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감정학과 서지학 등은 문화재학의 선행학문이다

하천의 모랫바닥 위에 튼튼한 집을 지을 수 없다. 단층집을 지어도 하천을 피하여 단단한 땅을 고르고 기반을 다져서 집을 짓는다. 학문도 똑같다. 감정학이 없이 문화재 연구의 각 분야가 정확하게 성립될 수 없다.

중국에는 각 분야의 감정학(鑑定學)이 발달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각 분야의 감정학 연구 성과를 다룬 서적이 거의 없다. 우리나라의 문화재학(文化財學)이 부실한 것이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박물관에 소장되어 온 유물들, 국립중앙박물관이라면 왜정 때부터 수집되어 온 유물이나, 과거에 발굴 및 출토된 유물들, 그리고 과거의 연구자들이 검증한 문화재를 기준으로 하여 문화재의 각 분야를 연구하여왔다.

그러니 특정한 유물이 시중에 출현하면, 그 진위를 판단할 안목을 가진 사람이 몇 사람 되지를 않는다. 그러면서도 박사학위를 받으면 권위자 행세를 하는 사람들도 일부 있다. 그들은 실물에 어두우면서도 문화재를 도륙을 내고, 하찮은 것을 보물로 평가한다.

우리나라의 문화재학 가운데 유독 한국서지학(書誌學) 분야는 1990년 이래로 세계적인 수준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학 학자들이 한국서지학을 기본학문으로 배우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크다.

특히 자칭 민족사학자들이 한국서지학에 대한 기본 소양이 전혀 없이 언필칭 허상의 가림토문자로 실체의 [훈민정음]을 도륙을 내는 참담한 현실을 불러온다. 그것은 민족의 영광을 선양하기는커녕 가공된 허상을 내세우며 민족의 영광을 훼손하는 것이다.

[신 잡동산이(5)]
‘천부인’과 「천부경」은 무관하다

지난해 통일뉴스 5월 10일자에 연재되었던 [국혼의 재발견 (14)] “민족종교와 경전, 「동경대전」 「삼일신고」 「천부경」”에서 “아. 「천부인」은 『천부경』으로 단정할 수 없다”를 다룬 바 있다.

필자의 논리는 천부경 추종자들에게 심한 충격을 준 모양이다. 당시의 이 언급에 대한 비판이 높았다. 그들 누군가가 사석에서 이 모(필자)는 “광무9년 천부경 각석을 전혀 모른다”라고 말하며 필자를 공격했다는 말을 2월 초에 들었다.

이제 ‘광무9년 천부경 각석’에 관한 필자의 견해를 아래에 밝힌다. 아울러 필자의 이 견해에 대한 반론도 기대한다.

1. 천부인은 하늘이 준 옥새의 의미이다

[국혼의 재발견 (14)]의 글에서 필자는 “단군 사실(史實)에 나오는 「천부인(天符印)」이 『천부경』이라는 주장은 ‘인(印)’의 의미를 모르는 억측에 불과하다. ‘인(印)’은 글자 그대로 인장(印章)을 의미한다. 고래로 인장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의미한다. 환인이 환웅에게 삼위태백을 다스리는 권력을 준 증표가 ‘천부인’이다. 요즘도 권한을 행사하거나 증명할 때 인을 찍고, 고대에는 왕권의 계승에 옥새(玉璽)를 넘겨주는 행위는 매우 중요하였다”라고 하였다.

이어 “(중략) 환인은 환웅에게 『천부경』을 준 것이 아니라 「천부인」을 주었다. 그것도 3개를 주었다고 단군 사실에서는 수량까지 못 박고 있다. 이 「천부인」을 방울, 칼, 거울로 해석하는 설도 있고, 『천부경』으로 해석하는 설도 있지만, 「천부인」은 『천부경』이 아니라 삼위태백을 다스리는 권력으로서의 상징물, 즉 옥새와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천부인이 [천부경]일 수 없다는 관점은 필자가 20대에 [천부경]을 처음 접하면서부터 제기한 문제이다. 그것은 세계의 모든 문명과 종교에서 인(印)은 권능(權能)이자 권력(權力)이기 때문이다.

