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설마 설마 했던 일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분노하면서도 낙심하고 두려움에 떠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인공 신돌석씨는 이 모든 일이 우리가 진전한 데 따른 역작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거대한 힘인 듯하지만 사실은 몰락하지 않으려는 안간힘일 것입니다.
새로운 것은 시작되었으나 나아가지를 못하고 있고, 낡은 것들이 사라지지 않으려고 완강히 버티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역사를 되돌리려는 세력이 누구이고,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에 쐐기를 박고, 많은 사람들의 힘을 모아서 나가야 합니다.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의 고귀한 삶이 존중받을 때 세상은 제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그 일을 위해 신돌석씨는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그러한 삶들이 모여서 반드시 역사가 다시 제자리를 잡아가고 전진해 갈 거라고 확신합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참여와 응원과 질책을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2023. 9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좌석에 앉아 앞뒤와 옆을 둘러보니 거의 20대 젊은이들이었다. 바로 왼쪽으로 남녀 두 쌍이 있었다. 유니폼을 입고 있었는데 등에는 인기 선수의 이름이 씌어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 중 하나는 이미 은퇴한 선수의 이름이 씌어 있다는 것이었다. 오른쪽으로는 여자 셋이 있다. 이제는 확실히 야구장에 여자들이 많다. 남자보다 더 많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거의 차이가 없다. 그리고 여자들이 굉장히 적극적으로 응원을 한다.

야구장에 오면 언제나 느끼는 일이면서도 양쪽 젊은이들이 지르는 소리에 아내는 정신이 없다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이들은 아마도 응원석에 예매하려고 하다 안 돼서 이리 왔는지 응원단석과 똑같이 소리 지르고 노래를 불렀다. 하긴 이들만이 아니라 1루 내야석 전체가 그런 것 같다. 3루도 상대팀 응원석 일부를 제외하면 모두 그런 듯하다. 외야석도 상당 부분 응원으로 시끌벅적하다. 핸폰 라이트를 켜서 흔들어 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경기가 시작 되면 핸폰 라이트를 꺼달라고 방송에서 말한다. 그러면 일제히 끈다. 사실 이런 점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놀라운 점이다. 외국에서 오래 살다 온 사람들에 의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질서 의식은 굉장하다고 한다. 그것을 권위주의에 오래 길들여진 탓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신돌석씨는 그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시위를 하는가? 그런 가운데 형성된 우리의 문화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신돌석씨 바로 앞에는 노인이 혼자 앉아서 보고 있다. 작은 물병을 연신 기울이는데 소주를 마시는 것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예전에는 술병 들고 들어가는 것을 통제하지 않았고 소줏병을 들고 오는 사람이 꽤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신돌석씨는 나도 나이 들면 저 사람처럼 소줏병 들고 야구장에 와야지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술 반입이 엄격히 통제된 이후에는 팩에 든 소주를 주머니에 넣고 오는 사람들이 생겼다.

지금은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 된 동대문운동장이 서울운동장이던 시절에 신돌석씨는 중학생으로 여름 방학 때 거의 매일 야구장에 온 적이 있었다. 같은 반 친구인 오정원의 아버지가 운동장 관리계장인가 했는데 야구장 무료 관람표를 무더기로 가져 왔다. 둘이서 가기도 하고 신돌석씨에게 주어서 혼자 가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도 좀 신기한 경험이었다. 당시 여름 방학 때에는 봉황대기가 열리곤 하였다.

봉황대기는 신돌석씨가 중학교 1학년이던 1971년에 생겼다. 그 전에는 재일동포 고교생들로 팀을 이루어서 초청 경기를 하였다. 이 팀이 돌아가면서 국내 고교팀과 경기를 하였다. 당시 우승을 휩쓴 팀이 있다면 두 번 하기도 하였다. 신돌석씨가 초등학교 5학년이던 시절에는 선린상고가 우승을 휩쓸었다. 그때 재일동포와 선린상고는 두 번 경기를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런데 이때까지만 해도 신돌석씨는 야구장에 가지 못하고 주로 라디오로 중계를 들었다.

