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는 산(acid)과 같아서, 퍼붓는 대상보다는 그것이 담긴 그릇에 더 큰 피해를 줄 수 있다 – 마크 트웨인

우리나라에도 이런 직업이 있는지 모르겠다. 책 표지에는 저자를 ‘일본 최고 분노 조절 전문가’로 소개하고 있다. ‘분노는 어떻게 정의감을 내세운 마녀사냥이 되었는가?’라는 부제가 무겁게 다가온다. 최근 우리사회의 여러 모습을 보면서 느꼈던 감정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지난 서평에서도 언급했지만 요즘 한국사회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근원에는 거대한 분노가 자리하고 있다.

안도 슌스케 지음 / 송지현 옮김, 『정의감 중독 사회』, 또다른우주, 2023. 3. [자료사진 – 통일뉴스]
안도 슌스케 지음 / 송지현 옮김, 『정의감 중독 사회』, 또다른우주, 2023. 3. [자료사진 – 통일뉴스]

사실 이 책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누구라도 지금 우리사회가 돌아가는 꼴을 보면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과연 제정신인가 싶을 정도로 보이는 무리들이 그야말로 초현실적인 언행을 무한 반복하는 모습, 게다가 그 무리들이 국가를 운영하고,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는 현실.

거대 여야의, 국민의 삶과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이는 정쟁은 이제 아예 그들의 본래 역할인 것처럼 보이고, 사회적 약자가 설 자리는 점점 더 없어지는, 특정 직업의 무리들이 ‘그들만의 리그’로 끼리끼리 해 쳐드실 동안, 언제나 그랬지만 권력을 감시해야 할 거대 언론은 그 권력에 빌붙지 못해 안달이고, 거대한 재벌이자 권력이 된 종교들은 고고하게 뒷짐을 지고 앉아 주판알만 튕기고 있는 바로 이 땅에서 벌어지는 엿 같은 지옥의 모습에 어느 누가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게다가 우리는 코로나19라는 재앙을 2년 넘도록 견디면서 이미 분노의 토양이 충만한 상황이었다. 가난한 이들이 먼저 죽어가는 익숙한 지옥의 풍경이 이어졌다. 타인과의 소통, 접촉이 차단된 사회는 비대면이라는 이름아래 절망과 고독이라는 분노의 씨앗을 끊임없이 키워냈다. 거기에 더해 얼핏 이제는 더 이상 전쟁은 없으리라 믿었던 국민의 염원을 무참히 깨버린 남북관계의 모습은, 과연 이 땅에서 우리가 계속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든다. 도대체 어느 누가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분노에 더해, 우리를 더욱 더 피곤하게 만드는 것에 저자는 주목한다. 나 역시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분노라는 이름의 화풀이, 관음증, 집단마녀사냥이다. 일본 역시 이런 모습들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기에 ‘분노 조절 전문가’라는 직업마저 생기지 않았을까 싶다. 이런 것은 굳이 따라 배우지 않아도 될 터인데, 하지만 이것은 비단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천하고 천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문제가 아닐까.

아니, 어쩌면 인류가 발생한 이래 ‘정의’와 ‘응징’은 늘 있어왔다.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불의를 응징하는 영웅을 언제나 기다려왔다. 동서를 막론하고 영웅은 늘 대중문화의 아이콘이었고, 시대를 불문하고 현실의 혹은 가공의 영웅은 늘 존재해왔다. 우리에겐 임꺽정이나 홍길동과 같은 현실의, 가공의 영웅이 있었고, 헐리우드에서 탄생한 어벤져스는 미국의 이름으로 전 세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도 영웅 대접을 받는다. 슈퍼맨, 배트맨, 아이언맨 등 끊임없이 영웅이 탄생해 공권력을 조롱하며 정의를 지키는 모습을 보면, 미국이 얼마나 정의감에 목말랐는지도 느낄 수 있다. 사실 그 정의를 세계적으로 까부수고 있는 게 미국인데 말이다.

암튼 그렇다면 그 누구에게도 일생의 도움이 안 될 분노는 무엇인가. 이는 언론이 돈을 위해 애써 굳이 알지 않아도 될 ‘욕할거리’를 만들어내는 시스템과 깊은 관계가 있다. 세상에 얼마나 중요하고 모든 이들에게 필요하고 특히 서민들의 삶을 위해 필요한 뉴스가 많을까. 하지만 언론은 그런 문제들을 굳이 다루려 하지 않는다.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사람들의 관심을 단박에 끌 수 있는, 충격적이고 화끈한 소식을 발굴, 혹은 제조해 판매하면 그만이다. 이제 기성 언론을 그야말로 조롱하며, 더 큰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유*브 채널은 가짜뉴스 생산의 코어로 역할한 지 오래다.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을 갑자기 산송장으로 만들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창조해내는 자본주의 시대의 ‘신’이다.

게다가 채널에서는 정치라는 가면을 쓰고 상대에 대한 근거 없는 비난과 음모가 판친다. 쇼킹한 내용이어야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볼 테고, 그래야 돈이 되기 때문이다. 돈 앞에 그 무슨 정의와 가치가 필요할 것인가. 조회수를 위해서는 살인마저 버젓이 일어나는 곳이 바로 유*브인 것이다. 실제 어떤 채널 진행자는 조회수와 돈을 위해 생방송으로 자신의 여자 친구를 추운 겨울에 베란다로 쫓아내 동사하게 만든 일도 있었다. 실화다.