2. 갑골문 천부경은 있을 수 없다

또한 그 글의 “자. 갑골문 『천부경』은 있을 수 없다”라는 부분에서는 BC 1500년경의 갑골문은 대체로 4,000자 정도가 발견되었고, (중략) 갑골문자를 만든 상(商) 왕조의 건국은 BC 1600년경이다. 즉 BC 1600년 이전에 갑골문자는 없었다. 그리고 갑골문은 1899년에 처음 발견된 이래 20세기에 들어와 규명되기 시작한 고대의 은허(殷墟)에서 나온 문자이다. 만약 단군 사실의 「천부인」이 『천부경』이라고 해도, 그것이 갑골문으로 남아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라고 언급하였다.

이어서 “(중략) 그 갑골문 『천부경』이라는 것은 문서로서 옛날에 만든 것이 아닌 이유가 있다. 근‧현대까지 우리 민족은 오른쪽 위에서 아래로 글을 써 내려갔다. 이를 내려쓰기라 한다. 우리 민족이 1914년 이전에 문장(文章)을 가로쓰기든 역(逆) 가로쓰기든 한 예는 전혀 없다. 그러나 이른바 갑골문 『천부경』은 역(逆)가로쓰기를 하고 있다. 오른쪽 위에서 왼쪽 위로 역(逆)가로써기를 하는 것이다. 이른바 갑골문 『천부경』은 문장을 이렇게 쓴 유일한 예이다. 한편 극동 삼국은 모두 세로쓰기를 하고 있는데, 유태인들의 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역(逆)가로쓰기를 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필자의 눈으로 보기에 갑골문 천부경을 내미는 행위는 치졸한 행위이다.

3. 백두산 천부경 출현은 단막극이다

계속하여 필자는 “차. 최근에 만들어 묻은 백두산 『천부경』”에서는 “2020년 2월 28일 자 조선중앙티비는 ‘백두산 장군봉 마루에서 대종교 천부경이 새겨진 대리석과 삼각형 옥돌을 발굴했다’라고 보도하면서 ‘김일성 종합대학 역사학부 강좌장 교수, 리광희 박사와 같은 대학 조선어학부 교원 교수 리동윤 박사의 증언’을 전했다. 단군을 상징하는 푸른색 삼각형 옥돌과 대리석 판으로 된 대종교 경전 『천부경』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 유물을 발굴하게 된 것은 216사단 인민보안상 연대 동무들이 작업 도중에 글이 새겨진 유물을 발견했다는 통보를 하여온 것에 기초해서 현지에 나가서 그 동무들과 함께 발굴’을 진행했다고 한다” 나는 “조선중앙티비에 나온 대리석 판 『천부경』에 새겨진 글자 꼴은 이른바 갑골문 『천부경』과 역(逆)가로쓰기한 것까지 똑같다”라고 지적하였다. [관련글 참조]

4. ‘광무구년 천부경 구절 각석’의 문제점

[천부경 구절 석각], 충남 아산시 송악면 송학리에 있는 작은 암자에서 나왔다는 천부경 구절(句節) 각석이다. 금석학(金石學)의 입장에서 검토하면 이 각석은 아주 엉성하게 위조된 것이다. 그저 헛웃음(失笑)이 나온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천부경 구절 석각], 충남 아산시 송악면 송학리에 있는 작은 암자에서 나왔다는 천부경 구절(句節) 각석이다. 금석학(金石學)의 입장에서 검토하면 이 각석은 아주 엉성하게 위조된 것이다. 그저 헛웃음(失笑)이 나온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충남 아산시 송악면 송학리에 있는 작은 암자에서 나왔다는 천부경 구절(句節) 각석, 즉 ‘일시무시일(一時無時一)’과 삼태극, ‘일적십거(一積十鉅)’ ‘광무구(光武九)’라 새긴 바위가 있다. 이에 대하여 금석학(金石學)에 따라 논하고자 한다.

문제는 ① 이 바위에 새겨진 글씨의 순서와 위치를 금석학의 측면에서 보면 상당한 문제점이 발견된다. 우선 ‘광무구’라고 새긴 부분을 보면 과거의 금석문의 예와는 전혀 다른 위치에 새겼다. 제작 연호는 오른쪽 하단부가 아니라 왼쪽 하단부에 새겨야 했다. 동북아의 모든 비석에서 제작 연호를 오른쪽 하단부에 새긴 다른 예를 단 하나라도 예시해 보라. 전혀 없다. 즉 이 각석은 금석문의 공식적인 틀에서 벗어난 것이다.