신돌석씨가 야구장에 처음 가 본 것은 초등학교 6학년 시절 여름 방학 때 형 따라서 재일동포팀 초청 야구를 보러 간 것이었다. 당시에 언더스로를 하는 재일동포 투수가 있었는데 그 전해부터 경기를 하러 왔었다. 언더스로는 지금은 별로 특별할 것이 없는 투구인데 당시만 해도 일본에서는 많이 던졌어도 우리나라에는 그런 투수가 거의 없을 때였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 타자들이 속수무책인 경우가 많았다.

5학년 때 신돌석씨 기억으로 거의 모든 야구 경기를 석권하던 팀과 재일동포팀이 맞붙었을 때 이 선수의 언더스로 때문에 한국 고교 팀이 애를 먹었다. 이 팀 투수도 당시로는 초고교급 투수라고 불렸기 때문에 결국 0 : 0으로 비겼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신돌석씨가 갔을 때 이 투수는 상대팀에 홈런을 둘씩이나 맞았다. 그것도 한 선수에게 연타석 홈런을 맞았다. 그것이 고교 야구 최초의 연타석 홈런이라고 하였다.

이 팀은 우승을 했던 팀도 아니었고, 그 타자도 4번 타자도 아닌 2번 타자였다. 한국에 와서 너무 혹사시켜서 그런 결과가 나온 것 아닌가 하는 조심스런 분석 기사가 나왔다. 하지만 다음 다음 경기에서 우승도 했던 한국의 고교팀을 노히트 노런으로 이기기도 했다. 이 선수가 나중에 일본 프로야구에서 뛰었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한다. 가끔 궁금해지기도 하지만 굳이 찾아보지는 않았다.

봉황대기가 생기면서 재일동포 팀은 한 팀으로 참가했다. 이 대회의 특징 중 하나는 대진표를 미리 짜놓지 않고 매 차전을 할 때마다 추첨을 해서 대진표를 짜는 것이었다. 그래서 강팀들이 1, 2차전에서 붙는 경우들도 속출하고 흥미를 더하게 하였다. 그 전 해부터 그해 첫 번째 대회인 대통령배까지 우승을 휩쓸었던 경북고와 그 팀을 청룡기에서 꺾었던 중앙고가 1차전에서 맞붙게 되었다. 진짜 추첨을 한 것인지 그렇게 만든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1차전에서 중앙고는 경북고를 1 : 0으로 이겼다. 이어서 중앙고와 황금사자기에서 9회말 역전승한 군산상고가 2차전에서 맞붙게 되었다. 그러면 그것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였다. 청룡과 황금사자의 대결이라는 것이었다. 봉황대기를 주최한 신문사는 당시 유일한 스포츠신문도 함께 발간하였다. 그래서 그 스포츠신문을 통해서 이런 것을 대대적으로 알리곤 하였다. 두 팀의 대표 선수를 인터뷰해서 야구팬들의 흥미를 돋우는 것이었다.

이때는 아침 10시부터 경기를 시작해서 밤 10시까지 하였다. 밤 10시 이후에는 통금이 있기 때문에 새로운 회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그러다 보니 덜 끝난 경기가 서스팬디드 경기로 되어서 다음 날 오전 9시부터 하는 경우가 많았다. 경기가 이렇게 많은 것은 다른 대회와는 달리 전국의 모든 고교야구팀이 예선 없이 전부 참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신돌석씨 기억으로 당시 고교 야구팀이 48개였다. 거기에 재일동포까지 49팀이 토너멘트 경기를 하였다.

신돌석씨는 오정원과 함께 아침 9시부터 야구장에 가는 날이 많았다. 그때는 야구장이 텅텅 비어 있었다. 그러면 외야로 가서 그늘진 곳에서 한숨 자기도 하였다. 야간 경기가 가까워지면 관중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야간 경기할 때는 경기장이 많이 찼다. 특히 4강 경기가 될 때면 정말 입추의 여지 없이 관중이 들어서고 서울운동장 측에서는 ‘만원사례’라는 글씨를 크게 써서 전광판에 부쳤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른들 즐기려고 어린 학생들을 혹사시킨 셈이었다. 당시에는 5월부터 10월까지 매달 야구 경기가 있었다. 물론 예선도 통과하지 못하는 학교도 있었지만 조금 잘한다는 학교는 거의 매달 서울에 와서 경기를 해야 했다. 그리고 군산상고가 부산고에 역전승한 뒤에는 영호남 대결이 어린 고교생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 결과 나중에 대성할 선수들이 일찍 몸이 상하는 결과도 많이 발생했다. 아니 초고교급이라는 선수들은 거의 그랬던 것 같다.

