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리스토퍼 힐 6자회담 수석대표가 2005년 4차 6자회담 당시 베이징 숙소 호텔로비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내가 기자로서 지켜본 바로는 미국 정부의 협상 대상은 항상 둘이다. 북미 협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바로 북한과 미국 자신이다.

2005년 베이징 6자회담 취재 당시도 그랬다. 미국측 6자회담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은 당시 기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는데, 회담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면 호텔 로비에서 그날의 회담 경과를 비교적 솔직히(?) 들려줬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가지 고역은 힐 수석대표가 회담을 마치고 회담장인 댜오위타이(钓鱼台)를 떠났다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호텔 로비에서의 ‘뻗치기’가 너무 오래 걸린다는 점이다. 힐 수석대표는 비화기(祕話機)가 설치돼 있는 베이징 미국대사관에 가서 자신의 동료, 상관들과 다시한번 기나긴 협상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당시에도 워싱턴의 북한과 북핵 문제에 대한 감각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었다.

6자회담 초반에 아무 성과 없이 시간만 보낸 것도 CVID(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ismantlement,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폐기)만 밀어붙이려는 워싱턴의 일종의 ‘가이드 라인’ 때문이었다. 결국 워싱턴이 CVID로는 북한과 협상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나서야 다시 6자회담 프로세스가 가동될 수 있었다. 당연히 9.19공동성명에는 CVID가 포함되지 않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과 협상을 앞두고 단번에 협상을 타결지을 것처럼 큰소리를 치더니, 실무협의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슬그머니 ‘여러 차례 회담’, ‘프로세스’라는 단어들을 트위터와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협상의 귀재가 나름 판을 빨리 간파한 것이다. 그때 즈음부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 대한 호칭이나 태도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미정상회담 직후 싱가포르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12일 싱가포르 공동성명 서명으로 마무리됐지만, 정작 트럼프 대통령은 ‘워싱턴 기자들’을 상대로 두 번째 협상을 벌여야 했다. 쏟아지는 비판적 질문에 무려 1시간 넘게 방어에 나선 것이다. “김 위원장과의 회담은 정직하고 직접적이고 생산적이었다“, “비핵화까지 시간이 많이 걸린다”...

트럼프 대통령이 13일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트위터에 쓴 “내가 말했듯 누구나 전쟁은 할 수 있지만, 오직 용감한 자만이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메시지는 두 번째 협상 대상을 향해 그가 들려주고 싶은 본심이었을 것이다. 기존 주류언론들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들씌운 이미지가 한 꺼풀 벗겨지는 신선한 메시지다.

공동성명 북한본에 따르면 “트럼프대통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안전담보를 제공할것을 확언하였으며 김정은위원장은 조선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확고부동한 의지를 재확인하였다”고 한다. 첫 협상대상인 북한과 빅딜을 이룬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두 번째 협상대상인 미국 국민들을 설득하는 첫 관문을 우리가 기자회견을 통해 적나라하게 지켜본 셈이다. 물론 트럼프 대통령은 중간선거와 자신의 대통령 재선이라는 정치 일정이 더 관심사일 수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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