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월」의 인식과 그 올바른 기념

=「4⋅19」에 즈음한 학도소감의 일부로서=

 

이종률


요사이 우리 학계의 사람들 치고는 거의 현재 노력적 정치실종사태에 대하여 긍정적 태도를 가지지 않는다. 즉 이승만 국민체제의 오늘에 있어서의 유지자라고 보는 민주당에 대해서도 그리고 또 자유당 그날에 있어서의 민주당과 같은 존재 즉 정치적으로는 함께 여당적 존재인 신민당에 대해서도 그러하고 역시 특권의식적 소아사상과 그 분열주의에 집착이 되어 대중의 항쟁적 기대를 저버리고 있는 세?는 바 「혁신세력제당들」에 대해서 그러하다.

그리하여 이들 정치실천인들을 대개 「정치야욕자」 또는 「부동층정객」 기타와 칭호로써 그리 존귀치 않게 부르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 학도들의 상사인 것 같다. 필자는 이 「상사」를 잘못이라고 비난하려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성질의 잘못은 정치실천계에만 한정된 일이 아니다.

학계 더우기 정치학계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실천세계와 이론세계는 반드시 관련성이 있는 것이며 아울러 실천계의 잘못과 이론계의 잘못은 반드시 호조성을 갖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학계의 사람들은 이론적 및 실례적으로 자성해서 알아야 한다.

예하면 첫째, 3⋅15선거의 반민족적 내용을 옳게 인식해 있는 이가 적다하겠다. 즉 3⋅15선거는 투표상의 불법이있었기 때문에 불가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보다도 반민족적인 죄악성은 그때의 자유당이고 민주당이고 양자함께 대중의 열망이며 이 땅 정치난국해결의 열쇠인 민족통일문제를 추호도 거론하지 아니한 즉 양개단정유지를 위한 선거를 감행한데에 있는 것이다. 설령 불법이 아닌 적법선거를 행하여 자유당이 아니라 민주당의 정권이 수립케 되었던들 그것으로써 무슨 색다른 효과가 있었겠는가. 오늘의 민주당정권의 소행을 우리들이 보고 있는바 이대로 가 아니겠는가. 그럼으로써 우리는 3⋅15선거의 투표방법에서의 부정을 문제 삼는 것보다는 그것의 정치적인 면의 반민족성 즉 반민족통일적인 선거를 감행한데에 자유 민주 양당 함께 책임져야할 반민족적 문제성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또 우리들은 「사월혁명」도 아니며 「4⋅19혁명」도 아니며 「제2공화국」도 아님을 인식해야한다. 「정변」 또는 「역성정변」 등 혁명과 구분된다. 「사월」 또는 「4⋅19」의 사태를 일러 혁명이라함은 상식론자들의 무지담이 아니면 혁명아닌 것을 혁명인양 기만하여 대중의 혁명적인 전진을 진무하려는 교화론의 이야기 밖에 더되지 못한 것이다.

「제2공화국」운운함도 「3, 4월」 이전의 사태 즉 한민당 = 민국당 = 자유당 등의 사태에 대하여 불란서 역사에서 귀중히 평가되는 「제1공화국」으로서의 찬사를 붙여주자는 것이 아니면 「3, 4월」 이후의 민주당 정권성격에 대하여 재래와는 다르다는 변이성을 인식시키자는 것밖에 더 되지 못한다. 어느 것이든 간에 사실의 올바른 파악은 아니다. - 이일구 저 「현순간정치문제소사전」 제43항 「제2공화국 운운의 잘못」에 란 참조요망 -

1960년 「3, 4월」에 있었는 그 피의 「민족항쟁」은 우리들의 민족사 건설의 도상에서 극히 높이 평가되는 대중적 항쟁의 하나인 것만은 그 누구도 부인 못한다. 원시평화가 깨뜨려진 뒤부터 이 땅에 있어지게 된 가지 각양의 대중적 항쟁의 혈맥은 예를 들면 임무 농민항쟁로 3⋅1 민족투쟁도 모두 이 「3, 4월 항쟁」에 연결되었고 앞으로 달성될 우리들의 민족혁명과 기타 역사적인 성거엔 반드시 이 「3, 4월」의 항쟁이 하나의 힘으로서 작용을 미치게 되리라.

우리들은 이 항쟁으로써 물론 혁명의 달성은 쟁취하지 못했다. 정치적으로는 하나의 「역성정변」적 현상밖에 더 가져오지 못하게 했다. 즉 왕씨의 개성조가 이씨의 한양조로 바꾸어진 정도의 「역성정변」밖에 더 되지 못하게 했다. 대중의 빈궁과 불우는 왕씨때나 이씨때나 동일하였고 「3, 4월」이전이나 그 이후나가 동일하다. 그러므로 사가들은 「3, 4월」 사태를 혁명이라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들은 특권악행자의 정권은 언제든지 부서지고야 만다는 것을 대중들에게 실증적으로 인식시킬 수 있었고 항쟁하는 대중의 대열에 총탄을 던진 자의 말로엔 반드시 멸망이 있게 된다는 것을 광범위하게 인식시킬 수 있었는 것 등의 권익이 있었다.

