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에게는 `외국으로 일하러 갔다`고 속일 수밖에 없던 아들, 밤이면 그리움을 달래려 약주라도 한잔 걸치지만 방문틈으로 새나가는 울음소리를 감출 수 없던 그 아들을 만난 김삼례(73) 할머니.

지난 87년 1월 15일 여느때처럼 `고기잡으러 간다`고 나간 아들 강희근(49)씨가 납북된 뒤 애태우며 살아온 김 할머니가 남북이산가족 2차 상봉에서 평양에서 극적인 상봉에 성공했다. 납북인사와 상봉이 이뤄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다음은 김 할머니의 2박3일에 걸친 방북기다.

◇11월 30일 = 어린 손자들의 사진과 아들의 속옷을 들고 교동도 집을 나서 배를 타고 강화도를 거쳐 롯데월드호텔까지 올 때도 설레더니 평양 순항공항 안개때문에 비행기가 뜨지 못한다니 정말 답답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조금만 참으면 아들을 볼 수 있다.` 예정보다 4시간 가까이 늦은 낮 12시 50분께 이륙한 비행기가 1시간만에 평양에 도착했다.
`이렇게 가까운 길인데.` 낯설지만 아들이 사는 곳이라니 정겹게 보인다.
공항에 나와있던 북쪽 사람들에게 `13번 김삼롑니다`라고 했더니 한 여자가 와서 나를 안았다.
버스를 타고 숙소인 고려호텔에 내렸더니 3층 복도 구석의 한 방을 배정해줬다.
남들과 달리 문이 2개나 달린 방이어서 특이했다.
이 층에는 나밖에 없는지 다른 사람들의 모습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피곤해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안내원이 와서 `밑에 아들이 왔다`고 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집단상봉장에서 수많은 이산가족들과 기자들 사이에 아들을 찾고 있는데 한시도 못잊던 얼굴이 다가와 `어머니`하고 외쳤다.
둘이 끌어안고 한참을 울고 또 울었다.
얼굴을 보니 옛 모습 그대로다.
내 아들이 틀림없었다.
`네가 웬일이냐. 너를 다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저도 어머니를 이렇게 만날 줄 몰랐어요. 이제 통일이 얼마 남지 않았나 봅니다` 아들이 함께 나온 여자와 남자아이를 아내와 아들이라며 소개했다.
여기서 재가한 모양이다.
며느리 이름은 김용화, 손자는 강현민.
`현민아, 할머니께 인사드려야지.` 어쩌면 남쪽에서 나와 살고 있는 현문(16)이와 이리도 똑같이 생겼을까.
`현민`의 `현`자도 현문이 이름에서 딴 것이란다.
셋이서 큰 절을 올리는 모습을 보니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중간에 중앙TV 등 북쪽 기자들이 여러명 우리 자리로 왔다.
아들은 기자들에게 `동진의 갑판장으로 일하다가 공화국(북한)에 들어와 무상으로 공부하고 치료하는 곳에 영주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중앙TV 기자가 `선생께서 납치돼 이곳에 온 것인가`라고 거듭 묻자 `납치는 날조다. 우리는 38선을 넘어 (북한) 경비함에 단속됐다`고 답했다.
왜 북쪽에 살고 있냐고 기자가 묻는데 `나는 좋은데 살려고 눌러 앉았다. 두달전에 (노동당) 당원이 됐다`고 말했다.
기자들이 나한테도 아들을 만나니 어떻냐고 물어와 `참 좋시다. 며느리와 손자를 만나니 좋다`고 했다.
우리 네 가족에게 기자들까지 몰려드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벌써 오늘 만남은 끝이라고 했다.
우느라고 아무 말도 못한 것 같은데...

