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우 / 사진가

 

목   차

(1) 유엔헌장 위반여부
1) 요시다 정부의 유엔협조론
2) 요코타 기사부로의 경찰행위론
3) 요코타와 일본정부주장 비판
4) 일본정부조치의 유엔헌장 위반여부

(2) 국제전쟁법 위반여부
1) 불법전투원
2) 용병

(3) 평화헌법 위반여부

 

(1) 유엔헌장 위반여부

1) 요시다 정부의 유엔협조론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일본은 신문마다 대서특필했지만 미군 점령 하에 있었고, 장기간 전쟁피로 상태에 있었던 일본국민들은 이 전쟁에 무관심한 편이었다. 또한 한국사태가 내전이라면 주권이 없는 일본으로서는 방관할 수밖에 없었고, 전쟁이라도 전범국 일본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유엔이 움직이고 일본의 점령정책을 주도하던 미군이 “유엔사”의 이름으로 참전하게 되면서 일본으로서는 “유엔사”의 행동에 어떠한 방식으로 협력할 것인가라는 대응에 직면하게 되었다.(주1) 즉 유엔이라는 대의명분과 “유엔사”라는 실체가 아니었다면 일본의 한국전 개입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50년 7월 14일, 중의원 시정방침연설에서 요시다 총리는 유엔활동에 참가할 입장은 아니나 가능한 범위에서 이에 협력한다는 입장을 처음으로 표명했다. 다음날 유엔에 대한 협력은 어떤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서 유엔의 목적이 달성될 수 있도록 정신적으로 협력하거나 가능한 범위에서 협력하는 것이라고 답변했다.(주2)

일본정부가 ‘정신적으로 협력’한다는 애매한 태도에서 벗어나 공식적으로 “유엔사”에 대한 협력을 표명한 것은 전쟁이 발발한지 2개월이 지나서였다. 8월 19일, 외무성은 「한국동란과 일본의 입장」을 발표하고 미국주도의 “유엔사”에 대한 협력 필요성을 강조하고, 일본의 자세를 명확히 했다. 이 8월 19일이라는 시기는 “유엔사”가 부산교두보까지 밀렸던 시기이다.

「한국동란과 일본의 입장」에서, 한국전쟁은 공산세력에 의한 침략이며, 공산주의 세계와 자유세계의 사상전으로 받아들이고 미국과 유엔이 세계평화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대응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일본이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하여, 공산주의 세계에 굴복할 것인가, 유엔에 협력할 것인가’ 둘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하며 “유엔사”에 가능한 협력을 하지 않고서 어떻게 일본의 안전을 지킬 수 있겠는가라고 기술하고 있다.(주3) 주목할 것은 한국을 지원한다는 것보다 한국을 위하여 싸우고 있는 미국주도의 “유엔사”에 협력한다는 것이었다.(주4)

2) 요코타 기사부로의 경찰행위론

“유엔사”문제에 대해 일본정부방침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제공한 것은 1950년 당시 일본의 보수적 국제법학계를 대표하는 학자, 요코타 기사부로(橫田喜三郞)였다.(주5)

일본이 평화헌법에 의해 군비철폐를 당한 상황에서 주권을 회복할 때까지 안전을 어떻게 보장 받을 것인가 그 방법을 찾는 것이 당시 일본국제법학계의 첨예한 과제였다. 이에 요코타는 1950년 2월 간행한 일본의 강화문제(日本の講和問題)(주6)에서 유엔헌장에 있어서의 “국제평화와 안전을 유지한다”(헌장 제1조1항)는 규정에 대해 “어디까지나 일반적으로 국제평화와 안전을 유지한다고 하는 것”이라며 ‘국제’의 용어를 넓게 해석한다.

요코타는 이런 관점에서 일본이 비회원국(주7)의 지위에 있다고 하더라도 “공격을 받거나 그 위험에 접하는 경우에는 국제연합의 집단보장을 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엔으로부터 희망을 찾은 것이다. 요코타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비회원국임에도 불구하고 유엔에의 협력을 통한 재무장의 가능성도 언급한다. 유엔의 군사조치는 전쟁이 아닌 경찰행위이기에 평화헌법을 위반하지 않고도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제연합결의에 의거해 많은 연합국으로부터 군대를 파견하여 미국의 통합지휘하에 남측을 원조하기로 되었지만 이 군대의 행동은 보통 전쟁이 아니라 국제경찰행위로 봐야할 것이다...이 행위는 침략전쟁을 제지하는 경우에는 당연히 강력한 군사행동이 되어야 한다. 침략전쟁이나 무력행사를 제지하기 위해서는 이쪽에서도 무력을 행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형태상 무력행동에 대해서는 무력행동이 행해져 전쟁과 같이 보이긴 한다. 그러나 국내에서 개인의 완력을 제지하는 경찰관의 행위가 폭력이 아니라 불법이 아닌 정당한 공무집행의 행위이며 경찰행위인 것과 마찬가지로 국제사회에서 침략전쟁이나 무력행사를 제지하기 위해 국제사회의 공동의사에 근거하여 국제사회의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게 위해 이루어지는 군사행동은 사적인 전쟁이 아닌 공적인 국제경찰행위로서의 성질을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적법하고 금지되지 않는다. 금지될 리가 없다...유엔의 군사행동에 협력하는 것은 전쟁에 협력하는 것이 아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지금까지의 보통의 전쟁에 협력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일본이 국제연합의 군사행동에 협력하는 것은 헌법에서의 전쟁포기에 반하는 것이 아니다.(주8)

이는 한마디로 유엔군사조치의 경찰행위론이다. 경찰행위이기에 전쟁이 아니고, 일본이 유엔의 경찰행위에 협력하는 것은 참전이 아니므로 헌법위반이 아니라는 논리이다. 요코타의 논리는 요시다 시게루 총리가 한국전쟁 발발로 개회된 제8회 국회연설(1950.7.14.)에서 다음과 같이 현실화되기 시작한다.

만일 대전쟁이 발발하는 경우 우리나라의 군비철폐로 우리 안전보장은 어떻게 보장받아야 하는가 하는 것은 국민이 근심하는 바이다. 국제연합의 이번의 조치는 우리의 마음의 안정에 답하는 일이다. 우리나라로서는 현재 적극적으로 여기에 참여하는 국제연합의 행동에 참가한다는 입장은 아니지만 될 수 있는 범위에서 국제연합에 협력하는 일은 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주9)

요시다는 일본인을 참전시키는 문제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반대의 입장을 취하였으나, 유엔의 조치는 공개적으로 지지했다.(주10)

그러나 일본과 미국에서의 일부 여론은 “유엔사”에의 협력은 곧 참전이라는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1950년 7월 2일 관방장관 오카자키(岡崎勝男) 등이 일본인의 전투참여는 당연하다고 주장하였다.(주11) 일본인 참전주장은 일본 정계뿐만 아니라 미 의회에서도 제기되었다. 1주일 후인 1950년 7월 10일 인디아나주 출신 공화당 상원의원 호머(Homer Capehart)는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에게 한국전쟁에 일본인을 자원병의 형태로 투입할 것을 요구하는 요청서를 보냈다. 유엔이 일본인을 편성하여 “유엔사”의 지휘 하에 참전시키도록 하자는 주장이었다.(주12)

민주당의 아시다(芦田均)는 참전하는 것은 일본이 국제경찰행위에 참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말했다. 아시다는 “현재 요시다 정권은 조선전쟁이 주는 기회를 십분 이용함으로써 유엔활동에 적극 협조하는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주13)

그러나 대부분의 일본여론은 “한일의 역사적인 관계에 비추어 그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한 사토 의장의 발언처럼 참전 반대의견을 지지하였다.(주14) 미국의 여론도 주류는 반대 입장이었다. <뉴욕타임즈>는 1950년 8월 12일자 사설에서 6․25전쟁에 일본인이 참전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였다.(주15)

이렇듯 일본인의 참전에 관한 의견들이 분분해지자, “유엔사령관” 맥아더(Douglas A. MacArthur)는 그에 대한 최종적인 입장을 발표하였다. 그는 일본과의 평화조약이 체결되기 전에는 일본인이 “유엔사”에 참여하는 것은 ‘법적으로 불가능하다’고 공개적으로 발표했다.(주16)

그러나 요시다 정부의 신중함과 맥아더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일본은 비공개적으로, 비밀리에 불법참전의 길로 미끄러져 들어가 있었다.

