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7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당시 새들이 우지짓는 적막함 속에 남북 정상이 도보다리에서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누는 모습에 세계가 숨죽이고 주목했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책 표지를 열면 바로 한 장의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4.27 판문점 회담 당시 도보다리에서 남북 정상이 마주앉아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누던 모습이 그것이다. 정상회담의 엄숙함에서 잠시 비켜난 듯 친근함과 진지함을 오가는 표정으로 지근거리에 마주앉아 대화에 몰입하는 두 정상의 모습은 한반도는 물론 전세계를 숨죽이게 했다.

전쟁을 입에 올릴 만큼 긴장이 고조되던 한반도의 냉엄한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어떤 배석자도 없이, 따스한 봄볕과 스쳐가는 바람과 한창 푸른 물이 오르고 있는 나무들만이 귀를 기울이는 가운데, 아마도 남과 북 공동의 미래에 대해 논했을 두 정상의 모습은 놀라웠다. 멀고도 가까운 남북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감동을 넘어 비현실적인 느낌마저 불러일으켰다.

사진과 함께 ‘우리는 미래로 가는 첫걸음을 떼었습니다’란 책의 부제는 마치 기적처럼 성사된 4.27 남북 정상회담이 이 책의 출발점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책의 머리말을 보면, 책은 지난 해 겨울, 촛불혁명으로 정권이 바뀌었지만 살얼음 같은 한반도의 현실은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깊은 우려를 담아 한반도의 현안들을 정면에서 정리해 보자는 취지에서 기획된 것이었다. 그때의 기획은 등불을 드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책은 2000년과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 특별수행원으로 참가한 유일한 학자이자 현재 문재인 대통령의 통일외교안보특보로서 그 식견과 무게감이 남다른 문정인 연세대 명예특임교수와, 북한 문제를 전공한 정치학 박사이자 2007년 통일부 장관 정책 보좌관으로 남북 관계 실무를 담당한 전문가이며 현재 집권 여당 국회의원인 홍익표 의원, 이 두 사람의 대담 형식을 빌려 현안들을 정면으로 짚어 보고자 했다.
 
이들은 전문가일 뿐 아니라, 문재인 정부의 철학과 정책의 향배까지 가늠해 볼 수 있는 무게감을 지닌다는 점에서 이 대담의 기획 의도는 심중한 것이었다.

대담의 운전대는 통일 전문 인터넷 미디어인 통일뉴스의 김치관 편집국장이 잡았다. 그 역시 북한학 석사이자 2000년 통일뉴스 창간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차례의 방북 취재를 비롯하여 남북 관계의 변모를 현장에서 읽어온 전문가로서, 이 대담의 운전수 역할을 하기에 가장 적임자라 할 만하다.

그런데 책을 기획하는 동안, 모든 것이 바뀌었다. 평창 동계 올림픽을 거치면서 남북 관계는 급진전되어 정상회담이 성사되었는가 하면, 어제까지 서로 핵단추를 언급하던 북미가 회담장에 마주앉게 되었으니, 대담에서 정리하고자 했던 한반도의 현안들은 이미 진행형의 현실이 되어 우리 앞에 펼쳐졌다. 이제 우리는 초고속 열차의 탑승객이 된 심정으로 이 열차가 어디까지 내달릴지, 또는 어디서 멈출지, 열차가 아니라 롤러코스터는 아닌지 기대 반 의구심 반으로 현실을 지켜보게 되었다.

따라서 대담의 방향도 바뀌었다. ‘한반도의 기적과 미래에 관한 문정인·홍익표 격정 대담’이라는 책의 속표지 문구처럼 4.27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의 성사를 기점으로 이 첫 걸음이 향해야 할 미래를 진단하는 것이 대담의 기획 의도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겨울에 시작한 대담은 초여름에 이르러 끝이 났다. 볕이 따가운 1950년의 6월은 한반도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6.25 전쟁이 발발한 해이다. 그러나 2018년 6월, 문 교수는 책의 머리말에서 “새 시대, 새로운 남북 관계, 새로운 평화의 규칙으로 한반도 평화와 번영의 지평을 열어가야 한다.”며 이 대담이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적었다.

홍 의원은 맺음말에서 “우리의 대담은 한반도 문제의 결론이 아니라, 다가오는 평화와 통일의 시대를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제기”라며, 한반도가 평화와 번영으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각론은 시민들과 함께 써나가고 싶다는 기대를 피력했다.

공교롭게도 전쟁의 달 6월에 지금까지 없었던 평화의 새 역사를 논하는 책이 쓰인 것이다. 이제는 정녕 전쟁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이 책에서 말하고 있듯 종전 선언, 평화체제, 남북경제공동체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야 할 전환기에 섰음인가. 책의 출간이 더욱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 『평화의규칙』 표지 [통일뉴스 자료사진]

책은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세기의 기적, 한반도의 봄’은 한반도 정세의 중대한 변곡점이 된 4.27 남북 정상회담과 6.12 북미 정상회담의 과정을 차근차근 복기하면서 당면한 격변의 상황을 분석, 정리하는 것으로 대담의 서두를 열고 있다.

여기서 책의 제목 ‘평화의 규칙’이 제시된다. 냉전 시대 국제 관계는 로마 시대 정치 전략가 플라비우스 베게티우스의 금언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힘에 의한 평화, 무력으로 유지되는 평화였다. 그러나 인류가 겪은 세계대전의 경험은 우리에겐 평화, 적에게는 전쟁이라는 공식을 허물어뜨렸다. 더 강한 무기로 적을 제압하고자 한 결과, 전쟁은 공멸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문 교수와 홍 의원은 이렇게 말한다. 이제 베게티우스의 명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냉전 체제의 종식과 더불어 새로운 규칙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그 첫 번째가 “평화를 원하거든, 평화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평화를 위해서는 상대의 입장을 이해해라.”, 즉 역지사지의 규칙이다.

