위로 바위산에 새겨진 큰 글발이 ‘민족의 성산 백두산’이라 말하고 있다. 그것을 뒤로 하면서 백두산을 내려오는데, 갑자기 그 당당하고 우람해 보이던 백두산이 외롭게 느껴진다.

몇 해 전 지인의 부고 소식에 제주도를 방문했다가 한라산에 오른 적이 있었다. 그때도 1500미터 고지에서 등산을 시작해 백록담 바로 밑까지 올랐다. 백록담에 오르는 길은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갈 수가 없었다. 그곳에도 규모는 다르지만 용암이 만들어 놓은 평탄한 대지가 있었다. 백두산처럼 수목한계선이 없어 숲이 있었다. 숲은 우겨져 있었지만 나지막했다. 숲의 높이가 내 무릎 높이를 못 넘는다. 바람 때문이라고 한다. 거세 바람에 나무와 넝쿨들이 높이 자라지 못하고 옆으로 퍼지며 자란다고 한다. 그 야트막한 숲 사이로는 한라산 노루들이 뛰어 다니면 만든 좁은 길도 있다.

쌍둥이임에 틀림없다. 백두와 한라! 크기나 모양새는 다르지만, 화산폭발로 만들어진 산이고 곳곳에 용암이 만들어 놓은 펑퍼짐한 땅을 가지고 있고, 그곳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한민족임에 백두와 한라는 하느님이 만들어 놓은 자연산 쌍둥이인 것이다. 그들이 서로 만나기 위해서는 거센 파도가 있는 바다를 건너야 하고, 삼천리를 가야 하지만, 오천년을 형제로 쌍둥이로 무난히 살아 왔다. 그러나 그 어느 날 인간이 만들어 놓은 장벽으로 인해 해가 육십이 넘도록 만나지 못하고 있다.

서사시 「백두산」 전 7권의 집필을 마친 고은 시인이 1년 뒤인 1995년 8월 15일, 작품의 중심무대인 백두산을 올랐다. 이 날은 일제강점기가 끝나는 50년이 되는 해이었다. 그 시인이 천지에 올라 남긴 글이다.

“백두산! 백두산 천지! 그것은 하나의 엄중한 도성(都城)이었다. 어떤 사악이나 어떤 수단도 허용하지 않는 초전략의 절대로서 우리 겨레의 염원을 이룩하고 있는 것이었다. 백두산 열여섯 봉우리와 그 봉우리를 성으로 삼고 만고의 청정 법신으로 담겨있는 천지야말로 그것 없이는 우리가 결코 우리일 수 없는 이유가 거기 있었다. 하지만 우리 겨레 몇 천 년의 역사는 과연 우리 겨레의 자연인 백두산에 대해서 미치지 못한 바가 너무 많다는 사실에 대해서 깊은 자기반성이 있어야 했다.”

▲ 천지의 이모저모 - (좌상) 정상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이다. 가파르거니와 화산 자갈들이 깔려있어 미끄러지기가 십상이다. 멀리 우리가 타고 온 버스가 보인다. / (우상) 직접 내려가 손을 적셔 보고 싶었던 천지 호숫물! 그 호숫물을 가까이 찍었다. 천지의 물색은 청자의 빛깔을 담지 않았는가? / (좌하) 북측에서 백두산 천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 오르면 우뚝 솟은 바위가 있어 천지가 갈라져 보인다. 좌측에 남은 천지를 찍었다. / (우하) 향도역이 있는 향도봉이다. 향도봉 절벽으로 빗물이 따라 흐르다가 천지수면에 불어오는 바람으로 인해 흐르던 빗물이 하늘로 치솟는 장관이 연출된다고 한다. [사진-이창훈]

천지만 볼 생각에 가장 높은 곳만 쳐다보며 산을 오르던 때와는 다르다. 천지를 뒤로 하고 내려오는 길에는 주변을 살펴볼 여유를 가진다. 백두다리도 지나고 발원지가 가까운 압록강이 흐르는 계곡도 보이고 폭포도 보인다. 내려서 사진도 찍고 싶은 맘이 간절하지만 그러지 못한다. 다만 안내원의 설명만 듣고 있을 뿐이다. 백두산온천, 소연지봉, 대연지봉, 연지폭포, 사기문폭포, 백두폭포, 형제폭포, 쌍무지개폭포, 리명수 폭포, 내곡온천, 영암산 분화구, 간장늪 등등 그곳을 다 돌아보려면 삼박사일은 여기에 머물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백두산 호랑이도 보아야 하지 않겠나?

