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다시 이어가겠습니다

다시 봄이 왔습니다.
자연의 봄은 시간이 되면 오지만 역사의 봄은 그렇지 않나 봅니다.
하지만 역사의 봄이 오는 데 함께 했던 사람들은 괜히 들뜨지도 않고, 쉽게 좌절하지도 않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저는 꽃샘추위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물론 며칠 만에 끝나는 꽃샘추위는 아니겠지요.
그러나 우여곡절과 고통스러운 시간을 겪으면서도 민족은, 민중은 의연한 발걸음을 이어왔습니다.
우리 이야기의 주인공 신돌석씨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맨 앞에 서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남들 뒤꽁무니를 따라가지는 않았습니다.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신돌석씨의 삶을 새로 발견하고, 함께 알리고, 서로 배우는 이야기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참여와 응원과 질책을 기다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필자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한강 다리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보이는 한강 다리는 마포대교이다. 신돌석씨가 초등학교 4학년 때 개통되었다. 처음 개통됐을 때는 서울대교라고 일컬었다. 언제부터 마포대교로 바뀌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때가지 이 다리를 수도 없이 건너 다녔다. 초등학교 때와 중학교 때는 그냥 놀러 다니느라 건넜고, 고등학교 때는 날씨가 아주 나쁘지 않을 때면 걸어서 건너서 통학을 했었다.

다리가 생기기 전에는 강둑 아래로 백사장이 있었다. 장마철이 되면 강물이 강둑까지 올라왔다. 넘은 적이 있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반대로 하수구 등에서 물이 역류해서 마포와 공덕동 일대가 강처럼 되어 배를 저어 다녔던 기억은 난다. 백사장이 있던 때는 거기 가서 놀기도 많이 하였다. 배로 물건을 실어 오기도 하고, 뱃놀이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신돌석씨가 보는 앞에서 배가 뒤집어진 적도 있었다. 일어나서 춤추며 놀다가 뒤집어진 것이었다.

몇 살 때인지 아버지와 형과 아침에 백사장에 아침 운동하러 간 적이 있었다. 여름이면 물이 둑까지 올라왔던 기억이 나서 물이 갑자기 몰려들면 어떡하냐고 묻자 아버지는 형과 나를 양쪽에 끼고 헤엄쳐서 나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때 아버지가 얼마나 대단해 보였는지 모른다. 그런 아버지의 위대한 모습이 얼마 안 가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술 때문이었다. 그래서 형은 술을 안 마셨다. 하지만 신돌석씨는 60대 중반이 된 지금까지 술을 줄이지 못하고 있다.

당시에는 겨울마다 한강이 얼었다. 한강이 얼지 않으면 그것이 뉴스거리가 될 정도였다. 스케이트를 타고 한강을 건너서 여의도로 가는 형들이 있었다. 가는 도중에 날이 따뜻해지면서 조마조마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었다. 스케이트가 없는 아이들은 썰매를 타고 건너기도 했는데 썰매로 건너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도중에 돌아오곤 하였다. 요즘은 한강이 몇 년 만에 얼었다고 뉴스가 되곤 하니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일 중 하나였다.

마포대교 북단 있는 곳에 이전에는 전차 종점이 있었다. ‘마포 종점’이란 노래로 유명하다. 은방울 자매가 부른 이 노래는 상당히 유명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종점이 전차 종점이란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기는 전차는 신돌석씨가 초등학교 시절에 없어졌고, 서울과 부산에만 있었으니 그걸 아는 사람은 60대 중반 이상으로 서울과 부산에 거주했던 사람들뿐이었다. 전차만이 아니라 ‘마포 종점’이라는 노래도 사실 이제는 아는 사람을 찾기 쉽지 않다.

4.19세대인 혁신계 어른 중에서 ‘마포 종점’을 좋아하는 분이 있었다. 술자리에서 신돌석씨가 따라부르자 굉장히 좋아했다. 어떻게 아냐고 하기에 제 고향이라고 했다. 농어촌에서 자란 사람들은 자연이 어린 시절 벗이었겠지만 신돌석씨처럼 도시, 그것도 변두리에서 산 사람들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대중가요를 들으며 자랐다. 자연히 대중가요가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마포 종점’에는 영등포, 여의도 비행장, 당인리 등 익숙한 지명들이 나왔다.

