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1. 점토판과 죽간 및 목간

[갑골문], 은허 출토품, BC16~15세기경. 거북 껍질이나 짐승의 뼈에 새겨진 중국 은(殷), 상(商) 시기의 문자이다. 필자 소장품. [사진 제공 – 이양재] 은허문자(殷墟文字)라고도 한다. 1899년 중국의 왕의영(王懿榮, 1845~1900), 유악(劉鶚, 1857~1909) 등에 의해 하남(河南) 안양(安陽) 소둔촌(小屯村) 은허 유적에서 최초로 갑골문이 발굴된 이래 지금까지 발견된 것은 십여 만 편, 4,600자 내외에 이르며, 1904년 손치양(孫治讓, 1848~1908)이 [계문거례(契文擧例)]에서 해석을 시도한 이래 지금까지 약 1,700여 자가 해석되었다. 즉 갑골문은 아직도 모두 해독되지 않았다. 은대(殷代) 갑골문의 서풍(書風)은 동작빈(董作賓, 1895~1963)에 의해서 5단계로 구분된 바 있다. 대체로 고자(古字)로 아직 완전한 필획의 형태를 갖추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순수한 그림글씨보다는 상당히 진보된 단계로 평가된다.
[갑골문], 은허 출토품, BC16~15세기경. 거북 껍질이나 짐승의 뼈에 새겨진 중국 은(殷), 상(商) 시기의 문자이다. 필자 소장품. [사진 제공 – 이양재] 은허문자(殷墟文字)라고도 한다. 1899년 중국의 왕의영(王懿榮, 1845~1900), 유악(劉鶚, 1857~1909) 등에 의해 하남(河南) 안양(安陽) 소둔촌(小屯村) 은허 유적에서 최초로 갑골문이 발굴된 이래 지금까지 발견된 것은 십여 만 편, 4,600자 내외에 이르며, 1904년 손치양(孫治讓, 1848~1908)이 [계문거례(契文擧例)]에서 해석을 시도한 이래 지금까지 약 1,700여 자가 해석되었다. 즉 갑골문은 아직도 모두 해독되지 않았다. 은대(殷代) 갑골문의 서풍(書風)은 동작빈(董作賓, 1895~1963)에 의해서 5단계로 구분된 바 있다. 대체로 고자(古字)로 아직 완전한 필획의 형태를 갖추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순수한 그림글씨보다는 상당히 진보된 단계로 평가된다.

고대의 메소포타미아에서 사용된 점토판은 인간이 기록을 남긴 최고(最古)의 매체이다. 동아시아지역에서는 종이가 발견되기 이전에는 주로 죽간(竹簡)이나 직물(특히 帛書) 기록을 남겼다. 백서(帛書)는 서사용(書寫用) 비단을 의미한다.

죽간(竹簡)은 대나무를 얇고 가늘고 길게 자른 것을 말한다. 나무를 대나무보다 좀 넓게 잘라 만든 것은 목간(木簡)이라 한다. 대나무로 만든 죽간은 가죽으로 연(連)이어 문헌을 적어 넣어 축본으로 만든 것이 보편적이고, 나무를 잘라 만든 목간은 많은 경우 물표(物標)의 용도로 썼다.

2. 양피지와 식물로 만든 종이

히브리어 [토라]의 보관 케이스와 히브리어 [토라] 양피지 필사본, 연결부위는 실을 사용하여 꿰매었다. 18C(추정), 필자 소장품. [사진 제공 – 이양재]  히브리어는 영어나 한글과는 달리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써 나간다.
히브리어 [토라]의 보관 케이스와 히브리어 [토라] 양피지 필사본, 연결부위는 실을 사용하여 꿰매었다. 18C(추정), 필자 소장품. [사진 제공 – 이양재] 히브리어는 영어나 한글과는 달리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써 나간다.

점토판 이후 이집트에서의 서사 매체는 파피루스였고, 중동 지역에서는 양피지였다. 파피루스는 나일강의 델타 지대와 상류 습지대에서 자라는 사이프러스 파피루스(Cyperus Papyrus, 지초) 풀로 만든 식물성 서사 매체이고, 양피지는 양(洋)가죽으로 만든 동물성 서사 매체이다. 즉 파피루스는 채륜이 개량한 종이에 앞선 인류 최초의 식물성 서사 매체인데, 그 발명 시기는 늦어도 기원전 1,500 이전에, 대체로 기원전 2,000년 이전으로 추정된다.

