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중환자실에 입원한 지 1주일이 지났다. 아버지는 여전히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깊은 잠에 빠진 듯 눈을 감은 채 호흡기에 의존해 옅은 숨만 내쉴 뿐이었다. 회진 중인 담당 의사가 곁에 와 아버지 상태를 확인했다.

“선생님, 좀 어떻습니까?”

“아직 자가호흡은 어렵지만, 맥박은 정상입니다.”

“의식은 있으신가요?”

“의식이 완전히 돌아온 건 아니지만 많이 좋아졌습니다.”

“중환자실에서는 언제까지 있어야 하나요?”

“자가호흡이 가능해지면 일반병실로 옮길 수 있을 겁니다.”

사무적인 답변이었지만 처음보다는 긍정적이었다. 1주일 새 중환자실에서 세상을 떠나는 환자들도 여럿 봤던지라 조금은 안도가 됐다.

“아버지, 정신이 좀 드세요? 저 영민이에요. 알아보시겠어요?”

면회 때마다 아버지 손을 잡고 반복해서 묻는 말이었다. 매번 미동조차 없었는데, 이날은 조금씩 손이 떨렸다. 아버지 손에서 힘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11년 전 어머니는 진통제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던 상태에서 점점 의식을 잃어가시더니 결국 세상을 떠났다. 그나마 아버지는 차츰 좋아지고 있다니 한시름 놓였다.

어머니 장례 때 아버지는 어머니 영정을 보면서 자주 눈물을 보였다.

“여보, 나 때문에 정말 고생 많았소. 당신 고생시킨 거 생각하면 내가 아무 할 말이 없네. 그래도 나를 좀 이해해 주구려. 당신한테는 아픔만 남겼지만, 내가 왜 그랬는지 조만간 이야기해 줄 날이 올 거요.”

어머니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궁금해했다. 젊은 날 수학자로서 명망과 성공을 양손에 쥐었던 남편이 무엇 때문에 어마어마한 지하조직에 참여했을까. 엄혹한 유신 시절, 학생운동에 동정적이라는 이유로 교수 재임용에서 탈락하자 그에 대한 분노로 저항의 길에 참여했다고 하기에는 그 대가가 너무 가혹했다. 목숨까지 버릴 각오를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걸 알면서도 어떻게 자신의 전부를 바칠 결심을 했을까.

두 번째 무기징역을 받은 구국전위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출소한 지 몇 년도 안 돼, 그것도 환갑의 나이에 다시 조직을 만들며 앞장선 이유는 도대체 뭘까. 왜, 무엇 때문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는 2011년 6월부터 <통일뉴스>에 “어떤 현대사”란 제목으로 연재를 시작했다. 해방되던 날부터 6․25전쟁 때까지 소년 시절의 이야기였다. 밀양에서 보낸 어린 시절을 다룬 책, 『할배, 조선소는 왜놈소랑 우는 것도 다른강?』의 후편 격이었다. 2년간 총 124회를 진행한 연재는 원고지 4,000매에 달하는 막대한 분량이었다.

『끝나지 않은 길』 1권 표지(내일을 여는 책 출간). [사진 제공 – 안영민]
『끝나지 않은 길』 1권 표지(내일을 여는 책 출간). [사진 제공 – 안영민]
2013년 11월에 열린 아버지 회고록 『끝나지 않은 길』  출판기념회 광경. 아버지의 해방 직후 소년 시절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은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에게 들려주는 못다한 이야기였다. [사진 제공 – 안영민]
2013년 11월에 열린 아버지 회고록 『끝나지 않은 길』  출판기념회 광경. 아버지의 해방 직후 소년 시절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은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에게 들려주는 못다한 이야기였다. [사진 제공 – 안영민]

