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봉 /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평화학 명예교수

 

어제 3월 28일 백두산 관련 뉴스가 대부분 신문에 나오더군요. 백두산이 창바이산이란 중국 이름으로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됐다는 내용입니다. “백두산, 결국 중국명 '창바이산'으로 세계지질공원 등재”라는 제목의 <연합뉴스>를 따라 <중앙일보>와 <동아일보> 등도 제목에 ‘결국’이라는 말을 붙이면서, 국제사회에서 ‘백두산’보다 ‘창바이산’이라는 명칭이 더 많이 사용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우려를 표한 겁니다. 여기엔 우리의 강한 민족의식뿐만 아니라 조선(북한)에 대한 반감과 중국에 대한 혐오감도 은근히 섞여 스며든 것 아닐까요?

중국은 창바이산(長白山)을 2002년 10대 명산으로 지정하고, 2006년부터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과 세계지질공원으로 등재시키려고 추진하다, 2020년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해달라고 유네스코에 신청했답니다. 조선(북한)은 2019년 백두산을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해달라고 신청했지만, 아직 후보로 오르지 못했다고 하고요. 중국이 선수를 친데다 국제사회(유네스코)에 중국 국력(영향력)이 조선 국력보다 큰 탓이겠지요.

참고로 우리가 ‘동해’라 부르는 바다가 세계적으로는 ‘일본해’로 훨씬 더 많이 불립니다. 한국보다 일본과의 동맹을 더 중시하는 미국은 물론, 한국과 같이 일본의 침략을 당하기도 했던 중국도 ‘일본해’라 부르거든요. 미국에서 만든 세계지도엔 ‘Sea of Japan’으로, 중국제 지도엔 ‘日本海’라 표기돼있는 거죠. 국가 간의 친소(親疏)관계보다 해당국가의 국력이 더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언론인들이 ‘백두산’보다 ‘창바이산’이라는 이름이 더 많이 사용될까봐 걱정한다는데, 창바이산의 한자 표기 장백산(長白山)은 우리도 썼습니다. ‘장백산’이 중국 홀로 짓고 쓰는 이름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조선시대엔 장백산이 백두산보다 더 많이 불렸을 테고요. 한국전쟁을 직접 겪었던 70대 이상 어르신들은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으로 시작하는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듣거나 불러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조선(북한)뿐만 아니라 한국(남한)에서도 장백산을 여전히 인정하고 있어요. 이 글 쓰고 있는 오늘 2024년 3월 29일 대한민국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장백산(長白山)‘을 “함경도와 만주 사이에 있는 산. 장백산맥(長白山脈) 동쪽에 솟은 우리나라 제일의 산이다”고 정의해 놓고 있거든요.

그러나 이 정의엔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어요. 남녘이나 북녘이나 해방 직후 1946년부터 행정구역을 개편하기 시작해, 북한은 1954년 함경북도와 함경남도 일부 지역을 떼어내 ‘량강도(兩江道)’를 만들었습니다. 백두산 양쪽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이 흐르는 지역이라는 뜻인데, 남한에서는 두음(머리소리)법칙에 따라 ’양강도‘라 발음하지요.

아무튼 백두산이든 장백산이든 더 이상 “함경도와 만주 사이’가 아니라 량강도와 만주 사이에 있는 겁니다. 또한 1991년 한국과 조선이 서로 독립국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유엔에 가입했는데, 아직까지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헌법 제3조 영토조항에 따라 조선에 있는 산을 “우리나라 제일의 산”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부적절하지 않겠어요?

한편, 한국사회엔 백두산을 조선이 중국에 빼앗기거나 양보했다는 주장이 아직도 힘을 얻고 있는 듯합니다. 한국전쟁 때 중국이 조선을 도와준 대가로 김일성이 백두산 절반을 중국에 넘겼다는 억지인데, 북한에 대한 반감이나 김일성에 대한 적대감이 역사를 오도하는 거죠.