3. 채륜이 개량한 종이

후한(後漢)의 원흥(元興) 원년(105년)에 채륜(蔡倫, 50년경~121년경)은 자신이 개량한 종이를 후한의 황제 화제(和帝)에게 바쳤는데, 그때부터 종이를 서사 매체로 사용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의 종이를 ‘채후지(蔡侯紙)’라 불렀다. 이렇게 서사(書寫) 매체로서의 종이가 대량 생산되기 시작한 이후에 동아시아지역에서는 책의 공급이 다양화하고 보편화한다.

그러나 채륜이 개량한 종이는 섬유질이 풍부한 나무껍질(木皮)에 마두(麻頭, 삼베 뭉치), 폐포(蔽布, 헝겊 조각), 어망(魚網) 등을 혼합한 것으로 써 엄밀히 말하자면 후대의 피지(皮紙)나 선지(宣紙)와는 다르다.

4. 당대의 마지

돈황사경 [금광명경] 유수장자품 제16 (제4권)’의 끝부분. 필자 소장품. [사진 제공 – 이양재]  당나라 시기의 돈황사경 부분으로, [금광명경] ‘사신품 제17’부터의 제4권을 여러 해 전에 중국 북경보리박매를 통하여 매도하면서 앞 부분 1장을 떼어 놓은 것이다. 이 경은 당나라 시기의 마지에 쓰여 있다. 필자는 뉴욕 소더비와 일본 및 중국에서 입수한 6권의 돈황사경을 소장한 바 있는데, 모두 중국의 중국가덕박매와 북경보리박매에서 경매하였다. 이후 [심경] 1장과 위 사진의 [금광명경] 낱장을 소장하고 있다.
돈황사경 [금광명경] 유수장자품 제16 (제4권)’의 끝부분. 필자 소장품. [사진 제공 – 이양재]  당나라 시기의 돈황사경 부분으로, [금광명경] ‘사신품 제17’부터의 제4권을 여러 해 전에 중국 북경보리박매를 통하여 매도하면서 앞 부분 1장을 떼어 놓은 것이다. 이 경은 당나라 시기의 마지에 쓰여 있다. 필자는 뉴욕 소더비와 일본 및 중국에서 입수한 6권의 돈황사경을 소장한 바 있는데, 모두 중국의 중국가덕박매와 북경보리박매에서 경매하였다. 이후 [심경] 1장과 위 사진의 [금광명경] 낱장을 소장하고 있다.

채후지를 사용한 시기는 짧은 것 같다. 출토된 후한(後漢)의 종이는 모두 마지(麻紙)이기 때문이다. 중국 돈황(燉煌)의 장경동에서 출토된 당대(唐代)로 올라가는 많은 돈황사경은 모두 마지에 쓰였다. 돈황사경 가운데 피지(皮紙)에 쓰인 사경은 오대(五代) 때 만들어진 사경이다. 중국 돈황사경의 감정 기준은 어느 재료로 만든 종이냐? 하는 기준과 서체(書體) 및 이체자(異體字)이다.

5. 고구려지와 신라지와 고려지

중국으로부터 고구려로 전래한 종이는 틀림없이 마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종이가 전래한 시기를 문헌으로 가늠하기란 불가능하다. 다만 고구려의 중 담징(曇徵)이 610년(영양왕 21)에 일본에 종이 제조 기술을 전수한 사실이 있음을 보아, 적어도 4~5세기경에는 한반도에 종이가 전래한 것으로 본다.

그런데 닥나무는 원산 이남에만 자생하므로, 고구려의 종이는 당연히 마지였을 것이고, 백제나 신라의 종이는 닥종이였을 것이다. 1980년대인가에 평양의 고구려 유적에서 발견된 금니사경 단편을 쓴 종이가 마지(麻紙)임이 밝혀진 바 있다. 이를 보면 담징이 일본에 전한 종이 제조 기술은 마지의 제조 기술이었을 것이다.

한편 석가탑에서 나온 목판본 『다라니경』과 일본 쇼소원(正倉院)의 ‘신라문서’, 호암미술관 소장의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은 저지(楮紙, 닥종이)로 만들어진 것이다. 현재 남아 전하는 고려지는 대부분이 저지이며, 때로는 고정지(藁精紙)도 보인다.

6. 고려 색지와 조선 색지

삼국시대 이후로 고려나 조선종이의 기본색은 백색이니 백지(白紙)이다. 그런데 고려에서는 금니와 은니 사경을 쓰기 위하여 흑청색의 감지(紺紙)와 짙은 갈색의 상지(橡紙)가 사용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신라의 종이는 모두 백지이다. 그러나 고구려의 것으로 보이는 사경을 쓴 마지로서의 상지 종이의 조각 일부가 남아 전한다.

