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4.9통일평화재단 사료실장)

지난 2008년 가을 평양과 백두산 등을 참관했던 이창훈 4.9통일평화재단 자료실장(당시 경희총민주동문회 사무국장)이 방북기를 본사로 보내왔다. 필자는 뒤늦은 방북기를 쓰게 된 이유를 나날이 악화되고 있는 남북관계 탓에 혹시라도 새 세대들이 통일에 무관심하게 될까 하는 우려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연재는 매주 토요일에 걸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1편 : 프롤로그 - 나와 DPRK
2편 : 인천공항과 순안공항
3편 : 평양이야기 (상/하)
4편 : 백두산이야기 (상/중/하)
5편 : 묘향산 이야기와 남은 이야기들 (상/하)
6편 : 에필로그

평양에서의 마지막 날 밤

▲ 청천강. 유난히 맑고 깨끗하다고 해서 이름조차 청천강(淸川江)이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나에게 이번 여행은 '방북기행'이 아닌 '통일기행'이었다. 금강산 관광을 갔을 때, 북측안내원의 이야기가 기억난다. “남에 가시면, 금강산 구경 좀 많이 오라 하십시오. 금강산 구경은 그냥 구경이 아닙니다. 통일 구경입니다. 통일을 몰랐던 사람도 이곳을 다녀가고 나면 다 통일하고 싶어 합니다.”

세상에는 많은 민족이 있고, 국가가 있다. 그중 지금은 없어진 서남아시아 지역의 쿠르드족이 만든 쿠르디스탄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만제국이 해체되자, 쿠르디스탄의 민족주의자들은 독립 국가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이란, 이라크, 터키의 틈바구니에서 주변국가의 힘을 배경으로 서로 주도권을 잡기 위해 내부 싸움을 하다가 현재는 분할점령을 당하고 말았다. 또,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나라는 다르지만 게르만 민족의 한 부류인 도이치족이 세운 나라들이다.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강제 병합시킨 것도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였다. 그러나 지금은 신나치주의자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통일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다.

몽골, 아일랜드처럼 이 지구상에 다국가 민족은 많다. 민족이 두개의 국가로 나눠져 있다면, 하나의 국가로 뭉치려하는 것은 민족주의의 본성이다. 그러나 그 본성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면 영구히 분단된 채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쿠르디스탄의 경우처럼 외세를 등에 업고 주도권 다툼을 해서도 안 되고, 독일처럼 상대방의 의지를 무시하고 강제병합을 해서도 안 된다. 서로가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 우리 조국은 이미 1972년 7월 4일 '7·4남북공동성명'을 내고 자주·평화통일·민족대단결의 3가지 통일원칙을 천명한 바 있다. 이대로만 하면 된다. "통일은 참 쉽다."

하루 만에 다시 양각도호텔로 돌아왔다. 저녁식사는 '환송만찬'으로 진행되었다. 3박4일의 짧은 일정이 끝나가는 것이다. 마지막에 참가자 모두가 일어나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불렀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만찬에 참가한 남북 모든 인사들의 통일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날 저녁 우리는 다시 청량음료대를 찾았다. 그런데 주모가 바뀌었다. 교대 근무를 하다 보니 지난번에 봤던 봉사원대신 다른 조가 투입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이날 주제는 백두산 이야기다. 앞선 근무조처럼 백두산에 못가 본 봉사원들이다. 그날 백두산이야기는 곧 통일이야기로 이어졌다. 봉사원 동무들도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여행에 들뜨고 술기운에 들떠 우왕좌왕하는 뜨내기손님들이지만 같은 민족이기에 아주 오래 전에 본 사람들처럼 반가이 대해 주었다.

노래도 부르고 시 낭송도 한다. 나중에는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일어나 춤도 추었다. ‘통일맞이 문화행사’다. 어쩐지 통일이 되면 외려 서운할 것 같다. 통일 전에는 사상, 정파, 지역, 종교를 뛰어 넘어 민족대단결의 기치아래 한 몸 한 뜻으로 자리를 같이 하였지만, 정작 통일이 되면 먹고 살기 바쁜 나머지 이런 '민족대단결의 장'이 만들어지기 힘들지 않을까? 자정을 넘겨서까지 '대단결행사'가 지속되더니, 이제 지쳤나보다. 헤어지잔다. 봉사원 동무들이 인사 한다. “통일되면 다시 만납시다래!” 나도 인사한다. “그럽시다래!”