8월 29일 요시다 총리는 맥아더에게 서한을 보내 ‘귀관이 필요로 하는 어떠한 시설 및 노력도 제공할 용의가 있다’는 것과, 가능한 협력을 한다는 내용을 설명하면서 ‘더 많은 것을 해주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하며 양해를 구하고 있다.(주17)

그러나 일본의 “유엔사”에 대한 협력은 시설과 노력에 의한 협력에 그치지 않았다. “유엔사”가 부산교두보로 밀리면서 한국내의 비행장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전투기와 전폭기 출격은 큐슈 등의 비행장을 사용할 수밖에 없어, 일본의 비행장은 더욱 중요해졌다. 또한 극동공군을 보완하기 위하여 제7함대 항모 함재기가 사용되었는데, 그 기지인 사세보는 미해군의 작전기지뿐만 아니라 수송기지의 역할도 했다. 구일본해군의 군항으로서 발전했던 사세보는 태평양전쟁 이후에는 무역항으로 그 첫걸음을 디딘 상태였다. 그러나 한국전쟁발발로 인해서 중요지역 대부분을 미군이 접수하였다.(주18)

소해부대 파견이나 영덕, 흥남 등 전장지역으로의 선박‧선원파견은 정부가 표명한 「노력제공」범위를 초과한 것이나 정부는 “유엔사”에 대한 협력을 정부방침으로 추진하였고, 일본은 “유엔사”의 가장 큰 군수기지가 되었다.

이 무렵이 되면 일본인들은 요시다 정부의 “유엔사”지원 방침을 상당하게 지지하고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이 실시되었던 1950년 9월말 아사히신문 여론조사에 의하면, 유엔에 협력해야한다 56.8%, 협력해선 안 된다 9.2%로, 협력찬성이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요코타설을 지지한 오사토 마사오(大鄕正夫)는 1972년 논문에서 “가장 잘 국가실행을 통일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학설이 가장 옳다고 생각한다”고 하여 국가실행에 국제학설을 꿰맞춘다는 국수주의적 국제법학관을 대변하였다.(주19)

요코타는 한스 켈젠의 법실증주의를 신봉하는 대표적 학자였다. 그러나 그의 한국전쟁에 대한 입장은 켈젠의 입장과는 정면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가 켈젠의 입장과 정반대의 길을 가게된 것은 일본국의 입장을 수호하는 국수주의학자의 면모를 그대로 보여준다.

3) 요코타와 일본정부주장 비판

이제 요코타와 일본정부의 비회원국 권리의무설과 경찰행위설을 검토해보자.

첫째, 비회원국 권리의무설을 살펴보자.

유엔헌장은 회원국 간의 국제법적 권리와 의무를 발생시키는 조약이다. 그러나 조약일반처럼 비회원국에 대해서는 권리와 의무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헌장 제2조는 제1조에 명시한 국제평화와 안전유지를 추구함에 있어 회원국의 행동원칙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비회원국의 의무를 명시하고 있지 않다.

또한 안보리의 결정을 이행하거나 안보리가 정하는 바에 따른 이행조치, 상호원조 제공의 주체는 회원국이다.(헌장25조,48조,49조)(주20) 당시는 일미동맹 등의 지역기구를 형성하기도 전이지만 설령 지역약정이나 지역기관이 결성되어 강제조치를 취하고자 할 때도 안보리의 허가 없이는 불가하다.(헌장53조)(주21) 일본의 참전에 대해 안보리는 허가한 바가 없다. 따라서 이들 헌장조항에 의해서 요코타와 일본정부의 주장은 불성립한다.

다음으로 헌장29조에 의해 설치된 안보리의 보조기관에는 남녀 개인이 참여할 수 있다.(헌장8조)(주22) “유엔사”에 개인자격으로 참여하면 아무문제가 없다는 일본 법률가들의 주장은 여기에 근거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 최고법원장이던 타나카(田中耕太郞)는 1950년 7월 23일자 신문에 만약 유엔의 요구가 있으면 일본인이 개인자격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주23) 일본 참의원의장인 사토(佐藤尙武) 역시 일본이 평화조약을 체결하여 주권을 회복하기 전에도 일본인들이 개인자격으로 유엔군에 입대하는 것은 헌법상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주24) “유엔사”를 유엔의 보조기관으로 보면 일본국민이 개인자격으로 참가할 수 있다. 그러나 “유엔사”는 1994년 유엔법률국이 명백히 밝혔듯 유엔의 보조기관이 아니다.(주25) 따라서 이들 조항에 의해서도 요코타와 일본정부의 주장은 불성립한다.

헌장103조(주26)에 의하면 유엔헌장의 우선성을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미‧일간의 국제점령법보다 유엔헌장 상의 의무가 우선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켈젠에 의하면 두 가지 규범 또는 두 가지 의무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경우 하나의 경우에만 ‘우선적’이면 다른 하나는 유효한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즉, ‘우선’하지 않는 규범이나 의무는 ‘우선’인 의무를 규정하는 조약에 의해 ‘폐기’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제103조는 회원국 간 체결된 불일치 조약과 관련해서는 불필요한 조항이며, 회원국과 비회원국 간에 체결된 불일치 조약에 대해서는 매우 큰 문제가 된다. 현행 일반 국제법 하에서 조약은 동일 당사자가 아닌 다른 조약을 무효화할 수 있는 법적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2조 6항(주27)에 따라 헌장이 새로운 일반 국제법을 구성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경우, 즉 UN법이 모든 국가에 대해 유효하고 적용가능한 초국가법으로 인정되는 경우에만 회원국과 비회원국 사이의 조약에 관한 제103조의 규정은 현행법과 저촉되지 않는다.(주28) 그러나 유엔헌장은 국가간의 법이지 국가위의 법은 아니다.

따라서 헌장103조에 의해서도 요코타와 일본정부의 주장은 불성립한다.

둘째, 경찰행위설을 살펴보자

일본정부는 1952년의 국회질의응답에서 참전행위가 유엔에 대한 협력활동에 해당하나 전투에 참가한 것은 아니라고 답변하였다.(주29) 요코타의 경찰행위설에 기대고 있는 것이다. 요코타의 경찰행위설은 트루먼으로부터 유래한다. 1950년 6월 27일 안보리 결의는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권고’했다. 트루먼은 1950년 6월 29일 언론기자들과의 회견에서 미국이 전쟁 중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전쟁 중이 아니라고 답변하였다. 그리고 미국의 군사적 조치는 유엔에 의한 경찰조치라고 부르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는데 동의하였다.

유엔헌장의 채택과 관련하여 1943년 미 연방의회에서 이루어진 논의과정 중 상원의원인 페퍼(Claude Pepper)는 연방의회의 전쟁선언권을 국제기구에 위임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다만 소규모전쟁(small wars)에 있어 침략에 대응하기 위한 경찰력(police force)으로써 의회의 사전동의없이 미군이 사용될 수는 있을 것이라는 의견을 표명하였다. 미국역사에서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군사적 조치들은 해적과의 전투, 미개척의 해안에 소규모의 해군을 상륙시킨 행위, 멕시코 국경지대의 강도들이나 소떼 도둑을 쫒기 위한 군대동원 등이었다. 이때 사용된 느슨한 경찰조치(police action)라는 개념을 후에 트루먼이 의회의 동의없이 미군을 한국에 파병하는 법적 근거로 이용하였다. 트루먼은 페퍼의원이 발언하던 당시에 같은 상원의원이었다.(주30)

유엔의 행동이 국제사회를 대표한 경찰행위라면 침략자에 적용될 법은 낡은 전쟁법규가 아닌 새로운 유엔경찰법규가 아니면 안된다. 이같은 경찰법의 제정이 경찰행위에 선행해야 할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범죄자에 대하여 「불법으로부터 법이 발생하지 않는다」(ex enjuria non oritur jus)라는 원칙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주31) 그러나 유엔도 미국도 경찰행위에 해당하는 법 개념을 제정한 바가 없다. 비유는 법이 아니다.

그럼 요코타가 경찰행위라고 비유한 유엔의 군사조치에 대해 살펴보자.

안보리는 39조와 42조의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회원국들에게 무력사용의 ‘권한을 부여할(authorize)수’ 있다. 42조에 의거한 안보리결정은 2조 4항에 의해 금지된 무력사용을 법적으로 정당화하는 결정이다. 그러나 단지 39조에 의거한 단순한 권고는 이 같은 효력을 가질 수 없다.(주32) 39조는 ‘권고’(주33)와 41조와 42조에 따라 취해지는 ‘조치’를 구별하고 있다. ‘권고하기’와 ‘강제조치 결정하기’는 39조 내에서 안보리의 서로 다른 두 기능이다. 39조하의 강제조치는 안보리에 의해 결정, 지시될 수는 있으나 권고될 수는 없다. 만약 안보리가 39조하의 권고하기를 원한다면 강제조치에 대한 권고는 할 수 없으며, 오직 평화적 수단만을 권고할 수 있다.(주34) ‘권고’는 오직 유엔헌장 6장에 나열된 평화적 해결에 대해서만 사용하도록 헌장제정 당시부터 명확히 정의되었다.

