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열 / 재미동포 시인

연재를 시작하면서

 지난 해 10월, 3주일 동안 북한을 방문했다. 평양을 비롯, 개성, 사리원, 묘향산, 원산, 금강산, 함흥 등 여러 곳을 돌아보았다. 북녘 동포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내가 보고 듣고 느꼈던 생생한 이야기를, 앞으로 스물한 번에 걸쳐 독자 여러분께 들려드릴 예정이다.  분단 70년을 맞는 해다. 한반도의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화해와 통합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해가 되길 바라면서 얘기를 시작한다. / 필자 주

 

▲ 이른 아침 함경남도 함흥 성천강 다리 위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 [사진제공-정찬열]

 

함흥시의 아침 풍경

10월 17일(금) 맑음. 북한 방문 14일째다. 아침 6시 기상. 혼자서 호텔 주변을 돌아보았다. 호텔 앞 노점상은 벌써 문을 열었다. 어제 저녁 홍시를 사왔던 곳이다. “건강에 좋은 두부 곡차를 판매합니다. 수푸있습니다.” 삐툴삐툴 쓴 글씨를 작은 종이에 걸어놓았다. 바로 옆 노점상은 식당인 모양인데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옆에 안내판이 붙어있다. “일화장식사봉사안내 - 메밀국수, 강냉이 속살국수, 닭알우유지짐빵, - 단체주문 받습니다.” 라는 안내판이다. 
 
아주머니가 길을 쓸고 있다. 호텔 앞 차도에 자동차는 보이지 않고, 붉은색 유니폼을 입은 청년 세 명이 길 한 복판을 발맞춰 뛰어가고 있다. 함지박을 이고 가는 아주머니도 보인다. 
 
아침 식사는 호텔 구내식당에서 먹었다. 손님은 우리 일행뿐이다. 식사 후 산책을 나갔다. 인도를 따라 여인들이 백팩을 메고 걸어간다. 출근하는 모양이다. 남자들도 백팩을 메고 간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들도 보인다.
 
잘 지은 멋진 기와집이 보여서 무슨 건물이냐고 김 참사에게 물었다. 신흥관이라고한다. 함흥냉면의 본산이란다. 평양에는 옥류관이요 함흥에는 신흥관이라는 얘기다. 함흥에 왔는데 함흥냉면 맛을 보아야 하지 않겠냐고 했더니 점심을 여기서 먹자고 한다.  
 
‘함경남도 혁명사적관’ 건물 앞을 지나 오른쪽으로 꺾어 언덕을 올라갔다. 언덕 높은 곳에 김일성 김정일 동상이 서있다. 멀지 않은 소나무 우거진 쪽에 자그마한 정자가 보인다. 성천각이라고 한다. 정자에 올라서니 시내가 한 눈에 바라보인다. 함흥이 아침 안개에 쌓여있다. 어제 건너왔던 성천강 다리 위로 사람들이 부지런히 오가고 있다. 저 강을 경계로 동쪽은 농업지구, 서쪽은 공업지구로 나눠진다고 했다.

사람들이 오갈 뿐, 자동차는 보이지 않는다. 출근 시간이면 꼬리에 꼬리를 문 자동차에 시달리던 생각을 해 보니 별 세계에 와 있다는 느낌이 든다.
 
언덕을 내려오는데 30여명 남녀가 줄을 맞추어 언덕으로 올라가고 있다. 무엇하러 가는 사람들이냐고 김 참사에게 물었다. 김일성 김정일 동상에 인사하러 가는 행렬이라고 한다. 회사 설립일이나 결혼 같은 특별한 날에 지도자에게 인사하는 것은 주민들의 일상생활의 하나라고 설명해준다.