헛웃음이 나온다. 필자에게는 이 각석의 어설픈 조작이 눈에 보이는 것이다. 마치 천부경 갑골문이라는 것을 만들면서 역 가로쓰기를 한 것과 같은 실수가 여기에서도 보이는 것이다. 왜작지 않은 이 바위에 천부경의 아홉 자만 적었을까? 그것도 금석문의 공식적인 틀을 벗어나 적었을까? 위조를 하려면 제대로 위조하였으면 한다. 필자라면 이렇게 어수룩한 위조를 하지는 않겠다.

② 그런데 왜? 여기에 엉뚱하게 ‘광무구년’도 아니고, ‘년(年)’ 자를 빼고 ‘광무구’라고 새겼을까? 다른 금석문이나 고문서에서 ‘광무구년’을 ‘광무구’라고 새긴 예가 다른 고문헌에서는 전혀 없다. ‘광무구’는 완전한 기년 표기가 아니다.

③ ‘일시무시일’은 천부경의 첫 다섯(1~5) 글자이다. ‘일적십거’는 천부경의 21번째부터 24번째 글자이다. 이른바 ‘삼태극’이라 주장하는 문양은 ‘일시무시일’에서 연결되는 ‘석삼극(析三極)’을 표현한 것일 수 있다.

진짜 [삼태극]과 어설픈 소위 [천부경 각석 삼태극]. [사진 제공 – 이양재]
진짜 [삼태극]과 어설픈 소위 [천부경 각석 삼태극]. [사진 제공 – 이양재]

그러나 그려진 ‘삼태극’이라고 주장하는 S자 세 개를 조합한 듯한 갈고리처럼 열린 문양은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꼬리가 있는 닫힌 ‘삼태극’과는 전혀 다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열린 S자 세 개가 조합된 그 문양은 ‘삼태극’도 ‘석삼극’도 아니다. ‘태극’도 ‘삼태극’도 열린 갈고리처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꼬리를 그리며 닫혀 있어야 제대로 된 역동적인 ‘태극’ 또는 역동적인 ‘삼태극’이 되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문양에서 마치 일본의 어느 회사의 문장(紋章, Logo)을 연상한다. S자를 세 개 합친 모양의 갈고리처럼 열린 문양을 ‘삼태극’으로 부른다면 이는 ‘삼태극’에 대한 왜곡이자 모독이다. 태극이나 삼태극의 본질은 역동성에 있다.

④ 이 각석은 적으면 세 차례, 많으면 네 차례에 걸쳐 완성된 것 같다. 처음에 글자 다섯 자를 새겼다. 그 후에 네 자를 새겼다. 그것은 다섯 자와 네 자의 필체가 차이가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가 보이는 것은 서예가가 아닌 일반인이 쓴 붓글씨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후에 ‘광무구’를 새겼다. 마지막으로 갈고리 모양의 꼬리가 없는 소위 열린 ‘삼태극’을 새겼다.

그런데 꼬리가 없는 열린 ‘삼태극’이 바위 면의 중앙부에 새겨져 있는데, 혹 열린 ‘삼태극’이 먼저 새겨지지나 않은가 하는 의혹도 품게 한다. 꼬리가 없는 열린 ‘삼태극’ 문양과 문장은 전혀 관련이 없다. 문장에는 황금색의 누런 물감을 칠했지만, ‘삼태극’이라고 주장하는 문양에는 아무것도 칠하지 않았다.

⑤ 광무(光武) 9년이면 1905년이고, 을사년이다. 그해에 유명한 사건이 일제의 을사늑약(乙巳勒約)이다. 그리고 1905년이면, 우리 민족의 종교사(宗敎史) 상에 매우 중요한 저술 문건 가운데 하나인 [단군교포명서(檀君敎佈明書)]가 저술되었다고 주장하는 1904년의 한 해 후이다. 그래서 이 각석에 광무구년이라 적은 것 같다.