아버지의 글은 2013년 11월 『끝나지 않은 길』이란 제목으로 두 권으로 출간됐다. 만 80세가 되던 해였다. 1권은 ‘가짜 해방’, 2권은 ‘찢어진 산하’라는 부제를 달았다. 『끝나지 않은 길』 출판기념회 자리에서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감옥을 두 번이나 가고, 15년을 감옥에서 살면서 아내가 수발하느라 고생이 참 많았습니다. 아내는 제가 왜 그런 길을 갔는지 깊숙한 속사정을 잘 몰랐을 겁니다. 이 글은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를 생각하며 쓰기 시작했습니다. 생사를 넘나들던 그때의 이야기를 아내에게 꼭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어머니가 잘 몰랐던 아버지의 소년 시절 이야기, 아버지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할아버지와 밀양의 아재들, 그리고 함께했던 소년 투사들……. 그 글을 읽었더라면 어머니는 아버지를 조금은 더 이해하지 않았을까. 아버지의 책은 뒤늦게나마 어머니에게 전하는 아버지의 마음이자, 살아생전에 하지 못했던 고백이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는 손자들도 볼 겸 우리 집 근처로 이사를 왔다. 같은 아파트 단지였다. 가까이 살면서 나는 아버지의 살아온 이야기를 어머니 대신 자주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내게 들려준 이야기를 토대로 <통일뉴스>에 연재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1933년 10월 24일 밀양에서 태어났다. 1933년은 일본제국주의가 조선반도는 물론이고, 대륙으로까지 세력을 넓혀 나가던 때였다. 일제는 만주를 삼키고 북부 중국으로 밀고 들어갔다. 1937년에는 중일전쟁이 터졌고, 1941년에는 태평양전쟁이 벌어졌다. 아버지의 어린 시절은 이처럼 조선 사람들이 왜놈들 등쌀에 시달리며 강도질 당하고, 전쟁터의 노예로 끌려가던 때였다.

2017년부터 아버지의 기억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할 때, 나는 자주 밀양 이야기를 꺼냈다. 아버지가 치매 증세로 이유 없이 화를 낼 때, 밀양은 화를 누그러뜨리는 특효약이었다. 최근의 기억은 사라져가도 옛 기억은 생생했던 것이다. 밀양 이야기만 나오면 아버지는 순수한 소년 시절로 되돌아갔다. 어느새 입가에 웃음이 솟았다. 목소리에도 흥이 묻어났다. 하지만 해방 직후 엄혹한 세월 속에 세상을 떠난 아재들과 동지들 이야기를 할 때면 금세 목이 잠겼다. 눈가도 촉촉이 젖어 들었다.

아버지에게 밀양과 그곳에서 격동의 시절을 함께 보낸 사람들에 대한 기억은 강렬했다. 병세가 점점 심해져 기억들이 하나둘씩 사라져도 밀양의 기억만큼은 여전히 또렷했다.

아버지의 고향은 밀양시 초동면 성만리다. 성만 동네의 백호등에 우리 집안의 선산이 있다. 아버지, 어머니 산소도 이곳에 있다. 하지만 아버지가 주로 자란 곳은 밀양 읍내에 있던 ‘밀양유림연계소’였다.

“연계소는 1880년대에 밀양 유림에서 지은 기와집이야. 당시 밀양 유림을 대표하던 고조부께서 유림계의 연합체(연계)를 조직하고, 이들의 힘을 모아 학문배양을 위한 집을 지었지.”

하지만 국권을 빼앗기고 고유문화가 말살되는 세상에서 유림 세력도 점차 퇴락해 갔다. 연계소도 마찬가지였다. 제대로 관리할 사람이 없다 보니 엉망이 됐다. 기와는 깨지고 지붕은 허물어져 있었다. 방마다 구들은 내려앉았고, 축담도 다 무너져 있었다. 그렇게 도깨비집처럼 방치된 걸 서울에서 하향한 아버지의 할아버지께서 싹 수리해 대가족을 데리고 살기 시작한 것이다. 아버지가 태어나기 여러 해 전의 일이었다.

아버지는 연계소에서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일제의 발악이 극에 달하면서 할아버지한테도 계속 탄압이 들어왔어. 왜놈들의 등쌀에 뭐 하나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아버지는 자주 밀양을 떠나 있었지. 이 때문에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 손에서 컸어.”

