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설마 설마 했던 일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분노하면서도 낙심하고 두려움에 떠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인공 신돌석씨는 이 모든 일이 우리가 진전한 데 따른 역작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거대한 힘인 듯하지만 사실은 몰락하지 않으려는 안간힘일 것입니다.
새로운 것은 시작되었으나 나아가지를 못하고 있고, 낡은 것들이 사라지지 않으려고 완강히 버티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역사를 되돌리려는 세력이 누구이고,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에 쐐기를 박고, 많은 사람들의 힘을 모아서 나가야 합니다.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의 고귀한 삶이 존중받을 때 세상은 제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그 일을 위해 신돌석씨는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그러한 삶들이 모여서 반드시 역사가 다시 제자리를 잡아가고 전진해 갈 거라고 확신합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참여와 응원과 질책을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2023. 9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힘찬이가 엄마 아빠 결혼기념일이라고 자기가 사는 대전으로 초대한다고 하였다. 힘찬이는 몇 년 전부터 대전에 가서 사는데 무엇을 하는지는 설명을 해줘도 신돌석씨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컴퓨터 관련되는 일이라는 것만 알 뿐이었다. 수도권에서 그와 관련된 직장을 다니다 대전에 기반을 잡은 선배와 동업을 한다고 내려갔다. 이제 30대 후반이 되었지만 여전히 혼자 사는 힘찬이가 어떻게 사는지 살펴도 볼 겸 아내와 함께 날 잡아서 가보기로 하였다.

사실 신돌석씨 부부는 결혼기념일이 좀 애매하다. 동거를 시작한 날일 수도 있고, 결혼식을 한 날일 수도 있다. 동거를 시작한 날도 무 자르듯 언제라고 말하기도 쉽지 않다. 둘이 각각 살면서 상대방의 방에 가서 며칠씩 머문 적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둘이 합쳤는데 그 날은 정확하게 알 수는 있다. 하지만 그걸 결혼기념일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게 말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결혼식을 한 날은 분명하다. 그런데 동거를 하고도 몇 년이 더 지난 뒤의 일이고, 그때는 이미 힘찬이, 아름이가 태어난 뒤였다. 그러므로 그 날을 결혼기념일이라고 하는 것은 좀 낯간지러운 일이다. 성직자나 주례의 혼인성립선언이나 혼인 서약이 있어야만 결혼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애를 둘씩이나 낳고 사정이 괜찮아져서 결혼식을 했는데 그날을 기념일로 한다는 것은 좀 우스운 일이라고 신돌석씨는 생각하였다.

그래서 힘찬이도 특별히 날짜를 정하지는 않았다. 대략 엄마 아빠가 결혼기념일처럼 이야기하는 날을 잡아서 자기가 대접하겠다고 하였다. 그것이 바로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시작되는 9월이었다. 신돌석씨가 아내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처음 긍정적인 반응을 얻은 날이었다. 대개의 경우가 그렇듯이 아내도 처음에는 일언지하에 거절을 하였고, 그 뒤 한동안 냉랭한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다가 응낙을 한 것이 초가을이었다.

일요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해고를 당하고 1년이 거의 다 되었을 무렵이다. 그 한 해를 어떻게 지냈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아득하기만 하다. 여럿이서 방을 얻어서 살았고, 그러다가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함께 하는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기도 했다. 아내는 주로 같은 공장에서 함께 노조 만들고 해고된 이들과 한 방을 얻어서 같이 살았다. 신돌석씨는 이 공장 저 공장에서 해고된 이들과 함께 지냈다.

아내와 신돌석씨는 1985년 두 번에 걸쳐서 같이 구류를 살았고, 1986년이 되면서는 유인물 배포, 임금투쟁지원, 가두시위참가 등을 함께 했다. 그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정이 들었고, 친숙해졌다. 그해 봄에는 부처님 오시는 날 연등행사 때 같이 시내에 나가기도 했다. 그때 학생 대열에서 터져 나왔던 ‘미제 축출 파쇼 타도’라는 구호가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아내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그날인지 그 다음 번인지 둘이 술을 마실 기회가 있었다. 신돌석씨가 불쑥 고백을 했다. 신돌석씨는 순덕이와 사귀다가 그전 해에 헤어지고 허전한 마음 상태였다. 그러다 보니 더욱 미친 듯이 투쟁에 몰입하였다. 그러다 만난 아내를 보고 이상하게 이 사람은 내 사람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하지만 아내는 냉랭하게 거절했다. 그리고는 둘만이 있는 시간을 만들지 않으려고 했다. 괴로운 시간이었다.

