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필자와 불교와의 인연

필자의 신분은 기독교 교파중 하나인 장로교단 소속의 목회자이다. 하지만 평소 전통적 장로교 교리보다는 ‘역사적 예수’를 선호하는 신학적 입장을 취하기 때문에 타종교 성직자들이나 타종교와의 교류에 대해 매우 우호적으로 생각한다. 내 종교가 소중할수록 타종교는 더욱 소중하며, 타종교를 통해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은 더욱 확고해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보수세력이 다수를 차지하는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자신이 믿는 기독교만이 유일한 참 진리의 종교이며 나머지 타종교들을 미신으로 치부하는 배타주의(排他主義)적 성향이 강하다.

그래도 좀 더 나은 진보적인 교단과 신자들은 자신이 믿는 기독교가 모든 타종교를 예외없이 포괄하고 있다고 여기며 무조건 배타적이지는 않다. 타종교의 가르침에도 어느 정도 참의적 요소가 있다고 보고 있으나, 궁극적으로 자신의 종교와 타종교의 우열관계를 따지며 자신의 종교야말로 결국 최고의 진리라는 신념을 지니는 포괄주의(包括主義)에 머물러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필자는 모든 종교의 동등성을 분명하게 인정하는 ‘상대주의(相對主義)’를 지지하며, 아울러 다종교 상황을 철저하게 인정하는 ‘다원주의(多元主義)’를 지지한다.

특히 필자가 기독교에 입문하기 전까지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부모님을 따라 중학교 2학년까지 절에 다녔던 경험 때문인지 불교라고 하는 종교가 어색함이나 불편함 보다는 오히려 친근함으로 다가오며 지금도 서재에는 석굴암 본존불 부처 사진을 걸어놓고 항상 감상하듯 바라보노라면 마음의 평온과 평정심이 유지된다. 고향인 경기도 양평의 절에 다닐 당시 큰 아버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마을에 가톨릭 공소(본당 분회)를 운영하셨으나, 나의 부친과 모친은 내가 성장해서 목회자가 되기 전까지는 절에 열심히 다니셨다. 부모님은 심지어 절간의 보살을 나의 수양 어머니로 삼아주실 정도로 불교에 심취하셨고 열심이셨다. 이러한 특수한 종교 환경에서 자란 나는 큰아버지가 운영하는 우리 마을의 성당 공소를 열심히 다녔으며 동시에 부모님이 다니시는 절간에도 꾸준히 다닌 특이한 종교적 체험을 하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후 신학을 공부하던 필자에게 한국불교계에서 큰 이슈를 던져준 작은 사건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30여년전 우연하게 참석한 불교 전시회에서 벌어졌다. 서울 중앙청 경내 경북궁에서 개최된 ‘지장보살 특별전’을 참석하게 됐는데 전시회 명칭이 바로 “메시야 지장보살, 우리 곁에 오다”라는 타이틀이었다.

기독교 성경에 등장하는 그리스도 예수에게만 붙이는 명칭인줄로만 알았던 ‘메시야’라는 호칭을 불교에서도 버젓이 사용하는 것을 본 나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으며, 당시 불교측에서 기독교 명칭을 도용한 줄로만 알았다(필자 주: 불교에서 사용하는 메시야는 미래의 부처님을 일컫는 용어로서 석가모니가 열반한 후 56억 7천만년이 지난후에 나타나는 미륵불을 말한다. 이 미륵불은 석가모니 부처가 미처 제도하지 못한 중생들을 구제할 부처라고 한다)

특히 그 전시회의 주인공인 지장보살은 바로 우리나라 신라의 김교각이라는 왕자가 중국으로 건너가 지장보살이 된 것이며 전시회는 그가 지장보살이 되기까지의 스토리를 담고 있어서 더욱 신기하고 감동적이었다. 전시물들은 김교각이 실제 착용했던 의상과 신발 등을 비롯해 열반하던 당시의 육체를 그대로 보존한 미이라 등신불(等身佛)등이 전시됐었는데 이를 계기로 그후부터 자연스럽게 기독교와 불교를 비교하며 연구하는 습관이 생겼다. 아울러 평소 지니고 있던 나의 좁은 식견과 안목 그리고 보수신학에 찌든 결과로 형성된 잘못된 고정관념과 배타적 편견들을 과감히 던져 버리는 계기가 되었다.