평양의 밤 풍경

▲ 묘향산에서 만난 한복여성. [사진-이창훈]

양각도호텔 28층에서 평양하늘을 바라본다. 내 카메라로는 평양의 밤풍경이 잡히지 않는다. 도시의 불빛이 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동강과 능라도, 모란봉이 어우러져 있는 평양의 밤하늘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달빛이 살아 있고, 별빛이 살아 있고, 하늘과 맞닿아 있는 산등줄기가 어슴푸레 보인다. 삼백만이 넘는 인구가 사는 도시 답지 않은 고요함이 여행으로 지친 객의 잠자리를 달래주고 있었다. 침대는 폭신하고 이불은 부드러웠다. 아쉬울 것 같은 여행의 마지막 날이었지만, 어쩐지 나는 편안한 잠자리를 맞이했다.

새벽하늘은 더욱더 신기했다. 곧 태양이 떠오를 것처럼 동쪽하늘은 붉어 있고, 구름이 짙은 하늘은 어두웠고, 구름이 없는 하늘은 짙푸르렀다. 대동강에는 벌써 바지선들이 무언가를 잔뜩 싣고 운항을 시작하였으며, 커다란 쇠망치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새벽기차 울음소리도 들린다. 벌써 신성한 노동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아직 노동자 군상(群像)의 움직임은 감지되지 않고 있지만, 곧 공장의 기계바퀴는 제 속도로 움직일 것이고, 신성한 노동의 임무를 부여받은 노동자들은 일떠설 것이다.

아침이다. 마지막 날 아침은 분주하다. 여행 짐들을 정리하느라 이 방 저 방이 소요하다. 짐이 넘치는 사람은 짐을 나눠담느라 여기저기 부탁하러 다닌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나니 묘향산으로 떠나기 전까지 시간이 좀 남는다. 나는 관광상품매대로 갔다. 할머니와 가족을 위한 선물을 준비하고, 사무실 사람들을 위한 선물도 마련하고, 지인들을 위한 선물도 준비해야 한다. 분주하게 이곳저곳을 헤맨다.

구로시민센타 김 대표는 확실하다. 개성 고추장을 집중 공략한다. 한 이십여 개를 구입하여 가방에 넣고 있다. 매대의 안내원 동무도 상술을 부린다. “고추장의 원조는 개성이라요”하며 고추장을 강권한다. 그러나 선물을 고추장으로 한다는 것이 언뜻 내키지 않아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할머님에게 드릴 선물로는 마른 산나물 몇 봉지를 들었다. 올해 태어난 첫 조카를 위한 선물도 샀다. 어머님 선물은 절구통이다. 나무로 깎아 만든 것인데 겉에 '묘향산'이라고 쓰여 있다. 여동생을 위한 선물로 그럴싸해 보이는 부채도 하나 샀다. 그런데 계속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 떠올리면 그에게 맞는 선물을 고를 시간이 없었다. 결국 나도 개성표 원조 고추장을 집어 들고 말았다.

묘향산 가는 버스에 오르다

▲ 평양에서 묘향산 가는 길, 들녘은 황금벌판을 이루고 있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향산으로 가는 길은 청천강 유람길이다. 삼천리금수강산에는 어딜 가나 맑은 물이 있다. 곳곳에 '청천(淸川)'이 있다. 그러나 수 백리 물길, 산 계곡 굽이굽이 돌던 시냇물이 모여 강이 되고, 다시 그 작은 강들이 모여 큰 강이 되면, 대부분 탁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청천강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낚시꾼들이 좋아할 청천강이지만, 고구려의 대장군 '을지문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암울한 일제강점기시대에 나라 잃은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민족혼을 불어 넣고자 했던 역사학자!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을지문덕을 이렇게 평하였다.

“을지문덕주의는 적이 커도 우리는 반드시 나아가고, 적이 강해도 우리는 반드시 나아가며, 적이 사납든지 용맹하든지 간에 우리는 반드시 나아가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면 식은땀으로 등이 젖고, 털끝만큼이라도 양보하면 입으로 피를 토하면서 이로써 자신을 독려하고, 이로써 동료를 고무하며, 이로써 전국 국민을 흥기 시켜, 그 삶을 조선으로서 하며 그 한 번 숨 쉬고 한 번 먹는 것을 반드시 조선으로서 한 결과, 마침내 여진 부락을 다 우리의 식민지로 만들었고, 중국의 천자를 우리 손으로 거의 사로잡을 뻔했던 것이다.” (신채호, [을지문덕]에서)

저 맑고 고요해 보이는 물줄기들이 물막이에 갇혀 답답한 시간을 보내다가 그 어느 한 순간 그 때가 왔을 때, 갑자기 요란한 소리를 내며 허망이 되돌아가는 외세의 적병들을 향해 달려들어 그들을 몰살시키는 장면이 내 머릿속에 떠오른다. 아 당시 고구려 백성들은 얼마나 통쾌했을까? 우리도 대장군의 명을 받아 이 땅에서 외세의 적병들을 몰아내고 자주국가를 세울 날이 언제 올꼬? 하며 애를 토하다 보니, 시간도 두어 시간 흐르고 벌써 향산이란다.