‘갈 곳 없는 밤 전차’라는 가사도 신돌석씨처럼 그 근방에 살았던 사람에게는 추억거리이다. 밤이면 마포 종점에 전차들이 서 있었다. 종점이니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동네 형들과 함께 새총을 만들어서 전차를 향해 쏘는 일이 있었다. 그러다 간혹 너무 나가서 건너편 집에까지 날아가기도 하고, 전차 유리창에 맞아서 깨지는 일도 아주 드물지만 있었다. 광복절에 보는 꽃전차도 추억거리로 떠올랐다. 전차 전체를 꽃으로 장식해서 운행하는 것이었다.

마포 종점과 전차 하면 신돌석씨에게는 쉽게 잊히지 않는 기억이 있다. 전차에 가려서 버스에 어린 여자아이가 교통사고를 당한 것을 목격한 것이었다. 전차가 서 있는데 아이가 길을 건넜고, 미처 발견하지 못한 버스가 그 아이를 쳤다고 하였다. 그 동네 아이라고 하였다. 당시에 대여섯 살 된 것 같다. 한강 부근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목격하였다. 그 아버지의 망연자실한 표정이 지금도 뇌리에 남아 있다.

한강 다리에 들어서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오늘 비가 많이 내린다는 예보가 있었다. 그래서 과연 행진을 할 것인지가 관심이었다. 그런데 유가족협의회와 시민대책위는 신속처리안건에 올리는지를 결정하는 날이기 때문에 폭우가 쏟아져도 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예상 외로 기자회견 할 때나 행진을 시작하고 한참 지날 때까지 비가 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다리를 건너면서 빗방울이 떨어지는 한강을 보게 되었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이 다리를 건너서 여의도로 들어갈 때의 기억이 있다. 1988년인 것으로 기억한다. 노동절 기념행사를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했다. 아마 최초로 합법적으로 공개된 방식의 노동절 행사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민주노총이 생기기 전이고, 전노협도 생기지 않았을 때였다. 주최는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와 대공장 노조, 업종노조 들로 구성된 행사준비위였을 것 같은데, 신돌석씨야 그냥 참여하는 대중의 한 사람으로 정확한 것은 알지 못했다.

행사가 끝나고 행진이 시작되었다. 연대에서 신촌로터리를 지나 공덕동 로터리에서 우회전하고 마포대교로 들어서서 여의도를 지나갔다. 지금 같으면 아마 서강대교로 해서 여의도를 지나갔을 것이다. 그때는 서강대교가 개통되기 전이었다. 여의도 광장을 지나면서 서울교로 진입했을 때 경찰이 막았고, 최루탄을 쏘아서 해산을 시도했다. 대열은 흩어졌고 평화적 시위를 상정한 주최측은 예상 외의 경찰 행동에 당황한 듯 별다른 지침을 내리지 않았었다.

그때 연대에서부터 신돌석씨와 줄곧 옆에서 달리던 사람이 있었다. 서노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바로 전에 나온 사람이었다. 신돌석씨 지역에도 와서 지도라는 것을 하곤 했었다. 당시만 해도 그는 굉장히 급진적인 사람이었다. 삼민헌법쟁취를 주도하던 전노삼민통이라는 조직의 핵심 역할을 하였다고 들었다. 그가 신돌석씨 지역에서 노동자가 삼민헌법쟁취를 주장해야 한다면서 한두 명이라도 현수막 들고 나서라고 요구했었다.

그러던 그가 완전히 극우세력이 되어 성조기 집회에서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윤석열 정부에서 노동문제와 관련된 한 자리를 얻었다는데 민주노총은 물론 한국노총까지 그와 대화하기를 거부하였다. 그가 변한 것을 보면서 신돌석씨는 인텔리의 자기중심적 사고가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자기가 없으면 세상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 것이 합리화되면서 변절하기까지 하는 것인데 조용히 살 수 없는 것이 그들의 비극을 더욱 부채질했다고 볼 수 있다.