책 맨 앞의 도보다리 사진 뒤에 시 한 편이 나온다. 시는 “평화는 독점할 수 없는 것이어서/ 내가 평화를 갖는 순간/ 적에게도 평화가 온다”로 시작하여, 평화비용을 퍼주기라 일컫는 자들을 향해 “평화를 돈으로 살 수만 있다면!/ 하지만 평화의 몸값은/ 대개/ 목숨인 것을”이라고 끝맺고 있다. 시의 제목은 ‘평화의 규칙’.

책과 제목이 같을 뿐 아니라 책의 내용을 압축해 놓은 듯 평화에 대한 철학이 일맥상통하는 이 시는 사실은 2009년에 쓰인 것이다. 시는 이명박 정부가 10.4 남북정상선언의 합의들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2000~2007년 비약적으로 발전한 남북 경협의 귀한 결실들을 ‘퍼주기’라고 비난하며 격하시키던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이렇듯 ‘평화의 규칙’을 저버린 후과가 어떤 것인지는 이후의 전개 과정이 여실히 보여준다. 2010년 3월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는 천안함 침몰 사건이 일어났고, 11월에는 남북 서해교전이 7년 만에 재발했다. 그리고 2010년 11월에는 휴전협정 이래 민간을 상대로 한 첫 대규모 군사 공격 사례라고 불리며 2명의 민간인 희생자까지 발생한 연평도 포격 사건이 일어났다. 2009년 2차 핵실험을 했던 북한은 점점 더 그 주기가 짧아져 2013년 3차, 2016년 4차, 2017년 5차 핵실험을 했고, 한반도의 긴장 상태는 전쟁 위기 직전까지 내몰렸다.

‘우리는 지정학적 숙명을 벗어날 수 있는가’란 소제목을 단 책의 2부는 소위 말하는 한반도 정세의 강대국 결정론과 지정학적 숙명론은 유효한 것인가를 정면으로 짚어 보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 결정론, 숙명론은 자신의 운명을 남의 손에 맡긴 자의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변화하는 아시아 지역의 질서와 북•중 관계에 대한 인식 부족 또는 오해,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에 대한 저평가 등이 이런 숙명론을 낳는다는 지적이다.

책은 이어서 한반도의 지정학적 여건을 규정하는 주변 강대국, 즉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의 한반도에 얽힌 이해 관계와 대한반도 전략, 그들의 의도와 속셈을 한 나라씩 집중적으로 면밀하게 분석한다.

책의 1부가 현재의 한반도 정세를 정리해 주는 역할을 한다면, 책의 2부는 우리의 눈을 한반도 밖으로 넓혀 향후 정세에 대한 전망을 가능케 해준다. 판문점 선언의 감동을 되살려 주는 1부도 재미있지만, 이 책의 진가가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은 전문가의 안목으로 주변 현실을 분석하여 우리의 눈을 틔워 주는 역할을 하는 이 2부이다.

3부의 소제목은 ‘북한 사회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야기의 초점은 우리가 가장 궁금해 할 사항, 북한의 핵문제와 경제 제재의 효과에 맞춰져 있다.

북핵의 선제 타격 가능성과 선제 타격이 가져올 확전의 우려, 핵을 보유한 통일 한반도 구상의 실현 가능성, 북핵 문제 해결의 입구와 출구, 동북아 비핵화 지대 구상 등 흥미진진한 주제가 이어진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에 맞서 오랜 세월의 고립과 제재를 견디며 살아남은 북한 사회 체제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을 제공해 준다.

‘미래를 향한 첫 걸음’이라는 소제목의 4부는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운전자론을 짚어 보면서 남북의 평화 공존과 통일 전망에 대해 알아본다. 공존과 통일이라는 상반된 화두, 문재인 정부의 사드 배치 강행이나 주한 미군의 주둔 필요성 등 논란이 되고 있는 예민한 문제들에 대해서 에둘러 가지 않고 명쾌하게 답을 한다.

▲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이날 판문점에서 역사적인 첫 악수를 했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문 교수는 책 출간 기자 간담회 자리에서 세 번째 평화의 규칙을 ‘실사구시의 규칙’이라고 언명했다. 평화를 원한다면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입장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책 전체를 관통하는 관점이자, 특히 책의 제4부 민감한 현실 사안에 대한 유연한 태도와 직접 관련되어 있는 규칙이다.

이어서 문 교수는 네 번째 평화의 규칙으로 ‘평화의 마음, 평화의 문화’ 같은 것들을 들었다. “전쟁이 사람의 마음속에서 나오듯이 평화도 사람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것”이니 그런 것들이 있어야 당연히 평화가 오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전쟁과 평화에 대한 전통적 시각을 되짚어 보는 이 책의 출간 자체가 네 번째 규칙의 실현 과정이랄 수 있고, 이를 완성시켜 주는 것이 독자의 몫일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보와 집권 여당 정책위원회 수석부의장의 대담이니만큼 어렵지 않으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전문가의 식견을 대담이라는 유연한 형식에 담아 쉽게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한반도 평화 만들기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에 대담자의 위상이 얹혀 급변하는 한반도 정세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를 제공해 준다. 야심찬 기획이자,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책이랄 수 있다. 규칙을 모르고서야 어떻게 한반도 평화를 향한 여정의 운전대를 잡을 수 있단 말인가.

정상회담 이후 현재 북미 관계도 남북 관계도 답보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여전히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평화의 도정에서, 올여름 휴가에 이 책 한 권을 동반한다면, 적어도 알지도 못하면서 훈수 두는 문외한은 면할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한반도 평화의 새 역사를 여는 각론 쓰기에 동참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수정-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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