▲ 호텔 앞 노점상. [사진제공-정찬열]

 

▲ 함흥의 아침 풍경, 백팩을 맨 사람,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사진제공-정찬열]

 

▲ 아침 안개에 쌓여있는 시가. [사진제공-정찬열]

 

▲ 함흥시내 풍경. [사진제공-정찬열]

 

흥남비료공장 방문

흥남을 향해 출발한다. 운전사 방 동무의 처갓집이 이 부근이라서 어제 저녁 다녀왔다고 했다. 처갓집 다녀온 얘기를 한다. 처할머니가 86세이고 장인은 47세이신데. 두 분이 식사 때마다 반주 한 잔씩을 빼지 않는다고 한다. 3대가 함께 산다고 했다. 평양에서 대학을 졸업한 다음 지방에서 일하고 있는 처남을 칭찬한다. “... 고런 징표를 다 갖췄으니, 소꼬리보단 닭대가리가 되겠다고 지방에 내려온 기 아니겠시유.“
 
3대가 함께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북한에 그런 가정이 많은가 물었더니 그렇다고 한다. 주택공급의 한계도 있지만, 그보다는 가족이 함께 살아가는 게 아이들의 교육은 물론,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 가족제도의 장점이 아니겠냐고 반문한다. 노년을 양로원에서 보내는 서구식보다는 훨씬 인간적인 전통적 미풍이 아니냐는 말이었다. 당연한 얘기다. 날이 갈수록 핵가족화 되어가는 현실에서 그럴 수 없어 아쉽지, 자식이 부모를 모시며 사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사실 어디 있겠는가.

함흥 시내를 빠져 나간다. 인도 위로 우마차가 지나간다. 마부는 마차 위에 걸터앉아 끄덕 끄덕 소를 몰고 간다. 소 뒤에는 소똥을 받아내는 똥받이를 달아놓았다. 그 옆으로 사람이 걸어가고, 자전거가 뒤따르는 모습이 보인다. 바로 뒤쪽으로 기차가 지나가고 있다. 평양, 함주 간을 운행하는 기차라고 했다. 교통순경이 자동차를 향해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9시경 흥남비료 공장에 도착했다. 말로만 들어왔던, 일제가 1930년에 세웠다는 비료공장이다. 정문에 ‘26호모범기대련합기업소’라는 표지가 보인다. 이 비료공장은 해방 이후 한국의 최대 비료공장이었다. 분단이 되면서 북한은 남한에 대한 비료공급을 중단했다.

남한은 자력생산이 가능해지기 전까지 화학비료를 전량 수입했다.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을 방문했을 때, 독일정부가 광부들의 송금을 담보로 한국정부에 1억 5000만 마르크(3000만 달러)를 빌려주어 처음으로 비료공장이 세워졌다. 1964년 당시 한국의 국민소득은 77달러, 필리핀 국민소득은 170달러, 태국은 260달러였으니 한국이 얼마나 가난한 나라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은 한국이 국민소득 3만 달러를 오르내리지만, 그런 시절이 있었다.
 
공장 입구에 “검사원의 아낌없는 찬사”라는 큰 글씨로 쓴 간판이 보인다. 그 밑에 <2보수직장 제관 2반 용접공 홍성일 동무 주야간 계속되는 가스청정직장 변탈 1,2탑 환산관 교체작업에서 속도와 질을 최상의 수준에서 보장! 모든 사람들 감탄!>이라는 사연이 적혀있다.
 
자전거를 타고, 혹은 걸어서 출퇴근을 하고 있다. 정문을 들어서는 사람은 출근하는 사람이고 나가는 사람은 퇴근하는 사람들이다. 근무 교대를 하는 모양이다.
 
공장을 걸어서 들어간다. 한 건물 앞에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께서 다녀가신 건물”이라는 글씨가 빨강색 바탕에 금빛 글씨로 걸려있다. “백두산의 아들 김정일 장군을 천만년 높이 받들어 모시자!”라는 글이 백두산 그림 위에 크게 써 있다.
 
홍보관으로 안내를 한다. 흥남비료공장에 관한 여러 가지 사항이 년도에 따라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있다. “흥남비료공장은 우리나라의 비료생산에서 생명선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김일성 어록이 사진과 함께 벽에 붙어있다. 6.25사변 때 폭격으로 공장이 파괴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건설되었고, 2011년 10월 뇨소비료를 생산하게 되었다는 얘기 등을 안내원이 청산유수로 설명한다.     
 
