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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천리를 걸어서 임시정부를 찾아간 청년들<연재> 임영태의 ‘다시 보는 해방 전후사 이야기’(6)-제1부 해방 전야(4)
임영태  |  ytlim2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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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6.08  10:5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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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이 연재는 매주 월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학병 탈출 후 광복군이 된 김준엽과 장준하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한 사람들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장준하와 김준엽이다. 두 사람은 학병으로 끌려가 중국 전선에 배치되었다가 일본군 부대를 탈출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 광복군이 되었다. 두 사람을 비롯해 광복군 2·3지대 대원들은 임정과 미국의 합작 계획에 따라 미 OSS(전략첩보국) 훈련을 받고 국내침투 작전인 ‘독수리 작전’(Eagle Project)을 준비하였으나 일제의 조기 항복 선언으로 광복군의 국내 침투작전은 무산되었다. 일제 항복 선언 직후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국내에 선발대로 정진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했고, 장준하·김준엽 등은 정진대원으로 최초로 국내로 들어왔다. 그러나 정진대는 일본군의 거부로 여의도 공항에서 다시 되돌아가야 했고, 그들은 임시정부 요원들이 귀국한 뒤에야 국내에 들어올 수 있었다. 

장준하·김준엽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은 회고록을 출간해 널리 알려졌다. 특히 두 사람은 해방 후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사회적 지위와 역할을 맡았던 명사이기도 했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를 굳이 이곳에서 다시 할 필요가 있을까 고민했으나 한 회에 걸쳐 정리하기로 했다. 그들이 일본군을 탈출해 광복군이 되어 OSS훈련을 받고 일제 패망 후 귀국하기까지의 과정은 매우 극적이어서 그 자체로 흥미로운 면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행보가 해방 전후 시기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활동 정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해서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출발점으로 하여 해방 전후 충칭 임시정부의 활동 상황을 살펴보려는 의도도 있다.  

20대 청년 시절 김준엽은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일본군을 탈출해 광복군이 되었다. 그가 일본군을 탈출해 광복군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정말이지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다. 그는 목숨을 걸고 일본군 부대를 탈출한 다른 학병동지들과 함께 수차례의 사선을 넘나드는 등 죽을 고생을 하며 6천리 길을 걸어서 충칭 임시정부까지 갔다.(주1) 

김준엽을 비롯한 학병탈출 후 광복군이 된 이들의 일본군 탈출과 장정 과정에서 겪은 경험은 그 어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볼 수 없는 극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그들에게 닥친 위기와 고난을 불굴의 의지와 투혼으로 헤쳐 나가는 모습 또한 감동 그 자체이다. 그들은 임시정부를 찾아가면서 ‘절대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들이 죽을 고생을 하면서 일본군을 탈출해 임시정부를 찾아간 것은 나라를 찾기 위해서였다. 독립투쟁에 목숨을 걸겠다는 각오를 했기 때문이다. 

김준엽과 그 동지들이 선택한 것은 일제 말기 민족적 지식인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방식 중 하나였다. 일제 말기의 암울한 상황에서 도피가 아니라 적극적인 행동에 나선 것이었다. 그들의 행위는 주목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 김준엽의 회고록 <장정>. 1권과 2권이 독립군 시절 이야기다. 이 책은 자신의 행적뿐만 아니라 당시의 상황과 연관이 있는 독립운동사와 중국사 등을 잘 정리한 교양서이기도 하다. 

학병 탈출 1호가 된 김준엽

김준엽은 1920년 8월 26일 평안북도 강계군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강계에서 소문난 부자였다. 압록강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그의 집에는 낯선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부친은 남만주에서 활약하던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대었다. 그러한 내력 때문에 그의 집안은 해방 후 토지개혁 때도 크게 핍박당하지 않았고 그 바람에 그의 가족들도 뒤늦게야 월남하게 된다. 김준엽은 시대 상황, 집안 환경, 그가 자란 지리적 조건 등으로 인해 어릴 때부터 일제에 대한 반감,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는 1940년 신의주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게이오(慶應)대학 동양사학과에 입학했다. 이 무렵 그는 단파방송을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소식을 듣게 되고 도쿄에 온 여운형을 만나 격려를 받으면서 중국 망명을 결심하게 된다. 

