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갑진년에도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거꾸로 돌아가는 듯하던 세상이
다시 뒤집어지는 반전이 계묘년 끄트머리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갑진년 봄에 결실을 맺는 위대한 반전이 되게 하기 위해
우리의 주인공 신돌석씨는 올해도 열심히 살아갈 것입니다.
새아침이 오는 것을 거부하며 거부권을 남발하는 이들을
거부하는 이들의 힘찬 아우성과 몸부림으로
우리 현대사에 매우 중요한 갑진년 한 해는
그야말로 값진년이 되리라 믿습니다.
갑진년에는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 모두 건강하시고 댁내 평안하시고
무엇보다 우리 공동체 모두가 이 어려움에서 벗어나 건강하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2024. 1.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현충원 역사 산책을 하기로 한 3월 2일이 되자 날씨가 무척 추워졌다. 서울 기온이 영하 7도까지 내려갔다. 꽃샘추위라고 하였다. 옷을 겹겹이 입고 나섰는데 막상 밖에 나와서 걸어보니 다행스럽게도 그렇게 춥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4호선 동작역에서 4번 출구로 나가면 현충원이라고 해서 나갔더니 측문 앞으로 나왔다. 집결하기로 한 장소는 정문 안쪽에 있었다. 상당히 오래 걸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정문 앞에도 지하철 입구가 있었다. 오래 전에 올 때는 지하철역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다는 생각을 했는데 정문 바로 앞에 역이 있었다. 새로 지하철 노선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오전 9시 50분까지 가기로 했는데 10시가 다 되어서 도착하였다. 정문에서 왼쪽 길로 들어서니 만남의 집이 있었다. 대략 보아도 30명은 되어 보였다. 1층에 최미숙과 지역 노동자들이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은 부부와 애들 둘이 왔다. 중학생과 초등학생 아들이었다.

날씨가 춥기도 하려니와 연휴인데 이렇게 모인 것은 뜻밖이었다. 아마도 해설자의 유명세와 이 강좌의 유익함 때문에 그런 듯하였다. 회비는 만 원이었는데, 미성년자를 동반한 사람들은 무료였다. 재미있는 발상이었다. 자라나는 세대가 이런 강좌에 가까이 하게 하려는 뜻이었을 텐데, 그래서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추운 날씨에도 초등학생이 여럿 보였다. 심지어 부모를 잘 안 따라올 나이인 중학생도 있었다.

시간이 되고 사람들이 어느 정도 모이자 만남의 집 빈 공간에 모여서 간단한 시작 행사를 하였다. 주최 단체 주관자가 행사에 대해 설명을 하고, 대표가 간단한 인사말을 하였다. 대표의 말 중에 인상적인 것은 ‘100년도 더 된 일을 가지고 무릎 꿇고 사죄하라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고 한 자가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면서 100년 전 같았으면 비분강개한 의병들이 전국 곳곳에서 기병하는 일이 속출할 망언이라고 하였다.

이어서 해설자가 소개되었다. 해설자가 오늘 역사 산책의 얼개를 말하였다. 처음 현충원 탐방을 할 때는 전체를 둘러보는 것으로 했는데 그러다 보니 시간이 너무 걸려서 주제별 탐방을 하는 것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주제별로 길을 만들었는데, 독립운동가 길, 친일파 길, 여성 길, 4.3길, 5월 길, 대통령 길, 평화 통일 길 등이었다. 물론 이 길은 해설자가 주제에 따라 나누어 본 것이지 현충원에 공식적으로 있는 길은 아니었다.

어제가 3.1절이어서 독립운동가 길을 주로 하려고 했는데 주최 측에서 여기 묻힌 친일파를 꼭 소개해야 한다고 해서 둘을 연결시켜서 하겠다고 하였다. 그렇게 하려니 시간이 좀 많이 들 것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자기가 아는 분도 많이 오셨다고 하면서 돌석이형은 멀리서 오시느라 수고하셨다고 하고는 여기에 평민의병장 신돌석의 무덤이 있는 것을 아느냐고 사람들에게 물었다. 사람들은 그렇게 옛날 사람까지 있냐고 하면서 신기하다는 표정들을 지었다.

해설자의 말로는 평민의병장 신돌석과 13도 창의 총대장을 맡았던 의병장 이인영이 여기 안장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외세와 싸운 것으로 치면 동학농민군의 전봉준 장군 등도 해당되는데 왜 없을까 하는 점을 생각해 보자고 하였다. 신돌석은 평민의병장이지만 이인영 등은 유생으로 대한제국을 위해 싸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복벽이었다. 하지만 전봉준 등은 대한제국에 맞서 싸웠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결국 계급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정으로 출범해도 여전히 지배층에는 봉건적 의식이 남아 있고, 체제에 대항하는 것은 그것이 봉건제이든 자본주의이든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식이 발현된 것이 아닐까? 그런 인식 속에서 제대로 된 반외세 독립운동을 찾을 수 있을지 의아할 따름이다. 21세기가 된 오늘날까지도 그런 의식을 버리지 못하는 자들이 여전히 권력을 틀어쥐었을 뿐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해설자는 자세한 내용은 돌아보면서 하겠다고 하면서 말을 마쳤다. 해설자의 간단한 설명이 끝난 뒤 참석자들이 모두 현수막을 들고 촬영을 하였다. 요즘은 인증샷이라고 해서 무엇을 할 때마다 사진 찍는 것이 관례화되어 있다. 비합법조직 형태로 노동운동을 시작한 신돌석씨는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요즘은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다. 아니 오히려 찍지 않으면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실시간으로 여기저기 올리는 재미도 있었다.