종업원은 산하 공장 4개 직원을 포함 약 7천명이라고 한다. 공장 안에 화학공업대학이 있다고 한다. 80만톤 질소를 생산할 예정이었는데 금년은 100% 달성했다고 한다. 요소는 논농사에 필요하고, 질소는 밭농사에 필요하다고 한다. 종업원들이 24시간 3교대로 근무를 하고 있으며, 공장은 40만 평방m 넓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갈탄재로 블록도 만든다고 한다.  전기 때문에 고전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날이 가물어 수력발전이 제대로 가동되지 못해 전기사정이 호전되지 못하는가 싶었지만, 금년 농사가 풍년이라니 다행이다.
 
“이 분이 꼭 아바이 같아요.” 김 참사가 한 마디 한다. 인상도 좋고 안내하는 태도가 어딘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던 참이었다. 그제서야 안내원이 이전에 이 공장의 부지배인이었다고 자신을 밝힌다.
 
문을 나서는데 ‘나들문’이라고 써 있다.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문이라는 뜻인 모양이다. 안내원이 ‘주은래 방문 기념비’ 앞으로 안내한다. 1958년 주은래 중국수상이 이곳을 방문했던 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다.
 
공장 곳곳을 안내하는데 잘 보이는 곳에 시 한 편이 걸려있다. <인간의 도덕>이라는 제목이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면서 지켜야할 도덕 / 그 모든 것 법이 자기의 조항으로 못다 밝히고 / 못미친 생활의 구석을 도덕이 환히 불을 켜고 있다 //  그 불빛은 환히 자기 량심과 사람들의 눈 / 그것이 때로는 법보다 더 무서운 것이거니 사업에서 실수는 만회할 수 있어도 / 한번 저지른 도덕의 실수는 일생을 두고 회복하기 어렵어라 / ..... / 물에 빠진 아이들을 건지려 남먼저 얼음구멍에 뛰어들지 않았다고 / 법의 판결을 받게될 것인가 // 사람이 사람으로 존경받는 것 직위냐 권세냐 / 아니여라 그의 마음속에서 도덕 빛날 때 인간이 인간으로 존경받을 수 있고 // ........ 아름답게 살자 젊은 날엔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 늙은 날엔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한생을 보람높이 살고 싶지 않은 사람 / 이 세상에 있으랴!”
 
꽤 긴 내용이다. 그렇지만 삭막한 공장생활에 시 한 편이 주는 위안과 위로는 작지 않으리라. 서울의 지하철 곳곳에 붙어있는 좋은 시들이 그러하듯이.
 
공장을 둘러보아도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여성 공장장이 뒷짐을 지고 계기를 살펴보고 있기에, “일하는 분들이 다 어디로 갔나요” 하고 물으니 빙긋이 웃기만 한다. 다시 밖으로 나와 걸어 나오는데 공장 한켠에 “장군복 태양복 수령복”이라는 글씨가 크게 보인다.

▲ 검사원의 아낌없는 찬사, 라는 큰 글씨로 쓴 간판이 보인다. [사진제공-정찬열]

 

▲ 출퇴근하는 사람들의 모습. [사진제공-정찬열]

 

▲ 흥남비료 공장 안에 세워진 ‘주은래 방문 기념비’. [사진제공-정찬열]

 

▲ 공장 잘 보이는 곳에 세워진 시 한 편, <인간의 도덕>. [사진제공-정찬열]

 

▲ 여성 공장장이 뒷짐을 지고 계기를 살펴보고 있다. [사진제공-정찬열]


바람찬 ‘흥남부두’에서 목을 놓아 금순이를 부른다

흥남부두 쪽을 향해 떠난다. 차에 올라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노래를 흥얼거린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 목을 놓아 불러 봤다 찾아를 봤다 / 금순아 어데로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더냐 /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이후 나홀로 왔다”

현인이 불렀던  ‘굳세어라 금순아’란 노래다. 노래의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앞자리에 앉은 김 참사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바닷가 방파제에 다다랐다. 흥남부두가 멀리서 보인다. 부두 중앙쯤에 거대한 크레인이 서 있고, 오른쪽으로 군함이 보인다. 항구 앞 작은 섬은 ‘대진도’라고 했다.  
 