아무튼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의 종교적 정체성은 분명히 기독교지만 이웃종교로서 불교를 염두해 두었을 때, 모든 종교의 궁극적 목적은 인간의 구제(인간 구원)에 있다고 보기 때문에 두 종교의 장점을 잘 조화시킬 수 있다면 하나의 종교를 통해서만 접할 수 있는 진리를 보다 풍요롭고 다채롭게 공유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 정릉사 정문 입구에서 포즈를 취한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정릉사 경내 8각 7층 석탑 앞에서의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동명왕릉 앞에서의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이북의 종교들과 교류하려는 의도

평소 나는 분단된 조국 땅에 뿌리를 내린 반도 이남의 기독교와 불교는 둘 사이에 벌어진 대립적 종교이념 문제와 포교(선교)의 기득권을 점유하려는 경쟁에 몰두하기 보다는 우리민족 최대의 절대적 지상 명령이며 최고 가치인 민족통일에 중점을 두고 서로 소통하며 협력하는 관계가 형성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왔다.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이 무엇이고 공통점이 무엇인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자기 종교만의 우월성과 기득권을 챙기려는 욕망보다 지금은 조국통일이라는 대사명과 대전제 아래 두 종교가 사회적으로 하나가 되어 민족적 가치를 공유하며 힘을 합치는 일이 더욱 시급하고 중요할 뿐이다.

필자가 설립한 ‘NK VISION 2020’에서는 이러한 의도와 목적하에 산하 기구로 ‘동북아종교위원회’를 만들어서 종교간의 소통 창구 역할을 하도록 했으며, ‘손정도목사기념학술원’이라는 학술연구단체도 설립하여 남과 북과 해외동포 3자가 꾸준하게 종교 교류에 앞장서도록 하고 있다. 아울러 북과의 종교 교류를 원하는 국내외 종교단체와 신자들을 자문해주거나 협력, 지원하고 있으며, 기독교라는 특정종교에 국한하지 않고 통일지향적으로 북과 소통하거나 교류하기를 원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으면 어떤 종교든지 가능하도록 했다.

또한 통일운동과 대북사역을 펼치는 가운데 필자는 광복 70주년을 맞이하던 2015년을 전후해 약 3년 동안, 현존하는 이북의 교회들을 골고루 참관하였으며 그 결과를 정리해 남측과 미국을 비롯해 해외동포들을 대상으로 강연과 집필활동을 하며 북측의 기독교 실태를 가감없이 전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측의 종교자유와 기독교에 대해 터무니없는 낭설과 사실 왜곡들이 난무하고 있는 상황이라 필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대부분 편견을 갖고 있는 현실이다.

무엇보다 필자는 우리나라의 불교를 종교차원에서 바라보기 보다는 역사차원에서 바라보고 있다. 불교는 예로부터 내려오던 우리민족의 산 역사 그 자체에 대한 물증이며, 민초들을 비롯해 제왕들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모든 구성원들과 함께 해왔던 민중의 안식처이며, 정신적 유산이다. 또한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우는 과정에서 탄생한 헤아릴 수 없는 문화재와 역사 유적지를 우리들에게 안겨준 민족의 보고(寶庫)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종교문제를 떠나서 민족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도 이북의 불교를 소홀히 할 수 없어 탐방하고자 했던 것이다. 우리민족의 통일에 대한 열망을 종교인들과 종교단체가 앞장선다면 통일대업이 빠르게 이룩될 수 있을 것이며, 불교와 기독교의 다양한 인적자원과 물적자원을 조국통일 성취 사업에 쏟아붓는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백두산 천지 종덕사를 필두로 사찰들을 모두 탐방할 계획

올해는 고려건국 110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다. 남측 불교계에서는 작년부터 고려건국을 기념하며 불교문화제와 세미나 등의 행사를 곳곳에서 개최하기 시작했다. 특히 남측 불교계의 평신도들이 주축이 되어 남북 불교학술교류 차원에서 고려불화 국제세미나를 준비 중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1100주년을 기념하는 남북학술대회는 고려불화 세미나를 통해 태조 왕건과 고려시대 불교의 역사적 위상에 대해 논의하며 북측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고구려 불교와의 비교와 접목 그리고 역사적 의의를 남북의 불교인들이 모여 토론하는 매우 의미있는 장이 될 것으로 예상한다. 특히 필자와 미주에서 종교평화협의회에서 함께 활동하는 범휴스님이 남측 대표단을 이끌고 방북해 고려불화 세미나를 개최하고자 동분서주하고 있는 중에 필자에게도 자문을 구한 적이 있어 적극 협력하기로 하였다.