하루 24시간 아무 때나 스마트폰을 열면 채널에 들어갈 수 있고, 온갖 말도 안 되는 모든 사건사고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10분만 지나도 잊어버릴 정도의 가치 없는, 그리고 내 삶과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찰나의 이야기를 보며 어느새 저주의 댓글을 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SNS를 보라. 자신의 주장만 정당하고, 상대의 행동이나 이야기는 전부 다 쓰레기다. 협상이나 토론이 아예 불가능하다. 내 의견에 동조하는 이들과의 소통만 중요할 뿐이다. 상대는 적이고 내편만이 정의인 것이다.

이쯤 되면 아수라 지옥이다. 인터넷과 언론이 만들어내고 있는 지옥이다. 누구라도 걸리면 죽는다. 어떤 잘못을 했는지가 중요하다. 그 이면에 어떤 배경이 있는지, 어떤 사연이 있는지 따위는 관심 없다. 지금 당장 욕먹고 죽어 마땅한 죄인들일 뿐이다. 죄인으로 지목된 이는 극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비정상이 정상으로 둔갑한 이 시대의 모습이다.

저자는 올바른 정의를 이야기함에 있어 ‘빅 퀘스천’을 먼저 생각해보자고 한다. 즉 지금 내가 뿜어대고 있는 분노가 과연 ‘장기적으로 나와 내 이웃들, 그리고 이 사회에 도움이 되는’ 분노인지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물론 그 판단 역시 각자가 스스로 하는 것이지만, 적어도 한 템포 생각할 여지는 줄 수 있다.

내가 지금 이 뉴스에 분노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 절대 신념에 어긋나기 때문인가. 내가 싫어하는 무언가를 건들기 때문인가. 아니면 남들이 다 그렇게 비난하니 나도 어쩐지 해야 할 것만 같아서인가. 내 절대 신념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부모님이 말씀하신 삶의 진리인가. 선배가 이야기해준 진리인가. 내 스스로 만들어낸 기준인가.

인간은 경제학 교과서에 나오는 것처럼 절대 합리적이거나 이성적이지 않다. ‘나도 나를 몰라’가 오히려 더 정답에 가깝다. 때문에 내 행동의 이유를 정작 내가 설명하지 못할 때도 적지 않다. 그 행동으로 어떠한 사건이 발생하고 피해를 입어도 할 말이 없다.

게다가 분노의 대상인 상대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 더욱 더 분노를 터뜨린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헛짓거리일 가능성이 높다. 누군가의 생각을 바꾼다? 나의 절대 신념이 있다면 상대에게도 절대 신념이 있다. 그것이 그리 하루아침에 욕 한 번 세게 먹었다고 바뀔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거대한 분노와 사소한 증오를 구분하고, 정당한 분노와 일순간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분노를 가려내는 능력만 갖추어도 우리는 10년은 더 장수할 지도 모른다. 만악의 근원이 스트레스 아닌가. 하지만 그 스트레스를 위해 되도 않는 분노를 터뜨리는 이가 있다면, 그야말로 어리석은 바보일 것이다.

책은 정의가 쉽게 소비되는 사회에서, 분노가 생겨나는 구조, 나의 정의와 당신의 정의 등을 먼저 살핀 후에 핵심 믿음(절대 신념)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정의감이 폭주하는 조건은 무엇인지, 정의감 중독의 유형은 무엇인지 등을 설명한다. 친절하게도 정의감 중독 체크 리스트도 제공한다. 나는 어떤 유형일까. 그리고 정의감 중독에서 벗어나는 방법, 정의감 중독인 사람과 잘 지내는 방법도 담고 있다.

물론 이건 저자의 생각이고, 의견이다. 우리의 생각과는 다를 수 있다. 실제 인간의 심리나 분노의 근원을 너무 단순화하고 가볍게 다뤘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정작 우리가 진정 분노해야 하는, 진정 정의감을 발휘해야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책의 한계이다.

하지만 책의 미덕은 다른 게 아니다. 거창하게 저자에게 해법까지 기대하진 말자. 다만 왜 내가 이렇게 자주, 사소한 일에도 분노하는가, 그 분노의 근원은 무엇인가. 누가 나를 분노하게 하는가 등을 곰곰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만 주어도 책은 성공이다.

그야말로 사소한 실수를 저지른, 혹은 그냥 내가 몰라도 법적인 처벌을 알아서 받을 이들을 비난하고 매장하고 끝내 죽여 버리기 위해 내 영혼을 갈아 넣지 말자. 그들의 잘못과는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죄악을 저지르면서도 하루하루 오히려 국민을 훈계하며 깝치며 살고 있는 이들이 따로 있지 않은가. 그들에겐 끽소리도 못하면서 사소한 이웃들에게 잘못된 화살을 쏘아대고 있진 않은지 한 번 돌아보자는 것이다.

퇴사 이후 가급적 뉴스를 자세히 읽지 않고 있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쌓아두기만 한 책이 다섯 수레가 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사소한 소식을 접하고 그야말로 사소하고 편협한 분노에 사로잡힌 스스로를 발견할 때가 종종 있다. 수치스러운 일이다. 저열한 자본주의에 무너진 것이니. 때문에 매일 매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것은 결코 만만치 않다. 여러분 모두 분투하고 있다.

다만 사소한 이웃을 죽이기 전에, 우리가 진정 정당한 정의감을 발휘해야 할 이들이 누구인지 먼저 생각하자. 그 거대한 권력을 우리가 당장 때려죽일 순 없겠지만, 적어도 피아식별만 잘 하더라도, 우리끼리 무너지는 꼴은 면할 수 있다. 우리가 스스로 분열하고 무너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오늘도 온갖 권력과 자본을 동원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적이다.

C8, 오늘밤에도 욕이 바람에 스치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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