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이라고 해야 하는지, ‘드디어’라는 표현이 어울릴지, 2021년 1월 20일 미국의 새로운 행정부가 출범함에 따라 트럼프 대통령이 ‘마침내’ 퇴장하게 되었다. 전무후무하게 ‘지저분한’ 퇴장이다. 지난해 선거 직후부터 승리를 장담했지만, 그는 패배했다. 하지만 승복하지 않았고, 미국이라는 나라를 둘로 쪼개버렸다. 급기야 지난 1월 6일에는 그의 지지자들이 의회에 난입해 폭동을 일으켜 사망자가 발생하는 초유의 사태도 벌어졌다. 그토록 자랑하던 미국의 민주주의가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돌이켜보면 트럼프 4년은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 있어 끔찍한 ‘악몽’이었다. 미국 국민의 절반에 못 미치는 이들은 여전히 인정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는 오로지 돈으로 모든 것을 판단했고 움직였다.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미국의 정신과 가치는 중요하지 않았다. 동맹, 기후변화, 이념, 인종 문제 등 모든 것에서 그는 돈을 핵심 키워드로 설정했다. 덕분에 세계는 명백히 퇴보했다. 그 후과는 이제 본격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이 그를 혐오하고 조롱했고 동시에 두려워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의 행동 하나에 자국의 명운이 바뀔 수도 있었으니 충분히 그럴 만했다. 한편 애매모호한 마음으로 그의 행동을 바라보고 기대한 이들도 있었다. 슬프지만 남과 북, 바로 우리도 그들 중 하나였다.

그는 미국 역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으로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지도자와 만나 정상회담을 가졌다. 그것도 두 번이나. 최초로 북의 영토를 밟은 현직 미국 대통령이라는 기록도 세웠다. 싱가포르에서 트럼프와 김정은은 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북미 관계 정상화에 대한 역사적 합의를 이뤄냈다. ‘전략적 인내’를 운운하며, 현실성 없는 정책으로 8년을 날린 전임 오바마 정부와 비교해봤을 때 천지개벽이나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북미관계의 근본적 변화가 오는 것인가,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이후 열린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만난 양 정상은 결국 밥도 같이 안 먹고 서둘러 헤어졌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헤어졌다고 했지만 개소리였다. 유례가 거의 없는 ‘실패한 정상회담’이라는 오명을 피할 수 없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제 살길이 더 급했고, 옆에는 볼턴 같은 훼방꾼이 존재했다. 반면 김정은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을 과하게 신뢰했다. 싱가포르 합의가 언제라도 번복될 수 있음을 그는 미처 알지 못했다. 트럼프가 합의하면 그저 다 이뤄질 줄 알았을지도 모른다.

자, 과거는 과거이고, 이제 판이 바뀌었다. 새로운 플레이어가 등장했고, 그 전에 북은 제8차 당 대회를 통해 전열을 가다듬었다. ‘이민위천’, ‘일심단결’, ‘자력갱생’을 내세웠고, 선군정치 대신 인민대중제일주의 정치를 강조했다. “대외정치활동을 우리 혁명발전의 기본장애물, 최대의 주적인 미국을 제압하고 굴복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지향”시켜나가겠다고 명토 박았다.

우리에 대한 입장도 명확했다. 남북 간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깨닫고, ‘상대방에 대한 적대행위를 일체 중지’하고, 남북 간 합의한 선언들을 이행하라고 촉구했다. 덧붙여 (북의 입장에서) ‘비본질적인 문제’를 들먹이며 남북관계 개선에 관심 있는 척하지 말라며, 남북관계 개선이 전적으로 우리(남측)하기에 달렸다고 엄포를 놓았다. 씁쓸하다.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사를 보면 우린 여전히 ‘비본질적 문제’를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승원, 『바이든 플랜』, 메디치, 2020. 12. [자료사진 - 통일뉴스]
이승원, 『바이든 플랜』, 메디치, 2020. 12. [자료사진 - 통일뉴스]

이제 트럼프 4년 동안 만신창이가 된 미국을 회복시켜야 하는 매우 힘든 과제를 시작하게 된 바이든 행정부는 어떠한 대북정책을 구상하고 실행에 옮길 것인가. 소개하는 책 <바이든 플랜> 저자의 예측대로 몇 가지 시나리오가 가능할 것이다. 우선 오바마 3기가 될 가능성이다. 극히 우울한 시나리오다. 우리에겐 분노의 이름일 수밖에 없는 ‘전략적 인내’가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미국 민주당이 발표한 정강정책을 저자는 이렇게 요약한다. ‘미국은 동맹과 협력을 통해 북한 비핵화라는 장기적 목표를 외교적 해법으로 달성하겠다’고. 여기에 인권문제가 더해진다면 북미협상은 더더욱 쉽지 않을 것이다. 장기적 목표로 외교를 통해… 자칫 최악의 상황을 막아가며 중국, 한국 등의 협력을 통해 북을 그저 ‘관리’하겠다는 안이한 발상이 반복될 수 있다.