필자는 우리나라의 자생종교 중 하나인 천불교(天佛敎) 터전을 참관하기 위해 일부러 여름과 겨울, 두 차례에 걸쳐 백두산 천지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순수 전통 불교는 아니지만 민족종교화된 천불교는 김일성 주석의 자서전인 ‘세기와 더불어’에도 등장하는 불교에서 파생된 애국적 종교이다. 그 대표적 사찰이 바로 백두산 천지호반 공터에 조성된 종덕사(宗德寺)라는 사찰이다. 발굴된 유물들과 터전에 의해 알려진바에 의하면 1906년에 조선의 신도들이 백두산 천지가에 세운 이 절은 모두 목재로 지어졌으며 절간의 규모는 방이 무려 99칸이나 되었다.

천지물이 흘러나오는 동북쪽 평평한 바위에 자리잡은 이 종덕사 유적지는 여름에 방문하려면 천지로 내려와 절터를 방문한 후에 승사하를 따라 장백폭포 옆에 조성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된다. 그러나 겨울철에는 그 반대로 올라가여한다. 우선 겨울철에는 장백폭포 우측 통행을 금지하고 쇠사슬과 자물통으로 통로를 폐쇄하기 때문에 올라갈 수가 없다. 그러나 필자는 그곳을 관리하는 한족(중국인) 공무원이 암묵적으로 허락해줘서 남측에서 온 스님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현장으로 올라가기도 했다.

승사하 천지호를 거슬러 올라가다가 왼쪽 편의 웅장한 바위 위가 나타나면 그곳이 바로 종덕사 터전이다. 지금은 쓸쓸한 옛터만 남았으나 당시는 은은한 종소리와 더불어 예불을 드릴때는 ‘덩덕쿵’하는 요란한 의식이 진행되었다, 일제시대에 창건된 이 절간은 애국적이고 민족적인 반일성향의 사찰이었으며, 항일투쟁과 항일 투사 종교인들의 본거지가 되었다. 당시에는 평소에도 인근 산적들이나 일제에 의해 이곳에 기거하던 종교인들이 괴롭힘을 당했으며 특히 일제가 패망하며 퇴각할 때는 절간을 훼파하다시피했던 곳이라서 필자에게 더할 나위 없이 매력이 끌리는 불교 유적지였다.

그러나 절터가 안타깝게도 북측 영역이 아닌 중국측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중국 당국의 눈을 피해 매번 은밀히 참관해야 했다. 손정도목사기념학술원을 이끌고 있는 필자는 종덕사에 대한 학술적 연구를 위해 남측의 전문 연구가인 우룡스님과 함께 공동으로 종덕사 터전을 답사하기도 했으며 이미 발굴된 유물들은 현재 연변대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와같이 백두산 종덕사 터전 참관을 필두로 상황이 허락 된다면 다음 방북 프로젝트는 이북에 있는 불교 사찰들을 본격적으로 모두 참관할 계획이다. 칠보산, 묘향산, 구월산, 금강산 등 4대 명산에 고루 퍼져있는 유명 고찰들을 우선 순위에 두고 있다. 현재까지 필자는 황해도 정방산의 성불사, 평양 대성산의 광법사, 평양시 역포구역의 정릉사 등에 대한 참관을 이미 마쳤으나 불교사찰 순례 차원의 참관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현재 이북에는 크고 작은 사찰이나 암자 등이 모두 70여개 정도가 보존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중에서도 말로만 듣던 약 30여개의 유서깊은 사찰들을 1차적으로 참관을 할 예정이다. 북측 당국이 관심을 가지고 운영중인 사찰들 위주로 순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이를 위해서 사전 준비와 공부가 철저해야 하기 때문에 그동안 참관을 서두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동안 필자가 사찰을 참관 할 때 소상하게 설명해준 북측의 해설사나 담당 스님들의 증언들을 정리하여 남북 불교 교류를 하고자 하는 불자들과 문화재 연구 관계자들에게 작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우선적으로 남기려한다.

▲ 겨울철에 종덕사터를 올라가려면 백두산 장백폭포 방향으로 올라가야한다. 그러나 폭설등으로 인해 겨울철에는 산행로를 페쇄한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장백폭포 출입구를 관리하는 중국인(한족)의 배려로 종덕사 답사를 마치고 하산한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여름철에 백두산 천지를 오르기 위해서는 장백폭포 방향의 계단 코스를 이용해야 한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여름철 백두산 천지 종덕사 터에서 도착해 바라본 반대편 천지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준비된 질문으로 해설사와 스님에게 다가가다

필자가 백두산 종덕사 탐방을 하던 중 연변에서 우연히 만난 서일범 연변대 교수는 평양의 고구려 절터에 관한 경험담을 말해준 적이 있었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평양의 여러 사찰 유적 중에 광개토대왕 시기에 창건한 ‘평양 9사(寺)’ 중에 광법사, 금강사, 영명사 등이 있는데, 아쉽게도 금강사와 영명사 터전은 외국인들은 접근할 수 없는 상황이다”라고 귀뜸해 주었다. 그후 필자가 사실여부를 확인해보니 절터에 큰 공사가 진행 중인 것으로 보아 복원 작업과 관련된 사업이 진행 중인 듯 했다.