김준엽은 학병으로 가면서 이미 탈출을 마음먹었고, 부대에 배치된 뒤 치밀한 준비 끝에 이를 감행했다. 장준하도 그랬다. 이들은 독립운동을 위한 준비를 하고 학병에 나갔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반학병들과는 차원이 달랐다고 볼 수 있다. 

1944년 1월 20일 평양부대에 학병으로 입대한 김준엽은 2월 25일 중국 서주(쉬저우) 부근 일본군 부대에 배치되었다. 기회를 노리던 그는 꿈에 부친이 나타나 알려준 3월 29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한밤중에 탈출을 결행한다. 공교롭게도 그날 대허가(大許家)와 쉬주(徐州) 사이에 있는 대묘(大廟)까지 완정군장으로 행군하는 훈련 날이어서 탈출에 유리했다. 그는 위기의 순간을 넘기고 4시간을 걸어서 탈출에 성공한다. ‘학병 탈출 1호’로 기록되는 순간이다.(주2) 

   
▲ 1944년 학병에 나가기 전 김준엽이 어머니와 찍은 사진(KBS, <역사스페셜>에서 캡쳐)

김준엽이 일군 부대를 탈출해 처음 만난 것은 중국군 유격대였다. 유격대의 한치융 사령관은 ‘한국혁명지사 김준엽 동지’의 탈출을 크게 ‘환영’해주었다. 김준엽은 이후 약 4개월간 중국군 유격대에서 생활하며 사령관과 참모들의 배려로 기마 훈련도 받고 중국어도 익히게 된다. 그는 중국군을 도와 일본군을 대상으로 하는 선전물을 만드는 일에 참여했다. 7월 9일에는 그가 활동하고 있던 유격대로 장준하, 윤경빈, 홍석훈, 김영록 등 4명의 탈출 학도병이 합류해왔다.(주3) 

이후 일본군 부대장이 조선인 탈출병사 5명과 중국군 포로 30명을 맞교환하자고 제의를 했으나 한 사령관은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중국군의 입장에서는 30명과 5명을 교환하는 것이 유리할 수 있었으나 그들은 의리를 지켰던 것이다.(주4) 중국 국민당군에 대해 항일의지가 부족한 점이 종종 지적되지만 국공합작 이후 국민혁명군의 항일에 대한 의지는 비교적 확고했다. 일제의 패배가 거의 기정사실로 굳어지는 후반기에는 국민당군과 공산당군의 전후 주도권 확보를 염두에 둔 충돌이 점점 격화되면서 문제가 발생했던 것이다. 

   
▲ 시안 사건 당시의 장쉐량과 장제스

김준엽을 비롯한 학병들은 이러한 국공 충돌의 현장을 직접 목격하게 되는데, 그와 같은 충돌로 인해 그들은 유격대에 계속 있을 수 없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다. 1936년 12월의 시안 사건을 계기로 1937년부터 시작된 제2차 국공합작이 1940년 12월 장제스가 국민혁명군을 동원해 신사군을 포위 공격한 신사군 사건을 계기로 사실상 와해되기 시작했다. 이후 국민당군과 공산당의 팔로군-신사군은 일본군에 대항하여 항일전을 벌이면서 동시에 해방지역을 더 확보하기 위해 경쟁하는 관계로 바뀌었다. 김준엽 등이 속해 있던 중국군 유격대가 공산당의 팔로군의 공격으로 사실상 와해되는 상황을 맞았기 때문에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한광반)의 33인

1944년 7월 28일 김준엽 등 5명은 애초 목적했던 임시정부를 향한 장정(長征)에 나섰다. 그들이 통과한 길은 중국군과 일본군 점령지가 겹쳐 있어서 사선을 넘어야 했다. 그들은 중국 유격대의 안내를 받아 장사꾼으로 변장하고 벙어리 시늉까지 해가면서 온갖 기지를 동원해 일본군 점령지를 여러 차례 돌파한 후, 9월 10일 광복군 훈련반이 있는 안후이(安徽)성 푸안(阜陽)현 린취안(臨泉)에 도착했다. 이 과정은 극적인 상황의 연속이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항일전을 치르면서 피폐해진 중국의 경제사정과 군벌의 행패, 인민의 고통을 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중국 무명 애국 청년의 감동적인 행위도 목격했다.(주5) 