해설자와 신돌석씨는 아주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런대로 아는 사이였다. 가장 최근에는 작년 가을쯤에 노량진 수산시장 상인들 후원의 밤을 할 때였다. 신돌석씨는 전국민주노점상연합의 상근자가 부탁을 해서 갔었다. 노량진 구 수산시장 자리에서 열렸다. 그때 해설자를 만났다. 생각해 보니 노량진 수산시장도 동작구라서 해설자가 활동하는 지역이었다. 그때 신돌석씨와 술잔을 기울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있다.

신돌석이라는 이름이 불리자 그 동안 이름 때문에 겪었던 여러 일들이 한꺼번에 머리에 떠올랐다. 신돌석씨는 자기 이름이 왜 돌석으로 지어졌는지 알지 못한다. 아버지가 지었다고 하는데 그 까닭을 듣지 못한 상태에서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어린 시절에는 정말 자기 이름이 싫었다. 얼마나 놀림을 받았는지 모른다. 왜 이런 이름을 지어서 놀림감이 되게 하는지 아버지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때 국사 선생님이 신돌석이라는 평민의병장에 대해 설명해 주면서 이름에 대한 일말의 자부심이 생겼다. 물론 그때도 교과서에서 배운 것은 아니었다. 선생님이 신돌석씨 이름을 부르면서 설명을 해주었던 것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반 친구들이 너도 나도 의병장이라고 추어주기도 했다. 고모에게 처음 이름에 대해 물었었다. 혹시라도 아버지가 평민의병장처럼 되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지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조금은 있었다.

그런데 고모로부터 들은 말은 한마디로 웃기지 마라는 것이었다. 네 아버지가 무슨 그런 생각이 있었겠냐고 하면서 그저 쉬운 글자 찾다 보니 그랬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신돌석씨 집안에서 그래도 유일하게 공부를 한 작은아버지가 자기도 자세한 내막을 모르지만 아버지가그런 생각을 충분히 할 수 있는 분이라고 말하였다. 작은아버지는 고학을 해서 야간 대학이나마 나온 사람인데 아버지를 못 배웠지만 그 나름대로 자기 주관이 있는 사람으로 평가했었다.

신돌석씨 이름을 처음 들으면 사람들은 뭐 그런 이름이 있냐는 식으로 되묻곤 했다. 1985년 10월 26일. 잡혀 가는 조철구를 구해 주려고 하다가 함께 끌려가던 날, 신돌석씨는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맞았던 매를 모두 합한 것보다 더 많은 매를 맞았다. 경찰 버스에 실려서 계속 짓밟히고, 보호실에 들어가서 또 전경들에게 뭇매를 맞고, 경찰서 강당으로 끌려가서 또 맞았다. 맞을 때마다 몸부림을 치고 전경을 맞받아치기도 하다 보니 더욱 맞았다.

그러다가 이곳저곳으로 분산돼서 조사를 받았다. 신돌석씨가 간 곳은 조사계였다. 조사계 어느 형사에게 배당되자 그는 다짜고짜 무릎을 꿇고 앉으라고 했다. 신돌석씨는 못하겠다고 했다. 맞으면 맞을수록 성질이 솟아나는 것이 신돌석씨의 성격이었다. 지금까지 맞았는데 무릎을 꿇다니 말이나 되냐는 생각으로 거절했다. 이 새끼가 환장했나? 멧돼지같이 생긴 형사가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고 했다. 열이 받아서 신돌석씨는 그의 멱살을 잡았다.

조사받을 때 꿇어앉으라는 법이 어느 법 몇 조에 있어? 그러자 형사는 신돌석씨의 그런 행동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는지 조금은 당황하면서 씩씩거리기만 했다. 그때 들어서던 주임이라는 자가 멧돼지에게 그만하라고 했다. 그는 씩씩거리다가 그냥 의자에 앉으라고 턱짓을 했다.이름? 신돌석. 신돌석? 야 무슨 이름이 그러냐? 가명 아냐? 본명입니다. 그러면 돌돌이란 말이냐? 멧돼지는 어이없다는 듯이 타자를 치다가 멈추면서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물었다.