스톤(J. Stone) 역시 헌장 39조 규정에서 “권고한다”는 것은 평화적 수단의 권고만을 의미하며 강제조치에 대한 권고는 포함하지 않으므로, 6월 27일의 결의에서 안보리가 가맹국에 군사원조 등을 권고한 것은 헌장에 입각한 결의가 아니라고 한다.(주35)

따라서 이들 결의에 따른 참전국의 조치는 유엔의 조치가 아닌 각국의 조치일 뿐이다.(주36) 통합사령부든 “유엔사령부”든 간에 그것은 헌장 29조에 계획된 방법대로 창설되지 않았으므로 유엔의 기관이 아니다.(주37)

이리하여 미국은 작전수행상 다수의 국제약정을 체결할 필요가 있었다. 예컨대 미국-스웨덴 간 「재한 유엔작전에 있어서의 스웨덴적십자야전병원의 참가에 관한 협정」 또는 「남아연방군의 재한유엔작전참가에 관한 미정부와 남아연방정부간의 협정」(주38) 등은 미국이 「주한유엔사의 집행기관」의 자격으로 체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과는 이러한 약정조차 체결하지 않았다. 유엔사업무편람에는 “유엔사”가 ‘유엔의 대행기관인 미국 국가통수기구로부터 전략지침 및 지시를 수행한다’(주39)고 되어있다. 그러나 미국이 유엔의 「집행기관」으로 지명된 일은 없었다. 그 결과 그것을 “유엔군”이라 칭할 수 없으며, 「유엔의 조치」라는 표현은 정치적 용어일 수는 있으나 법적의의에 있어서는 과오를 범하게 된다.(주40) 유엔사무국 역시 유엔의 조치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주한 통합사령부는 유엔의 지휘와 통제하에 있는 강제조치라기보다는 개별국가에 의해 허가된 무력사용이라는 점에서 걸프전에서 설립된 연합군과 유사하다.(주41)

이로서 요코타와 일본정부의 “유엔사”협력론의 근거는 모두 의심된다. 요시다시게루 총리는 현실적인 이유로 참전에 반대했지만 유엔의 조치 자체에 대해서는 지지했다. 요코타와 같은 입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일본이 유엔에 가입한 것은 1956년이므로 한국전쟁기간동안 유엔회원국으로서의 어떤 권리나 의무도 존재하지 않았다.(주42) 또한 유엔의 군사조치는 존재하지 않았고 유엔참전국들의 조치는 유엔의 조치가 아닌 각국의 조치였다. 1951년 요시다애치슨교환공문과 1954년 일본유엔사행정협정의 최대전제인 한국에서의 ‘유엔조치’는 부존재 한다. 따라서 요시다 시게루의 참전결정이후 현재까지 일본정부가 추구해온 유엔조치의 경찰행위설은 의심된다.

4) 일본정부조치의 유엔헌장 위반여부

다음으로 요시다 정부의 행정적 책임을 살펴보자. 소해대에 내린 명령서는 요시다의 유엔헌장위반이 의심되는 증거이다. 요시다는 1950년 10월 9일, 특별소해대 제2전대의 함선에 전보 한 통을 최종적으로 보냈다.

“일본 정부는 우리나라의 평화와 독립을 위해 한국해역에서 유엔군의 소해작전에 협력할 것이다.”(주43)

또한 1차 원산소해작전에서의 사고 후 10월 31일 해상안전청 오오쿠보 청장은 특별소해대 타무라 사무총장을 대동하고 오카자키 관방장관을 방문하여, 한반도해역에서 특별소해대 활동에 대한 정부의 의향을 확인하고자 했다. 이에 대하여 전쟁초부터 참전찬성론자였던 오카자키 장관은 요시다 총리의 말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일본정부로서는 유엔군에 전면적으로 협력하고, 이에 따라 강화조약을 일본에 유리하게 이끌어 갈 생각이다. 추운 겨울 한반도해역에서 노후화된 작은 배로 소해작업에 대단히 노고가 많을 것으로 생각되나 최선을 다하여 미해군의 요망에 부응하길 바란다. 일본정부로서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 심려하지 말라”(주44)

유엔회원국이라도 안보리의 허가없는 강제조치는 헌장위반인데 비회원국이 유엔의 강제군사조치에 참여하거나 원조를 제공하는 것은 유엔헌장위반이다. 또한 유엔의 명칭을 도용하고, 유엔깃발을 불법사용 했으며 자국의 조치를 유엔의 조치로 기만한 미국의 유엔헌장위반에 그대로 편승한 것이다. 미국의 헌장위반을 추수만 했다고 해서 일본정부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실상을 보면 일본은 미군주도의 유엔활동에 ‘가능한 범위 내에서 협력’한다고 표명해놓고 ‘기지제공, 후방지원, 작전지원’등 예상을 뛰어넘는 적극적 협력을 했다. 기지제공 측면에서 일본은 주한미군 가족의 긴급피난지, 긴급파견부대의 출격기지, 작전기지, 훈련기지, 군수기지로 “유엔사령부”의 전쟁수행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후방지원활동을 개관하면 수많은 일본인이 일본 국내에서 군수품 생산과 수송 등에 종사하였으며, 일본국내의 미군기지 등에서 서비스에 종사하였고, 해상수송, 항만기술자 및 하역자로서 한국의 해역 및 항만에 파견되어 “유엔사”활동을 지원했다. 직접적인 작전지원으로서는 소해활동을 들 수 있다.

일본의 참전은 외면적으로 ‘유엔군에 대한 협력’이라는 명분을 걸고 내면적으로는 ‘대미협력’을 한 것이었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직접지원은 생각지도 못할 사안이었고 한국도 일본의 협력을 바라지 않았다. 직접적인 대미협력도 불가능했다. 오직 “유엔사”를 명분으로 한 참전만이 가능했던 것이다.

일본정부가 ‘미군에 대한 협력’보다 ‘유엔군에 대한 협력’을 선언하게 되는 배경은 야당과 국민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것도 있었다. 제1야당인 사회당도 ‘미군에 대한 협력은 불가하지만 유엔의 활동은 지지’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은 미군이 유엔을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정부는 “유엔사”협력이라는 명분으로 대미협력을 추진할 수 있었다. 일본정부는 국내문제를 해결하는 절호의 기회로서 “유엔사”를 활용하였던 것이다.

한미안보조약 제3조에서는 ‘태평양지역에서의 무력공격에 한미가 공동으로 대응’한다고 규정되어 있으며, 미일안보조약 제6조에는 ‘극동에 대한 국제평화와 안전유지에 기여하기 위하여 일본은 미군에게 시설과 구역을 허용’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두 조약은 한미일 3국이 극동지역에서 간접적으로나마 연동되어 작전을 펼칠 수 있는 근거가 된다.(주45) 그러나 “유엔사”는 한국전쟁부터 지금까지 일본이 직접적으로 한국유사사태에 개입할 수단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유엔사”를 앞세운 일본의 한반도개입은 유엔헌장위반을 반복할 것으로 예상된다.

유엔사 로고. [출처 - 유엔사 홈페이지]
유엔사 로고. [출처 - 유엔사 홈페이지]

 

(2) 국제전쟁법 위반여부

1) 불법전투원

명확한 기록을 중심으로 “유엔사”와 일본정부의 국제전쟁법 위반여부를 살펴보자. 먼저 불법전투원개념을 중심으로 다음사례를 보자.

1950년 10월 2일 미극동해군참모부장 얼레이 버크소장은 해상안전청 오오쿠보(大久保)청장을 극동해군사령부로 불러, 원산만 소해지원을 요청했다.(주46) 오오쿠보 청장은 즉시 거절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해상안전청(MSA)의 공식지위 문제였다. 해상안전청법 제25조는 비군사적 단체로서의 해상안전청의 지위에 대해 명확히 했다. 법은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다.

“이 법의 어떠한 내용도 해상안전청 또는 그 직원이 군대로 조직되거나 훈련되거나 군사기능을 수행하도록 승인하는 것으로 해석되지 않는다.(주47)

따라서 해상안전청법 제25조는 해석의 여지가 없는 명확한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오오쿠보는 버크 소장 요청의 본질에 대해 1981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었습니다.”(주48)

이 문제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총리 요시다 시게루였다. 오오쿠보 청장의 보고를 받은 요시다 총리는 미군의 부대나 화물수송을 위한 용선傭船계약은 체결되었으나 소해작업은 계약하지 않았고 한반도해역에서의 소해작업은 전투행위이며, 해상안전청법 제25조에서 ‘비군사적 부대’라고 명기되어 있었기 때문에 구일본해군이 미군의 지원작전에 나서는 것은 정치적으로 곤란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요시다는 버크 소장의 지시에 따르도록 했다.(주49) 일본정부는 “유엔사”에 대한 협력을 방침으로 결정했다.(주50)

“유엔사”는 요시다 정부에 거부할 수 없는 압력을 행사했고, 요시다 정부는 소해대가 비군사조직이고 교전자가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법적인 적대행위에의 참가명령을 내렸다.

