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설마 설마 했던 일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분노하면서도 낙심하고 두려움에 떠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인공 신돌석씨는 이 모든 일이 우리가 진전한 데 따른 역작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거대한 힘인 듯하지만 사실은 몰락하지 않으려는 안간힘일 것입니다.
새로운 것은 시작되었으나 나아가지를 못하고 있고, 낡은 것들이 사라지지 않으려고 완강히 버티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역사를 되돌리려는 세력이 누구이고,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에 쐐기를 박고, 많은 사람들의 힘을 모아서 나가야 합니다.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의 고귀한 삶이 존중받을 때 세상은 제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그 일을 위해 신돌석씨는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그러한 삶들이 모여서 반드시 역사가 다시 제자리를 잡아가고 전진해 갈 거라고 확신합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참여와 응원과 질책을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2023. 9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이승만이 대통령일 때는 물론이고, 박정희가 대통령이었을 때도 어린 나이였고, 또 성인이 되었어도 정치에 거의 무관심했었기 때문에 신돌석씨는 그때 상황을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노동운동을 하기 시작한 이후에는 정치 상황에 대해 예민하게 관심을 가져서 그런지 자세히는 몰라도 어느 정도는 안다. 그것은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일 것이다. 안다고 해도 사실 굉장히 거칠게 아는 정도였다.

당시에는 정치상황을 생각할 때 제1야당인 신민당이 중심적인 문제였다. 그때는 전두환군사독재정권이 위기에 처해지기 시작하던 때였다. 1985년 2.12 총선은 민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보여준 것이었다. 신돌석씨는 그때 공장에 다니면서 조철구 등과 어울리기 시작했을 때였다. 조철구가 술 마실 때마다 시사적인 문제들을 재미있게 풀어주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야당 지지자가 되어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2.12총선은 엄청난 것이었다. 유세장마다 인파가 가득했다. 중선거구라서 동반당선되었지만 서울 같은 경우는 1등과 2등이 거의 더블 스코어가 되는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었다. 조철구와 함께 유세장 몇 군데를 휴일에 돌아다녀 봤는데 정말 사람을 흥분하게 만들었다. 결과는 신민당이 총득표에서 앞섰다. 하지만 동반당선에 전국구의 2/3를 1당에 배분하는 선거제도 때문에 여전히 당시 여당인 민정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하였다.

해고가 되고 노동운동이란 걸 시작한 뒤에는 좀 색다른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다. 1986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 신민당 국회의원이던 유성환이 ‘대한민국의 국시는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어야 한다’라는 말을 했다가 구속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때 전두환은 몸싸움으로 저지하는 신민당 국회의원을 전경을 동원하여 막은 채 체포동의안을 가결시키게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대결로 치닫고 있던 정국이 더욱 첨예하게 맞붙게 된 사건이었다.

그때 전경들을 향해 신민당 의원들이 호스를 끌어와서 물을 쏘던 장면이 신문에 나왔다. 전경들은 그 물을 맞으면서도 그냥 대열을 지키면서 신민당 의원들이 의사당에 못 들어가게 하였다. 사람들은 유성환 의원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잘 몰랐고, 신민당 의원들이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만 되풀이 방송하는 텔레비전의 보도만 볼 수 있었다. 전경들은 국방의 의무를 하고 있는데 저게 무슨 고생이냐고 말하며 야당 의원들을 탓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때 신민당 의원들이 ‘하루만 정권을 잡아 보면 좋겠다’고 말했다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었다. 신돌석씨는 그 의원의 말이 정말 공감이 갔었다. 해고된 뒤 몇 차례 끌려가고 심하게 구타를 당할 때마다 정말 하루만이라도 권력을 잡아서 이 새끼들 싹 쓸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권력을 잡고 그 권력이 어떤 모습을 띨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로 그저 그런 생각만 했다.

그런데 그 당시 학생 출신 해고자들은 사뭇 다른 이야기들을 하였다. 신돌석씨와 나중에도 조직 활동을 오랫동안 함께 했던 장선우란 친구는 이 기사를 보고서 ‘니들은 하루가 아니라 한 시간도 못 잡을 거야’라고 하는 것이었다. 신돌석씨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당시의 의식 수준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들을 많이 들을 때여서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채 묻지 못하고 넘어갔다.

나중에 정리한 것이지만 당시의 야당이 정권을 잡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민주당 계열 정당들의 뿌리를 친일지주들을 기반으로 하는 한민당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자체는 틀린 것이 아니다. 지금도 그것을 이야기하면서 민주당을 지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김민호도 민주당 이야기만 나오면 이것을 주장의 근거로 삼는다. 표를 얻기 위해 민주적인 척하지만 그 계급적 이익은 친일지주가 변한 자본가라는 것이다.