그렇게 나는 이번 여행의 장도에 큰 점을 찍고 내려오는데, 젖 달라 보채는 아이가 된다. 더 놀다가 가자고 안내원 면전에서는 말 못하고, 안내원동무 한참 뒤에 서서 궁시렁 댄다. 그런 나를 눈치라도 챘는지, 북녘의 동포들은 아이가 되어 버린 나를 멋지게 달래 준다.

내가 여행 일정에 큰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이다. 같이 동행한 방문객들 중에는 더러 빠듯한 여행 일정에 불만을 표하거나, 혹은 자유롭지 못한 것에 대해 이러 저러한 말들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여행기간 내내 예정된 일정이 바뀌어도, 그래서 자유롭지 못하더라도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니 그조차도 즐거웠다. 원래 여행이라는 것이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겨야 재미난 것이 아닌가? 나는 순안공항에 내리면서부터 바람 부는 대로 가는 나그네가 되었다. 만약 내가 우리 여행 일정을 미리 알아 천지에서 내려와 도시락을 먹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더라면 천지에서의 그 엄청난 아쉬움을 한낱 도시락 하나에 잊어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와 이게 뭔가요?’

백두산 자락에서 도시락이라니! 돗자리가 이곳저곳에 펴지고 안내원 동무들이 도시락을 나눠주기 시작한다. 어렸을 적 선생님들과 동무들 손잡고 가던 소풍이 생각난다. 어머님이 정성스럽게 싸주신 분홍색 소시지가 들어간 김밥과 사이다, 과자 한 봉지 들고 유명한 관광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동네에서는 경치가 가장 좋다는 곳을 찾아, 보물찾기와 장기자랑을 하던 그 추억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 백두산 자락에서 도시락이라니! [사진-이창훈]

아, 그런데 일회용 도시락이다. 샌드위치, 밥, 계란, 돈까스 모양의 돼지고기 튀김 등, 아! 이거는 아니다. 이거는 백두산 도시락이 아니라 서울에서 지겹게 먹어대던 도시락이다. 백두산 도시락은 뭔가 달라야 한다. 일단 밥은 주먹밥으로 하고, 삶은 감자가 있어야 하고, 또 백두산에서 자란 고사리, 더덕, 만병초 등이 들어간 산채비빔밥은 어떤가? 반찬은 천지의 산천어 튀김이 들어가야 한다. 또 후식으로는 머루와 다래 그리고 황기, 마가목, 왕대황(장군풀)을 다려낸 후식용 음료까지 나와야 한다. 정말이지 서울 도시락과 똑같은 도시락이 밉다. 다행히 술은 ‘백두산 들쭉술’이다.

▲ 북한산 다래 - 정작 다래 맛은 마지막 날 보현사에 들렸을 때 맛을 보았다. 비닐봉투에 십여 알씩 담아 팔고 있었다. [사진-이창훈]

술잔이 여기저기서 기운다. 나는 하루 사이에 안면을 익힌 사람들이 모여 있는 이 자리 저 자리를 쫒아 다니며, 가당치도 않은 도시락 논리를 설파하며 한두 잔씩 얻어 마신다. 나는 여기서도 또 생억지를 부린다. 다들 치우고 일어섰는데, 아직 닭다리 하나를 더 먹어야 한다며 버틴다. 그러다 결국 안내원 동무들에게 한 소리를 듣고서야 벌그래진 얼굴로 일어서 차량에 올랐다.

“천지 신령이시여! 잘 계십시오. 내 훗날 다시 찾을 때는 아무런 서운함도 아무런 부끄럼도 없이 티끌도 없는 깨끗한 맘으로, 날도 맑아 천지 수십 길 물속이 훤히 보이는 날 찾아, 장군봉 맨 꼭대기에서도 천지 호숫물 가까이에서도 초라하지만 정성껏 고사 상을 차려 올리겠습니다.”

▲ 백두산 노정도. [사진-이창훈]

백두산 첫 여행길이다. 그 감격에 이곳저곳을 다녔는데, 영 방향 감각이 없다. 그래서 다시 차근차근 살펴보기 위해 백두산 지도를 펴놓고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대충 감이 온다. 그러니까. 삼지연 공항에서 내려 대흥단 가는 길로 돌아 천지를 오른 것이다. 그런 후에는 압록강 발원지점 쪽으로 내려와 백두밀영에 들렀다가 이후 삼지연을 보고 베개봉 호텔에서 숙식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삼지연공항에서 평양순안공항으로 돌아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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