아침 일찍 야구장에 가면 항상 외야에 소줏병을 놓고 앉아서 야구를 보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할아버지라고 하지만 어쩌면 지금 신돌석씨의 나이보다 적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 사람이 신기하게 느껴졌던 것은 홈런을 정확하게 맞힌다는 것이었다. 딱 소리가 나서 그가 벌떡 일어나면 홈런이었다. 오랜 경험에서 나온 직감인 모양이었다. 앞에 앉은 사람을 보고 문득 그 생각이 떠올랐다.

1루 지정석에 앉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신돌석씨가 응원하는 팀이 먼저 1점을 내었다. 볼넷으로 나간 선수가 도루를 하여 2루에 갔고, 이어서 나온 친구가 우중간 안타를 치면서 불러들였다. 한 점을 얻자 관중석에 난리가 났다. 일어나서 한참 동안 응원가를 불렀다. 신돌석씨와 아내는 왠지 뻘쭘해졌다. 물론 기분이 좋고 응원하고 싶은 마음도 생겼지만 왠지 함께 어울리는 것이 쉽지 않게 느껴졌다.

앞에 앉은 노인은 그냥 앉아서 보기만 하였다. 결국 나이가 많은 사람이 여기 앉은 것이 어울리지 않은 짓을 해서 젊은 사람들 불편하게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면 지갑을 열어서 홈플레이트 뒤에 있는 특석에 앉아 점잖게 보아야 하는 것일까? 1루석 전체를 둘러 보면 가족 단위로 3대가 함께 온 듯하게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괜히 주눅이 들어서 그러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계속 관람을 하였다.

4회말에 한 점을 냈는데 바로 이어서 5회초에 2점 홈런을 맞아서 역전을 당했다.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았지만 응원구호를 외치거나 응원가를 부르는 것은 멈춰지지 않았다. 그리고 6회말에 3점 홈런을 쳐서 다시 역전을 했다. 홈런을 친 선수는 3번 타자로 현재 홈런 1위를 달리고 있다. 29호 홈런을 친 것인데, 100타점 30홈런 100안타를 기록할 것이라는 예정이다. 거의 꼴찌 수준에서 홈런 1위인 선수가 나온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다시 관중석이 뒤집어졌다. 이때는 신돌석씨도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서서 손을 흔들었다. 아내도 조금 있다 따라 일어나서 응원구호를 외쳤다. 젊은 사람들은 서로 얼싸안고 소리를 질러댔다. 신돌석씨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열기가 시위 열기로 만들어지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아내에게 이야기해 볼까 하다가 핀잔이나 들을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이것도 직업병의 일종일까.

이제 필승조 투수들이 3회만 잘 막아주면 이기는 게임이 된다. 정말 오랜만에 대전까지 와서 직관을 하는데 기왕이면 승리하기를 바랐다. 신돌석씨는 직관을 하면 승률이 높은 편인데 응원하는 팀이 워낙 못해서 요즘은 직관을 잘 안 하는 편이었다. 오늘 모처럼 힘찬이가 엄마 아빠한테 초대를 해서 야구를 보는데 같은 값이면 붉은 치마라고 이겨야 기분 좋게 결혼기념여행을 마칠 것 아닌가. 하지만 승부야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니 조바심 낼 것 없겠지.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7회초에 필승조의 투수로 교체되었고 잘 막아내었다. 7회말에 추가점을 올리지는 못하였다. 그런데 8회초에 대거 석 점을 빼앗기면서 다시 역전이 되었다. 필승조라고 하는 투수가 연속 안타를 맞고, 바꾸었는데 또 맞아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경기 자체는 흥미진진하게 진행되었다. 이제 다시 역전을 하면 될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이건 또 뭔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경기가 중단되었다.

신돌석씨는 비가 오리라는 생각을 못해서 우산을 준비하지 못했다. 역시 아내가 이럴 때를 대비해서 작은 우산을 가져왔다. 그것을 받쳐 들었다. 오랜만에 둘이 밀착해서 있으니 기분이 새로웠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비옷을 준비해 와서 입었다. 시간이 꽤 흘렀다. 이대로 가면 강우 콜드게임이 된다. 이건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에 앉은 노인은 이길 때도 질 때도 그냥 앉아서 물병만 기울일 뿐이었다. 경기를 관조한다는 느낌이었다.