고려 이후 조선의 종이는 염색에 따라서 황염초주지(黃染草注紙) · 아청초주지(鴉靑草注紙) · 옥색저주지(玉色楮注紙) · 홍색저주지(紅色楮注紙) · 초록저주지(草綠楮注紙) · 청저주지(靑楮注紙) · 황저주지(黃楮注紙) · 취지(翠紙) · 납지(蠟紙) · 은면지(銀面紙) · 청색지(靑色紙) · 금분지(金粉紙) 등이 있으니, 조선후기로 올수록 그 색상이 다양해졌다. 그러나 대체로 색지는 궁(宮)이나 반가(班家)에서 사용되었다.

7. 종이의 수출

위에서 “고구려의 중 담징(曇徵)이 610년(영양왕 21)에 일본에 종이 제조 기술을 전수한 사실”을 언급하였다. 고구려에서 일본에 전달된 종이 제조 기술은 대체로 마지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 남아있는 7세기의 일본 종이는 대체로 일본산 닥나무를 재료로 하여 만든 왜저지(倭楮紙)이다.

즉 고구려의 종이 제조 기술은 일본으로 전해진 직후 일본 현지에서 생산되는 적합한 종이 재료(材料, 즉 倭楮)를 찾아 개량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한반도의 조선저(朝鮮楮)와 일본의 왜저(倭楮)는 품질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런데 중국에서 고구려와 한반도로 전해진 종이 제조 기술은 상당히 발전하여, 그 개량된 생산물이 중국으로 수출된다. 한때 당나라 말기나 송나라 시기의 중국에서는 신라지 또는 고려지가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고려 천태종의 승려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이 중국의 송판본 [화엄경소] 판목을 수입할 때 송(宋)의 얇은 마지(麻紙)에 검수본(檢受本)으로 찍어온 책이 바가 있고, 조선후기에 조선에서 출판된 여러 관판본 서적에 청(淸)나라에서 만든 백면지(白綿紙)가 사용되기도 한 것으로 보아, 조선산 종이를 중국으로 수출하면서도 옛 중국산 종이가 우리나라에 때때로 수입된 적이 있다.

8. 조선종이의 다양성과 귀중성

위의 ‘6. 고려 색지와 조선 색지’에서 언급하였듯이 염색한 우리나라의 옛 종이는 그 색에 따라 달리 명칭을 하고 있다. 또한 용도나 종이의 두께에 따라서도 명칭을 달리하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종이를 만든 재료가 저피(楮皮, 닥 껍질)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고구려의 종이는 마지이다. 고구려의 마지는 거의 마(麻)로만 만든 종이이지만, 조선시대에는 닥 섬유에 마나 볏짚을 섞어 종이를 만들기도 하였다. 닥에 어느 재료를 몇 퍼센트 정도 섞여 있느냐에 따라 종이의 명칭이 달라진다. 조선전기 세조 때 간경도감에서 찍은 불경 언해본의 초인본은 대체로 닥과 볏짚을 섞어 만든 고정지(藁精紙)를 사용하였다.

종이는 그 시대의 산림 상태와 국가 경제를 돌아보는 척도이다. 임란 직후에는 임란으로 인하여 전 국토의 산림이 파괴되었고 국가 경제가 원활하지 않아 그 시기의 종이는 얇고 품질이 좋지 않다. 또한 신분이 높고 재산이 많은 층에서는 대체로 양질의 종이를 사용하였다.

조선 시대의 사회에서 종이는 최상의 선물이었다. 양질의 문방사우(文房四友)는 왕이 신하들에게 때때로 하사하는 품목이기도 했다. 권문세가(權門勢家)의 창고에서는 누대(累代)에 걸쳐 받아 온 미사용 옛 종이(古紙)가 수백 년간 비축되기까지 하였다.

9. 견과 삼베와 모시

흔히 우리 닥종이를 가리켜 “지천년(紙千年) 견오백(絹五百)”을 말한다. 즉 닥종이는 천년을 가지만 비단은 오백 년을 간다는 말이다. 이 말은 닥종이의 내구성과 보존성이 우수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직물, 특히 비단은 종이보다는 고급 고가(高價)의 서사용(書寫用) 재료였다. 처음부터 그림을 그리는 용도로 제작한 얇은 회견(繪絹)도 여러 종류가 있다. 이러한 그림을 그리는 용도로 직조한 비단(회견)의 경우 일반적으로는 아주 얇은 비단은 배접한 후에 그 위에 그림을 그리고, 조금 덜 얇은 비단은 그림을 그린 후에 배접한다.