나의 할아버지 안의환 선생(1912-1999). 사진가이면서 바이올린 연주도 뛰어났지만 독립운동하던 아버지와 통일운동하던 아들의 옥바라지를 모두 해야만 했던 흔치 않은 삶을 사셨다. [사진 제공 – 안영민]
나의 할아버지 안의환 선생(1912-1999). 사진가이면서 바이올린 연주도 뛰어났지만 독립운동하던 아버지와 통일운동하던 아들의 옥바라지를 모두 해야만 했던 흔치 않은 삶을 사셨다. [사진 제공 – 안영민]

나의 할아버지는 일찍이 사진 기술을 배워 밀양에서 사진관을 운영했다. 키도 헌칠했고, 바이올린 연주 실력도 뛰어났다고 한다. 당시로는 보기 드문 예술가 풍모의 ‘젠틀맨’이었다.

할아버지는 일본 놈들에게 국권을 강탈당한 직후인 1912년에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나서 자란 시대는 일제의 잔인무도한 탄압이 일상인 때였다. 할아버지는 당신의 아버지와 성격이 잘 맞지 않았다. 감성적인 기질에 자유분방함도 있었던 할아버지는 이성적이고 대쪽 같은 성품의 증조할아버지와 자꾸 부딪혔다고 한다.

게다가 걸핏하면 형사들이 사진관으로 찾아와 증조할아버지의 동향을 캐묻곤 했다. 그들에게 시달리다 지칠 때면 사진기를 챙겨 들고 훌쩍 떠나버렸다. 그렇게 서울로 만주로 다니다 돌아오길 여러 차례 반복했다. 그런 할아버지를 대신해 증조할아버지가 아버지를 키운 것이다.

아버지의 할아버지인 우정 안병희 선생(1890-1953). 구한말에 태어나 국권 상실의 역사를 지켜보면서 평생을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했다.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조부의 슬하에서 자라면서 민족해방투쟁을 향한 굳은 절개와 지조를 배웠다. [사진 제공 – 안영민]
아버지의 할아버지인 우정 안병희 선생(1890-1953). 구한말에 태어나 국권 상실의 역사를 지켜보면서 평생을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했다.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조부의 슬하에서 자라면서 민족해방투쟁을 향한 굳은 절개와 지조를 배웠다. [사진 제공 – 안영민]

어려서부터 자신을 키워준 증조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예전에 증조할아버지는 어떤 분인지 물어봤을 때,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했다.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지조와 절개란 말이 먼저 떠올라. 돌아가실 때까지 지조와 절개를 지킨 분이지. 할아버지는 지조와 절개가 있어야 나라를 되찾겠다는 불굴의 신념도 생기고, 인민을 위해 헌신하는 자세도 나올 수 있다고 항상 강조하셨지.”

일제의 폭압과 고문 속에 수많은 사람이 변절했다. 해방 뒤에도 미군정의 탄압과 총칼 아래 또 수많은 사람이 전향했다. 지조와 절개를 지킨 사람들은 모두 체포와 구금, 고문에 내몰렸다. 끝끝내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지조와 절개를 지킨다는 건 곧 목숨을 거는 일임을 역사는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나는 말로 하는 애국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애국이 뭔지 할아버지를 통해 배웠어. 무엇이 참다운 운동가의 자세인지 할아버지의 삶을 통해 배운 셈이지. 아직도 해방되던 날의 모습을 잊을 수 없어. 산에서 내려와 청년들의 무등을 타고 밀양 거리로 들어오시던 할아버지의 활짝 웃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해. 열세 살 때의 그 기억이 팔십을 넘긴 오늘까지 나를 이끌어 온 힘이야.”

할아버지한테서 배운 지조와 절개는 아버지가 사형선고를 이겨낸 힘이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무기징역을 감내할 수 있었던 원천이었다. 어머니가 죽기 전까지 궁금해했던 물음의 답도 이 속에 있지 않을까.

이제부터 아버지한테서 전해 들은 이야기를 정리해 보려고 한다. 아버지의 할아버지, 우정(于正) 안병희 선생, 바로 나의 증조할아버지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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