여기서 교전자격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전쟁수행 자격을 국제법적으로 교전자격(facultas bellandi)이라 하고 교전자격을 가진 자를 교전자(belligerents)라고 한다. 비전투원이라 함은 병력에 속하되 직접 적대행위를 하지 않고 법무, 위생, 종교 등에 종사하는 자를 말한다. 현대 전쟁법에 있어서는 정규군의 구성원이면 비전투원에게도 전투원과 거의 유사한 법적지위를 부여한다. 그러나 비전투원이 아무리 전투원의 지위에 근접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적대행위의 권리는 전투원에게만 주어진다.(주51)

비정규군은 전시에 일시적으로 구성되는 민중의 조직으로서 이에는 민병·의용병 등이 있다. 민병이란 전시에 국가가 소집·편성한 병단이고, 의용병이란 국가의 위급을 인식하고 자진 출원하여 병력에 속해서 전쟁에 종사하는 자로 편성된 병단이다. 그러나 민간공무원인 소해대는 비정규군도 아니었다. 민간인이라면 어떨까?

전투원이 교전자로서 적대행위에 직접 참여할 권리를 갖는 것과 달리, 민간인에게는 그러한 권리가 인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전투행위로 인한 기소 면제와 전쟁포로 대우를 핵심으로 하는 “전투원의 특권”역시도 향유하지 못한다.(주52) 민간인의 전투참여는 전쟁법위반으로 전쟁범죄자가 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민간공무원신분인 소해대의 적대행위참여는 전쟁법위반을 구성한다.

그럼에도 4가지 조건을 갖추면 교전자격을 부여받을 수는 있다.

1907년 “육전의 법규관례에 관한 조약”의 부속서인 “육전의 법규관례에 관한 규칙 제1조” “1949년 제네바 제3협약 제4조(A)(2)”는 합법전투원으로서 포로지위를 부여받기 위한 4개 조건을 명시했다.

ⓛ 부하를 위하여 책임을 지는 통솔자가 있고,
② 원거리에서 인식할 수 있는 고착된 특수기장을 가지고,
③ 공공연하게 무기를 휴대하고
④ 전쟁에 관한 법규나 관례를 준수할 경우에 한하여 교전자격을 인정한다
.(주53)

민병, 의용병, 민간인이라도 위의 4개 조건을 갖추면 합법전투원이 된다 하겠다. 그러나 일본특별소해대의 경우, 고착된 기장부착이라는 두 번째 조건을 명백히 위반하였다. 다음을 보자.

10월 6일 미제3소해대의 스포포드 대령은 일본 소해대가 제7통합임무부대 지휘관 스트라블 중장의 지휘 하에 편입되었다고 통보했다. 동시에 일본 제1소해대와 제2소해대에 출동명령을 하달하였다. 이것을 접수하고 특별소해대 사무총장은 특별소해대의 임무편성을 규정한 명령 특별소해 제1호를 하달하였다.(주54)

“일본 소해부대는 일본 국기 대신 국제 ‘E’깃발(상업용 선박에 사용됨)을 게양할 것이다.”(주55)

선원들은 일본선박이 일장기를 달고 항해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법적지위는 정확히 무엇인지 질문했다. 선원들은 일시적으로 더 이상 일본시민이 아니라 미 해군에 고용된 무국적 계약자인가? 소해대 사무총장 타무라는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주56)

일본국기 대신 ‘E’깃발을 단 것은 교전자격을 갖기 위한 4개의 조건 중 2번째를 명백히 위반한 것이다. 원거리에서 인식할 수 있는 고착된 특수기장을 달기는커녕 오히려 고의적으로 위장‧기만한 것이다.

이는 최근 전쟁법 이론인 불법전투원의 조건에 의하면 두 가지나 해당된다. 우선 불법전투원의 조건을 보자.

(i) 정규군이 제복을 착용하지 않거나 기타 고착된 식별표지를 하지 않고 간첩행위나 적대 행위를 한 경우,
(ii) 정규군에 편입되지 않은 비정규군이 합법전투원의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상태에서 적 대행위를 수행하는 경우,
(iii) 민간인이 적대행위에 직접 가담하는 경우 세 가지로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주57)

일본소해대는 (i) 고착된 식별표지를 하지 않고 (ii) 비정규군이 합법전투원의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상태에서 적대행위를 수행한 것이다. 따라서 “유엔사”와 요시다 정부가 소해대에 내린 명령과 조치는 국제전쟁법의 위반이 의심된다.

다음은 주일미군기지에 근무하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일본인기지노동자들의 사례를 보자.

미7사단 제49야전포병대대 대대장의 진술에 의하면, 상부에서 일본인노동자들을 한국으로 데려가지 말라는 지침도 없었고 그저 일본에서 일상적으로 하던 연장선에서 데리고 갔다고 했다.(주58)

이들은 미군에 의해 공식적으로 편성된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관계로 비공식적으로 편성된 것이었다. 이들의 종군 동기는 대체로 미군부대의 일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미국으로 갈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해 또는 아니면 막연히 더 좋은 기회를 얻기 위해 자원하여 한국행을 자원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자신이 소속된 부대가 전투에서 위기에 처할 때나 혹은 자신의 신변의 위협을 느낄 때 전투‧적대행위에 가담하게 되었다.

이는 교전자격조건을 두 가지나 위반한 것이다.

③ 공공연한 무기휴대
④ 전쟁에 관한 법규나 관례의 준수

이들은 전투목적으로 참전한 것이 아니기에 공공연하게 무기를 지급하지 않았고 위기가 발생했을 때 불가피한 상황에서 전투에 휘말렸다. 또한 미군대대장의 진술에서 확인되듯 지침도 없이 상식선에서 데려갔기에 전쟁에 관한 법규나 관례를 준수할 수 없었다. 다음은 더 구체적인 사례들을 보자.

제24사단에 소속되어 있던 타케시(Matsunobu Takeshi, 28세)는 1950년 7월 4일 이후 사단 포병본부를 따라 통역 겸 기술자로 종군하였고, 대전에서 부대가 위기에 처하였을 때는 직접 전투를 가담하여 북한군 2명을 사살하였다고 했다.

제24사단에 소속되어 있던 미네후미(Yoshiwara Minefumi)는 1950년 7월 19연대 G중대와 함께 종군하면서 주로 주방 일을 수행하였다. 그는 지연전을 수행하던 중대와 함께 많은 고초를 겪었지만 결국 7월 20일 대전전투에서 실종되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처가 미 187공수연대 군 경찰을 통해 소재 파악을 요청하면서 알려지게 되었고 <아사이신문>1952년 11월 14일자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1952년 10월 14일 극동군사령부는 그가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가한 것이 아니고 개인적 권유에 의해 참가한 것이라는 입장을 표명하였다.(주59)

이는 교전자격조건 ⓛ 부하를 위하여 책임을 지는 통솔자가 없었음을 의미한다. 전투원으로서 지휘통솔체계에 속하지 않은 채 적대행위를 한 것이다. 이 사안은 미군으로서는 대단히 민감한 문제로써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어졌다. 맥아더가 일본인의 참전은 법적으로 불가능하다고 공표한 상태였기에 조사부대는 이 사건이 미군정책에 명백히 위반된다는 점에서 매우 복잡한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고 전제하고 상부의 특별한 지침이 요구된다고 보고하였다. 이 사안은 특별보안이 유지되도록 통제되었다.(주60) 이처럼 “유엔사”는 불법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타모츠(Ueno Tamotsu)는 1950년 7월 9일 부산에 도착하여 열차로 대전으로 갔고 제24사단 34연대 통역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는 부대와 종군하면서 항상 전투에 참가하여 사격전을 수행했다고 진술했다.(주61)

후미죠의 경우는 사단 병원에서 근무하였으나 철수작전 시 개성 북쪽에서 적의 공격을 받아 북한군과 사격전을 수행하였다고 진술하였다.(주62)

히라츠카(Shigeji Hiratsuka)는 1950년 7월 제1기병사단 8기병연대 E중대에 소속되어 종군하였다가 1950년 9월 4일 낙동강전투에서 교전 중 사망하였다. 1952년 11월 13일 아사이신문에 「조선에서 전사했던 한 일본인」이란 제목으로 히라츠카(平塚重治)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사단에서는 예하부대에 그에 대한 의무기록이나 인명손실기록을 철저하게 조사하도록 지시하였고, 각 부대의 조사결과 의무기록이나 사망기록이 전혀 없다고 보고되었다.(주63) 미군 당국은 그 이유가 공식적인 승인 없이 밀항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주64)

히라츠카 역시 전투원으로서의 지휘통솔체계 없이 비군사요원으로 부대에 소속되었다가 적대행위에 내몰린 경우이다. 일본인노동자개인의 전쟁법위반보다 그들을 교전자격도 갖추지 않고 전쟁터로 끌고 간 지휘관들의 전쟁법위반이 더 심각하다 하겠다.