향산에 도착했건만 산 구경도 하기 전에 들른 곳이 바로 '국제친선 전람관'이다. 북에서는 이곳을 '조선인민과 세계평화 애호 인민의 친선·단결을 상징해, 김일성 주석에게 보내는 세계 각국 인민의 경의의 선물을 집대성한 시설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 조금 떨어진 곳에는 1996년부터 세계 각지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보낸 선물들을 모아 둔 곳도 방문했다.

국제친선전람관. 위쪽 사진이 김일성 주석이 받은 선물을 모아둔 곳이고, 아래쪽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받은 선물을 모아둔 곳이다. 양식은 웅장한 고구려 건축양식을 따라 했다고 한다. [사진-이창훈]

국제친선전람관에 입장을 하니, 마치 박물관에 들어선 기분이다. 세상에 진귀한 물건은 죄다 이곳에 갖다 놓은 모양이다. 선사시대의 유물부터 정주영 회장이 선물한 자동차까지 전시되어 있었다. 수십만 개의 전시물들 중 나의 관심사는 바로 남녘의 인사들이 보냈다는 선물이다. 역대 대통령들부터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등 기업인, 언론인, 사회단체, 그리고 무명의 일반시민들이 보낸 선물들이 보낸 사람(기관)의 명패와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재미난 것은 역대 대통령 중에 김영삼(YS) 대통령의 선물은 전시가 되어있지 않다고 한다. 정상회담까지 약속한 YS가 선물을 안 보냈을 리 만무하지만, 아마도 조문파동 이후 북에서 치운 것 같았다. 정상회담까지 약속해 놓고도 죽은 사람에 대한 예의를 저버린 자에 대한 북측 나름의 응징방식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1994년 조문파동에 대해 한겨레평화연구소 김연철 소장은 <냉전의 추억>이라는 책을 통해 다음과 같이 썼다.

"최소한 1994년의 기억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무능한 자는 전쟁의 공포를 자극한다. 지혜로운 자는 위기를 막을 대책을 찾는다. 무능한 자들은 언제나 보수의 옷을 입으려고 한다. 한국에서 색깔은 실력을 감추는 옷이다. 오늘도 실력은 없지만 색깔이 강한 전문가들이 설친다. 오늘도 무능한 정부는 공포를 뿌린다. 망각의 안개처럼"이라고 썼다.

이 당시 YS는 “무모한 모험을 강행한다면 자멸과 파멸의 길로 갈 것”이라고 북한에 대해 경고했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에게 한 말이었다. 3년 뒤 YS는 ‘구제금융’을 신청하게 된다. 김 소장의 말처럼 YS는 자신의 무능함을 감추려고 ‘1994년 조문파동’을 일으킨 것이다.

▲ 묘향산문화유적안내도. [사진-이창훈]

진귀한 구경이 끝나자, 철딱서니 없는 아랫배는 꼬르륵 소리를 낸다. 점심은 향산호텔 식당을 이용하였다. 관광매대에는 묘향산 등산로가 그려진 벽그림이 있었다. 자세히 둘러보았다. 한참을 둘러보고 나니 묘향산 등반을 마친 기분이다.

묘향산 등반에 대한 아쉬움을 뒤로 하고 차에 오르는데, 보현사에 들른다는 것이다. 예정에는 없었지만 남녘에서 온 손님들을 배려한 행사 관계자들이 애쓴 덕분이다. 천 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는 곳, 서산대사의 혼이 담겨진 곳. 그 긴 이야기를 어찌 이곳에 다 담을 수 있으랴. 보현사의 짧은 관람은 대웅전 앞 13층 석탑에 달린 '바람방울'(풍경)소리로 달랠 수밖에 없었다.

13층 석탑.  각 층마다 풍경이 달려 있다. [사진-이창훈]

보현사 소풍. 인민학교 학생들로 보이는 소년 소녀들이 소풍을 왔나 보다. 한 아이가 앞에 나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남측에서 온 관람객들에게는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사진-이창훈]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출발은 인천공항에서 하였지만, 김포공항으로 돌아왔다. 나는 서둘렀다. 할머님이 입원해 계시는 광진구 혜민병원으로 급히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할머님의 병세가 악화되어 내가 방북한 사이에 입원을 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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