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g the Dog」이라는 영화가 있다. 1998년 작으로 더스틴 호프만, 로버트 드 니로 등 연기파 배우들이 주연을 맡아 열연한 영화다. 미국 대통령이 성추문으로 위기에 몰리자 이에 대한 관심을 돌리기 위해, 그리고 지지율을 높여 재선하기 위해 일부러 군사적 위기 상황을 연출한다는 내용이다.

2018년 국내에 소개된 그레이엄 앨리슨의 저서 『예정된 전쟁』이 화제를 낳은 바 있다. 저자는 최근 북미 갈등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제2의 한국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말해 다시 한 번 주목을 받았다. 책은 미국과 중국이 충돌할 가능성, 그리고 제3차 세계전쟁을 막기 위한 조언을 제시한다. 아울러 책을 통해 이른바 ‘투키디데스의 함정’이 마치 유행어처럼 회자되었다.

‘투키디데스의 함정’은 신흥 세력이 지배 세력을 위협할 때 가장 치닫기 쉬운 결과가 바로 전쟁임을 뜻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신흥국 아테네의 부상에 대한 패권국 스파르타의 두려움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인데, 지난 500년 동안 이런 상황이 16번 발생해 그중 12번이 결국 전쟁으로 귀결됐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현재 미국과 중국의 갈등을 슬기롭게 풀어내지 못하면 다시금 세계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최근 미국과 이란의 군사적 충돌이 이어지며 전 세계가 긴장하고 있다. 아울러 북한과 미국 역시 살얼음판을 걷는 모습이다. 미-중 갈등, 미국-이란 충돌 그리고 미국과 북한의 긴장관계. 현재 세계를 불안하게 하고 있는 세 가지를 생각하며, 앞서 영화와 책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IS(이슬람국가)와 같은 테러집단도 아닌 일국의 최고사령관을 사살해버린 미국. 이를 두고 미국 내에서도 과연 정당한, 합법적인 조치였는지에 대해 논란이 일고 있다. 냉혹한 국제사회에서 정당성 운운하는 것이 애초에 순진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국제사회의 시선은 차갑기만 하다.

먼저 미국은 이라크 정부의 동의 없이 공습 작전을 단행했다. 당연히 주권 침해다. 아울러 유엔 회원국이 다른 회원국의 고위 관리를 살해한 것은 국제법 위반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다 떠나서 나는 과연 미국이 이렇게 무리해서 솔레이마니 사령관을 사살할 만큼 긴박한 이유가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자국을 위태롭게 하는 위험성이 충분했는지, 반드시 그를 지금 그런 방식으로 사살해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는지, 아무리 트럼프를 비롯한 미 고위관료들이 설명해도 납득되지 않는다.

때문에 「Wag the Dog」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미 역사상 세 번째로 하원에서 탄핵안이 가결된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11월 대선에 나서야 하는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무언가 충격적인 돌파구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이른바 트럼프식 ‘정면돌파전’이었을까? 어차피 자국 영토만 아니면 세계 어디에서든 타국을 공격하고 점령하는 것에 대해 큰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 않은 미국 국민들이기에, 이번에도 이런 무책임한 짓을 저질러도 괜찮다고 느꼈을까?

솔레이마니의 죽음 이후 이란은 그야말로 성전에 나서는 분위기이다. 문득 페이스북 친구가 남긴 글이 떠오른다. ‘저런 깡패 같은 미국이 있는데, 북한이 미쳤다고 스스로 핵을 포기하겠냐. 내가 김정은이라도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란이 핵을 가지고 있었다면, 과연 저런 짓을 할 수 있었겠냐는 설명이다. 정말 그런 것인가. 약육강식의 이 무참한 세계에서 북한의 선택이 탁월했던 것인가. 이란은 무모하게 미국을 믿었다가, 전쟁의 참화에까지 휘말려들게 될 것인가. 모르겠다. 여전히.

2020년이 우리에게 만만치 않은 해가 될 것임을 많은 이들이 인정하고 있다. 북미 핵 협상은 여전히 오리무중이고, 그 사이 주변국들은 제 이익을 위한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 더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감이 우리를 짓누른다. 남북관계의 개선을 위한 우리 노력이 번번이 미국의 반대로 무력화될 때마다, 그리고 방위비분담금 인상이나 무기 구매 등으로 우리를 옥죄고 있는 지금의 미국을 볼 때, 과연 정의는 무엇인지, 상식은 무엇인지 생각해볼 수밖에 없다.

이란에 대한 미국의 처사를 보면서, 북한이 ‘다음 차례는 우리가 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낄 수 있다는 분석을 봤다. 나는 정 반대로 생각한다. 중동의 화약고에 어설프게 불을 붙이게 되면 그 후과가 어찌 될지, 북한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미국이 중동의 수렁에 빠지게 되면 북한은 오히려 미국과의 군사적 충돌을 덜 걱정할 수 있다. 이미 여러 차례 증명되었지만, 미국은 동시에 두 개의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게다가 중동 문제가 아니더라도 미국이 북한을 공격할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하다. 한반도는 중동과는 다르다. 이란도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그리 만만한 국가가 아니고(페르시아 제국을 경영한 이들이다) 종교와 민족이라는 끈으로 단단히 맺어져 있는 우호국가들을 가지고 있지만, 북한은 그보다 더 차원이 다르다. 중국과 러시아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북한을 공격한다면, 그 후과는 트럼프의 상상을 넘어설지 모른다.