그들의 이익 자체가 자본가들을 위한 것이지만 자유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견디기 어려운 파시즘 구조에서 그들이 정권을 잡는 것은 외세나 독점재벌에 용인되기 어렵다는 주장들을 하였다. 그렇다면 혁명밖에는 길이 없다. 하지만 역사는 이러한 주장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민주당 계열의 정당은 이미 세 번이나 정권을 차지했다. 민주당이 정권을 잡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머릿속으로만 단정하는 관념의 소산일 뿐이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민주당 계열의 정당이 정권을 잡을 수 없다고 주장했던 수많은 사람들 중 자신들의 생각이 잘못됐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을 신돌석씨는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그뿐인가? 정권을 잡을 수 없다고 하는 그 정당에 들어가서 국회의원도 하고, 지방의회의원도 하고, 당직자도 하고, 보좌관도 하는 사람들을 신돌석씨 주변에서도 많이 보았다. 심지어 지금의 국힘당 쪽으로 들어간 사람도 적지 않게 보았다. 씁쓸한 일이었다.

신돌석씨는 민주당의 뿌리가 친일지주정당인 한민당이라는 주장이 완전히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민주당이 오랜 세월 동안 변한 점과 현재 하고 있는 역할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자유당 시절에 진보당이 있었지만 그 이외에는 1987년까지 반독재 민주화투쟁에서 대중의 기대를 모은 것은 민주당 계열의 정당이었다. 이것에 대해 조철구는 분단 구조가 낳은 어쩔 수 없는 조건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조철구는 민주당을 자본가의 정당이라기보다는 계급연합 국민정당이란 성격으로 규정하였다. 자신의 견해가 애매하기는 하지만 우리 현실이 그렇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정당이 1987년 대선을 앞두고 분열이 되는 것에 대해 대단히 안타까워하였다. 조철구는 분열된 상태에서 그 정당을 혁신한다는 명분으로 들어가는 것을 반대했다. 신돌석씨는 자세히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한참 동안 조철구의 견해에 대체로 동의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민주당이 중심이 되어 민주주의투쟁이 전개되는 것은 아니리라.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자주통일과 평화를 이루는 데서도 민주당은 많은 한계를 보여왔다. 그렇다면 민주당을 바꾸거나 대체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나와야 한다. 민주당을 바꾼다는 명분으로 재야에서 대거 들어갔지만 그 결과가 생각 같지 않다는 것은 대체로 인정되는 사실이다.

물론 그 결과 민주당이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는 것을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렵다. 민주당을 대체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바로 진보정당일 것이다. 정당 이전의 형태로 그것이 출발되었는데, 그 첫 번째가 바로 1987년 대선에서 백기완 후보 출마였다. 신돌석씨가 속해 있던 조직은 백기완 후보 지지에 소극적이었다. 조직에서 이탈해서 일부가 백기완후보운동본부에 들어가서 활동하였다. 하지만 조직의 공식 방침은 그렇지 않았다.

이유는 역시 민주화운동진영을 분열시킬 수 있다는 우려와 노동계급이 아직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전이므로 노동계급의 조직화에 기여하는 전술이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신돌석씨는 이 논리에 동의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반대했던 것도 아니었다. 이때부터 조직은 노선상의 위기를 맞이했던 것 같다. 대선 방침에 따라 이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당시는 대선에 대한 노선이 뚜렷하지 않은 조직이 유지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신돌석씨는 정치상황이 어떻게 되든 열려진 조건에 따라 열심히 현장투쟁을 지원하는 일을 하였다. 그때는 정말 신났었다. 그렇게 만들기 어려웠던 노조가 여기저기서 생기고, 하루가 멀다 하고 파업을 하는 사업장이 생겼다. 그러다가 공개단체들이 침탈을 당하고 결국 조직이 깨져서 수배자가 되었다. 이후 체포되고 구속되었다가 집행유예로 나온 뒤 공개단체에서 잠깐 일하고 지역을 옮겨서 다시 현장에 들어가 노조활동을 하였다.

수배당했을 때를 제외하면 조철구와 간헐적이라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많은 조언을 들었다. 조철구는 말하자면 신돌석씨에게는 멘토와 같은 존재였다. 그러던 그가 민주노총이 결성되고, 대선을 맞이하여 건설국민승리21이 활동을 시작했을 때부터 행방이 묘연하였다. 나중에 만나서 들었지만 그는 그 몇 년 동안 미국으로 유학 간 아들을 위해서 기러기 아빠로서 대치동 학원에서 논술 강사를 하였다. 신돌석씨에게는 아주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때도 건설국민승리21을 통해 민중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위한 독자후보출마가 옳으냐, 아니면 모처럼 생긴 수평적 정권 교체의 기회에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와 연대하는 것이 옳으냐 하는 논쟁이 격렬하게 일었다. 신돌석씨는 사실 어떤 것이 옳은지를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평소에 의논 상대였던 조철구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서 지역에서 함께 하는 사람들의 견해를 존중하여 건설국민승리21 활동을 하게 되었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사실 그야말로 우리끼리 논쟁을 한 것이지 당시에 김대중 후보측에서는 진보진영과 연대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중앙에서 활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돌석씨는 자세한 것은 알지 못했지만 지역에서도 새정치국민회의 지구당들은 노동운동단체와 연대를 하려 하지 않았다. 재야단체나 시민운동단체에 일방적인 지지를 요구하였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이전에 연대를 해서 별로 득을 보지 못했다는 판단을 했다고 한다.