코바야시(Sakae Kobayashi, 21세)는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시 제7사단 32연대 H중대의 하우스보이로 종군하였으며, 북진작전에서는 중대장과 함께 정찰을 나가 북한군을 만나 사격전을 수행한 적이 있다고 했다. 중대장은 만에 하나 공산군이 그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알면 안 된다고 하여 즉시 후방으로 가도록 지시했다고 진술했다.(주65)

이처럼 현장지휘관들도 일본노동자들의 교전행위가 문제가 될 것임을 정확히 자각‧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켄죠(Takatsu Kenzo, 19세)는 1950년 9월 15일 제7사단 32연대 57포병대대에 소속되어 종군하면서 주로 주방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는 대대가 동년 11월 25일 중공군의 공격을 받았을 때 사격전에 참가했으며, 부상을 입었다고 했다.

켄죠의 경우는 중공군과 교전 중 부상을 입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당시 미 극동군사령부로부터 큰 관심을 받았다. 극동군사령부는 그의 사안에 대해 특별히 비밀등급을 1급 비밀로 상향할 정도로 민감하게 처리하였다.(주66)

제2사단 23연대 1대대 A중대 소속되었던 츠네시데(Shigamitsu Tsuneshide)는 부대의 하우스보이였으나 소총을 지급받았고 북한지역에서 중공군을 만나 사격전을 전개하여 3~4명을 사살하였으며, 자신도 중공군의 사격에 부상을 입었다고 진술하였다.(주67)

1950년 11월 27일 세이이치가 부산에서 한국군 경찰의 검문에 걸려 심문을 받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한국은 김두한 외무장관 명의로 미국 대사관을 통해 세이이치의 한국입국경위 조사와 일본으로의 추방조치를 촉구하였다. 이 문제에 관해 후에 제1기병사단 감찰참모는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담당 중대장들이 일본인들을 공식적인 절차없이 허락한 것은 잘못이고, 그들이 그것이 위법사실이라는 것을 몰랐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면책이 될 수 없다. 일본인들이 한국으로 들어간 것은 현재 미국의 외교정책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다”(주68)

현장지휘관이 위법사실을 몰랐어도 위법은 구성되고, 위법에 대한 처벌도 피할 수 없다. 이 사건은 미군 내부적으로 종군 일본인기지노동자에 대해 가장 처음으로 심각하게 고려한 사안이었다. 일본인 종군노동자들의 소재가 공산측에 알려지면 미국이 국제적으로 궁지에 몰릴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일본기지노동자들의 불법참전에 대한 전쟁법위반책임은 전적으로 “유엔사”측에 물어져야 할 것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래로 요시다는 “유엔사”에 직간접적인 지원을 제공하라는 미국의 끊임없는 압박을 받았다. 그리고 요시다는 국내정치적 유‧불리를 따져 때론 어쩔 수 없이, 때론 능동적으로 요구에 응했다. 1950년 6월 이미 요시다는 “유엔사”의 전쟁수행에 광범위한 비군사적 지원을 제공했다.(주69) 또한 138척의 일본 상선과 7,550명의 선원을 한반도로 오가는 유엔군과 군수품수송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한 요시다의 협정이 있었다.(주70) 미국대사를 지냈던 머피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의 선박과 철도전문가들은 숙련된 부하직원과 같이 한국에 가서 미국과 함께 유엔사령부 예하에서 활동했다. 이와 같은 활동은 극비사항이었다. 한국사정을 잘 아는 수천 명의 일본전문가들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유엔군은 한국전을 수행하지 못했을 것이다”(주71)

이것은 전쟁에 대한 직접개입의 중요하고 실질적인 형태를 나타낸다.(주72) 이는 “유엔사”와 일본정부 공동으로 전쟁법위반책임이 의심되는 사건들이다.

2) 용병

다음으로는 참전일본인의 용병적 성격에 대해 살펴보자. <뉴욕 타임즈>는 1950년 8월 12일자 사설에서 밝힌 일본인의 참전반대 이유 중 하나가 일본인은 “유엔군”의 일원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미군의 용병이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주73) 다시 소해대의 사례를 살펴보자.

1950년 10월 9일, 특별소해대가 요시다 시게루총리로부터 최종적으로 받은 전보에는 다음과 같은 지시가 적혀 있었다.

“특별소해대원, 귀하는 항구를 떠날 때부터 항구로 돌아올 때까지 미군에 임시 고용된 것으로 간주된다. 단, 복무기록의 경우에는 계속 공무원으로 근무한 것으로 간주한다.”(주74)

일본선박과 선원들이 미해군사령부로 이전된다는 발표는 그들이 일종의 “용병”임을 암시했다. 미육군 공간사에 의하면 맥아더는 일본 소해정의 사용은 계약에 의해 고용된 것이기 때문에 전투목적이 아니라 인도적 목적으로 운용되었다고 국방성에 보고하였다. 그러나 역사가 밝히듯 그들은 전투목적으로 운용되었다. 용병으로서 전투에 참전한 것이다. 맥아더는 거짓말을 한 것이다.

한국전쟁 후에 발전된 용병관련 국제법은 아프리카 통일기구(Organization of African Unity, OAU)가 1977년 범용병회의에서 채택한 “아프리카 용병 폐절에 관한 OAU 의정서(용병배제조약),” 이를 보완하기 위해 유엔총회가 1989년에 채택한 “용병모집, 사용, 자금공여 및 훈련을 금지하는 국제조약(용병금지조약),”(주75) 1977년에 국제적십자위원회가 채택한 제네바 협약에 추가되는 제1의정서(제1추가의정서) 제47조의 정의가 있다. 이 제47조에 따르면 용병은 전투원의 권리와 포로의 권리가 없다.(주76)

따라서 맥아더의 말처럼 소해대가 고용된 용병이었다면 교전자로서의 권리를 갖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들은 인도적 목적이 아니라 전투‧적대행위를 목적으로 운용되었으므로 용병관련 국제법의 기준으로 보면 그 위반이 의심된다.

 

(3) 평화헌법 위반여부

일본국헌법 제9조는 다음과 같다.

① 일본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평화를 성실히 희구하며, 국제분쟁을 해결하 는 수단으로써 국권이 발동되는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영구히 포 기한다.
② 제1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육해공군, 그 밖의 전력을 보유하지 아니한다. 국가교 전권은 인정하지 아니한다.

일본국헌법 제9조①항 전쟁포기의 주체는 국가가 아닌 일본국민이다. 일본국민이 전쟁에 참여했다면 그는 이 조항의 위반자가 된다. 그런데 그가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군대의 일원으로 참가했다면 그를 배치한 군대와 지휘관이 위반자가 된다.

타케세(Ito Takeshe, 20세)는 전쟁 이전 주한 미군사고문단(KMAG)과 함께 한국으로 왔으나, 전쟁이 발발한 후 제24사단 21연대 C중대에 소속되어 미군 병사들과 똑같이 군복과 소총 등을 지급받고 전투에 참가했다. 그는 특이하게도 7개월 동안 전선에서 공산군을 20명 정도 사살하였고 자신도 전투에서 부상을 입어 미국정부로부터 퍼플 허트(Purple Heart) 훈장을 수여받았다고 진술했다.(주77) 이 훈장의 수여는 종군한 일본기지노동자 가운데 유일한 경우로 미국정부가 그의 종군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셈이었다. 이는 거꾸로 “유엔사”가 그를 헌법9조의 위반자가 되도록 지휘한 책임을 인정한 것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 소해대사례를 다시보자.

1950년 10월 4일 미해군 극동해군사령관 터너 조이중장에 의한 긴급동원에 불안과 불만을 느낀 소해대원들은 타무라 사무총장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한 함장은 “어느 바다에서 기뢰제거를 할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또 다른 사람은 “우리가 주한 미해군사령관의 지휘를 받는다면 강제로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위헌 아닙니까?”
또 다른 사람은 “우리는 38선을 넘는 것입니까? 넘지 않는 것입니까? 그것을 넘으면 우리는 참가할 수 없습니다.”
(주78)

부하들 사이의 불신과 불안을 억제하기 위해 타무라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우리는 미 극동군사령부와 안전한 장소에서만 기뢰제거를 하기로 합의했다.”(주79)

그것이 거짓말임은 금방 드러났다. 한 익명의 해상안전청대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은 새로 제정된 헌법에서 전쟁을 포기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다른 나라의 전쟁을 위해 위험한 곳에서 목숨을 내놓을 이유가 없다. 게다가 우리는 더 이상 군인이 아니라 국가 공무원, 행정 공무원이다…일본재건 사명을 가지고 일본재건을 위한 국내 소해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기꺼이 노력했다. [우리는] 다른 나라에서 기뢰제거를 위해 전쟁을 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주80)

비록 많은 인원이 전직 일본제국해군(IJN) 선원이었지만 전후 일본의 새로운 평화국가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확고한 신봉자로서 그들은 평화헌법을 수호하려 했다. 이 사람들에게 다시 전쟁에 나가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일 뿐만 아니라 전후 국가의 정체성과 헌법을 위반하는 것이었다.(주81)

일본 특별소해대는 원산항부근 미구축함의 육상포격이 실시되는 가운데 정박예정해역의 소해작업을 실시하였다.(주82) 원산에서의 소해임무는 시작부터 치명적임이 증명되었다.

