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흔히 먹지라고 말하는 묵지(墨紙)는 언제 발명되었을까? 먹지는 한쪽 또는 양쪽 면에 검은 칠을 한 얇은 종이를 말한다. 이러한 먹지를 종이 사이에 끼우고 골필(骨筆)이나 철필(鐵筆)로 눌러써서 한꺼번에 여러 벌의 복사본을 만든 시기가 있었다.

즉 복사기가 발명되어 사무용기기로 널리 보급되기 이전에 호적등본이나 주민등록등본을 동사무소나 읍⸱면사무소에서 떼려면 등서(謄書) 방법만이 있었다. 복수(複數)의 등본을 뗄 때 먹지를 사용하여 볼펜으로 눌러써서 복수의 등본을 제작하였다.

먹지를 사용하여 한꺼번에 복수의 같은 문건은 만드는 것은, 많이 만들어야 10부 미만이었다. 대체로 5~6부‥‥‥. 이렇게 먹지 사본이 간혹 시중에 나온다. 필자에게도 먹지 사본 문건이 몇 점 있다. 이번에는 그중 한 건의 먹지 문건과 한 책의 생명보고서를 소개하고자 한다.

[신 잡동산이(4)]
먹지 사본과 서글픈 초판본

제주4.3에 대한 민주 측과 수구 측의 인식이 전혀 다르다. 민주 측이 보는 제주4.3은 식민지시대의 민족 자주적 독립운동의 연결 선상에서 있었던 단정 수립 반대의 민주적 의사 표출을 무자비하게 집단학살한 사건이다. 반면에 수구 측이 보는 제주4.3은 공산 폭동이다.

필자는 제주4.3의 70주년(2018년)을 추념하기 위하여, 당시 제주의 한 인터넷 언론에 낡은 문건 한 점을 소개한 바 있다. 2011년인가 2012년경에 어느 현장 경매에서 구매한 문건이다. 문건은 1948년 9월 4일자로 ‘조선교육자협회’의 위원장 박준영이 조선일보 편집국장에게 투고한 글이다.

1. ‘조선교육자협회’에서 먹지로 만든 4.3의 희소한 1차 사료

이 문건이 2~3년여 전에도 눈에 띄더니, 이번 75주년 추념식 전에 제주도에 기증하고자 하여 찾아보았으나, 어느 구석에 박혀 있는지 며칠을 찾아도 안 나온다. 하여 그 문건의 기증은 후일로 미루어야겠다. 다만 그 전문을 여기에 다시 소개한다.

“1948년 9월 4일
서울시 중구 다동 62
조선교육자협회
위원장 박준영(朴俊永) (조선교육자협회 직인)
조선일보 편집국장 귀하
긴박한 제주도 사태에 관하여
제주도에 또다시 800명의 무장토벌부대가 파견되었다고 전한다.

어느 때 보다도 결정적이고 처참한 민족상잔의 비극을 꾸미려고 발광한다. 이것이 대한민국이니 정권이양이니 떠들기 좋아하는 매국 멸패족의 무리들이 나날이 심각하여 가는 민생고는 본체만체 수해이재민의 참상에도 귀를 막고 인민에게 보내는 최초의 선물인 것이다.

폭력으로서 자주독립의 민족의지가 말살되는 것이라면 어찌하여 파시스트 독일과 일본은 패망하였느냐? 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위하여 싸우는 제주도(濟州島) 인민에게 학살로서 임하는 것은 결단코 조선인민의 의사일수 없다. 외제(外帝)와 파시스트와 그에 맹종하는 괴뢰들 외에는 아모도 이 반족적인 처사를 묵인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몇 놈의 특권배를 위하여 조국을 열애하는 죄 없는 인민의 수많은 생명이 외제의 최신식 무기 앞에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애국인민이여! 사태를 정시합시다. 이것이 누구를 위한 살상이며 또 뭣 때문에 동포의 생명이 짓밟히어야 하느냐?말입니다. 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쟁취하여야 할 엄숙한 이 순간에 조선최고인민회의에 결집한 애국인민들이여! 망국 멸족적 괴뢰군정의 기도를 일축하고 통일적 중앙정부의 깃발 밑에 구국의 성업을 완수할 시기는 닥쳐왔다. 단결하여서 양군(兩軍)의 물리치고자 양군이 나가는 날부터 삼천리 강산에 독립과 평화가 올 것이다.”

이 문건은 얇은 종이에 먹지를 대고 쓴 먹지 사본이다. ‘조선일보’라고 명기한 부분은 청색 잉크로 쓴 것을 보면 아마도 조선교육자협회가 다수의 사본을 만들어 당시의 언론사에 배포한 것 같다. (글자가 매우 흐리게 보이지만 판독은 가능하다. 옮기면서 한자는 한글로 바꾸었다.)