   
▲ 김준엽 일행의 일본군 점령지 돌파(김준엽, 『장정-나의 광복군 시절』, 182쪽)

김준엽 일행이 도착한 린취안에서는 3지대장 김학규(1900〜1967)(주6) 장군 휘하 70여명의 광복군이 중국군관학교에 속해 훈련을 받고 있었다. 이와 관련해 장준하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떠밀려 들어간 곳은 중국 중앙군관학교 린취안분교로서, 그 안에 한국광복군 훈련반이 특별히 부설되어 있었다. 이 훈련반엔 김학규가 주임으로 있었으며, 이평산·진경성 두 교관이 주임을 돕고 있었다. 약 4개월 전에 설치되었다고 했다. 일본군에 징병되어 중국지역으로 파견 오는 한국 청년들의 수가 많아졌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공작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에 우리 임시정부와 광복군 총사령부로부터 명을 받은 김학규가 안후이성 푸양이란 곳에 주재하면서 약 1년 전부터 각종 공작을 폈으며, 탈출 학병 외에도 한국 청년들을 모병하여 상당수가 되자 이곳 린촨분교에 정식으로 군사훈련을 요청하여 특설한 것이 이 훈련반이었다. 그동안 한국 청년은 80여 명이나 집결하였다. 계속적인 모병 공작과 격증하는 탈출 학병으로 해서 훈련반은 열을 띠었다.”(주7)

김준엽 일행도 이곳에서 광복군 장교를 훈련하는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한광반)에 편입되어 교육을 받았다. 모두 33명의 탈출 학도병들이 함께 했다.(주8) 김준엽과 장준하, 윤재현 등은 자신들의 전공을 살린 교양강좌를 열어 큰 인기를 얻었고 그 내용을 담아 <등불>이란 잡지를 펴냈다. 이때의 경험은 해방 후 귀국하여 <사상계> 잡지를 창간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등불>은 형편없는 마분지 종이 위에 일일이 붓으로 쓴 원고를 묶어 만든 이 잡지는 2호까지 나왔는데 너덜너덜한 넝마가 될 정도로 부대원들의 큰 인기를 얻었다. 이 책자 표지는 김준엽의 무명팬티를 빨아 마련한 헝겊으로 만들었다. 김준엽 등은 4개월간의 훈련 과정을 거치고 한광반을 졸업하고 중국군 소위 계급장을 달았다.(주9) 

   
▲ 한광반 주임 겸 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 장군과 그의 부인 오광심. 오광심도 광복군 여성대원이었다. 

졸업이 가까워지자 한광반 대원들은 거취를 두고 고민했다. 김학규 주임은 대원들이 그곳에 남아서 광복군의 ‘초모(招募)’ 업무에 종사하기를 바랐다. 학병출신의 엘리트 등 한광반 출신들이 자신의 휘하에 남아서 활동하는 것이 자신의 영향력을 확보에도 유리했던 것이다. 김학규는 충칭에 가보면 알겠지만 당파싸움이 심하고 시끄러운 곳이고 특별히 할 일이 있지도 않다면서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이들은 충칭으로 가겠다는 의지를 꺾지 않았다. 학생시절부터 동경해온 임시정부를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보고, 또한 임시정부를 이끌어온 지도자 김구를 비롯한 독립운동 원로들을 만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던 것이다. 

임시정부를 찾아 떠난 6,000리 대장정 

1944년 11월 21일 김준엽 일행은 처음 목적지였던 임시정부가 있는 충칭을 향해 다시 길을 떠났다. 학병출신 8명과 기타 대원 7명은 그곳에 남기로 했다. 학병출신 25명(주10)을 비롯 6명의 여성과 3명의 아이까지 포함해 모두 53명이었다. 청년들만이 아니라 여성과 아이까지 포함된 복잡한 구성으로 이들의 발길은 더디었고 그만큼 위험 부담도 컸다. 그들이 린취안에서 충칭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은 그 어떤 드라마보다도 극적이었다.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기며 갖은 고생을 다하며 나아간 길이었다. 그들이 걸은 길은 삼국지에 유비와 제갈량이 삼분지계에 따라 촉한 땅으로 헤쳐 나갔던 그 험산준로였다.(주11)

중간에 장준하가 쓰러져 병원에 입원해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는 일도 발생했다. 굶은 일은 다반사였고, 얇은 청색 여름 군복에 맨발에 풀로 만든 초혜(草鞋)를 신고 험한 길을 강행군하며 걸어야 했다. 이처럼 힘든 장정 과정에서 김준엽은 장준하와 평생의 깊은 교감을 나누었다. 김준엽은 두 살 연상으로 결혼까지 해 세상물정과 경험이 앞섰던 장준하를 형처럼 의지했고, 이 과정에서 형성된 두 사람의 동지적 관계는 평생 동안 이어진다. 