[삼일신고], 필사본, 필자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삼일신고], 필사본, 필자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이 필사본의 맨 뒤에 [천부경]을 간단히 수록하고 있지만, [삼일신고]는 구결(口訣)을 붙였지만, [천부경]에는 구결을 붙이지 않았다. 그리고 [삼일신고]와 [천부경] 부분의 글씨 크기라든가 필체가 각기 다른 것을 보면, [삼일신고]를 필사한 연도와 [천부경]을 필사한 연도가 다를 수도 있다. 같은 연대에 썼다면 [천부경]도 별도의 장(張)에다가 [삼일신고]의 경우와 같이 격식을 갖추어 큰 글씨로, 같은 필체로 썼을 것이기 때문이다. [삼일신고]의 필체는 사자관(寫字官)들이 쓰던 판본체(版本體)에 가깝다. 그리고 이 [삼일신고]는 우리나라 고서의 특징인 오침선장본(五針線裝本)인데, 오침선장에 사용한 실은 다른 오침선장본에 비하여 매우 가늘다. [상일신고]를 필사한 종이는 상당히 양질의 닥종이로서, 왜정시기(倭政時期)의 종이라기보다는 조선후기로 올라가는 질 높은 저지(楮紙)이며, 또한 [삼일신고]라 서명을 쓴 붉은 종이는 닥종이로 보인다. 표지의 서명을 이런 붉은 종이에 써서 부친 형식은 우리나라의 고서보다는 청나라 말기의 중국 고서에서 간혹 보이는 형식이다. 그런데 표지의 문양을 보면,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종이가 아닌, 일본 종이도 아닌, 20세기 초기 서양 고서 표지의 내면지를 떼어내어 만든 것 같다. 표지를 만드는 데 사용한 종이의 국적은 규명해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단군교포명서]는 1904년이 아니라 1908년경에 나철이 저술한 것이다. 이 천부경 구절 석각을 새기면서 ‘광무구’라 한 것에는 대종교, 즉 단군교가 중광하기 이전에 이미 천부경이 존재했다는 가설을 성립시키기 위한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다섯 가지 점에서 보았을 때 이 각석에서는 인위적 조작의 냄새가 짙다. 거짓말은 또 누군가의 거짓말로 릴레이 하는 경향을 여기서도 보인다. 필자 같으면 이렇게 서투른 조작은 하지 않는다. 아마추어의 조작이다. 비석 제조 전문가가 [천부경] 전문을 새기게 하기에는 상당한 경비가 필요했던 것 같다. 서툰 싸구려 조작이다.

5. [담연재시고에 낙서된 [천부경]

[담연재시고] 앞표지 뒷면에 쓰인 [천부경]. [사진 제공 – 이양재]
[담연재시고] 앞표지 뒷면에 쓰인 [천부경]. [사진 제공 – 이양재]

[담연재시고(覃揅齋詩藁)]는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시문집이다. 고종 4년(1867)에 그의 제자 남병길(南秉吉, 1820~1869)에 의하여 편찬되어 금속활자 전사자로 인출되었다.

여러 해 전에 나는 이 책 상권(上卷) 1책 낙질을 경매에서 낙찰받았다. 당시에는 이 책 완질 2책이 있었으나 그 낙질 1책을 중복하여 매입해야 할 이유가 있다. 이 책의 앞표지 뒷면에는 천부경이 서툰 필치(筆致)로 필사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이 책의 앞표지 뒷면과 뒤표지 뒷면의 사진을 아래에 공개한다.

[담연재시고] 앞표지 부속 종이 앞⸱뒤에 쓰인 글. [사진 제공 – 이양재]
[담연재시고] 앞표지 부속 종이 앞⸱뒤에 쓰인 글. [사진 제공 – 이양재]
[담연재시고] 뒤표지의 부속 종이 뒷면에 쓰인 글. 1940년을 전후로 한 시기에 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담연재시고] 뒤표지의 부속 종이 뒷면에 쓰인 글. 1940년을 전후로 한 시기에 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담연재시고]는 그 초판본이 1867년에 나왔다. 그렇다고 그 앞표지 뒷면에 쓰인 글이 조선시대에 쓰인 것은 아니다. 동경의 주소와 경성의 주소로 보아, 1940년 이후에 낙서(落書)한 것이다.