10월 17일 결국 일본소해함이 기뢰와 충돌했다. 이 폭발로 승무원은 큰 피해를 입었다. 그의 동료선원들을 위해 점심을 준비하던 배의 요리사 나카타니 사카타로오(Nakatani Sakatarō)는 갑판위에 있지 않았기에 기뢰충돌시 즉사했다.(주83)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항복한 지 불과 5년 만에 일본선원은 전쟁에서 적대행위의 결과로 다시 한 번 죽거나 다쳤다. 분노한 함장들은 타무라에게 즉시 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이 전쟁에 더 이상 휘말리고 싶지 않다. 기뢰제거를 중지하라. [우리는] 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주84) “[우리는] 속았다.”(주85)

모인 함장들은 원산작전의 미 해군 사령관에게 일본소해정의 침몰에 대한 분노를 표명하는 성명서를 입안하여 서명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해상안전청 민간고용인의 직무가 아니었다.(주86)

타무라 휘하의 해상안전청부대 2인자인 노세(Nose)대령은 이제 전체작전을 불법이자 부하들의 생명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위험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노세는 더 이상의 기뢰제거를 거부하는 부하장교들과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사실상 노세와 그의 동료 함장은 그들의 사령관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고, 원산에 있는 연합함대 미 사령관의 명령에 불복종하겠다고 위협하는 편지에 서명했다. 그러나 미국상륙부대의 중장인 앨런 스미스(Allen Smith)는 분개했다. 스미스는 타무라에게 다음 날 아침 일본함정이 소해를 재개하거나 작전 개시 후 15분 이내에 일본으로 출발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고 위협했다.(주87) 노세는 간단히 말했다.

“쏠 테면 쏴라.”(주88)

이는 전후 일본군 내에서 유일하게 알려진 성공적인 불복종 사례였다.

상선의 광범위한 동원과 해상안전청의 전개는 전후 시대에 일본이 해외분쟁에 직접 가담한 첫 번째 사례임을 의미했다. 요시다 총리와 오오쿠보 청장은 헌법 9조 위반을 합리화했다. 패전 후 해상보안청에서 없어졌어야 될 조직이었던 구해군의 소해대가 은닉하고 있다가 한국전쟁으로 정체가 드러났고, 결국 해상자위대의 중핵이 되었다. 일본정부는 속으로는 출동하여 요시다 정권유지를 위한 ‘국내여론의 환기’와 국민경제궁핍을 극복하기 위해 ‘전쟁특수’로 나서야 했으나 겉으로 제시할 수 없는 처지에서 미국이 제의하는 형식으로 추진하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일본은 미일 간에 한반도 유사 등 주변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양국 간의 작전협력항목으로 ‘일본영역 및 일본주변의 공해역에서 기뢰제거와 기뢰정보를 교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물론 일본주변의 공해역이므로 한국의 영해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현재 미국이 극동지역에 보유하고 있는 소해정은 3척에 불과하나 일본 해상자위대는 소해모함 3척과 34척의 신소해정을 보유하고 있다. 한반도 유사시에 소해능력이 부족할 경우에 1950년의 한국전쟁에서와 같이 한반도 영해까지 일본의 소해활동을 요구할지도 모른다.(주89) 한미일동맹이 가속화되면서 공동군사연습의 범위는 급속도로 확대되고 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한국전쟁 당시와 마찬가지로 일본정부의 평화헌법위반은 반복될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2023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일본의 “유엔사후방기지”를 두 번이나 언급했다. 브룩스 전 유엔사령관 겸 주한미군사령관은 “유엔사”를 강화하던지 새로운 극동군사령부를 창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유엔사”를 중심으로 한미일동맹이 현실화되는 것은 유엔헌장과 국제전쟁법과 평화헌법을 총체적으로 위반한 것으로 의심되는 과거역사를 고스란히 반복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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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池井優, 『日本外交史概説』, (東京: 慶応義塾大学出版会, 1992), p.269.

2) 山崎静雄, 『史実で語る朝鮮戦争協力の全容』 (東京:本の泉社,1998), pp.270-272.; 이종판, 「韓國戰爭당시 日本의 役割에 관한 연구; 日本의 對美協力活動을 中心으로」, (한양대학교 국제학대학원박사논문 2007), p.121

3) 辻清明編, 『資料戦後二十年史』, (東京:日本評論社, 1966), pp.81-82.

4) 이종판, 「韓國戰爭당시 日本의 役割에 관한 연구; 日本의 對美協力活動을 中心으로」, (한양대학교 국제학대학원박사논문 2007), p.122

5) 그는 1896년 아이치현 출생으로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에서 배우고 1930년 동대학 법학부교수가 된다. 1948년 도쿄대 법학부장, 1957년 도쿄대교수 퇴직, 1960년~1966에는 최고재판소 장관을 역임하고 1993년 사망했다. 鄭祐宗, 「戰後日本の國際法學者における朝鮮問題認識」, 韓國朝鮮の文化と社會第20号, (2021), p.37. 참고로 일본 평화헌법수호운동의 시발점인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가 도쿄대 법학부에 1934년 입학하니까 그의 스승 중 한명이기도 한 셈이다. 그러나 마루야마는 1937년 요코타가 아닌 난바라 시게루(南原 繁)의 연구실조수가 된다. 난바라는 일본국체론을 비판한 진보적 정치학자였고 1945년 도쿄대 법학부장이 되니 요코타는 난바라의 후임 법학부장이었던 셈이다. 1946년 난바라는 귀족원 칙선의원으로 선출되어 신헌법심의에 참여했다. 그러니 그의 제자였던 마루야마 마사오가 평화헌법수호운동을 벌인 것은 그의 스승의 길을 따른 측면도 있는 것이다. 그는 1949년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시 전면강화를 주장하며 요시다 시게루 총리와 정면대립 하였다.

6) 橫田喜三郞, 日本の講和問題, (勁草書房). p.111

7) 일본이 유엔의 회원국이 된 것은 1956년으로, 한국전쟁 당시는 회원국‧가맹국이 아니었다.

8) 橫田喜三郞, 朝鮮問題と日本の將來, (勁草書房,1950), pp.68-71, 208-209; 鄭祐宗, 「戰後日本の國際法學者における朝鮮問題認識」, 韓國朝鮮の文化と社會第20号, (2021), p.27

9) 第8回國會施政方針演說, 1950.7.14.; 고영자, 「6·25전쟁과 전후일본;미점령기의 講和문제와 독립회복」, (경희대학교박사논문, 2010), p.246재인용

10) 『每日新聞』, 1950年7月12日字.

11) 『讀賣新聞』 1950年10月30日字.

12) 『每日新聞』, 1950年7月10日字.

13) 『每日新聞』, 1950年8月14日字.

14) GHQ SCAP, Prefecture Press Analysis(27 Aug 1950), MFSN-267(군사편찬연구소소장 자료번호)

15) New York Times, 12th August 1950.

16) 『每日新聞』, 1950年8月10日字. 맥아더가 중요하게 고려한 것은 법률문제보다도 오히려 일본인 참전으로 발생할지 모르는 일본의 군사적 위기 문제였다. 주일 미군이 한반도로 모두 투입되는 상황에서 일본인마저 투입하게 된다면 일본안보의 취약점을 그대로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양영조, 「주일미군기지 일본인노무자의 6·25전쟁 종군활동과 귀환」, 군사No.111,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19), p.52

17) 神井林二郎篇訳, 『吉田茂=マッカーサー往復書翰集』, (東京: 法政大學出版局, 2000), pp.340-341

18) 佐世保市総務部, 『佐世保市史(政治行政編)』 (東京: 図書刊行会,1982), pp.348-349,410.; 이종판, 「韓國戰爭당시 日本의 役割에 관한 연구; 日本의 對美協力活動을 中心으로」, (한양대학교 국제학대학원박사논문 2007), p.122

19) 大鄕正夫, 「南北朝鮮統一なめく゛る國際法問題」, レファレンス22(12), 1972, p.113

20) 제25조 유엔회원국은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정을 이 헌장에 따라 수락하고 이행할 것을 동의한다. 제48조1. 국제평화와 안전의 유지를 위한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정을 이행하는데 필요한 조치는 안전보장이사회가 정하는 바에 따라 유엔회원국의 전부 또는 일부에 의하여 취하여진다. 제49조 유엔회원국은 안전보장이사회가 결정한 조치를 이행함에 있어 상호원조를 제공하는 데에 참여한다.

21) 제53조1. 안전보장이사회는 그 권위하에 취하여지는 강제조치를 위하여 적절한 경우에는 그러한 지역적 약정 또는 지역적 기관을 이용한다. 다만, 안전보장이사회의 허가없이는 어떠한 강제조치도 지역적 약정 또는 지역적 기관에 의하여 취하여져서는 아니된다.