이미 이란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앞으로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확전으로 나아갈지, 다시 대화국면으로 전환될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세계는 다시 한 번 뼈저리게 확인했을 것이다. 단지 행정부의 수장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동일한 국가가 상대방과 맺은 국제적 협정을 단 번에 깨버리고, 심지어는 군사적 공격까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대표적 국가가 바로 미국이라는 점을 말이다. 난 이번 사태가 오바마와 트럼프의 합작품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오바마는 아마 억울해 하겠지만 말이다.

▲ 로버트 D. 카플란 지음 / 이재규 옮김, 『21세기 국제정치와 투키디데스』, 김앤김북스, 2019. 7. [자료사진 - 통일뉴스]

책 이야기를 해보자. 원제는 『Warrior Politics』다. 전사의 정치,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조금 무식하게 책의 주제를 정리하자면, 국익을 위해서는 과정의 정당성보다는 목표가 더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저자가 책에서 줄기차게 이야기하는 것은 처칠이나, 마키아벨리, 투키디데스처럼 이른 바 선견력을 가지고 국익을 위해 과감히 결정하고 밀고 나가라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을?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피의 냄새를 맡게 된다. 다음의 이야기는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때로는 절차 따위, 도덕적 이상 따위, 민주주의 따위 무시하고 국익을 위해 적국을 폭격하자는 것 아닌가? 마치 지금의 트럼프처럼 말이다.

“미국에 민주주의가 없다면 미국은 존재 가치가 없다. 미국은 피의 본거지가 아니라 자유의 본거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때보다 가까워지고, 더 위험해진 넓은 세계에 민주주의의 씨앗을 현명하게 심어두기 위해서는 미국은 반드시 민주적이지는 않지만 가치가 있는 이상들을 적용해야만 할 것이다.” - 226p

저자는 미국이 피의 본거지가 아니라 했지만, 현실은 정반대이다. 미국은 늘 피의 본거지였다. 이는 현재도 마찬가지다. 이라크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은 수많은 이들의 피를 희생하며 자신들의 ‘국익’을 지켜내고 있다. 이는 한반도 역시 다르지 않다. 우리는 한국전쟁 발발 70년을 맞는 지금까지, 온전한 평화를 누려본 적이 없다. 이것이 100% 북한 때문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고대부터 현재까지 ‘정복의 역사’를 서술하며, 시대를 관통하는 ‘정복과 확장’의 이데올로기를 찬양하는 저자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다시 한 번 심각하게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정의란 무엇인가. 애초 정의 따위는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패배가 아닌 승리가 바로 정의이고, 피지배가 아닌 정복이 바로 정의였던 것일까.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승자인가, 패자인가. 그리고 우리는 지금 얼마나 정의로운가.

‘세상에 믿을 놈은 없다’ ‘영원한 우방도 적도 없다’ ‘오직 강력한 국력이 뒷받침되어야만 이 아수라와 같은 국제사회에서 생존할 수 있다’ 따위가 국제정치학의 전부라면 그 따위 학문은 존재할 이유도 가치도 없을 것이다. 더욱 더 심오한 이야기들이 담겨져야 한다. 머리를 잘 굴려서 상대방을 굴복시키고, 정복하고, 착취하는 것이 국제정치의 진리라면 세상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 부재중인 정의를 하루라도 빨리 되찾아오는 것이 인류가 생존할 수 있는 마지막 길일 것이다.

우리는 다시 고민해야 한다. 우리의 평화를 위해, 우리의 번영을 위해, 다른 이들의 불행을 당연하다고 여겨온 것은 아닌지, 한미동맹을 위해 남북관계의 진전을 위해 호르무즈에 파병을 검토하는 정부의 처사가 과연 정의로운 것인지, 상식적인 것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과거 우리는 남북관계를 위해, 우리의 생존을 위해 이라크에 정의롭지 못한 파병을 한 바 있다. 그 우를 다시 범하지 않았으면 한다.

약육강식, 각자도생이 아닌, 상생과 공영의 국제정치학을 꿈꿔본다. 짐짓 남의 일 마냥 전쟁과 학살을 이야기하는 이들, 선제공격이니 전략적 무기이니 하며 전쟁을 게임처럼 묘사하는 이들도 이제 그만 사라졌으면 한다. 지금 이란은 전운이 감돌고 있다. 얼마나 많은 무고한 이들이 또 이란에서 죽어갈지 아무도 모른다. 그런 지옥을 만들어내는 이들이, 정의와 상식 따위는 달러보다, 석유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임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 앞에 트럼프라는 미성숙한 인간이 서 있다.

부디 이란의 안녕을 기원한다. 그리고 그 어떤 죽음도 더 이상 없기를.

나는 우리가 무엇을 하든 앞으로 우리들에게 다가올 운명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들 앞에 다가올 운명은 믿는다. - 도널드 레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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