그때쯤 유행했던 노래 중에 양희은이 부른 ‘하얀 목련’이 있었다. 하얀 목련이 지면서 흩어지는 동안 그 노래를 들으며 괜히 울적해지곤 했었다. 그렇게 봄이 가고 여름이 지나고 어떤 상황이 되었는지, 무슨 이유에서인지 솔직히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은 상태에서 둘만 술을 마시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다시 고백하는 신돌석씨의 말에 아내가 완곡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술집에서 나오면서 어깨에 손을 얹었고, 아내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 뒤로 둘이 만나는 일이 잦아졌고, 그해 가을을 넘기지 않고 동거에 들어갔다. 곧바로 힘찬이가 생겼다. 생각해 보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겪는 그저 그런 이야기지만 신돌석씨는 아내와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뭔가 벅찬 느낌이 들곤 하였다. 벌써 30년도 훨씬 더 지난 일이다. 이제 다 성장해서 어른이 된 아들과 딸이 있다. 그 아들이 엄마, 아빠를 생각해서 자리를 마련해 준다고 생각하니 흐뭇한 마음에 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힘찬이는 엄마 아빠더러 대전으로 오라고 하면서 자기 집으로 부르지 않고, 대전에 있는 작은 호텔을 잡아주었다. 옛날을 생각하면서 엄마 아빠가 오붓한 분위기를 느끼라는 것일까? 그리고는 야구장을 예약해 주었다. 처음에는 자기도 함께 셋이서 야구를 보기로 했는데, 갑자기 거래처 사람을 만나야 할 일이 생겼단다. 그래서 아내와 둘이서 야구장에 가서 야구 보고 호텔에 가서 자기로 했다.

신돌석씨 가족은 대전을 연고로 하는 야구팀의 팬이다. 희한한 일이다. 신돌석씨는 서울 출신이고, 부모님은 경상북도와 평안도이다. 아내는 경기도 출신이다. 힘찬이도 주로 경기도에서 자랐다. 그런데도 대전 연고 팀을 좋아한다. 셋이 다 좋아한다. 힘찬이는 한때 그 팀 유니폼도 입고 서울과 대전을 오가면서 응원하러 다녔었다. 그 팀이 워낙 성적이 안 좋아서 그런지 요즘은 시들해졌지만 광팬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

신돌석씨는 어린 시절부터 야구를 좋아했다. 당시에는 부유한 집 애들 아니면 글러브나 배트를 만져보지도 못할 때였다. 한강 모래사장에 내려가서 축구도 하고, 야구도 했다. 포수와 1루수만 글러브를 끼고 나머지는 맨손으로 하는 경우도 많았다. 아홉 명이 모두 글러브를 끼고 하는 일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그러면서 그때 대표적인 인기 종목이었던 고교 야구에 푹 빠져 있었다.

그때 고교 야구는 지역을 대표하는 팀들 간 경쟁으로 인식되었다. 신돌석씨가 중학교 2학년일 때까지는 호남을 대표할 수 있는 이렇다 할 팀이 없었다. 그러다가 그해 7월인가 황금사자기대회에서 군산상고가 결승전 9회말 투아웃에 1 : 4에서 5 : 4로 부산고에 역전하는 일이 생겼다. 그때부터 군산상고는 역전의 명수가 되었고, 호남을 대표하는 팀이 되었다. 적어도 신돌석씨 기억에는 영남과 호남이 대결하는 것은 그 뒤부터였다.

흥미 삼아 이전 기록들을 살펴본 적이 있다. 해방 직후 막 시작된 청룡기대회에서 3연패를 노리던 경남중을 광주서중이 꺾은 기록이 있었다. 당시에는 중학교 5년제였다고 한다. 경남중의 장태영, 광주서중의 김양중이라는 사람들이 초고교급 투수였다는 말을 들었다. 물론 신돌석씨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호남은 그 뒤 불모지가 되었고, 야구도시 하면 대구, 부산이나 인천이 일컬어졌다고 한다.