누군가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응원단석에서는 이미 울려퍼진 구호였다. 8회면 하는 이 팀의 육성 구호다. 상대팀에서 이걸 들을 때는 소름이 끼친다고들 하였다. 비옷을 입고 비를 맞아가면서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왠지 처절함이 느껴졌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당연히 팀이 승리하는 것이겠지. 그런데 이기고 지는 것이야 늘 있을 수 있는 것 아닌가? 더욱이 이 팀은 승률이 매우 낮은데도 왜 이렇게 열심히 응원을 할까?

신돌석씨는 또 다시 개미들이 합창하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촛불시위할 때 비가 와도 비옷을 입고 끝까지 참여하고, 행진할 때도 목이 터져라 외치면서 걷던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들과 이들은 무엇이 다를까? 그들은 의식화되어 있고, 이들은 그런 것을 모르는 무지한 이들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이다. 신돌석씨가 그렇듯이 그곳과 이곳에 함께 있는 이들도 있을 테고, 이곳에는 국힘 내지는 일베인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절절한 외침과 열기가 왠지 같게 느껴지는 것은 신돌석씨의 지나친 주관일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빗줄기가 가늘어지다가 그쳤다. 운동장 정리를 하고 경기를 이어나가겠다는 방송이 있었다. 서 있던 사람들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8회초가 다시 이어졌다. 바뀐 투수가 잘 막아내고, 8회말이 되었다. 선두 타자가 볼넷으로 나간 뒤 다음 타자가 땅볼을 쳐서 2루로 보낸 뒤 상대팀의 실책으로 3루로 갔다. 이어서 희생플라이로 한 점이 들어왔다.

동점이 되었다. 9회초를 잘 막고 9회말에 끝내기를 하면 된다. 관중석의 분위기는 다시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9회초는 잘 막아냈다. 기대되는 9회말이었다. 첫 타자는 아까 3점 홈런을 친 선수였다. 선수 이름에 홈런을 붙여서 외치는 소리가 운동장을 들었다 놓았다 할 지경이었다. 3구째 친 공이 왼쪽 담장 근처까지 갔는데 그만 잡히고 말았다. 이어서 4번 타자도 뜬공으로 죽었다.

관중석이 실망으로 가라앉아 갈 때 5번 타자가 좌중간 2루타를 쳤다. 이 선수는 몇 년 전에 프로데뷔 첫 경기에서 대타로 나와 1구에 홈런을 쳐서 화제가 되었었다. 끝내기 홈런이라도 기대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좀 아쉽기는 했다. 그래도 2루타를 쳤으니 다시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이어서 볼넷 몸에 맞는 볼로 만루가 되었다. 상대팀에서 투수를 바꾸었는데 이 투수가 폭투를 하는 바람에 그냥 끝내기가 되어 버렸다.

조금 싱겁기는 했지만 어쨌든 극적인 승리가 되어 관중들은 열광을 하였다. 신돌석씨와 아내도 일어나서 힘차게 박수를 치고 구호도 따라서 외쳤다. 앞에 앉은 노인도 일어나더니 구호는 외치지 않고 박수를 쳤다. 결국 이긴 것이다. 그것도 상대의 자멸로 이겼다. 야구가 인간사를 잘 보여준다고 말들 하는데 이번에도 그런 것 같다. 내가 잘 하는 것보다 상대가 실수하는 것이 내 승리가 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언제든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외야 쪽에 차를 대놓았으므로 나가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 아까 못 마신 맥주를 마시자고 하면서 호텔 부근 편의점에서 맥주를 샀다. 신돌석씨는 여기 온 관중은 무엇인지를 계속 생각했다. 3S 정책에 놀아나는 한심한 사람들일까? 아니면 사회문제에 무관심한 이기적인 사람들일까?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지 자신들의 궁극적 이익을 위해 이 열기를 쏟아낼 수 있는 사람들일까? 어쨌든 그 답을 유보한 채 신돌석씨는 호텔로 천천히 향했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