말로만 들어왔던 흥남부두. ‘국제시장’이라는 영화를 통해 더 널리 알려진 항구. 1950년에 저 항구를 통해 흥남철수작전이 펼쳐졌고, 미군과 함께 10만 명 피난민이 배를 타고 남으로 내려갔다.

한국전쟁 당시 함경남도 장진군 고토리의 ‘장진호 전투’는 그 어떤 전투보다 치열했다. 영하 30~40도의 혹한 속에 12만 중공군에 포위된 미 해병대 1사단 장병 1만5,000명은 전멸 위기에 처했다. 당시 미 해병은 중공군을 상대로 17일간 사투를 벌이며 이들의 남하를 저지했고, 10만명의 피난민이 흥남 부두를 통해 탈출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벌었다. 장진호 전투의 대단원은 ‘흥남 철수’의 성공으로 막을 내렸다. 
 
이렇게 간단한 몇 줄로 당시의 상황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좀 더 구체적인 기록이 없을까 살펴보던 중, 다음 글을 읽게 되었다. 2015년 1월 7일자 한겨레신문 칼럼이다.
 
“흥남 철수는 맥아더 사령관의 작전 실패가 초래한 비극이었다. 철수는 기적적인 성공이었지만, 맥아더의 무모한 북진작전은 미군 전사상 가장 불명예스러운 실패였다.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애초 조중 국경선에서 50㎞ 이남까지만 북진하라고 명령했지만, 맥아더는 정치적 야망 때문에 이 명령을 무시하고 전면적인 북진을 지시했다. 중국 인민군의 개입에 대해서도 오판했고, 그들의 전력을 무시했다. 그 결과 중공군의 유인과 매복 전술에 휘말려 모진 희생을 낳으면서 38선 이남으로 퇴각했다.

개활지가 많은 서부전선은 그래도 나았다. 협곡과 산악지대를 통해 북진했던 동부전선의 상황은 참혹했다. 50㎞의 협곡으로 철수하면서 미군은 무려 6500여명의 장병과 군속을 잃었다. 함흥에 도착했지만 중공군은 이미 원산을 장악하고 있었다. 탈출로는 바다밖에 없었다.
맥아더는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26개 이상의 원자폭탄을 북쪽 지역에 투하하려 했다. 1950년 11월26일께 모든 전선에서 철수 명령을 시달하면서, 그는 동해에서 서해까지 국경 지역을 방사능 낙진으로 덮어버리겠다는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전면적인 흥남 철수를 명령하고, 12월9일 그는 다시 원폭 사용에 대한 재량권을 본국에 요청했다.

당시 주민들 사이에서 원폭 투하는 기정사실처럼 되어 있었다. 설사 원폭이 아니더라도, 포격 때문에 그곳에선 쥐새끼 한 마리 살아남기 힘들었다. 당시 함흥 일원에 쏟아 부은 함포 및 로켓포는 인천상륙작전 때의 1.7배에 이르는 규모였다. 주민들은 앉아서 죽으나 가다가 죽으나 마찬가지였다. 최선은 미군 가까이에 있는 것이었다. 그곳은 폭격을 당하지 않을 테니까. 수많은 금순이와 오빠들이 미군을 따라 흥남부두로 몰렸다.”
 
그랬다. 수많은 사람들이 흥남부두로 몰렸다. 죽고 사는 일이 가랑잎 같은 배 한 척에 달려있었다.
 
흥남철수는 미군 철수를 위한 작전이었다. 피난민을 데리고 가는 계획은 원래 없었다. 피난민을 태우자고 미 10군단장을 끝까지 설득한 사람은 고(故) 현봉학 박사였다. 그는 세브란스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의사로, 미국 측을 설득해 9만8000여명의 피난민을 미군 수송선을 통해 남으로 내려오도록 했다.
 