대선이 끝나고 조철구를 만났고, 학원 강사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신돌석씨로서는 뭔가 지탱하고 있던 기둥이 무너진 느낌이었다. 그 뒤 조철구는 2000년에 학원 강사를 그만두고 충청도 지역으로 내려가서 다시 노동운동을 하였다. 그 뒤로는 거의 보지 못하다가 2009년 세상을 뜨기 직전에 보았다. 췌장암으로 갑자기 건강이 악화된 그가 신돌석씨를 찾았고, 요양하고 있던 강원도의 누이동생 집으로 찾아가서 만났었다.

신돌석씨는 민주당계열 정당에 대해서 건설국민승리21 활동 이전까지는 대체로 조철구의 견해가 맞다고 생각한다. 아니 지금까지도 큰 틀에서는 그의 생각에 동의하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유의미한 점이 많다고 본다. 하지만 그가 건강이 악화된 시기 이후로 진보정당운동은 엄청나게 변화하였다. 민주당계열 정당도 정권을 차지하기까지 하였다. 이제 조철구의 생각만으로는 판단하기 어려운 점들이 많이 있는 것 같다.

민주당계열 정당인 보수야당은 1997년 대선에서 승리하여 우리 현대사에서 최초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1987년에 분열되었던 보수야당이 3당 합당을 통해 보수대연합이 되자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그리고 드디어 정권을 차지한 것이다. 물론 이 정권교체는 보수세력인 자민련과 연대하여 이룬 것이기 때문에 대단히 불안한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 자민련이 정권에서 이탈하게 만들고, 정권 승계까지 가능하게 하였다.

무력할 것만 같았던 보수야당은 어찌됐든 우리 역사에서 커다란 일들을 했다. 김영삼 세력은 3당 합당을 한 뒤 민자당의 일원이 되어 정권을 획득한 뒤 정치군부의 핵심인 하나회를 척결하였고, 금융실명제를 정착시켰다. 김대중 세력은 군사독재의 후예인 자민련과 연대하여 정권을 획득했지만, 남북정상회담과 6.15선언을 이루어냈다. 한 시간도 정권을 못 잡는다는 말이 무색해지는 역사였다.

건설국민승리21 활동은 통합적이고 강력한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10명이라는 국회의원을 당선시켰다. 당시에는 이제 곧 진보정당이 원내교섭단체가 되고, 더 나아가서 집권정당이 될 수 있다는 생각까지 품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보수정당이 아니라 진보정당이 분열에 휩싸였다. 무엇이 원인이고 누구의 책임이라는 것을 따질 것도 없이 결국 민주노동당은 분열되고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신돌석씨는 그때 아주 절친한 후배가 빨리 탈당하라는 문자를 보냈던 것을 기억한다. 패권주의인지 노선 차이인지 정확하게 알기도 어려운 상태에서 분열을 맞이했다. 지금 지역에서 열심히 뛰고 있는 사람들의 거의 대부분이 이 당시 민주노동당 당원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정말 분열이 안타까운 일이다. 신돌석씨는 그 뒤로 진보정당이라도 가입하지 않았다. 아름이는 그럴수록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정당에 가입해야 한다고 아빠를 재촉하곤 했다.

한때는 교차투표가 주위 사람들에게 권할 수 있는 아주 유력한 투표방식이었다. 지역구는 민주당을 찍어도 비례는 진보정당을 찍는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렇게 투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제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사람도 신돌석씨 주위에서는 많다. 이유야 여러 가지인데 그렇다고 이 사람들이 민주당을 지지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닌 경우가 많다. 점점 더 정치혐오에 빠져드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생겼다.

보수야당이 집권을 하면서 큰 일을 해냈듯이 진보정당도 비록 집권은 못했지만 많은 역할을 했다는 것이 신돌석씨의 생각이다. 무상급식, 복지정책 등에서 진보의 가치를 많이 남겨서 보수정당들이 그것을 따라하게끔 만들었다. 그런 것이 바로 진보정당들의 힘인 것 같다. 그런데 지금 진보정당이 민주당에 대한 대안으로 국민들한테 기대되는 것은 솔직히 아니다. 무엇 때문일까? 바로 분열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극복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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