22) 제29조 안전보장이사회는 그 임무의 수행에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보조기관을 설치할 수 있다. 제8조 유엔은 남녀가 어떠한 능력으로서든 그리고 평등의 조건으로 그 주요기관 및 보조기관에 참가할 자격이 있음에 대하여 어떠한 제한도 두어서는 아니된다.

23) 『每日新聞』, 1950年7月23日字.

24) 『每日新聞』, 1950年8月5日字.

25) “안전보장이사회는 회원국이 제공한 군대를 미국의 권한 하에 있는 통합사령부에 제공할 것을 권고했다. 분명히 안보리는 통합사령부를 자신의 통제하에 있는 보조기관으로 설립하지 않았다.”UN Office of Legal Affairs, “STATUS OF THE “UNITED NATIONS COMMAND” IN KOREA — SECURITY COUNCIL RESOLUTION 84 (1950) OF JULY 1950”, UN Juridical Yearbook, 1994, Chapter VI, p.501

26) 제103조 유엔회원국의 헌장상의 의무와 다른 국제협정상의 의무가 상충되는 경우에는 이 헌장상의 의무가 우선한다.

27) 제2조6. 기구는 유엔의 회원국이 아닌 국가가, 국제평화와 안전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한, 이러한 원칙에 따라 행동하도록 확보한다.

28) H. Kelsen, The Law of The United Nations A Critical Analysis of Its Fundamental Problems (New York : Frederick A. Praeger, 1950), p.116

29) 山崎静雄, 『史実で語る朝鮮戦争協力の全容』, (東京:本の泉社、1998), pp.310-311; 이종판, 「韓國戰爭당시 日本의 役割에 관한 연구; 日本의 對美協力活動을 中心으로」, (한양대학교 국제학대학원박사논문 2007), p.165

30) Louis Fisher, “The Korean War : On What Legal Basis Did Truman Act?”, American Journal of International Law, 1995, p.25; 崔哲榮, 「미국의 UN참여법과 미군의 6.25전쟁 참전의 합법성문제」, 美國憲法硏究Vol.21 No.3, (미국헌법학회, 2010), p.154

31) Julius Stone, Legal Controls of International Conflict: A Treatise on the Dynamics of Disputes and War Law, (Stevens and Sons, 1954), p.237; 이한기, 「한국휴전협정의 제문제」, 國際法學會論叢Vol.3, (대한국제법학회 1958) p.63

32) Peter Malanczuk, Akehurst's Modern Introduction to International Law, 7thed., (London: Routledge, 1997), p.390; 김대순, 국제법론제11판, (서울: 삼영사, 2006), pp.1084-1085

33) 헌장 기초자들의 의도를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 ‘권고’란 단어는 어떤 구속력 있는 병력도 안보리의 조치에 첨가하지 않았다. 유엔헌장제정회의 제7차 Ⅲ/2위원회 회의에서 ‘벨기에 대표는 4항에서 사용되고 있는 “권고”란 단어의 법적 효력에 대해 발기한 국가들에게 해석을 요청했다. 미국 대표는 영국 대표의 관점에 합의하여 말하길, 강요나 강제없음을 상정했다는 것을 명백히 하기 위한 의도였다고 했다. Cf. also U.N.C.I.O. document 1027, Ⅲ/2/31(Ⅰ), p.4.); Hans Kelsen, The Law of The United Nations A Critical Analysis of Its Fundamental Problems (New York: Frederick A. Praeger, 1950), p.444인용

34) 헌장 39조의 권고(Recommendation)가 평화적 수단의 권고를 의미하느냐, 또는 강제적 수단의 권고까지 포함하느냐의 논의에서 평화적 수단의 권고에 한한다는 견해는 다음과 같이 다수 학자에 의해 주장되고 있다. Hans Kelsen, The Law of The United Nations A Critical Analysis of Its Fundamental Problems (New York: Frederick A. Praeger, 1950), p.932; Hersch Lauterpacht, Oppenheim's International Law, Vol.II 7thed., (London: Longmans, 1972), p.164; Ian Brownlie, International Law and the use of Force by States (Oxford: The Clarendon, 1963), p.335; Julius Stone, Legal Controls of International Conflict (New York: Rinehart & Company Inc., 1954), p.230; Grenville Clark and Louis B. Sohn, World Peace through World Law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58), p.113; L. M. Goodrich and E. Hambro, Charter of the United Nations, 2nded., (Boston: World Peace Foundation, 1949), pp.27-28; James Leslie Brierly, The Law of Nations: an introduction to the international law of peace, 6the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63), p.394; 김명기, 주한국제연합군과 국제법 (서울: 국제문제연구소, 1990), p.20

35) Julius Stone, Legal Controls of International Conflict (New York: Rinehart & Company Inc., 1954), pp.234-235

36) 이들 안보리결의가 유엔의 조치가 아닌 개별국가의 조치라는 입장에 대해서 국내에서는 이한기, 「한국휴전협정의 제문제」, 국제법학회논총제3호, (1958), pp.37-85; 김대순, 『국제법론』(제9판), (삼영사 2004), p.988; 정태욱, 「주한 유엔군사령부(UNC)의 법적 성격」, 민주법학34권, (민주주의법학연구회, 2007), p.213등이 있고, 국외에서는 Hans Kelsen, “The Recent Trends in the Law of the United Nations”, The Law of the United Nations: a Critical Analysis of Its Fundamental Problems: with Supplement, (Steven & Sons, 1951), pp.936-937; Peter Malanczuk, Akehurst’s Modern Introduction to International Law, (Routledge, 1997), pp.389-390; Julius Stone, Legal Controls of International Conflict: A Treatise on the Dynamics of Disputes and War Law, (Stevens and Sons, 1954), p.231등이 있다. 반대로 그것을 유엔의 행위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로는 국내에서는 김명기, 주한국제연합군과 국제법, (국제문제연구소, 1990), pp.52-62; 제성호, 한반도 평화체제의 모색, (지평서원, 2002), p.15; 이병조·이중범, 국제법 신강(제9개정판), (일조각, 2003), p.959의 각주3; Chee, Choung II, Korea and International Law, (Seoul Press for the Institute of International Legal Studies, Korea University, 1993), p.88, 강병근, 「주한 유엔군사령부의 해체에 관한 법적문제」, 한림대학교민족통합연구소총서제2권, (2000), p.207; 배재식, 「한국휴전의 법적제문제」, 『법학』(서울대) 통권33호, (1975), p.52등 있고, 국외에서는 Rosalyn Higgins, United Nations Peacekeeping: 1946-1967(Documents and Commentary II. Asia), (Oxford University Press, 1970), p.178; D. W. Bowett, United Nations Forces: A Legal Study, (Frederick A. Praeger, 1964), pp.45-47; Finn Seyersted, United Nations Forces: In the Law of Peace and War, (A.W. Sijthoff-Leyden, 1966), p.41; Danesh Sarooshi, The United Nations and the Development of Collective Security,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p.110, 169이하; Christine Gray, International Law and the Use of Force, 2nded., (Oxford University Press, 2004), p.199등이 있다.

37) Baxter, “Constitutional Forms and Some Legal Problems of International Military Command”, British Year Book of International Law, (1952), p.334. 순군사적인 면에서 본다면 한국사변에 대한 Command의 구조는 일본점령에 채용된 Command의 구조와 유사하다. 이 두 개의 경우에 단일국가가 국제조직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그 단일국가는 실제의 군사작전에 어떠한 통제도 행사하지 않았다.(Ibid, p.335)

38) 다른 참전국들도 미국과 협정을 체결하였다. 대표적 경우가 네덜란드와의 협정인데, 그 협정의 주된 목적은 참전국들이 전쟁물자를 미국으로부터 보충받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Rosalyn Higgins, United Nations Peacekeeping: 1946-1967(Documents and Commentary II, Asia), (Oxford University Press, 1970), p.205; 정태욱, 「주한 유엔군사령부(UNC)의 법적 성격」, 민주법학34권, (민주주의법학연구회, 2007), p.205

39) UNC and CFC Manual(유엔사연합사업무편람), 7 November 1984, p.7-2-2

40) H. Kelsen, “The Recent Trends in the Law of the United Nations”, The Law of the United Nations: a Critical Analysis of Its Fundamental Problems: with Supplement, (Steven & Sons, 1951), p.937참조.

41) UN Office of Legal Affairs, UN Juridical Yearbook, (1994), Chapter VI, pp.501-502

42) 이시우(李時雨), 「國連システム と 國連軍司令部」, PRIMEno.41, (東京: 明治學院大學國際平和硏究所, 2018), pp.13-14

43) Tajiri, “1950nen genzan Tokubetsu sōkai no kaiko,”p.14.;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44) 大久保武雄, 『海鳴りの日日』, (東京: 海洋問題硏究會, 1978), p.231.