남쪽에서는 흔히 백두산을 ‘민족의 영산’이라 하는데, 북녘에서는 ‘혁명의 성지’입니다. 김일성이 1930년대 항일 무장투쟁을 벌였던 근거지였으니까요. 중국도 창바이산을 신성시했습니다.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여진족) 시조가 태어났다는 건국 설화가 깃들어 있는 곳이거든요. 장백산 자락엔 두만강 발원지로 알려진 원지(圓池)라는 조그만 연못이 있는데, ‘천녀용궁지(天女浴躬池)’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으니 “하늘 여인이 몸을 씻은 연못”이란 뜻이지요. 옛날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이 연못에서 목욕하다 새가 옷에 떨어뜨려준 열매를 먹고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금나라(청나라)를 세운 여진족(만주족)의 시조라는 게 설화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청나라는 1600년대 이곳을 신성시하며 외지인들이 드나들지 못하게 봉금령(封禁令)을 발포했고, 이에 조선도 조선인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월강금지령(越江禁止令)을 내렸답니다. 그래도 일부 조선인들이 강을 건너 봉금지역에 드나들자 청나라가 경계를 분명히 하기 위해 조선과 1712년 (숙종 38년) 장백산에 경계 비석을 세웠습니다. "서쪽은 압록으로, 동쪽은 토문으로 (西爲鴨綠 東爲土門)" 경계를 삼는다는 이른바 백두산정계비(定界碑)인 거죠.

1800년대 말 청나라가 봉금령을 해제하여 두만강을 건너 이주하는 조선인들이 많아지자 갈등이 생겼답니다. 청나라는 백두산정계비의 ‘土門(도문)’이 두만강을 가리키기 때문에 두만강 북쪽 간도(間島)가 청나라땅이라 주장하고, 조선인들은 도문을 송화강으로 받아들여 간도를 조선땅이라고 주장했다는군요. 합의나 결론을 내지 못한 상태에서 한반도와 만주를 점령한 일본이 1909년 청나라에 간도 지배권을 넘겨주는 이른바 간도협약을 체결했으니, 한국사회에서 일제 때 빼앗긴 우리땅 간도를 되찾자는 주장이 나오는 배경입니다.

지금 옌벤(延邊) 조선족 자치주가 된 이 지역 주민들은 조선이나 한국이 아닌 중국 국적 가진 것을 당연시하고 있으니 현실성은 없다고 봐야겠죠. 이에 관해 더 자세한 내용은 제 친구 곽승지 박사가 쓴 책 『중국 동북지역과 한민족』 (모시는사람들, 2017)의 ‘청나라 건국과 봉금령’ 및 ‘백두산정계비/ 간도협약/ 조중변계조약’ 항목 (37-43쪽)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712년 청나라와 근대 조선이 경계를 정한 때로부터 꼭 250년이 지난 1962-64년 현대 중국과 현대 조선 사이에 국경조약이 맺어졌습니다. 조중변계조약(朝中邊界條約)이라 부르지요. 압록강-백두산-두만강을 따라 국경을 정했는데, 조선이 압록강 하류의 비단섬 또는 신도, 위화도, 황금평 또는 황초평 등 큰 섬들과 백두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 장군봉 및 천지의 55%를 차지했으며, 두만강에서 조금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조선이 적지 않은 이득을 본 것 같은데, 협상대표였던 저우언라이(周恩來) 당시 중국 총리는 너무 많이 양보했다고 대만에서 비판받고, 김일성 당시 조선 수상은 백두산을 빼앗기거나 팔아먹었다고 한국에서 비난받아온 거죠. 백두산, 장백산, 창바이산 등의 명칭과 아울러 이들을 둘러싼 조선과 중국의 국경에 관해 한 번 더 생각해보시겠어요?

 

이재봉 교수 약력

약력:
하와이대학교 정치학 박사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평화학 명예교수
남이랑북이랑 더불어 살기 위한 통일운동 대표

대표 저.편.역서: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
Korea: The Twisting Roads to Unification
『이재봉의 법정증언』
『문학과 예술 속의 반미』
『평화의 길, 통일의 꿈』
『통일대담: 역사.문학.예술 전문가에게 듣는 평화와 통일』
『한반도 중립화: 평화와 통일의 지름길』

수상:
2019년 한겨레통일문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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