그들의 모든 길이 고난의 길이었지만 가장 극적인 순간은 라오허커우(老河口)에서 파촉령을 넘어 바둥(巴東)으로 가는 길이었다. 라오허커우에서 파촉령 정상 대파산은 3,000미터에다가 정상을 넘어 양자강변까지 가려면 2주일이나 걸렸으며, 제비도 날아서 넘어가지 못한다는 고사가 있을 정도로 험하기로 유명했다. 이 험산한 길을 넘어가던 도중 김준엽과 장준하는 호랑이를 만나는 위기를 겪었고, 산속에서 노숙하면서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동지들끼리 끌어안고 밤을 꼬박 세운 적도 있었다. 라오허커우를 떠나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며 꼬박 13일 동안을 걸어서 파촉령을 넘은 일행은 양쯔강 하류가 흐르는 평지 바둥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1945년 1월 23일 일행은 바둥에서 충칭으로 가는 500톤급의 군용선에 탈 수 있었다. 김준엽과 장준하 등은 삼국지의 유비와 제갈량이 촉한 땅으로 헤쳐나가던 그 험산준로를 따라 죽을 고생 끝에 1945년 1월 31일 임시정부가 있는 충칭에 도착했다. 김준엽이 일본군을 탈출한 지 10개월만이었다.(주12)  

   
▲ 김준엽 일행의 장정 6천리 길 행로(김준엽, 『장정-나의 광복군 시절』, 261쪽)
   
▲ 장준하·김준엽 등이 걸은 ‘장정6천리 길’ 행사를 알리는 포스터(사진 장준하 기념사업회) 

충칭에 도착한 뒤 그 감동을 김준엽은 이렇게 표현하였다. 

“부두에 닿자 우리들은 앞을 다투다시피 중경땅에 첫걸음을 내디뎠다. 얼마나 기다렸던 중경인가! 동경시절부터 꿈꾸던 중경! 강제로 학병으로 끌려갈 적부터 꼭 찾으려고 했던 중경! 유격대와 임천, 그리고 노하구에서도 모든 장애를 물리치고 중경행의 집념을 관철했던 나의 뜻은 이제 그 결실을 보아 중경에 힘찬 첫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이다. 임천을 떠난 지 73일, 일본군을 탈출한 지 10개월만에 나는 이 감격의 날을 맞이한 것이다. 1945년 1월 31일, 나는 고난의 장정을 끝맺고 이제 중경에 도착한 것이다.”(주13)  

충칭에서의 실망과 ‘폭탄 발언’ 사건

김준엽·장준하 등은 김주 주석과 임정각료들의 감격스런 환영사와 함께 격한 환영을 받았다. 김준엽 등은 충칭에 머문 3개월 동안 광복군과 여러 단체들의 환영회에 참석했고, 그들을 찾아오는 중국이나 연합국의 기자, 정보기관원들도 만났다. 김준엽과 장준하는 김구 주석의 판공실장(비서실장 격)이었던 민필호(주14)를 찾아가 <등불> 잡지를 속간하기 위한 등사판과 종이를 지원받았다. 

   
▲ 민필호·신명호 부부(항주, 1932.6)(사진=국사편찬위원회)

그러나 임시정부는 온갖 정파들이 난립하면서 서로를 헐뜯는 등 목숨을 걸고 찾아온 청년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있던 여러 당들에서 이들을 집단적으로 가입시키려 했으나 거절하자 개별적으로 포섭하려 난리가 났던 것이다. 충칭 임시정부 주변에는 대략 350여명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청년 50여명이 가입하게 되면 그 당은 최대 정당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목숨을 걸고 일본군 부대를 탈출해 죽을 고비 끝에 찾아온 임시정부의 모습을 보고 실망한 청년들은 실망한 나머지 해서는 안 될 행동까지 하고 말았다.(주15) 

김준엽 일행이 충칭에 도착한지 2주가 되는 일요일 전체 국무위원들과 교포들이 많이 모이는 주간모임에서 장준하가 ‘폭탄선언을 한 것이다. 장준하는 이날 국내실정에 대한 보고를 했는데, 보고의 마지막에 가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폭탄선언을 한 것이다. 