고교 야구에 푹 빠져 있던 중고교 시절에 신돌석씨는 경북고를 좋아했다. 전혀 연고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경북 출신이었다. 하지만 신돌석씨는 자라면서 아버지의 고향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아버지에게 고향에 대해서도 들어본 적이 없다. 자신이 경북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고모 등을 통해 어렴풋이 들었지만 전혀 실감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희한하게 경북고를 좋아했다.

신돌석씨가 경북고를 좋아한 것은 아마도 야구를 막 보기 시작했을 때 싹쓸이를 할 정도로 강한 팀이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신돌석씨가 중학교 1학년 때인 1971년에 경북고는 모든 대회에서 우승했다. 그리고 2학년 때 첫 대회인 대통령배에서 충암고를 8 : 0으로 완패시키면서 우승컵을 차지했다. 다음 달에 열린 청룡기 결승전은 신돌석씨가 직접 가서 봤다. 그때 아주 오랜만에 서울팀인 중앙고가 4 : 1로 이겨서 경북고의 연속 우승 행진을 좌절시켰다.

이날도 신돌석씨가 경북고를 응원하는 바람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한테 말을 들었다. 그때는 경북고가 너무 독주하니까 관중들이 거의 일방적으로 중앙고를 응원하였다. 그런데도 신돌석씨는 경북고를 좋아했었다. 나중에 생각하니 강한 것이 곧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알게 모르게 자신을 지배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어서 벌어진 황금사자기에서 군산상고가 극적인 역전 우승을 했던 것이다.

고2때 첫 대회인 대통령배에서 광주일고가 경북고를 꺾고 우승했다. 그때 광주일고 4번 타자 김윤환이 고교 첫 3연타석 홈런을 쳤다. 신돌석씨는 그 경기가 있을 때 수학여행을 가서 해운대에 있었다. 거기서 라디오를 통해 이 경기 중계를 들었다. 그때만 해도 스포츠 중계에서 라디오가 커다란 역할을 했었다. 특히 국제경기는 텔레비전 중계가 드물었고 라디오로 듣는 경우가 많았다. 신돌석씨 기억으로는 광주일고가 수십 년 만에 다시 야구 명문이 된다.

프로야구가 생긴 뒤에 군대에 있었고 먹고 사느라 바빠서 이전 같지는 않아도 그런대로 야구를 즐겼다. 그러다가 노동운동을 하면서 안 보게 되었다. 주위에서 프로야구를 보는 사람이 없었고, 그걸 이야기하면 마치 부르주아가 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바쁜 일이 잠시 쉬어가는 듯하던 때인 수배 시절에 다시 프로야구를 보게 되었다. 신돌석씨만이 아니라 사실은 프로야구를 즐기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특히 호남 출신들이 많이 그랬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어느 날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인 인간극장인가 하는 것을 보다가 연습생 출신으로 홈런왕이 된 선수 이야기가 나왔다. 그것을 본 뒤 그가 나오는 경기 중계를 보거나 스포츠 신문을 뒤져서 어떻게 됐는지를 보게 되었다. 특히 홈런왕 2년째이던 해에 한 시즌 홈런 숫자를 자기 등 번호와 같은 숫자인 35호를 기록했고, 그 다음 해에는 당시로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40호를 넘겨서 41호 홈런을 기록했다.

그에게 열광했고 그러다 보니 그가 소속된 충청도 연고팀을 응원하게 되었지만, 막강한 투타 전력을 지니고도 번번이 우승을 놓치자 다시 프로야구에 대해 시들해졌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그냥 포스트시즌이 되면 볼까 말까 할 정도로 관심이 멀어졌다. 그러던 신돌석씨가 다시 야구에 관심을 갖게 만든 것은 힘찬이었다. 힘찬이가 희한하게도 충청도 연고팀의 팬이 된 것이었다. 정말 신기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것에도 유전자가 있는 것일까?