이제 바이든 행정부에서 대북정책을 이끌어나갈 인사들의 성향이나 생각도 이를 뒷받침한다. 초대 국무장관 내정자 앤토니 블링컨은 북핵 문제 해결에 대해 “시작하기 어려운 문제”라 표현하며, “모든 선택지에 대한 접근법을 점검하는 것부터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생뚱맞게 오바마 정권 때 이뤄진 ‘이란 핵 합의’ 방식을 북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는 생각을 밝히기도 했다. 매우 생뚱맞은 발상이지만, 정작 본인은 모르는 것 같다.

또 하나의 시나리오는 부시 정부 말기의 상황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즉 2005년 9·19공동성명 도출 시기의 수준으로 돌아가 다시 차근차근 협상을 진전시켜나가는 것이다. 아니면 오바마 행정부 시기 유일한 성과였던 2012년 2·29합의 수준으로 되돌아가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두 시나리오 모두 큰 문제를 안고 있다. 클린턴, 부시, 오바마, 트럼프에 이르는 그 긴긴 시간 동안 북의 핵과 미사일 전력은 비교 불가한 수준으로 높아졌기 때문이다. 바이든 행정부가 원한다 해도 오바마 시기와 똑같은 방식의 ‘전략적 인내’가 사실상 불가능한 이유이다. 핵을 탑재한 미사일이 미국 본토에 충분히 닿을 수 있는 수준까지 왔는데 전략적 인내? 기다리다 죽는다.

오랜 시간 동안 기자로서 남북문제를 취재했고, 이후 북미관계 연구를 통해 내공을 쌓아온 저자는 과거 북미대화의 ‘실패’사례를 통해 바이든 시대 한반도 평화를 위한 해법을 모색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과거에서 교훈을 찾지 못하는 이들은 역사에서 사라져갔다.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외교에서 승리한 사례도 없다. 저자는 북미관계(협상과 대결의) 역사를 살펴보고 동시에 북중, 미중관계를 돌아본다. 또한 이란 핵 합의가 왜 북에게는 적용할 수 없는지, 정치인 바이든, 오바마 정부 부통령 바이든은 어떠한 대북관을 가지고 있었는지 살펴봄으로써 미래를 전망하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저자의 이야기 중 우리가 명심해야 할 부분은 따로 있다. 미국의 대통령이 어떠한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와는 별개로 우리 정부가 어떠한 의지를 가지고, 철학을 가지고 대북정책을 추진하느냐에 따라 상당히 다른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이다. 언뜻 당연한 이야기로 들릴 수 있겠지만, 사실 이 부분을 간과하는 이들이 많다. 패배주의와 사대주의가 만들어 놓은 결과다. 지난 역사는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우리의 외교적 역량에 따라 한반도의 변화는 분명 가능하다는 것을. 좀 ‘심장에 쪼아 박아야’할 말 아닌가!

기껏해야 러시아 정도가 결사반대 수준에서 조금 전향적인 입장이랄까, 한반도 통일을 환영하는 주변 강대국은 없다. 결국 우리가 판단하고 우리가 행동해야 변화가 시작된다.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는 그것을 현실로 보여줬다. 역설적으로 이명박, 박근혜 정부도 이를 여실히 보여줬다. 우리가 어떠한 철학을 가지고 남북관계를 풀어가고 외교적 역량을 발휘하느냐에 따라 평화도, 혹은 파국도 맞이할 수 있다.

저자는 <바이든 플랜>이란 이름으로 이야기를 풀어갔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우리의 정책 즉, <코리아 플랜>일 것이다. 저자의 지적대로 협상무용론자들의 말을 따르자면, 결국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결론밖에 얻을 것이 없다. ‘못 믿을 상대와의 대화와 협상은 필요없다’가 아니라, 그러한 불신을 없애기 위해 대화하고 협상하는 것이다.

우리 정부는 바이든 행정부 출범과 동시에 외교부장관을 전격 교체했다. 신의 한 수가 될지, 결국 ‘회전문 인사’라는 비판만 받다 끝날지는 전적으로 우리 실력에 달렸다. 바이든도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다. 북한은 인민대중제일주의 정치를 구현하겠다고 선포했다. 이제 우리는 전 세계에 ‘한반도평화제일주의’를 선포해야 할 시점이다. 한반도의 평화가 곧 세계의 평화로 이어질테니 말이다. 우리 모두 건투를 빈다.

냉소주의자들에게 ‘협상’은 의미 없는 단어다. 덕분에 그들은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한다. 회의보다 냉소의 독성이 더 강하다. 악마화, 하기는 쉽다. 하지만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더 악화시킨다. 십여 년간 잔인한 전쟁을 벌였던 미국과 베트남은 1995년 국교 정상화를 이뤄냈다. 최악이 아닌 차악의 선택, 더 나쁜 실패보다 덜 나쁜 실패를 도모하는 일, 그러다 기적처럼 생각지도 못한 결과를 맞이하는 것. 모든 것이 바이든과, 그의 파트너로서 방향을 제시할 한국 정부의 의지와 계획과 능력에 달려 있다.(본문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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