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강성주 (KAL858기 사건 연구자, 국제관계학 박사)


“인간이 평생을 걸쳐 찾는 존재가 있으니, 바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어떤 분이 해주셨던 말씀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를 좋아한다. 이해받고 싶어하고 사랑받고 싶어한다. 삶은, 그리고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래서 누군가 필요하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신을 믿어주는 존재가.

KAL858기 사건의 폭파범으로 알려진 김현희 씨가 얼마 전 <TV조선>에 출연했다. 비록 공중파 방송이 아니긴 하지만, 공개적으로 국내 방송에 출연한 것은 “결혼 후 처음”으로 15년 만이다. 김씨는 그동안 있어왔던 의혹들에 대해 나름대로 해명을 하는 한편, 이른바 “좌파정부” 아래에서 겪었던 고통스러운 삶에 대해 털어놓았다. 핵심은, “좌파정부”가 사건의 진실과는 반대되는 증언을 하라고 강요했다는 것이다(참고로 김현희 씨는 2008년부터 이러한 이야기를 해오고 있다).

무엇보다 나는 김씨가 어떤 방송에 출연해서 무슨 이야기를 하든, 그러한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김씨도 인간이기에, 자신의 말에 관심을 가져주고 가장 잘 들어줄 것 같은 매체와 이야기를 나눈 것은 개인적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김씨의 그러한 모습은 그녀의 특별한 위치를 생각해볼 때 좀더 주의 깊에 논의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김현희 씨의 존재이유와 태도

기본적으로 나는 이번 텔레비전 출연을 ‘태도’와 관련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김현희 씨 자신도 잘 알겠지만, 그리고 이미 많이 알려졌지만, 김씨가 사형을 선고 받고 특별사면을 받은 이유는 이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산 증인”으로 풀려난 것이다(물론 미국 비밀문서 등을통해 이미 밝혀졌지만, 김씨에 대한 사면 계획은 재판이 진행되기 이전 또는 초기부터 당국 차원에서 논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안기부 관계자는 실종자 가족들의 회의장소에 찾아와 사면에 대한 협조를 요청하며 항의하는 이들의 멱살을 잡기도 했다).

따라서 ‘폭파범’ 김현희는 ‘진실’에 논란이 있는 한 최대한 성실하고 책임있게 해명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에게는 억울한 일이겠지만, 결국 문제는 그녀의 사면 이유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지금 김씨가 살아있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했을 때 김현희 씨가 그동안 보여준 태도는 여러 가지로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김씨는 국정원 발전위원회와 진실화해위원회의 재조사가 진행되던 시기 면담조사를 거부했다. 다시 말해, 김씨가 자신의 존재이유를 거스르며 책임을 다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김씨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재조사 자체를 “좌파정부”가 진실을 뒤집으려는 시도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그대로 믿기에는 어려운 지점이 있다. 일단 두 위원회에서 활동했던 인사들의 이야기와 그 ‘결과’가 증명하고 있듯이, 재조사에 대한 김씨의 주장에는 무리가 있다.

이와는 별도로 김씨는 적극적으로 조사에 임할 필요가 있었다. 자신의 진술에 문제가 없었다면, 그리고 안기부의 수사결과를 확신했다면, 재조사에 협조해서 더 이상의 논란이 없도록 했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김씨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재조사 거부 이유 중의 하나로 이야기되던 아이들 문제만 해도 그렇다. 자신의 아이들이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될까봐 걱정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걱정을 하던 김현희 씨는 이후 (비록 얼굴이 가려졌긴 했지만)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공개하고,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던 일본 방문에 나서는 한편, 이제는 국내의 텔레비전에까지 출연하였다.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정작 자신을 만나고 싶어하는 실종자 가족들은 외면한 채로. 가족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가족들을 대하는 김현희 씨의 태도.

아울러 차옥정 가족회장이 <한겨레>를 통해 지적한 대로, 김씨가 가족들과 1997년 만났던 것은 진정한 화해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또한 가족들과 함께하겠다던 서약서도 자신이 사죄의 마음에서 스스로 썼던 것이 아니라, 당시 만남의 자리에 있었던 어느 가족이 요구했기 때문에 쓴 것으로 알고 있다(논문 면접). 김현희 씨가 가족들에게 기부했다는 인세의 경우도 그 기부 자체는 분명 좋은 의도를 포함하고 있었겠지만,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그 무엇을 잃어버린 가족들의 입장에서는 꼭 그렇지만도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가족들에게 이미 용서를 받고 그들과 화해했다는 김씨의 이야기는 조심스럽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가족들이 분노하는 이유

나는 바로 이러한 김현희 씨의 태도가 실종자 가족들에게 아픔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해하기로 가족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단순히 국정원 발전위원회가 안기부 수사결과가 맞다고 해서가 아니다. 실종자 가족들이 지금껏 의혹을 제기하며 아파하는 이유는, 김현희 씨의 납득하기 힘든 ‘태도’ 때문이다.

태도의 문제와 관련해, 김지영 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이야기도 덧붙일 필요가 있을 듯하다. 개인적으로 사건에 대한 박사논문을 쓰면서 면접을 위해 그에게 연락을 한 적이 있다. 이미 위원회를 떠난 뒤였지만, 김 전 조사관은 퇴직한 직원의 비밀준수를 내용으로 하는 ‘공무원 규정 및 진실위원회 업무규정’을 이유로 면접을 거절했었다. 나는 그의 의사를 존중했다. 그랬던 그가 이번에 <조선일보>와 인터뷰한 기사를 확인하며 개인적으로 복잡한 심정이 들었다. 아마 실종자 가족들의 경우 이러한 일을 수없이 겪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KAL858기 가족회는 김현희 씨에게 공개토론을 제안하며 7월 15일까지 응답해줄 것을 요청했다. 과연 김씨는 이 제안에 어떻게 응할까. 중요한 것은 증거와 진술이라기보다 태도의 문제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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