나중에 알고 보니 힘찬이도 그 팀의 뛰어난 선수를 좋아하다 팀까지 응원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역시 스타가 팬을 끌어들이는 것 같다. 아내는 중고교 시절이 없이 공장을 다녔으니 야구를 좋아한다는 일은 없었다. 특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면서 그런 것을 즐길 여유가 없었으리라. 그런데 힘찬이가 좋아한다고 하니까 함께 보기 시작하다가 어느새 팬이 되었다. 아름이까지 넷이서 한 팀을 응원했는데 워낙 성적이 안 좋아서 다들 시들한 상태가 되었다.

그러다가 올해 들어서 조금씩 텔레비전으로 보곤 했는데 뜻밖에도 힘찬이가 표까지 예매해 주어서 보러 오게 된 것이었다. 집에서 아점을 먹고 느긋하게 출발하였다. 토요일인데도 그다지 밀리지 않았다. 야구장으로 갈까 호텔로 갈까 하다가 호텔로 향하였다. 그런데 그것이 불찰이었다. 체크인을 하고 4시 반쯤 나왔는데 야구장 부근에 도착하니 5시가 조금 넘었다. 그런데도 주차할 곳이 없었다. 야구장 부근의 골목 여기저기도 모두 꽉 차 있었다.

이런 것을 데자뷔라고 하던가. 몇 년 전에도 힘찬이와 셋이 왔다가 이런 낭패를 당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야구장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식당 앞에 대고 양해를 구했다. 식당 주인도 같은 팀 팬이라면서 흔쾌히 그러라고 했었다. 또 그런 곳을 찾아야 하나 하면서 부근을 돌아다녔는데 비슷한 곳도 없었다. 그러다가 골목으로 들어가서 외야 입구가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주차할 수 있는 자리마다 차가 들어차 있었다.

아내에게 먼저 내려서 발권을 하라고 했다. 힘찬이가 온라인으로 예매하고 보내준 표를 체크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신돌석씨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주차할 곳을 찾았다. 도무지 그럴 곳이 없었다. 대전구장에 몇 차례 왔었는데 이렇게까지 주차 자리가 없었던 적은 없었다. 막 사정하면 슬쩍 열어 주고 그러면 어떻게 한 자리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이미 경기 시작 시각인 6시30분이 넘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데 아내한테서 전화가 왔다. 외야 구장 입구에 나간 차들이 있어서 주차할 수 있단다. 그런데 낭패인 것은 거기서 나와서 돌아다니다 보니 거기에 어떻게 갈 수 있는지를 알기가 어려웠다. 간신히 입구를 막고 있는 직원에게 물어서 찾아갔다. 경기가 이제 막 시작됐는데 왜 나간 차들이 있는지 의아했다. 알고 보니 바로 옆에 수영장이 있는데, 거기 온 차들이 나간 것이었다.

외야로 들어가서 1루 내야까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걸어갔다. 도중에 치킨을 파는 곳이 있어서 한 마리 사고 콜라도 샀다. 신돌석씨가 운전해야 하므로 맥주는 사지 않았다. 아내더러 마시라고 하니 호텔에 들어가서 같이 마시자고 한다. 이미 경기는 3회에 접어들었다. 아직 0 : 0이었다. 그런데 외야까지 정말 발 디딜 틈 없이 꽉 차있었다. 오래 전부터 이럴 때는 중계방송하면서 ‘입추의 여지’가 없다고 하였다.

신돌석씨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모른 채 오랫동안 썼다. 나중에 알고 보니 송곳을 세울 틈도 없다는 뜻이었다. 내야 쪽 좌석은 꽤 가팔랐다. 위쪽으로 올라가서 지정석을 찾아 가 앉으니 어찔한 느낌이 들 정도로 높게 느껴졌다. 거기서 3루쪽과 외야쪽, 홈플레이트 뒤쪽 특석 등을 보고 있자니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모여 있는 것이 신기하게 여겨졌다. 이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여기 모여서 집중하고 있을까? 답답하지는 않나?

그러다가 갑자기 이 모든 사람들이 개미처럼 생각되었다. 수많은 개미들이 모여서 누군가의 뜻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듯하였다. 결국 작은 행복을 탐하는 개미떼 같은 사람들의 돈을 누군가 빨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순간을 즐기고 있다. 그들은 자기 눈 앞의 행복을 빼앗지만 않는다면 그것이 누구의 주머니로 들어가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들이 부르는 거대한 합창이 신돌석씨 귀에 들리는 듯하였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