이 문건이 1948년 9월 4일에 만들어진 것은 남한이 정부를 수립한 8월 15일로부터 20일 후이고, 북한이 정부를 수립한 9월 9일로부터 5일 전이다. 이 시기는 제주에서 무차별한 살육이 벌어지던 초기이다.

조선교육자협회 위원장 박준영의 이름으로 만든 이 문건의 주목되는 점은 “자주독립의 민족의지……, 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위하여 싸우는……” 등등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이 문건은 제주 4.3의 기저(基底, 밑바닥)에는 통일과 독립을 향한 의거적(義擧的) 성격이 있음을 말하여 주고 있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미군이 1950년 전쟁 중에 평양에서 노획한 문건에, ‘김달삼은 1948년 8월 25일 해주에서 열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 ‘입후보자에 대한 토론’ 시간에 토론자로 나서 제주4·3 무장봉기의 발발 원인에 관하여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실시에 따른 분노가 폭발해 벌어진 자연발생적인 총궐기”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제주4.3은 남로당의 선동 영향보다는 도민들의 저항과 분단에 대한 분노로 인하여 발생한 것으로 보아야 하므로 제주4.3은 사태가 아니라 ‘제주 4.3은 의거’라고 불러야 마땅한 것은 아닐까?

그런데 ‘조선교육자협회’는 1946년 2월에 ‘조선교육혁신동맹’을 모체로 하여 결성된 전국 규모의 교원단체였는데, 그들이 내세운 교육이념은 ‘진보적 민주주의 교육’이었다. ‘진보적 민주주의 교육’은 교육기관의 국가관리, 민주적⸱과학적 교육을 통한 민주주의 국가건설, 과학⸱기술⸱직업교육, 여성의 해방과 계몽을 위한 교육 등을 강조한 것이었다. 그들의 활동은 일제 식민지 교육을 청산하고 새 국가에 맞는 교육개혁을 이루고자 한 진보적 교육자들의 실천이었다.

이 협회를 주도한 인물은 학자, 학교장, 일반 교원 등 다양하였다. 창립 전반기의 핵심인물은 조선인민당의 이만규와 조선공산당의 김택원이었으며, 중도 인물로 윤일선 조용욱 등도 함께 활동하였으므로, 창립 전반기에는 이념적 색채가 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946년 후반 이후의 후반기를 주도한 것은 김택원, 박준영, 정갑, 최종환 등 좌파 인사들이었고, 그들은 미군정의 교육정책을 비판하고 견제하였으므로 1947년 8월 미군정의 좌익 대검거로 인하여 협회가 약화되었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사실상 해체되었다.

2. 나비 박사 석주명의 [제주도의 생명조사서-제주도 인구론]

[제주도의 생명조사서-제주도 인구론-], 석주명 저, 1949년 3월 30일(초판본). 서울신문사 발행. 필자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제주도의 생명조사서-제주도 인구론-], 석주명 저, 1949년 3월 30일(초판본). 서울신문사 발행. 필자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제주도의 생명조사서-제주도 인구론] 내면지, “謹呈 鄭寅普 先生 著者” 자필 서명(署名) 부분, 석주명의 자필 서명 부분은 아홉 글자에 불과하지만, 그의 단아(端雅)한 필체를 볼 수 있는 아주 소장한 책이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지리교육학과 구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제주도의 생명조사서-제주도 인구론] 내면지, “謹呈 鄭寅普 先生 著者” 자필 서명(署名) 부분, 석주명의 자필 서명 부분은 아홉 글자에 불과하지만, 그의 단아(端雅)한 필체를 볼 수 있는 아주 소장한 책이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지리교육학과 구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제주도의 생명조사서–제주도 인구론]이라는 책이 있다. 나비 박사 석주명(石宙明, 1908~1950)이 1944년 2월부터 1949년 2월까지 약 5년간의 연구를 정리한 책으로, 1949년 3월 30일 서울신문사에서 초판본을 발행하였다.

필자는 이 책 초판본을 10여 년 훨씬 전에 매입하였다. 필자 소장본은 석주명이 민족사학자 정인보(鄭寅普, 1892~?)에게 증정한 증정본이다. 그러니만치 이 책에는 저자의 기증기(寄贈記)가 있으며, 또한 이 책에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지리교육학과’의 고무도장과 ‘팔역문고(八域文庫)’의 소장인도 찍혀 있기도 하다.

저자 석주명은 1944년 2월 7일부터 1945년 4월 5일까지 1년 2개월 동안 제주도의 16개 마을, 4,689호, 4,851명의 부(父) 또는 부(父)였던 이들로부터 인구조사를 시행하였다. 조사된 자료에 대한 분석을 끝내고 책으로 발간된 것은 4년 후인 1949년 3월 30일이다.