금강사에 대해 정확히 말하자면 문자왕 7년(498)에 “평양 대동강변에 금강사(金剛寺)를 창건하여 많은 고승들을 배출하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청암리 사지(寺址)’ 가 금강사 터전이라는 것을 규명하는 일이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북측 학자들이 정황상 금강사로 추측하고 있을 뿐 아직도 이 절의 명칭을 정확히 알 수가 없다.

필자는 할 수 없이 금강사로 추정되는 청암리 사지를 방문할 수 없게 되자 평양 민속공원으로 발길을 향했다. 평양민속공원은 평양시 외곽에 있는 대성구역에 조성된 고구려시대 유적인 안학궁 터전과 주변 부지에 60만평의 엄청난 규모로 조성된 유적지 공원이다. 이 민속공원에 청암리 사지 목탑을 원본 크기대로 재현했기 때문에 찾은 것이다. 비록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로 건축했으나 그 규모와 위용은 대단했다. 이 목탑은 지금까지 총 세 차례나 복원되었는데, 첫번째는 북측 사학자들이 미니어처로 제작한 모형물이고, 두번째가 이곳 평양 민속공원에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로 복원한 실물 모형물이다. 그리고 세번째는 남측의 국립부여박물관의 삼국문화교류 특별전에 전시된 디지털 복원물이 있다고 한다.

필자가 역사적으로 큰 매력을 느낀 것은, 평양 천도 시기인 장수왕 15년(427) 한 해 동안 무려 아홉 개의 대규모 절간을 지었다는 사실을 보면 고구려가 얼마만큼 국가적으로 불교를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는가를 말해주는 것이며 동시에 평양 도읍 프로젝트를 얼마나 본격적으로 정권 차원에서 다그쳤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금강사 터전으로 추측하는 청암리 사지와 평양민속공원을 뒤로하고 그 다음은 평양 대성산 자락에 위치한 광법사와 시설물들을 참관할 수 있었다. 광법사 수덕스님을 통해 이 절에 대한 여러 역사적 배경과 이곳에서 북 최초의 승려대학을 운영는 이야기등에 관한 자료들을 직접 접할 수 있었다.

또한 동명왕릉 앞에 복원된 정릉사를 참관했을 때는 북측 당국의 배려로 역사지식이 매우 뛰어난 여성 해설사를 붙여 주어 사찰 터전 발굴과 관련한 일화들과 절간의 유래에 대해 북측 입장을 소상히 들을 수 있었다. 신라말기 도선국사가 창건한 황해도 정방산의 성불사를 방문했을 때는 법성스님의 설명과 해설을 통해 많은 숨겨진 비화와 절간에 얽힌 이야기들을 직접 접할 수 가 있었다. 필자는 북측 스님들과 사찰 전문 해설사들의 설명을 녹취하여 정리한 것을 위주로 오늘부터 이북의 불교사찰 시리즈를 몇 회 정도 연재하고자 한다. (계속)

▲ 평양 광법사 입구 해탈문 앞에서의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광법사 경내에서 수덕스님으로부터 8각 5층 석탑의 유래에 대해 설명을 듣는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황해도 정방산 성불사 대웅전 앞 4각 5층 석탑 앞에서의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성불사 입구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평양민속공원에 건설된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청암리 사지 8각 8층 목탑의 실물크기 모형물. 원래의 크기를 현하면 80-90미터 크기이며 이는 황룡사 9층 목탑과 비슷한 크기라고 한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평양민속공원 입구부에서 해설사의 설명을 듣는 필자. [사진 제공 - 최재영 목사]

▲ ​금강사와 청암리 사지 석탑에 대해 북측 정기풍 교수의 부연 설명을 듣는 필자. 정릉사의 탑과 마찬가지로 청암리 사지 탑도 고구려 사찰의 특징인 목탑을 중심으로 세 금당이 둘러싼 1탑 3금당 식의 배치를 하고 있었다. [사진 제공 - 최재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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