그때 서무를 보는 듯하는 전경이 한마디 했다. 신돌석이라고 유명한 의병장이 있잖아요? 그 사람 이름 따서 지은 모양인데요. 신돌석 의병장.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았다. 조철구도 신돌석씨를 처음 만났을 때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학교 다닐 때도 신돌석씨의 이름을 갖고 의병장과 연결시키는 사람이 가끔 있기는 했다. 하지만 공부도 못하고 집안도 지지리 못 사는 신돌석씨를 그런 유명한 인물과 견주는 일 자체를 사람들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그러다가 노동운동을 하면서 신돌석씨는 이름 덕을 톡톡히 봤다. 만나는 사람마다 의병장 신돌석씨와 같다고 말하곤 했었다. 그래서 의병장 신돌석씨의 이야기가 실린 글들을 찾아 읽어 보기도 했다. 그가 부하의 배신으로 잡혀서 죽게 된다는 것이 왠지 마음이 아팠고, 나중에 조직 사건에 걸렸을 때 가까웠던 사람 때문에 잡힌 일을 생각하면서 나중에 괜히 비슷한 운명이라는 감상적인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멧돼지는 좀 엉뚱한 반응을 보였다.

신돌석이 의병장 이름이야? 그러면 이 새끼 혹시 빨갱이 집안 아니야? 빨갱이 새끼들이 보면 의병장이니 독립군이니 하면서 사실은 빨갱이짓 하더라구. 기가 막혔다. 신돌석씨는 한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욕하는 건 참지만 조상 욕하는 건 참기 어려우니까 그만 합시다. 뭐야, 이 새끼야? 멧돼지는 얼굴이 벌개지면서 소리쳤지만, 아까 당한 일이 있어서 그런지 그만하고는 이어서 취조를 했다.

이때의 경험도 그렇지만 신돌석씨는 이후로도 이 사회에서 힘깨나 쓰는 자들, 그들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는 관리들은 거의 친일의식에 쩔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 사회 곳곳에서 힘을 갖고 있는 자들이 바로 친일의식에 젖은 자들이고, 그들은 끊임없이 친일의식을 확산시키려 하고, 그에 저항하는 이들에게 사정없이 폭력을 행사해서 이 사회로부터 고립시키려고 한다.

해설자가 택한 처음 코스는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이었다. 만남의 집에서 평지로 얼마 걷지 않는 곳에 있는 현충문 왼편에 있었다. 원래는 무명용사탑이었다고 한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예를 갖추는 현충탑의 역할을 하던 곳인데, 현충탑이 완공되면서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그리고 포항지구에서 전사한 학도의용군 48명을 안치시키면서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이 되었다고 해설자는 말하였다.

6.25전쟁 때 참전한 17세 이하 소년 소녀가 무려 29,603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 중에서 전사자가 2,573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들이 자발적으로 전선에 나선 것만은 아니었고, 강제로 동원된 경우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북도 비슷한 규모를 동원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전쟁은 남북의 어린 청소년들을 희생시키는 일을 자행한 것이었다. 이들의 용감함 등을 말하기에 앞서 평화의 중요성, 전쟁을 막아야 하는 점 등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닐까?

당시 포항지구에서 전사한 이가 어머니에게 쓴 편지를 써놓고 미처 부치지 못한 상태에서 전사한 뒤 발견된 편지가 있다고 한다. 해설자가 그 내용을 이야기하는데 정말 눈물이 나올 내용이었다. 어린 자기가 사람을 죽였다는 것, 비록 적이지만 그들의 죽은 모습을 볼 때 마음이 아프다는 것, 전쟁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 전쟁이 빨리 끝나고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다는 것, 어쩌면 오늘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절절하게 씌어 있었다고 한다.

해설자는 이 시를 이 탑 옆에 조형물로 만들어서 사람들이 평화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강조하였다. 이 탑을 보면서 재미있는 것은 입구 양쪽에 세워진 해치 모양의 조형물이었다. 그런데 경복궁에 있는 해치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대전에 있던 신사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일본 신사 부근에 배치한 코마이누라고 하는 수호견이라는 것이다. 그걸 갖다 놓고 우리의 무명용사탑을 지킨다고 하니 정말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대전시의회에서 사라진 해치를 되찾겠다고 하다 현충원에 있다는 것을 알고 반환 요청을 했다고 한다. 현충원에서는 거절했는데, 준다 못 준다 밀당을 했단다. 이후 일본 신사에 있던 것이라는 점을 알았는지 대전시에서 다시 요구하지는 않았다는데, 이것이 일본 신사를 지키던 것을 서로 가지겠다고 하는 것을 보면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해설자는 이건 악의를 갖고 그런 것은 아니고 무지도 결국 매국의 한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어서 부부 위패를 모셔 놓은 탑, 지하 실내에 위치한 위패 봉안소를 거쳐서 1970년대에 베트남 전쟁에서 전사한 이들의 묘역으로 갔다. 해설자는 베트남 전쟁을 통해서 우리가 여러 가지를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전쟁과 평화, 민간인 학살 등이 우리 사회에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생각하게 해준다는 것이었다. 주로 1960년대에 전사한 분들의 묘역은 따로 있다고 한다. 해설자가 먼저 1970년대에 전사한 사람들의 묘역을 찾은 까닭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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