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미경 / 농부

 

살구나무를 찾아서 살구나무 동산을 만들고 있다. 올해는 살구나무 마을을 만들려고 한다. 올해 우리 마을에는 많은 살구나무들이 새로 뿌리를 내리게 될 것인데, 나는 그것이 북측 회령 백살구나무이기를 바래서, 그것을 구하려 안타깝게 뛰어다니고 있다.
사라진 살구나무를 찾으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살구나무를 잃어버렸듯이 아주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무엇을 위하여 그 많은 것들을 놓아버린 것일까? 여기 연재할 글들은 살구나무처럼 우리가 잃은 것들, 잊은 것들, 두고 온 것들에 대한 진지한 호명이다. / 필자

 

▲ 두 방향으로 갈라지는 철로. [free stock photos 에서 캡처]

 

땔나무를 하는 시간

입동이 지나니 가을도 하루하루 빠르게 꼬리를 감춰가고 있다. ‘툭, 투툭, 후두둑’ 숲 속에서 꽤 여러 날 들려오던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도 진작 멈췄다. 올해 유난히 소란스럽더니 숲 가장자리를 따라 도토리들이 한 벌 깔렸다. 다람쥐들이 부지런히 돌아다닐 때인데 도무지 보이지를 않는다. 숲 아래쪽에 고양이 두어 마리가 이따금 보이더니 그것들의 작간이나 아닐까?

이제 숲을 채우는 것은 키 큰 나무들이 떨구는 황갈색 나뭇잎들이다. 바짝 마른 나뭇잎들은 ‘솨아 솨~~~’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한기를 몰아오는 바람에 마른 나뭇잎들이 하늘을 뒤덮으며 일제히 떨어지는 광경은 그 웅장한 소리와 더불어 자못 장엄하기까지 하다.

추호의 미련도 없는 숙명적인 죽음과 마주치는 느낌이 이러할까. 딱 요즈음의 짧은 시간 동안에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그러고 나면 차갑고 하얀 햇빛이 숲 속으로 쏟아져 내릴 거다. 그늘로 갇혀 있던 숲이 햇빛으로 가득차는 시간이다.

그 시간을 기꺼이 맞이하려면 땔나무를 해야 한다. 우리 사람들의 연료는 세월을 두고 나무에서 석탄으로, 석탄에서 연탄으로, 또 석유로, 가스로, 전기로 진화해왔지만 나는 석탄에서 전기까지를 두루 섭렵하고 마침내 한번 경험해본 적도 없는 나무로 곧장 후퇴했다. 아마도 그거 하나를 빼먹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에서 사람들은 흔히 낭만을 떠올리지만, 숲 속에서 쓰러져있는 나무들을 끌어내어 자르고 쌓아 땔감을 마련하는 일은 조금도 낭만적이지 않다. 그러나 땔감은 겨울 엄동설한을 무사히 나기 위한 절대조건, 곧 생존이다. 게다가 얼마 전에 또 일어났던 철로보수 노동자들의 죽음까지 더하여 며칠내내 온종일 땔나무를 하면서 또 ‘그 소설’에 대한 생각이 줄곧 떠나지를 않는다.

「땔감」, 세 개의 이야기

윤흥길 작가가 쓴 소설 중에 「땔감」이라는 단편이 있다. 그가 보여주는 소설이 그렇듯이 이것도 단편이라 하기에는 좀 긴 이야기이다. 그는 단편이니 장편이니 하는 글의 규격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다는 듯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만큼 끌고 나간다. 또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다하면 그만 끝내버리기도 주저하지 않아서, 그의 소설에는 단편이라 하기에는 긴 단편, 장편이라 하기에는 짧은 중편들이 탄생하는 것이다.

소설은 땔감이라는 소재를 놓고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벌어지는 세 개의 에피소드를 펼쳐놓는다. 주인공은 아버지와 아들, 화자는 아들인 ‘나’이다. 첫번째는, 꽉 막힌 방고래를 뚫어줄 청솔가지를 구하기 위해 아버지와 아들이 맹추위가 기승을 떠는 어느 날 오밤중에 산림감시원이 지키는 남의 산에 숨어들면서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두 번째는 석탄이 실려있는 역구내의 무개화차에서 석탄을 ‘데뽀’하는 동네 패거리에 섞여 석탄을 훔쳐내는 아들의 이야기이다. 안개가 자우룩한 어느날 밤, 아들은 만일의 경우 입이 찢어져도 좋다는 서약을 받고 처음으로 패거리에 끼워주었던 진권이의 비명횡사를 목격한다.

세 번째는 앞의 두개에 비하면 어딘지 우스꽝스럽고 너누룩하다. 어디까지나 ‘합법적인’ 땔감구하기였으니 말이다. 토탄이 무언지는 모르겠으나, ‘북더기에 비해 값이 헐하고 야금야금 마디게 타는 요란하게 경제적인 땔감’이라고 작가는 써놓고 있다. 바로 그 토탄을 구하기 위해 배산 뒤편짝 논바닥 한 평을 사서 오뉴월 뙤약볕을 마다치 않고 온 가족이 나서서 토탄을 캐내는 이야기이다.