고려불화는 배접하지 않은 비단 위에 먹으로 초본을 그리고 그 위에 기본적인 채색을 한 후, 그 그려진 위에 종이를 배접한 후에 배접이 안 된 면에 다시 채색을 입히고 선묘를 따라 그려 넣는 과정을 거친다. 이를 이채법(裏彩法) 또는 배채법(背彩法)이라고 부른다. 고려불화에서 회견을 조달하기가 어려울 때 삼베나 모시 위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배채법을 쓰지 않는 조선중기 이후의 불화에서는 두꺼운 삼베의 표면에 직접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의 회견은 산잠(山蠶)에서 뽑은 생초(生綃)와 양잠(養蠶)에서 뽑은 견(絹)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생초는 그 실의 굵기가 일정하지 못한 특성이 나타난다.

한편 우리는 비단 위에 쓴 글을 백서(帛書)라고 부른다. 우리 역사상 유명한 백서로는 천주교인 황사영(黃嗣永, 1775~1801)이 쓴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가 있다.

 

신(新) 잡동산이

1. 옛 종이에 그려지는 위조 고서화

요즘도 수백 년 전에 만들어진 사용하지 않은 옛 종이가 나온다. 그러한 미사용 고지(古紙) 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써서 옛 서화를 위조한 것을 볼 수가 있다. 우리나라의 가장 초보적인 위조 고서화는 한 작가의 그림을 유사하게 베껴내는 이모(移模) 수준의 그림으로 치졸하기까지 하다. 그것은 글씨도 마찬가지이다.

고화(古畫)에는 4종류가 있다. 첫째가 그림이나 발문이 모두 진짜인 그림이다. 이를 ‘진화진발(眞畵眞跋)’의 그림이라 부른다. 둘째가 그림은 진짜이나 발문이 가짜인 그림이다. 이를 ‘진화가발(眞畵假跋)’의 그림이라 부른다. 셋째가 그림은 가짜이나 발문은 진짜인 그림이다. 이를 ‘가화진발(假畵眞跋)’의 그림이라 부른다. 넷째가 그림이나 발문이 모두 가짜인 그림이다. 이를 ‘가화가발(假畵假跋)’의 그림이라 부른다.

우리나라는 ‘진화가발’인 그림은 거의 없다. ‘가화진발’인 그림은 간혹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대부분의 가짜 고서화는 ‘가화가발’인 셈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고서화 시장의 취약점은 ‘진화진발’의 진품도 그것을 판별해 내는 정직한 감식가의 숫자가 매우 적다는 것이다. 그리고 엉터리들이 세력화되어 있어 고서화 시장을 장악하려 한다.

2. 왜곡된 한국의 미술시장

한국의 미술시장은 크게 왜곡되어 있다. 그 왜곡을 선도하는 주도자가 메이저 경매사이고 메이저 화상이다. S옥션이나 K옥션의 도록을 보면, 우리 재료로 그린 현대 화가들의 한국화(韓國畵) 작품을 모두 고미술로 분류하고 있다. 유화(油畫) 만을 현대미술로 분류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화와 유화의 가격 편차를 심화시켰다. 이것은 그들이 우리나라의 미술시장을 크게 왜곡시키고 있다.

반면에 중국이나 일본의 미술시장은 현대의 중국화나 일본화를 고미술로 분류하지 않는다. 중국에서 근대의 중국화 화가 제백석이나 장대천의 작품 가격을 능가하는 중국의 유화가는 별로 없다. 일본의 경우도 유사하다. 그러나 유독 한국에서만이 유화가 박수근이나 이중섭을 능가하는 한국화 화가가 없다. 한국화와 서양화에서의 수채화는 다르다. 한국화에는 사의(思意)가 중요하며, 서양의 수채화에서는 사의가 필요 없다.

반면에 북한에서는 조선화(朝鮮畵)와 유화는 차별되지 않는다. 오히려 조선화가 유화보다 우대를 받는다. 조선화는 우리의 전통적인 그림이라는 주체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왜곡된 미술시장을 바로 잡아야 한다. 한국의 미술시장이 이렇게까지 왜곡된 데에는 작가들의 책임도 있다. 수요는 적은데 유화 작가들과는 달리 마구 다작(多作)을 해 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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