‘우리는 여러 선배들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기 위해 사경을 수차례 넘고 수천 리 길을 걸어서 이곳에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우리는 요즈음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어졌습니다. 오히려 오지 않고 여러분들을 존경할 수 있었다면 더 행복했을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가능하다면 이곳을 떠나 다시 일군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이번에 일군에 들어간다면 꼭 일군 항공대에 자원하고 싶습니다. 일군 항공대에 들어간다면 중경 폭격을 자원, 이 <임정>청사에 폭탄을 던지고 싶습니다. 선생님들은 왜놈들에게 받은 서러움을 다 잊으셨습니까? 그 설욕의 뜻을 잊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렇게 네 당, 내 당하고 겨누고 있을 수 있습니까?’(주16)  

   
▲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자리(사진=위키백과사전). 학병을 탈출해 6천리 길을 걸어서 도달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청년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분파 싸움에 격분한 청년들은 ‘임정청사 폭격 발언’과 ‘폭력 난입 사건’ 등을 벌이며 울분을 토했다.

장준하가 이처럼 과격한 비판 발언을 한 것은 임시정부 내의 파벌 싸움과 함께 청년들을 이간질해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한 것에 격분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장준하의 격정과 열정, 그리고 나아가 외곬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걸고 항상 이처럼 치열하게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김준엽도 임시정부의 파벌 싸움을 비판했는데, 임정지도자들을 풍자하는 만화를 그려서 임정청사 회의실 벽에 붙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임시정부 비판의 강도는 차이가 있다. 장준하가 매우 강한 어조로 임시정부를 비판하는데 비해 김준엽은 비판하면서도 옹호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는 김준엽의 글이 임시정부를 독립운동사의 정통으로 놓으려는 목적을 갖고 씌어졌다는 점과도 무관하지 않다.(주17) 

그런데 장준하의 이 ‘폭탄선언’보다 더 심각한 사건이 곧 벌어졌다. 김붕준, 홍진, 유동열 등이 중심이 되어 신한민주당을 창당 경비를 조달하기 위한 ‘댄스파티’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한 청년들이 몽둥이를 들고 파티장에 난입해 난장판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장준하, 김준엽 등 20여명의 청년들이 몽둥이와 밟으면 터져서 놀라게 되어 있는 화약물(콩알 만한 딱총)을 들고 파티 현장에 난입했고, 현장은 발밑에서 터지는 폭음으로, 또 몽둥이로 위협하는 청년들로 인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주18)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20대 중반의 청년들이 자신의 할아버지뻘에 가까운 어른들이 벌인 행사장을 폭력으로 짓밟는 ‘난입사건’이 가능했던 것일까? 불과 수십 명의 청년들의 움직임에도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친 노투사들은 우왕좌왕했고 임시정부는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 이 일을 벌인 이들은 독립을 위한 군인(광복군)이 되기 위해 학병을 탈출한 이들이었는데, 당시 광복군은 중국군 작전권 아래 놓여 있었다. 이 사건을 통해서 당시 임시정부의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이들 우익‘학병’들은 일제 말기 거의 궤멸 상태에 가까운 우익 민족주의 독립운동 상황에서는 상당히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존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주19) 

그렇다면 당시 충칭 임시정부는 어떤 상태였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광복군은 얼마나 되었고, 실제로 해방에 대비해 어떤 준비를 하고 있었을까? 다음에는 이 문제를 간략히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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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학병탈출과 그 후 광복군이 되는 이들의 이야기는 김준엽, 『장정-나의 광복군 시절』(나남, 1987); 장준하, 『돌베개: 장준하의 항일대장정』(돌베개, 2015); 한광반학병동지회, 『장정 6천리-한광반 학병 33인의 항일투쟁기』(한광문화사, 1967); 윤재현, 『사선을 헤매이며』(국제문화협회, 1948); 태윤기, 『회상의 황하』(갑인출판사, 1975) 등을 참조할 수 있다. 아래 내용은 주로 김준엽과 장준하의 책 등을 참조해 요약 정리했다. 