흥남철수를 얘기하면서 1950년 당시 35세 ‘레너드 라루’ 선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7,600톤급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 선장이었다. 선원은 12명. 흥남에 입항하여 퇴각하는 미국해군에 연료를 공급하고 돌아갈 계획이었다. 추위 속에 떨며 사람들이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영하 이십도. ‘자동차 엔진이 얼어 터지는’ 추위라고 미군들이 당시를 기록했다. 강풍 몰아치는 부두에 서서 애원하는 사람들을 버려두고 갈 수가 없었다. 선장은 명령을 내렸다. “사람들을 태우시오. 타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한 척의 배에 구출한 인원이 만사천여 명. 기네스북에 기록될 만큼 많은 인원이었다. 배가 항구를 출발했다. 미국 군함이 계속 포를 쏘아댔다.
  
선원들은 후일 이렇게 증언한다. “해변에 있던 군인들은 떠나고 해변에 남아있던 사람들도 사라졌죠. 그리고 나중에 항구 자체가 사라졌어요.”
 
선장은 전쟁이 끝난 후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47년간 수도원에서 베네딕도회 수도자로서 살다가, 2001년 10월 14일 생을 마쳤다. 공지영 소설 <수도원 기행2>에 나오는 얘기다. 
 
배를 탄 사람은 살아남았다. 허허벌판에 내던져졌지만 산 사람은 또 어떻게든 살아가기 마련이었다. 수많은 이산가족이 생겼다. 뿔뿔이 흩어진 가족,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던 한이 맺혀 가슴에 멍이 들었다. 그런 사람들은 소주잔을 앞에 놓고 노래로 상처를 쓰다듬었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 이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질 때 / 영도다리 난간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 그 영화를 보고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렸다. 수많은 덕수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런 세월을 살아온 지 어언 70년이다. 
 
저 작은 섬 ‘대진도’가 당시의 상황을 고스란히 보았던 증인이다. 혼자 옛일을 상상하고 있는데, 옆에 서 있던 김 참사가 불쑥 한 마디 한다. “저기 저 흥남부두는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완전 쑥밭이 되었디요.”
 
쑥대밭이 되었다, 는 말을 들으면서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랬구나. 배가 떠난 다음, 이 땅에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수많은 사람이 쑥밭 위에 별이 되었겠구나. 살아남은 사람들이 맨손으로 이 땅을 일으켜 세웠구나.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를 서로 다독이면서 오늘에 이르렀구나... 마음이 착잡했다.
 
전쟁은 남과 북 모두에게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런데도 툭 하면 ‘전쟁을 불사해야한다’는 말이 들린다. 다시는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전쟁은 곧 공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흥남부두 전경1. [사진제공-정찬열]

 

▲ 흥남부두 전경2. [사진제공-정찬열]

 

▲ 흥남부두 전경3. [사진제공-정찬열]

 
비날론(Vinalon) 생산공장 방문, 리승기 박사를 만나다

차를 돌려 ‘2.8비날론 연합기업소’로 향한다. 비날론(Vinalon) 생산공장이라고 했다. 석탄에서 섬유를 비롯한 소금, 식초, 물감 등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들어내는 곳이란다.
 
경지면적이 넓지 못하고 목화가 잘 되지 않는 북한에서 인민의 입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시급한 문제였다. 북한에 거의 무진장 있는 석회석을 원료로 섬유를 만들어내는 방법이 있었다. 전남 담양 출신인 당시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학장 리승기(1905년-1996년) 박사가 그 분야의 전문가였다. 1950년 10월, 전쟁 중 김일성은 그를 평양으로 모셔왔다. 안전을 위해 달구지로 산길을 따라 모셔왔다고 한다. 50년대에 ‘비날론’이라는 섬유를 발명하는 데 성공했다.
 
공장에 도착. 안내원이 안내를 시작한다. 1957년 첫 비날론을 생산했고, 비날론 생산공장이 여러 곳인데 이곳은 그 중 하나라고 했다. ‘2.8’이라는 이름은 2.8군대가 지었다는 의미라고 한다.
 