작가가 이 세 개의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 싶어하는 주제는 한 아이의 성장에 관한 것이다. '아이는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뭐 그런 것. 말하자면 아이는 아버지를 통과하면서 성장한다. 거기에는 가족의 생계와 안녕을 책임지려는 무력한 가장의 안간힘이 아이의 눈을 통해 가슴 아프게 드러난다.

청솔가지를 구하러 소라단으로 갈 때 아버지는, 부자사이를 자꾸만 갈라놓는 어둠 속에서 콧마루와 뺨이 쩍쩍 갈라지도록 아프게 몰아치는 바람의 칼날을 부러뜨리는 널찍한 등판이었다.

친구 진권이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돌아온 아들의 종아리를 치는 아버지는, 자책으로 터져나가는 가슴을 짓누르는 소리 없는 눈물이었고, 토탄을 남보다 삼분지 일도 못되게 캐놓고 딱 한 평 네모진 토탄구덩이에 아들과 함께 드러누운 아버지는, 이 모든 불행을 제 탓이라 체념하는 축축한 귀엣말이었다.

시대가 만든 아버지의 모습

「장마」와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나이」는 잘 알려진 대표작으로서 작가 윤흥길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하지만 그 외에도 내가 그의 소설을 두루 좋아하는 것은 그가 소설 속에서 시대를 그려내는 솜씨가 빼어나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의 ‘시대’란 이야기에 맥락을 부여하고 인물들의 삶과 행위에 필연성을 담보해줌으로써 작품을 가치 있게 만들어내는 핵심적인 중추이다. 또한 소설에서의 시대란 특정소설의 존재이유 그 자체를 설명해주는 근간이자 바탕이기도 하다. 시대가 거세된 소설이란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처럼 재주만 되바라진 현실도피적 관념의 함정으로 매몰되고 만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소설 「땔감」의 무대가 전쟁을 통과한 상처입은 시대임을 말하기 위해 작가가 선택한 장치는 ‘양민증이 없는 아버지’와 ‘산으로 올라간 삼촌’이다. 산으로 올라간 삼촌은 그의 소설 여기저기에 등장하여 그가 낙인처럼 끌어안고 있는 정체성의 한 조각을 얼핏얼핏 보여주는 기둥이다.

어쩌면 평생을 그 시대에 붙들려 있기라도 한 듯, 전쟁과 삼촌은 그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화수분 같기도 하다. 그가 거듭 재구성하여 살려낸 그 시대와 인물들은 금시라도 손에 닿을 듯한 모습으로 우리를 그 안으로 불러들인다. 그리고는 그들이 바로 우리였음을, 지금은 잃어버린 우리였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산으로 올라간 삼촌을 둔 아버지와 아들은 그렇게 부역자의 가족으로 등장한다. 그들에게 차례진 모진 추위와 굶주림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알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청솔가지를 구하러 소라단으로 가면서도, 그곳이 행방불명된 삼촌을 찾아 시체 구덩이를 뒤지고 다녔던 유명한 학살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버지는 삼촌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 아버지, ‘삼촌의 되똑 솟은 부역행위로 말미암아 옴치고 뛸 수도 없는 입장’이었던 아버지, 아궁이에 넣을 바랭이를 뜯다가 남의 밭에서 무를 뽑아 먹으려는 허기진 아들에게 ‘남의 물건은 터럭 하나라도 건디리는 법이 아니’라고 타이르는 아버지, 그러나 막힌 방고래 때문에 추위에 얼어터지는 식구들의 참상에 밀려 아들을 뒤에 달고 고래를 뚫어줄 청솔가지를 훔치러 남의 산으로 떠나는 아버지이다.

아이들이 무리를 지어 무개화차에서 석탄을 훔치러 갔다가 진권이가 죽은 날, 아들에게 ‘누가 너더러 도둑질허는 자리 따러댕기라고 시키드냐’며 회초리질을 하다가 급기야 회초리를 아들에게 넘겨주고 눈물을 보이는 아버지이다.

논바닥에 토탄 나오는 자리를 사서 비로소 떳떳하게 땔감을 마련하려던 계획이 어그러지고, 결국 ‘시국탓도 운수탓도 아니고 느이 애비가 사람이 덜된 탓’이라고 아들 앞에서 실토하는 아버지, 아들은 그런 아버지가 토탄 구덩이 밖으로 기어나가기 위해 '배비작거리는 궁둥이의 움직임'을 보다가 목이 깝북 잠겨온다.

아이는, 도덕적으로 올바르고 가족에게 따뜻했으나 시대가 들씌워놓은 낙인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에 대한 연민을 씹으며 성장하는 것이다.

철로 위에서 ‘그 때’

내가 소설에서 유독 주목하는 장면은 석탄을 실은 무개화차가 지나가는 철로다. 아들의 친구인 진권이는 그 철로에서 죽었다. 석탄을 훔치는 거사에 참가할 허락을 받고 처음으로 패거리에 끼어 역구내에 스며들었던 안개가 자우룩한 밤, 그 아이는 만일 소리를 내는 경우 입이 찢어져도 좋다는 맹세를 했다.

