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식(아태평화재단 연구위원, 정치학)


1. 분단 55년에 맞는 8·15

새천년 첫해에 8·15를 맞는 감회는 그 어느 때보다 각별할 수밖에 없다. 55년이라는 긴 세월도 세월이거니와 극적으로 열린 남북화해시대의 한 복판에서 8·15를 맞기 때문이리라. 헌데 여전히 분단의 세력은 완강하고 냉전의 논리는 막강하며 대결의 감정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분단에 길들여진 지난 세월만큼이나 우리는 화해와 통일의 세월을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단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正常일 수는 없다. 분단은 분명 비정상이었고 통일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마지막 정상화 과정임에 틀림없다. 이제라도 분단과 대결이 정상으로 인식되는 비정상성을 해소하고 통일과 화해의 정상성을 준비해야 한다.


2. 분단 55년의 역사

1945년의 해방은 분단이라는 우울한 그림자와 함께 찾아왔다. 우리는 일제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났다는 기쁨과 남북이 서로 갈라지는 설움을 동시에 맞아야만 했다. `일본군 무장해제`라는 군사적 명분으로 시작된 분단은 우리 내부의 좌우익 갈등과 미소간의 냉전적 대결이 상호 상승작용을 일으킴으로써 일시적 `갈라짐`이 아니라 남과 북에 각기 다른 체제와 정부가 수립되는 정치적 `분단`으로 결과되고 말았다. 그리고 1948년의 분단은 단순히 한 민족이 두 정부를 구성했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급기야 1950년의 동족상잔으로까지 증폭되면서 남과 북은 서로를 미워하고 적대하는 무차별적 대결관계를 형성하고 말았다. `국토`의 분단만이 아니라 `민족`의 분단으로 확대되었던 것이다.
1953년 휴전 이후 남과 북은 분단체제의 공고화 단계로 접어들었다. 남에게 북은 언젠가는 점령해야 할 失地로 인식되었고 북에게 남은 기어이 완수해야 할 革命의 대상지역으로 간주되었다. 분단의 공고화는 남한의 자본주의체제가 더욱 강고해지는 한편북한 역시 사회주의 체제가 보다 강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갔음을 의미한다. 남과 북은 서로가 상이한 체제로 더욱 멀어져 갔고 남한의 반공국시에 입각한 권위주의 체제와 북한의 주체사상에 입각한 유일체제는 서로가 서로를 적대하면서 이를 통해 자기 체제의 정당성을 강화시켜주는 이른바 `적대적 의존관계`로 고착되어 갔다.
수십년 동안 지속된 분단은 무엇보다도 양 체제의 이질화를 확대시켰다. 단순히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체제의 상이성 만이 아니라 정치경제적 작동원리와 사회적 보편가치, 그리고 삶의 방식과 언어, 문화 및 역사해석에 이르기까지 남과 북의 이질화는 갈수록 심화되어갔다. 수령의 삶과 자신의 삶을 일치시키는 `사회정치적 생명체`로서의 북한 인민은 국가로부터 분리된 시민사회 속의 `개인`이라는 남한 시민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이질화된 존재로 자리잡게 되었다.
분단은 또한 양측의 적대적 대결을 보다 첨예화시켰다. 공식적으로 서명한 정전협정에도 불구하고 남북의 군사적 충돌과 무력대결은 오히려 다반사가 되어 버렸고 남북관계는 대결과 갈등의 연속이었다. 가끔씩 보여졌던 대화는 역으로 갈등의 존재를 부각시켜 주는 일종의 해프닝이었고 대화 이후에는 결렬과 긴장고조를 반복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민족 내부의 의식에서도 남북간 적대감은 갈수록 증폭되어갔다. 같이 살아야 할 동포로서의 의식보다는 서로 미워하고 결국은 타도해야 할 증오의 대상으로 자리매김되었던 것이다.