45) 이종판, 「韓國戰爭당시 日本의 役割에 관한 연구; 日本의 對美協力活動을 中心으로」, (한양대학교 국제학대학원박사논문 2007), pp.171-175

46) 大嶽秀夫, 『戰後日本防衛問題資料集․ 第一卷』, (東京: 三一書房, 1992), p.524.

47) “Shōwa nijyūsannen hōritsu dai nijyūhachi gō kaijōhoanchōhō,” E-Gov hōrei kensaku, accessed June 5, 2022.;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48) Shirōchi, Shōwa nijyūgonen, p.27.;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49) 大久保武雄, 『海鳴りの日日』, (東京: 海洋問題硏究會, 1978), p.209

50) 이종판, 「韓國戰爭당시 日本의 役割에 관한 연구; 日本의 對美協力活動을 中心으로」, (한양대학교 국제학대학원박사논문 2007), p.154

51) 이광원, 「군인의 법적지위」, (전남대학교대학원박사논문 2010), p.62

52) 안준형, 「국제인도법상 불법전투원의 법적 지위」, 서울국제법연구Vol.28 No.1, (서울국제법연구원 2021), p.137

53) 이광원, 「군인의 법적지위」, (전남대학교대학원박사논문 2010), p.61. 다만 일각에서는 이외에도 1) 위계조직(hierarchical organization), 2) 교전당사국에의 소속, 3) 억류국에 충성의무(국적)가 없을 것이라는 세 가지 요건이 추가적으로 요구된다고 보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Yoram Dinstein, The Conduct of Hostilities under the Law of International Armed Conflict, 3rd ed.,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6), pp.54-56참조.

54) 이종판, 「韓國戰爭당시 日本의 役割에 관한 연구; 日本의 對美協力活動을 中心으로」, (한양대학교 국제학대학원박사논문 2007), p.156

55) Shōgo Nose, “Chōsen sensō ni shutsudō shita nihon no tokubetsusōkaitai,” (March 1978), p.7.;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56) Tajiri, “1950nen genzan tokubetsu sōkai no kaiko,” p.7.;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57) David Kretzmer, “Unlawful Combatants,”in Gordon Martel (ed.), The Encyclopedia of War (Blackwell Publishing, 2012), p.1.; 안준형, 「국제인도법상 불법전투원의 법적 지위」, 서울국제법연구Vol.28 No.1, (서울국제법연구원 2021), p.142

58) 테일러 대대장이 사단포병에게(1951.1.16), Hq Camp Mower to CG Southwestern Command, 1951.2.18, RG 338, Entry 11909, Box 46 ; 양영조, 「주일미군기지 일본인노무자의 6·25전쟁 종군활동과 귀환」, 군사No.111,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19), p.61

59) 『朝日新聞』,1952年 11月 14日字.

60) 치카마우가캠프가 서남부사령부에게 실종사건보고(1951.11.26) ; 유엔군사령부가 일본군수사령부에게(195112.20), Hq Camp Mower to CG Southwestern Command, 1951.2.18, RG 338, Entry 11909, Box 46

61) Ueno Tamotsu, Statement, Hq Camp Mower to CG Southwestern Command, 1951.2.18, RG 338, Entry 11909, Box 46

62) 양영조, 「주일미군기지 일본인노무자의 6·25전쟁 종군활동과 귀환」, 군사No.111,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19), p.65

63) 1st Cavalry Division Inspector, Certification(1951.1.26) ; 1st Cavalry Division, Certification(1951.1.28) ; 15th Medical Inspector, Japanese Nationals evacuated through medical channels (1951.1.29.), Hq Camp Mower to CG Southwestern Command, 1951.2.18, RG 338, Entry 11909, Box 46

64) 『朝日新聞』,, 1952年 11月 13日字.

65) Sakae Kobayashi, Statement,; 8041st Army,, Certification (1951.2.22), Hq Camp Mower to CG Southwestern Command, 1951.2.18, RG 338, Entry 11909, Box 46

66) 서남부사령부가 일본군수사령부에게(1950.12.20); 일본군수사령부가 극동군사령부에게(1950.12.22); 극동군사령부가 일본군사사령부에게(1950.12.22); Takatsu Kenzo, Statement, Hq Camp Mower to CG Southwestern Command, 1951.2.18, RG 338, Entry 11909, Box 46

67) Shigamitsu Tsuneshide, Statement, Hq Camp Mower to CG Southwestern Command, 1951.2.18, RG 338, Entry 11909, Box 46; 양영조, 「주일미군기지 일본인노무자의 6·25전쟁 종군활동과 귀환」, 군사No.111,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19), p.69

68) 제1기병사단 감찰참모의 조사보고(1951.1.26), Hq Camp Mower to CG Southwestern Command, 1951.2.18, RG 338, Entry 11909, Box 46.

69) Wada Haruki, The Korean War: An International History (New York: Rowman & Littlefield, 2018), p.138

70) Hisao Ōnuma, “Chōsen sensō ni okeru nihonjin no sansen mondai.” Sensō sekinin kenkyū 31, (Spring 2001), pp.2-4.;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71) 古垣鐵郞譯, 『軍人の中の外交官』, (東京: 鹿島硏究所出版會, 1954), p.442.; 이종판, 「韓國戰爭당시 日本의 役割에 관한 연구; 日本의 對美協力活動을 中心으로」, (한양대학교 국제학대학원박사논문 2007), p.130

72) Yōji Kasawa, “Dai yon shō chōsen sensō to nihonjin sen’in: gunyōsen nado no jōsōin toshite,” Kaiin, no 10. (October 2007), p.91.;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73) New York Times, 12th August 1950

74) Tajiri, “1950nen genzan Tokubetsu sōkai no kaiko,” p.14;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75) 용병배제조약은 용병의 정의를 ‘국가 및 OAU가 인정한 독립운동을 전복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고용된 주체’(제1조)로 하였다. 그러나 이 조약은 용병고용 자체를 금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1조에서 금지된 목적 이외의 용병고용, 예를 들어 앙골라와 자이르에서 반정부 세력을 탄압할 목적의 용병고용, 혹은 개인의 금전적 이익, 분쟁목적에 대한 공감, 병사에 대한 근친감, 개인적인 모험심을 목적으로 한 용병고용을 함으로써 조약의 적용을 면했다. 또한 조약은 적용 확보를 위한 강제수단이 결여되어 용병 배제의 목적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었다. 유엔은 이러한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용병금지조약을 채택하여, 용병모집, 용병사용, 용병에 대한 자금 공여, 용병훈련을 금지하였다. 동 조약은 용병행위를 세세하게 규정하고 있으나, 사찰조항이나 벌칙규정도 없기 때문에 조약의 유효성에 의문이 있다.

76) 전용태, 「민간군사경비회사(PMSC)의 업무수행과 그 법적문제」, 법학연구Vol.79, (한국법학회 2020), pp.674-675

77) Ito Takeshe, Statement, Hq Camp Mower to CG Southwestern Command, 1951.2.18, RG 338, Entry 11909, Box 46

78) Nose, “Chōsen sensō ni shutsudō shita nihon no tokubetsu sōkaitai,” p.7.;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79) Nose, “Chōsen sensō ni shutsudō shita nihon no tokubetsu sōkaitai,” p.7.;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80) Nose, “Chōsen sensō ni shutsudō shita nihon no tokubetsu sōkaitai,” p.7.;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81) Hirama, “Sōkaitei haken,” p.129.;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82) 이종판, 「韓國戰爭당시 日本의 役割에 관한 연구; 日本의 對美協力活動을 中心으로」, (한양대학교 국제학대학원박사논문 2007), p.159

83) Hirama, “Sōkaitei haken,” p.129.;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84) Nose, “Chōsen sensō ni shutsudō shita nihon no tokubetsu sōkaitai,” p.15.;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85) Nose, “Chōsen sensō ni shutsudō shita nihon no tokubetsu sōkaitai,” p.15.;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86) Yamazaki, Shijitsu de kataru chōsen sensō kyōryoku no zenyō, p.260.;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87) 포터에 의하면 오늘날까지 스미스(Smith)소장이 해상안전청(MSA)선박에 발포하겠다고 위협했는지 여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타무라와 동료 일본장교들은 스미스가 그들에게 발포하겠다고 위협했다지만 다른 목격자들은 스미스가 타무라에게 그가 “해고당했다”고 말했을 뿐이었다고 주장한다. 타무라는 스미스의 의견을 직접 들은 유일한 해상안전청(MSA) 장교였다. 결과적으로, 보강증거를 제공할 일본어로 된 다른 직접적 자료는 없다. 일반적으로 원산에 있던 일본 참가자들의 모든 설명은 스미스의 말을 타무라가 이해하는 대로 이해했다고 한다.;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88) Nose, “Chōsen sensō ni shutsudō shita nihon no tokubetsu sōkaitai,” p.15.;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89) 이종판, 「韓國戰爭당시 日本의 役割에 관한 연구; 日本의 對美協力活動을 中心으로」, (한양대학교 국제학대학원박사논문 2007), p.166-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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