그런데 앞표지에 부속된 종이의 뒷면(③)에 무인(戊寅, 1938년으로 추정) 6월 23일 술시(戌時) 초에 정환(正煥)이 태어났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그 서체는 앞부분의 [천부경] 등을 쓴 서체와는 너무 다르다. 필자가 보기에 정환의 출생 기록은 [천부경]보다도 먼저 쓰인 것으로 판단된다.

이 책에서 [천부경]이 필사된 부분은 1940년을 전후로 한 시기에 적은 것이므로 큰 의미는 없지만, 일단 단군이라고 명시가 되어 있어 경매에서 매입하였다. 우리 애서가들은 이러한 광적인 수집 면이 있다. 이렇게라도 자료가 모이면 진실과 진리가 보인다.

6. 맺음말

육당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은 시베리아 샤머니즘과 연결하여 천부인 세 개를 거울 칼 방울로 해석하였다. 거울과 칼과 방울이 만들어진 시기는 청동기시대이므로 결코 기원전 24세기로 올라가지 않는다. 육당 최남선의 논리대로 단군을 시베리아 샤머니즘과 연결한다면, 결국 단군 신앙을 무속화 시키는 역사 왜곡이 일어난다.

그래서 나는 애서가로서의 육당은 존중하지만 제대로 된 민족주의자가 아닌 얼치기 육당은 싫다. 육당이 제정일치(祭政一致)를 주장하며 단군을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제사장으로 무속화 시킨 것은, 그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런데 인(印)은 기원전 5000년경부터 그 연원을 두고 있다. 천부인이란 거울 칼 방울이 아니며, 더욱이 천부경도 아니다. 그렇다고 부적(符籍)이라 볼 수도 없다. 천부인 세 개는 그냥 지상과 인간사를 다스리는 권한을 준 세 개의 인장(印章)으로 보아야 한다. 종교적으로 해석한다면 하늘과 지상과 지하를 다스리는 권능이라든가, 전생 현생 내생을 관통하는 권능 정도로 풀 수도 있다.

인(印)과 경(經)은 같은 글자도, 뜻이 통하는 통자(通字)도 아니다. 아예 다른 것을 의미한다. 천부인은 오직 천부인일 뿐이다. 대종교에서는 천부인을 원(圓, ○) 방(方, □) 각(角, △)으로 푼다.

[동아일보] 1925년 1월 26일 부록 1면, 단재 신채호는 자신의 [조선사연구초]에서 [천부경]을 후인이 위조한 것으로 밝혔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동아일보] 1925년 1월 26일 부록 1면, 단재 신채호는 자신의 [조선사연구초]에서 [천부경]을 후인이 위조한 것으로 밝혔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이제 필자는 [동아일보] 1925년 1월 26일 자 부록 1면에 게재된 단재 신채호(申采浩, 1880~1936)의 [조선사연구초]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의 ‘4 결론’ 앞부분의 글, 즉 안목(眼目)과 재료 및 사료 선택의 중요성을 지적하며 당시의 단군교 측을 질타한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歷史를 硏究하랴면 史的 材料의 搜集도 必要하거니와 그 材料에 對한 選擇이 더욱 必要한 者라, 古物이 山가치 싸엿을지라도 古物에 對한 學識이 업스면 日本의 寬永通寶가 箕子의 遺物도 되며, 十萬冊의 藏書樓속에서 坐臥할지라도 書籍의 眞僞와 그 內容의 價値를 判定할 眼目이 업스면 後人僞造의 天符經 等도 檀君王儉의 聖言이 되는 것이라”

물론 1910년대 이전의 조선시대에도 기본적이고 전통적인 서지학이 있었으나, 단재 신채호가 이 글을 쓰던 1920년대에는 우리나라의 근대서지학이 태동하기 이전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글을 통하여 단재 신채호는 “국학의 연구에 있어서 본격적인 서지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라는 점을 알 수가 있다.

서지학은 한국학의 기본학문이자 기반학문이다. 서지학에서 볼 때 [천부경]은 종교서(宗敎書)이지 사료(史料)가 아니다. 즉, 단군 역사의 사료가 아니라 후대의 종교가 만든 자료로 이해하여야 한다. 따라서 단재 신채호는 [천부경]을 사료로서 인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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