그리고 이것과 아울러 오늘에 있어서의 역사사실의 전진적인 변경은 오직 통일적 및 과학적으로 조직화된 각 분야의 대중운동과 또 그 대중운동을 발바탕을 한 통일적이며 과학적인 정치선두투쟁조직이 상설적으로 대중의 일상적인 항쟁생활의 속에서 존재되어 있음으로써만 가능하고 그것 아닌 면의 대중의 자연발생적인 또는 각기 분산적인 항쟁만 갖고서는 그 역사사실의 효과적인 결정적인 전진적 변경은 불가하다는 것을 또 한번 체험에서 절감하게 된 것 등의 권익도 있었다.

극히 유감스러운 일이지마는 이 이외에는 별다른 권익 즉 혁명달성으로서의 권익은 있지 못했다. 그 사유를 여기서 분석하려하지는 않지마는 어쨌든 그 숭고한 피의 항쟁은 아깝게도 「4.26」으로써 중단되고 피의 대가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찾으련가? 정권은 다시 이승만적특권보수의 인사들에게 돌려주고 말았다.

이 일련의 경과를 자성의 위에서 분석비판하여 널리 대중들에게 또 실천의 속에서 이해시키지 못한 채 여기 그 「3, 4월 항쟁」의 절정기의 날인 「4⋅19」를 맞이하게 되니 이 땅 정치과학도의 한사람으로서의 이름을 지니고 있는 필자의 소감 단순치의 아니해짐이 있고 또 자유당 때에 이모저모로 활개를 치던 무리들이 반성은커녕 공공연하게 각종공적행사에 아무 거리낌 없이 나타나고 있는 사실은 「3, 4월」의 정신에 비추어 마땅한 것 같지 않다.

「3, 4월」을 기념하는 제일의 방법은 그 항쟁의 정신을 실천의 속에 계승발전시킨 것이며 아울러 우리 학도들이 지켜야할 그 기념방법의 하나는 전언한바 그러한 정치인식영역의 문제들을 옳게 분석구명하여 그 항쟁정신의 실천에서의 계승발전에 도움이 되게 하는 것일 줄 믿는다.

 

(필자=대학교수)

시론 / 「3⋅4월」의 인식과 그 올바른 기념

시론 / 「3⋅4월」의 인식과 그 올바른 기념 [민족일보 이미지]
시론 / 「3⋅4월」의 인식과 그 올바른 기념 [민족일보 이미지]

時論 
 

「三⋅四月」의 認識과 그 올바른 記念

=「四⋅一九」에 즈음한 學徒所感의 一部로서=

 

李鐘律

 

요사이 우리 學界의 사람들 치고는 거의 現在 努力的 政治實踪事態에 대하여 肯定的 態度를 가지지 않는다. 즉 李承晩國民體制의 오늘에 있어서의 維持者라고 보는 民主黨에 대해서도 그리고 또 自由黨 그날에 있어서의 民主黨과 같은 存在 즉 政治的으로는 함께 與黨的 存在인 新民黨에 대해서도 그러하고 역시 特權意識的 小我思想과 그 分裂主義에 執着이 되어 大衆의 抗爭的 期待를 저버리고 있는 세?하는 바 「革新勢力諸黨들」에 대해서 그러하다.

그리하여 이들 政治實踐人들을 대개 「政治野慾者」 또는 「浮動層政客」 其他와 稱號로써 그리 尊貴치 않게 부르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 學徒들의 常事인 것 같다. 筆者는 이 「常事」를 잘못이라고 非難하려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性質의 잘못은 政治實踐界에만 限定된 일이 아니다.

學界 더우기 政治學界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實踐世界와 理論世界는 반드시 關聯性이 있는 것이며 아울러 實踐界의 잘못과 理論界의 잘못은 반드시 互助性을 갖는 것이다. 이러한 事實을 學界의 사람들은 理論的 및 實例的으로 自省해서 알아야 한다.

例하면 첫째, 三⋅一五選擧의 反民族的 內容을 옳게 認識해 있는 이가 적다하겠다. 즉 三⋅一五選擧는 投票上의 不法이있었기 때문에 不可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보다도 反民族的인 罪惡性은 그때의 自由黨이고 民主黨이고 兩者함께 大衆의 熱望이며 이 땅 政治難局解決의 열쇠인 民族統一問題를 秋毫도 擧論하지 아니한 즉 兩個單政維持를 爲한 選擧를 敢行한데에 있는 것이다. 設令 不法이 아닌 適法選擧를 行하여 自由黨이 아니라 民主黨의 政權이 樹立케 되었던들 그것으로써 무슨 色다른 効果가 있었겠는가. 오늘의 民主黨政權의 所行을 우리들이 보고 있는바 이대로 가 아니겠는가. 그럼으로써 우리는 三⋅一五選擧의 投票方法에서의 不正을 問題삼는 것보다는 그것의 政治的인 面의 反民族性 즉 反民族統一的인 選擧를 敢行한데에 自由 民主 兩黨 함께 責任져야할 反民族的 問題性이 있음을 認識해야 한다.