◇12월 1일 = 아들 내외에게 뒤늦은 칠순 생일상을 받았다.
며느리가 수박색에 반짝이가 뿌려진 한복을 지어왔고 손자는 지팡이를 선물로 줬다.
들쭉술이 들어있는 선물도 받았다.
손자가 `할머니, 통일되면 꼭 오세요`란다.
아들이 술을 올리면서 `어머니 진갑상을 통일되는 날 꼭 모시겠습니다. 건강하십시오`라고 인사했다.
못다한 효도를 하려는 아들이 너무 고맙다.
손자를 끌어안고 눈물을 훔치면서 `아빠,엄마 말 잘 듣고 건강하게 자라거라`고 했다.
아들에게는 `애기(며느리) 고생하지 않게 사랑해라`고 당부했다.
남쪽의 아이들이 걱정되는지 `현문이는? 졸업했어요?` `괜찮아. 지선(강씨의 딸.20)이는 졸업하고...` `지선이는 공부 잘 했어요?` `지선이는 컴퓨터 치는 학원 다니고 현민이는 이제 고등학교 1학년이다. 남쪽 일은 꿈에서라도 잊어라. 아무 문제없어.` 세살짜리 아들을 두고 갔으니 그동안 얼마나 걱정이 많았을까.
아들은 `장군님 덕분에 잘살고 있으니 내 걱정은 말라`고 하니 살만한 모양이다.
`고생하냐`고는 묻지도 않았다.
어제에 이어 20명은 돼 보이는 기자들이 취재를 한다고 열을 올렸다.
TV카메라에 대고 `현문아, 텔레비전 보느냐? 텔레비전 봐라, 네 아버지 본다`고 외쳤다.
오늘도 울다가 얘기는 제대로 못해 아쉽지만 그래도 아들 얼굴은 실컷 만졌다.
피곤하지만 잠은 안오고 내일이면 떠나야 한다는게 믿기지 않았다.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평양의 야경에 자꾸 아들 얼굴이 겹쳐 어른거렸다.

◇12월 2일 = 무슨 이유인지 남쪽으로 돌아갈 시간이 늦어진다.
13년만에 재회가 이뤄진 평양을 천천히 떠나는게 싫지는 않지만 아들이 늦도록 보이질 않는다.
오후 1시께 나타난 아들에게 `왜 이리 늦었냐`고 원망하니 `집에서 오는데 좀 오래 걸렸다`고 했다.
호텔에서 아들과 마지막으로 만나는 시간은 20분 정도밖에 안됐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옮겨 공항으로 가는 버스에 탔는데 차창밖으로 아들이 다가왔다.
`어머니 건강하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통일되면 오셔야죠.` `그래 어서 통일이 돼야지.` ` 현문이 공부 좀 시켜주세요. 아빠 걱정 말라고 해요. 울지 마세요. 우리 어머니는 지독한 어머니입니다. 얼굴 한 번 대 보세요. 얼굴...` `내 걱정은 마라. 나는 이제 걱정없다.` 헤어짐의 순간, 아들도 참았던 눈물을 끝내 주체하지 못했다.
자꾸 뒤돌아보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비행기는 빨리도 서울에 내렸다.
떠나기 전 주변 사람들로부터 아들을 위해서 쓸데없는 말은 말라는 얘기를 들었던 탓인지 `할 말은 다 했나, 들을 말은 다 들었나`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도 살아있는 걸 확인했으니 원도 없고 이보다 좋은 일이 있을까.` 학교간 손자와 인천에 있는 손녀는 없었지만 납북자 가족모임 대표인 최우영(30)이가 공항에 꽃을 들고 나와 있었다.
함께 차를 타고 강화도까지 갔다.
아들이 탔던 배의 어로장으로 함께 납북됐던 아버지를 둔 우영이도 참 안됐다.
소식을 못 알아봐 준게 미안하다.
`우리 둘 다 갔으면 좋았을텐데. 다음엔 아버지 꼭 뵈야지` 우영이를 안고 얼굴을 보듬어 주는데 둘 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연합2000/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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