2) 김준엽, 『장정-나의 광복군 시절』, 나남, 1987, 24〜94쪽 참조 

3) 장준하의 탈출에 대해서는 장준하, 『돌베개』, 돌베개, 2015; 양화유, 중국을 배경으로 한 항일 기행문학 고찰-김준엽의 『장정』과 장준하의 『돌베개』를 중심으로-, 인하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0, 25〜34쪽 참조

4) 김준엽, 위의 책, 95〜177쪽

5) 자세한 내용은 김준엽, 위의 책, 178〜213쪽 참조

6) 김학규는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에서 조선혁명당·조선혁명군에서 활동하였으며, 만주사변 후 중국 관내로 가서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이청천 등과 광복군 창설에 참여해 광복군 제3지대장을 지냈다. 해방 후 광복군 총사령부의 주상해판사처처장으로서 교포들의 안전 귀환을 위한 활동에 종사했고, 한국독립당 만주특별당 부위원장으로 교포 귀환 활동을 하다가 1948년 4월 귀국했다. 1948년 7월 한국독립당 조직부장에 취임했으나 김구주석의 암살범 안두희의 한독당 가입과 연관해 이승만 정권에 의해 1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4.19혁명 후에 석방되었다. 

7) 장준하, 『돌베개』, 돌베개, 2015, 138〜139쪽

8) 韓光班學兵同志會, 󰡔長征六千里-韓光班 學兵 三十三人의 抗日鬪爭記󰡕, 1979, 73쪽

9) 김준엽, 위의 책, 215〜255쪽

10) 25명은 ‘김준엽, 김유길, 김영호, 김성환, 김성근, 김영록, 김춘정, 노능서, 백정갑, 박승헌, 박영록, 석근영, 승영우, 서상렬, 신현창, 이문화, 이영길, 이계현, 안광언, 윤경빈, 윤재현, 장준하, 정명, 홍기화, 홍석훈’ 등이다.(김준엽, 위의 책, 259〜260쪽) 

11) 충칭으로 가는 도정에 대해서는 김준엽, 장준하 책 외에 양화유, 위의 논문, 34〜63쪽에 정리된 내용을 참조할 수 있다. 

12) 김준엽, 위의 책, 257〜292쪽

13) 김준엽, 위의 책, 293〜366쪽

14) 민필호는 김준엽의 장인이 된 사람이다. 이곳에서 활동하던 중 김준엽은 1945년 6월 29일 민필호의 딸 민영주와 결혼해 부부가 되었다. 민영주는 독립운동가 신규식 선생의 외손녀이기도 하다. 신규식은 중국 망명 시절 손문과 함께 중국 신해혁명에 참여하여 돈독한 관계를 가졌고, 상하이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기틀을 다지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임정의 법무총장·외무총장·국무총리서리 등을 역임하면서 중국의 손문 정부가 임정을 승인하도록 했고 많은 독립투사를 키웠다. 민영주의 부친 민필호는 신규식의 딸 신명호와 결혼하여 그의 비서 일을 보았다. 신규식이 별세한 후에는 임정 재무부장 이시영의 비서로 활동하는 한편, 상해교민단의 학무위원으로 교민들의 교육사업에 힘썼다. 일본의 기밀통신을 탐지하라는 임정의 명을 받고 중국 교통부의 통정사(通政司)가 되었다. 이때 이시영·윤기섭 등이 그의 식객 노릇을 했다. 민필호는 충칭에서는 김구 주석의 판공실장으로서 임정청사를 마련하고 이범석과 함께 광복군 창설에 기여했다.

15) 김준엽, 위의 책, 291〜292쪽

16) 장준하, 『돌베개』, 306〜307쪽

17) 두 사람의 글의 차이점 및 김준엽의 ‘장정’이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부각하려는 점 등과 관련된 내용에 대해서는 조영일, 『학병서사 연구』, 서강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5, 151〜162쪽 참조

18) 김준엽, 위의 책, 367〜368쪽; 장준하, 『돌베개』, 312〜314쪽

19) 김건우, 월남 학병세대의 해방 후 8년, 『민족문학사연구』 57, 민족문학사학회, 2015, 3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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