그리고 또 우리들은 「四月革命」도 아니며 「四⋅一九革命」도 아니며 「第二共和國」도 아님을 認識해야한다. 「政變」또는 「易姓政變」 等 革命과 區分된다. 「四月」또는 「四⋅一九」의 事態를 일러 革命이라함은 常識論者들의 無知談이 아니면 革命아닌 것을 革命인양 欺瞞하여 大衆의 革命的인 前進을 鎭撫하려는 敎化論의 이야기 빡에 더되지 못한 것이다.

「第二共和國」云云함도 「三,四月」 以前의 事態 즉 韓民黨 = 民國黨 = 自由黨 等의 事態에 대하여 佛蘭西 歷史에서 貴重히 評價되는 「第一共和國」으로서의 讚辭를 붙여주자는 것이 아니면 「三, 四月」 以後의 民主黨 政權性格에 대하여 在來와는 다르다는 變異性을 認識시키자는 것밖에 더 되지 못한다. 어느 것이든 간에 事實의 올바른 把握은 아니다. - 李一九著 「現瞬間政治問題小辭典」 第四三項 「第二共和國 云云의 잘못」에 欄 參照要望 -

一九六○年 「三, 四月」에 있었는 그 피의 「民族抗爭」은 우리들의 民族史 建設의 途上에서 극히 높이 評價되는 大衆的 抗爭의 하나인 것만은 그 누구도 否認못한다. 原始平和가 깨뜨려진 뒤부터 이 땅에 있어지게된 가지 各樣의 大衆的 抗爭의 血脈은 例를 들면 壬戊農民抗爭로 三⋅一 民族鬪爭도 모두 이 「三, 四月 抗爭」에 連結되었고 앞으로 達成될 우리들의 民族革命과 其他 歷史的인 盛擧엔 반드시 이 「三, 四月」의 抗爭이 하나의 힘으로서 作用을 미치게 되리라.

우리들은 이 抗爭으로써 勿論 革命의 達成은 爭取하지 못했다. 政治的으로는 하나의 「易姓政變」的 現狀밖에 더 가져오지 못하게했다. 즉 王氏의 開城朝가 李氏의 漢陽朝로 바꾸어진 程度의 「逆成政變」밖에 더 되지 못하게 했다. 大衆의 貧窮과 不遇는 王氏때나 李氏때나 同一하였고 「三, 四月」以前이나 그 以後나가 同一하다. 그러므로 史家들은 「三, 四月」 事態를 革命이라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들은 特權惡行者의 政權은 언제든지 부서지고야 만다는 것을 大衆들에게 實證的으로 認識시킬수 있었고 抗爭하는 大衆의 隊列에 銃彈을 던진 者의 末路엔 반드시 滅亡이 있게 된다는 것을 廣範圍하게 認識시킬 수  있었는 것 等의 權益이 있었다.

그리고 이것과 아울러 오늘에 있어서의 歷史事實의 前進的인 變更은 오직 統一的 및 科學的으로 組織化된 各 分野의 大衆運動과 또 그 大衆運動을 발바탕을 한 統一的이며 科學的인 政治先頭鬪爭組織이 常設的으로 大衆의 日常的인 抗爭生活의 속에서 存在되어 있음으로써만 可能하고 그것 아닌 面의 大衆의 自然發生的인 또는 各基 分散的인 抗爭만 갖고서는 그 歷史事實의 效果的인 決定的인 前進的 變更은 不可하다는 것을 또한번 體驗에서 切感하게 된 것 等의 權益도 있었다.

극히 유감스러운 일이지마는 이 以外에는 別다른 權益 즉 革命達成으로서의 權益은 있지 못했다. 그 事由를 여기서 分析하려하지는 않지마는 어쨌든 그 崇高한 피의 抗爭은 아깝게도 「四.二六」으로써 中斷되고 피의 代價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찾으련가? 政權은 다시 李承晩的特權保守의 人士들에게 돌려주고 말았다.

이 一連의 經過를 自省의 위에서 分析批判하여 널리 大衆들에게 또 實踐의 속에서 理解시키지 못한 채 여기 그 「三, 四月 抗爭」의 絶頂期의 날인 「四⋅一九」를 맞이하게 되니 이 땅 政治科學徒의 한사람으로서의 이름을 지니고 있는 筆者의 所感 單純치의 아니해짐이 있고 또 自由黨 때에 이모저모로 활개를 치던 무리들이 反省은커녕 公公然하게 各種公的行事에 아무 거리낌 없이 나타나고 있는 事實은 「三, 四月」의 精神에 비추어 마땅한 것 같지 않다.

「三, 四月」을 記念하는 第一의 方法은 그 抗爭의 精神을 實踐의 속에 繼承發展시킨 것이며 아울러 우리 學徒들이 지켜야할 그 記念方法의 하나는 前言한바 그러한 政治認識領域의 問題들을 옳게 分析究明하여 그 抗爭精神의 實踐에서의 繼承發展에 도움이 되게하는 것일 줄 믿는다.

 

(筆者=大學敎授)

[민족일보] 1961년 4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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