노동절 행사 이후 행진하던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신돌석씨를 뚜렷이 기억했다. 신동지라고 부르면서 포옹까지 하고 어깨를 겯고 행진을 하였다. 그가 국회의원이 되고, 도지사가 되었을 때 한 번 찾아갈까 생각도 했지만 그만두었다. 보수정당에 간 것은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래도 노동운동을 했던 사람이므로 아닌 사람보다는 무엇이 나아도 나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잘못된 것임은 그리 오래지 않은 시간 뒤에 밝혀졌다.

그가 변절한 뒤에 광화문 역사에서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신돌석씨가 외면했고, 그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노동계 원로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장에서 부딪혔다. 그가 보자마자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의아했다. 저를 아십니까 라고 물으니 그가 갑자기 손을 빼고는 도망치듯 앞으로 빨리 가버렸다. 아마 누군지 모르면서도 정치인으로 밴 습관이지 않을까 생각이 되었다. 물론 설명하면 알 수는 있겠지만 바로 알아보지는 못했으리라.

그 못지않게 일류대에서도 이른바 상위권 학과에 다녔던 인간 중에 그와는 달리 그렇게 오래 되지 않은 시기에 삶의 행로를 달리한 자가 있다. 그는 2006년이던가 신돌석씨를 만나서 북이 핵실험에 성공했을 때 기분이 어땠냐고 물었다. 솔직히 신돌석씨는 탄압이 거세질까 걱정이 되었다고 했더니 자기는 통쾌하다는 생각을 했단다. 그러던 자가 지금은 진보운동은 친북이라면서 유튜브 등을 통해 떠들고 다닌단다. 기가 막힌 일이다.

신돌석씨는 이런 사람들을 볼 때 차라리 타고난 머리도 좋지 않고 부모도 무관심하여 공부를 못했던 것이 나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의 학습능력만은 부러웠다. 조직 생활을 하면서 학습을 할 때 학생 출신들은 하루 만에 책 한 권을 읽고 핵심을 요약 설명하였다. 물론 학생 출신 중에도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신돌석씨는 도저히 그렇게 할 능력이 없었다. 그들이 하루에 읽는 것을 일주일이나 걸려서 읽을 때마다 과거에 공부 좀 할 걸 하는 후회를 했다.

마포대교 중간쯤 오자 비가 제법 굵어지기 시작했다. 주최 측에서 미리 나누어준 우비를 입는 사람이 늘어났다. 신돌석씨 일행은 그냥 걷다가 마포대교가 끝나는 곳쯤에 우비를 입었다. 여의도를 가로질러 가지 않고 우회전을 하였다. 국힘당사 앞으로 간다고 하였다. 이태원참사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에 반대할 뿐 아니라 훼방까지 놓는 국힘당 앞에서 규탄하겠다는 것이었다. 죽 벋어 있는 여의도 광장의 대로가 보였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여의도 광장을 신돌석씨가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5.16광장이라고 불렀다. 그전에는 여의도비행장이었다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임시정부 요인들이 여의도 비행장에 내렸다가 미군에 의해 되돌아갔다는 이야기는 정말 슬픈 현대사의 단면이다. 김구 주석 등도 여의도에 내려서 장갑차에 실려서 경교장으로 갔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신돌석씨 어렸을 때 이승만의 시신이 여의도 비행장에 내려서 운구차로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동하였다.