조사에서부터 출판에 이르는 사이에 제주4.3사건이 일어났고, 이 책이 나올 1949년에는 조사 대상지였던 마을들을 포함하여 중산간 마을 대부분이 불타서 없어지며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그렇기에 저자 석주명은 이 책의 발간을 포기하지 않은 것 같다.

석주명은 이 책의 서문에서 “이 연구에 착수한 것은 1944년 2월이니 지금으로부터 꼭 만 5년 전이였다. 이 5년이란 세월은 지구 위에서 일어난 인간생활에 있어서의 가장 큰 변동을 포함하여서 그 영향은 우리 제주도에도 미쳤다는 것보다 제주도에야말로 예기치 못하였던 큰 영향을 미쳤고 현재도 그 안정성을 찾기에는 까마득하다. 지금의 제주도의 형편은 해안 일주도로 이상부의 인가가 모두 폐허로 되었다니 이 책에서 다뤄진 토평리, 교래리, 송당리, 성읍리, 오라리, 명월리, 의귀리, 토산리의 반쪽, 저지리 등 8.5부락의 기록은 벌써 역사적 기록으로 되고 만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 따라 해안부락의 인구동태도 격변했으니 이 책은 출판과 동시에 고전으로 되어서 더욱 의의가 있다”라고 안타깝고 참담한 심정을 드러냈다.

제주도는 자녀의 사망률이 높아서 출생 신고가 지연되거나 제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가족 수나 연령이 호적과 일치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적어서 제주도민의 호적은 신뢰할 수 없어 종래의 인구조사에서는 연구의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그는 인구조사라 하지 않고 ‘생명조사서’라고 하였다.

석주명은 제주도 인구 특징을 확인하기 위하여 제주의 문화적 측면을 고려하여 제주도 전체의 모습을 반영할 수 있도록 산남과 산북, 동부와 서부, 해안과 내륙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도록 9개면 16개 마을(토평, 법환, 신하효, 함덕, 교래, 상도, 송당, 성읍, 오라, 명월, 대정(인성, 보성, 안성), 화순, 의귀, 토산, 저지, 용수)을 연구 대상으로 선정하였다. 따라서 ‘제주도의 생명조사서’는 해방 직전 제주도 인구의 특성을 파악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제주4.3 직전의 인구를 밝히고 있는 소중한 자료로서, 그는 제주4.3의 와중에서 제주도민의 생명을 소중히 여겨, 연구를 지속하여 1949년에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석주명의 이 생명보고서를 전후로 한 시기의 인구조사, 즉 1930년 조선총독부의 마을별 인구조사와 해방 후 1950년대 중반과 1960년대 중반의 동네별 인구조사를 취합하여 연구할 필요성이 있다.

3. 제주4.3 관련 문건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위하여

필자는 지난해에 제주4.3평화재단의 고희범 이사장에게 “석주명의 [제주도의 생명조사서–제주도 인구론]이라는 책이 있습니까?”를 물어보았으나, “없는데”라는 답변을 들었다. 이에 필자는 조선교육자협회의 먹지 기고문과 [제주도의 생명조사서–제주도 인구론]을 언젠가 기증하겠다고 결정하였다.

그러던 중 제주도는 금년 2월 하순에 ‘제주4.3기록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하기 위한 추진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수형인 명부를 비롯한 제주4.3 당시의 기록부터 희생자 결정 등 제주4.3 이후에 나온 기록까지 포함한 약 3만 건 정도라고 한다. 역사적인 기록물의 보존과 그 가치를 부여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기에 필자는 기증하여야 할 때 임을 판단하고, 먹지 기고문 등의 자료를 찾았으나 의외로 먹지 기고문이 어느 구석에 들어가 있는지 찾을 수가 없다.

제주4.3의 본질은 집단학살, 집단살해이다. 즉 제노사이드(Genocide)이다. 제노사이드는 “고의로 혹은 제도적으로 다른 민족이나 종족, 다른 인종이나 종교 집단의 전체나 일부를 제거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제주4.3은 정치제도의 목적에서 동족이 동족을 집단학살한 것이므로 20세기 중반의 가장 비참한 제노사이드이다. 제주4.3은 20세기 제노사이드의 대표적인 한 유형(類型)으로 논증되어야 한다. 그러하기에 제주4.3 관련 문건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가 한편으로는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건과 [제주도의 생명보고서]를 필자 일 개인이 소장하기 보다는, 제주4.3 관련 기록으로서의 가치 있는 공적인 위치를 찾아 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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