차라리 입이 찢어지는 게 나았을 것을. 그 아이는 목표화차에서 선로 하나를 남겨두고 철커덕 들러붙어 하나로 합쳐지는 레일에 발목이 물렸다. 비명소리에 놀란 패거리가 다 틀렸다고 튈 때도 그 아이는 선로 위에 죽은 듯이 엎드려 있었다. 안개를 뚫고 내려온 하행열차가, 분명 질렀을 그 아이의 마지막 비명을 삼켜버렸을 게다.

작가는 이렇게 쓴다.

진권이는 하행열차가 통과한 뒷자리에 남아있지 않았다.
진권이는 이미 없어졌으면서도 그 주변에 널려 있었고
주변에 있으면서도 실상은 없어져버렸다.
 

철로 위에서 ‘지금’

지난 2019년10월22일 오전10시 15분, 밀양역 200m 부근에서 작업 중이던 노동자 세 사람이 역을 향해 달려오던 새마을호 열차에 치였다. 이 사고로 마흔아홉살 장씨가 숨지고 조씨 김씨는 중상을 입었다. 이들은 철로 자갈높이를 맞추는 ‘면 맞춤작업’을 하던 중이었고 작업기계의 소음 때문에 열차가 오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지난 2019년9월2일 오후5시17분, 지하철1호선 금천구청역 인근 선로에서 일하고 있던 노동자 마흔네살 정씨가 열차에 치여 사망했다. 그는 하청업체 소속 노동자로 철로에서 광케이블 보수공사를 위한 사전조사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지난 2017년 12월14일 오전8시경, 지하철1호선 온수-오류역 구간에서 서른여섯살 하청노동자 전씨가 열차에 치여 사망했다. 그는 선로 옆 배수로에 덮개를 설치하는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그는 하청업체의 공사단가를 맞추기 위해 안전한 야간작업이 아니라 위험한 주간작업에 들어가야했다. 현장에서 일한 지 불과 사흘째 되는 날 죽은 그는 홀어머니를 부양하는 일용직 노동자였다.

지난 2017년6월28일 0시13분, 노량진역 선로에서 작업중이던 50대 김씨가 상행하던 지하철에 치여 숨졌다. 그는 선로보수작업을 준비하던 중 공사안내표지판을 세우려 선로 위를 걸어가고 있었다.

지난 2017년5월27일 오후2시쯤, 지하철1호선 광운대역 철로에서 일하던 노동자 쉰네살 조영량씨가 작업하는 열차에서 떨어져 숨졌다. 그는 열차를 떼고 붙이는 일을 하는 수송원이었는데, 회사측의 비용절감으로 7인1조로 하던 일을 4인1조로 하다가 사고를 당했다.

지난 2016년 9월13일 0시48분, 경부선 김천역 인근 선로에서 야간보수작업을 하던 4명의 노동자가 KTX열차에 치였다. 그들은KTX하청업체 소속 노동자들이었는데, 쉰한살 장씨와 마흔여덟살 송씨가 사망하고 다른 2명은 크게 다쳤다. 그들은 잇따른 경주 지진의 여파로 열차가 연착되어 평소와 달리 자정 넘은 시각까지 열차가 운행되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 2011년 12월9일 0시5분, 인천 계양역에서 1.3km 떨어진 지점에서 선로동결방지작업을 하던 노동자 다섯명의 목숨이 사라졌다. 그들을 덮친 건, 0시 5분에 서울역을 출발해 검암역을 향해 가던 마지막 열차였다. 중상자 하나를 더하여 그들 모두는 코레일테크 소속의 하청업체 노동자들이었다.

쉰아홉살의 이화춘, 쉰다섯살의 백인기, 추성태, 쉰세살의 정덕선, 마흔세살의 정승일, 그들 모두는 필경 가족들의 생계와 안녕을 책임지려 안간힘을 다하는 무력한 아버지였을 게다. 월180만원을 받으며 야간근무를 해왔던 그들 모두는 연봉 1억이 넘는 사장이 경영하는 회사에 속해 있었다.

그들은 막차가 통과한 뒷자리에 남아있었을까?
그들은 이미 없어졌으면서도 그 주변에 널려 있었을 것이고,
주변에 있으면서도 실상은 없어져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버지의 불행은 아들에게로 이어진다. 2016년5월28일,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열차에 끼어 숨진 하청업체 노동자 열아홉살의 김군도 그들의 아들이다. 2018년12월10일 밤, 태안화력발전소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처참하게 숨진 비정규직 노동자 스물네살의 김용균도 또한 그들의 아들이다.

그 시대를 산다. 양민증이 없는 아버지의 시대, 산으로 간 삼촌의 시대, 석탄을 훔치러 갔다가 선로에 발목이 물려 죽은 진권이의 시대를 우리는 아직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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