3. `다르게 사는` 분단과 `똑같이 사는` 통일

55년 동안 우리의 일상이 되어버린 분단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그것은 `갈라져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갈라져 사는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혼재되어 있다. 즉 `다르게 사는 것`과 `싸우면서 사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지금껏 우리는 분단을 `다르게 사는 것`으로만 쉽게 인식해 왔다. 이처럼 분단을 서로 `다르게` 사는 것으로만 이해했기 때문에 당연히 분단의 反對態인 통일은 `하나가 되어 똑같이 사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즉 분단을 `다르게 사는 것`으로 이해하는 한 우리에게 통일은 남북한이 단일한 체제, 단일한 헌법, 단일한 정부 하에 `똑같이 사는` 완전통일 국가만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통일을 단일체제로 합쳐진 상태만을 상정했기 때문에 우리의 대북정책에서는 북한체제를 우리와 같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로 변화시킬 것인가가 최고의 전략적 목표로 간주되었고, 남북관계에서도 당연하게 북한을 우리 체제로 굴복시키는 것만이 최고의 과제로 여겨졌다. 그 결과 지난 55년간의 분단은 남과 북이 서로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그리하여 남은 북을 자신의 체제로 흡수하려 하고 북은 남을 자신의 혁명대상으로 간주하는 대결과 갈등만을 확대재생산 했던 것이다.
과거 김영삼 정부 시기까지의 우리 대북정책이 본질적으로 북한붕괴에 기반한 `흡수통일`이었음도 바로 이같은 분단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그 결과 남북관계의 역사적 화해는 불가능했으며 오히려 全部 아니면 全無 식의 극단적 대립만이 남북관계를 주도했다. 그러나 단일체제로 `똑같이` 사는 통일이란 우리가 추구해야 할 통일의 최종단계의 완성된 모습이며 이는 지금 당장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남북관계나 민족이익 차원에서도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4. `싸우면서 사는` 분단과 `평화롭게 사는` 통일

현실적으로 유용하고 바람직한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다르게 사는 분단` 대신 오히려 `싸우면서 사는 분단`에 초점을 맞춰야 하고 동시에 `똑같이 사는 통일` 대신 `평화롭게 사는 통일`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즉 남과 북이 불신과 적대의 고리를 끊고 화해와 협력의 상호관계를 정착시키며 자유롭게 서로 오고가는 상황만 된다 해도 이는 이미 `싸우면서 사는` 분단의 모순을 극복하고 `평화롭게 사는` 통일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경우 굳이 남과 북의 단일정부, 단일헌법, 단일체제를 고집하지 않아도 되며 당연히 우리의 대북정책과 남북관계는 평화공존과 교류협력에 주안점을 두게 된다.
과거 시기의 `강풍정책`과 달리 `햇볕정책`의 목표가 단일한 체제하의 급격한 법적, 제도적(de jure) 통일 대신에 `보다 많은 접촉` `보다 많은 교류` `보다 많은 협력`을 통해 남과 북이 서로 오가고 주고받고 돕고 나누는 `사실상의 통일`(de facto)을 지향하는 것임도 바로 이같은 분단인식에 토대한 것이다. 최종적 단계에서 `똑같이` 사는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지금 필요한 것은 싸우고 살아왔던 분단상태를 해소하고 `평화롭게` 사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남북간의 상시적 긴장과 갈등 대신 평화를, 상호 상승적이었던 남북간 불신과 대결 대신 화해를, 소모적 경쟁 대신 협력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분단으로 인한 폐해를 최소화시키면서 지금의 분단현실을 해소하기 위한 통일의 첫단계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분단인식과 통일개념에 충실한다면 지금 우리는 냉전에서 비롯된 남북한간의 `적대적 의존관계`를 청산하고 탈냉전시대에 합당한 `화해적 공존관계`를 이루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과제라 할 수 있다. 북한을 붕괴시키고 평양과 압록강에 태극기를 꽂는 것이 통일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평화와 화해 및 협력에 바탕한 남북관계의 개선이 바로 지금 시기 가장 절실한 통일의 시작으로 인식되어야 하는 것이다.


5. 남북정상회담과 `평화롭게 사는 통일`

남북정상회담의 역사적 의미 역시 분단과 통일에 대한 이같은 개념에서 새롭게 이해되어야 한다. 즉 정상회담의 가장 큰 의미는 무엇보다도 남과 북이 `싸우면서 살던`관계를 청산하고 상호간에 화해하고 협력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는 이번 정상회담이 남북한간 상호 체제인정과 평화공존의 역사적 디딤돌을 놓았음을 뜻하는 것이다.
지금 당장 `똑같이 사는` 통일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롭게 사는` 통일을 이룸으로써 남과 북의 단일체제로의 통합이 아닌, 남과 북의 평화공존으로서의 통일의 시작을 이루는 것이 바로 이번 정상회담의 역사적 의미인 것이다.
정상회담의 의미가 이런 것이라면 지금 우리에게는 남북이 적대하고 대결하는 `냉전근본주의`를 지양하고 남과 북이 더불어 살려는 `근본적 탈냉전주의`를 지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북한을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타도의 대상, 흡수의 대상, 경쟁의 대상, 불신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냉전적 대결논리를 해소하는 것이야말로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평화롭게 사는 통일`로 나아가는 지름길인 것이다.




▶필자 김근식

김근식 약력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대학원 졸업(석사)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대학원 졸업(박사)
현재 아태평화재단 연구위원(322-0449, 019-282-3947, kimosung@kdjpf.or.kr)
기타 민화협 정책위원, 경희대 등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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