둑길 따라 조금 가다가 다시 좌회전해서 국힘당사 앞에 대열이 멈춰 섰다. 사회자의 진행에 따라 발언이 있었고, 규탄 구호가 몇 차례 외쳐졌다. 사실 이태원 참사는 발생부터 이후 대응까지 전적으로 정부 여당에 책임이 있다. 그런데 발뺌하기에 급급하고 국힘당은 야당의 요구에도 한사코 막으려고만 한다 그런 국힘당을 규탄하는 것은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행진대오라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신돌석씨는 민주유공자법 제정 촉구 등을 할 때도 몇 차례 국힘당 앞에 왔었다. 그때마다 국힘당사는 굳게 닫혀 있다. 국회의원은커녕 당직자도 보이지 않는다. 경비 서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다고 알려주는 것이 고작이다. 이제 국힘당이 윤석열의 사당이 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한때 약간의 개혁적 성격이 있는 듯 보였던 것도 다 사라져 버렸다. 검찰독재에 대해 누가 더 충성하느냐만 남은 당이 되어 버렸다.

이어서 민주당사 앞으로 갔다. 민주당은 이번 이태원참사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에는 비교적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신속처리안건을 본회의에 상정하고 개회를 기다리는 이 순간까지 사실 민주당에 대한 믿음은 철석같지는 않다. 그러므로 촉구하고 호소하는 연설이 있었다. 빗줄기는 다시 뜸해졌다. 만약 민주당 내 이탈표가 있어서 부결된다면 그때는 정말 너도 나도 다 죽는 것이다. 민주당에 대해 이런 의구심까지 가져야 한다는 현실이 서글프기는 하다.

길을 건너서 국회 앞에 다다랐다. 농성천막들이 죽 늘어서 있다. 간호법 제정 촉구 천막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 법이 통과되면 뭐하는가? 윤석열이 대통령이라는 권한으로 거부권을 행사하면 그만 아닌가? 한숨이 나오지만 우리는 할 때가지 해봐야 한다. 민주유공자법 제정촉구 농성천막을 지나갔다. 유가협 회장님이 천막을 지키고 계셨다. 얼마 전까지는 단식도 하셨다. 신돌석씨가 입구에서 인사를 드렸다. 이 분은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튼 반갑게 맞아주셨다.

민주유공자법은 얼마 전에 정무1소위를 통과하였다. 그런데 처에서 부로 승격한 보훈부 장관이란 자가 이 법이 통과되면 대통령에게 거부권을 건의하겠다고 방송에 나와서 말하였다. 국회가 입법하는 족족 거부권을 행사하면 도대체 삼권분립은 무엇하러 있는 것일까? 그것도 법 내용에 대해 엉터리로 알고 있으면서 그런 소리부터 한다. 이들의 이념 편향은 정말 눈 뜨고 봐줄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농성장 앞에서 간략한 집회가 열렸다. 유가족 대표의 인사말과 함께 주최측에서 다들 수고했다고 말하고, 곧 국회 본회의에서 신속처리안건 지정 표결을 하니 끝까지 관심을 가져 달라고 하였다. 비는 이제 그쳤다. 유가족과 시민대책위 주요활동가들은 국회 안으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주최한 단체 활동가가 신돌석씨 일행에게 식당에 함께 가자고 했지만 김민호와 최미숙은 빨리 지역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다고 하여 그렇게 하기로 했다.

전철에서 내려서 각자 갈 곳으로 가려고 하는데 최미숙이 텔레그램을 보더니 큰소리로 말했다. 통과되었대요. 유가족들과 시민들이 얼싸안고 있는 사진들이 올라왔다. 그리고 곧이어 본청 앞에서 기자회견도 열렸다. 기자회견에서는 이제 시작이고, 연말 이전에 반드시 이 법이 제정되어야 하고, 그때까지 우리는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겠다는 발언이 있었다. 시민들께 감사드리고 계속 함께 지켜봐달라는 당부도 하였다.

오늘 노란봉투법도 본회의에서 표결하기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누군가 댓글을 올렸다. 오랜만에 민주당이 밥값을 하는 것 같단다. 진작에 그랬어야 했다. 국민들이 180석 가까운 의석을 몰아주었을 때는 입법권을 확실하게 행사하라고 하는 것 아니냐? 세 사람은 땀 흘리고 비 맞으며 걸은 보람이 있다는 듯 서로를 보며 활짝 웃었다. 비는 그치고 먹구름 사이 사이로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첫걸음은 떼었다. 기자회견 발언대로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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