“2.8비날론련합기업소가 짧은 기간에 현대적으로 꾸려지고 비날론이 쏟아져 나오게 된 것은 원자탄을 폭발시킨 것과 같은 특대형 사변이며 온 나라의 대경사입니다.”

김정일 어록이 벽에 붙어있다. 안내원이 그동안의 과정과 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들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한다. 솜과 섬유, 소금, 간장, 식초, 물감, 가성소다, 염산, 카바이트, 초산 등, 최고 500가지 정도인데 지금은 170여 가지를 생산하고 있다고 한다. 석회석과 무연탄을 전기분해하여 생산물을 얻어낸다고 했다. 하루에 석탄 600톤이 필요하다고 한다.
 
“강성국가 건설에서 조선사람의 본때를 보여주자.” “우리 식대로 살아나가자.” 등의 글이 벽에 걸려있다.
 
과학자 한 사람이 얼마나 큰일을 해낼 수 있는가, 한 인재(人材)가 인류를 위해 얼마나 공헌할 수 있는가, 를 공장을 둘러보면서 생각했다. “사람이 힘이고, 사람이 희망”이라는 말을 되새겨 보았다.
 
비날론을 생산하는 공장은 이곳 2.8연합기업소와 함께 남흥청년련합기업소, 승리화합련합기업소 등 5곳이라고 했다.  
 
리승기 박사는 비날론의 발명으로 1961년에 공산주의권 노벨상으로 불리는 ‘레닌상’을 수상했다. 까맣게 모르고 있던 사실이다. 정치 체제는 다르지만 이런 분은 널리 알려 민족의 자랑으로 삼을 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뒤따랐다.

그런데 그 후, 북한이 수소탄 실험을 했다는 뉴스를 듣게 되고, 이승기 박사가 북한 영변 원자력발전소 초대 소장을 지내는 등 1996년 사망 때까지 핵개발을 주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전남 담양군 창평면에 그의 생가가 남아있다고 한다. 그가 남한에 있었다면 어떤 일을 해낼 수 있었을까. 지난 일을 가정해본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일까.

▲ 2.8비날론 공장에서 안내원이 설명하고 있다. [사진제공-정찬열]

 

▲ 비날론 제품들1. [사진제공-정찬열]

 

▲ 비날론 제품들2. [사진제공-정찬열]

 

▲ 비날론 제품들3. [사진제공-정찬열]

 

▲ 비날론 공장 내부. [사진제공-정찬열]


함흥냉면 원조 신흥관에서 점심을 먹다 

다시 함흥에 나왔다. 점심을 먹으러 신흥관으로 갔다. 손님이 꽤 많다. 2층으로 안내를 한다. 함흥냉면 원조집이 아니던가. 함흥냉면을 주문했다. 감자지짐, 찰떡, 빵, 감자송편, 물만두 등이 차례로 나온다. 그리고 회냉면이 나왔다. 국물이 시원하고 깔끔하다. 맛이 깊다. 면발은 쫄깃쫄깃한데 도마도와 오이 씹히는 맛이 어울려 입안에서 시원하게 사근거린다. 안내원이 평양냉면은 메밀을 쓰지만 함흥냉면은 감자 녹마국수라고 설명한다. 자르지 않고 먹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외지에서 온 사람인 것을 담박 알아본다. 
 
후식으로 가재미 식혜가 나온 다음 아이스크림을 내온다. 아이스크림을 찹쌀과 계란 버터로 만들었다고 한다. 내 그릇에 육수가 좀 남아있는 것을 본 안내원이 “육수를 다 드셔야 합네다” 웃으며 얘기한다.
 
점심을 먹고 밖에 나오니 한 아주머니가 사진을 찍겠냐고 묻는다. 샘플 사진을 걸어두고 즉석 사진을 찍어주며 돈을 받는 사람이다. 삼륜차가 지나간다. 바퀴가 셋 달린 작은 트럭이다. ‘릉라도’라고 옆에 써 있다. 무슨 장사를 하는 모양이다.

▲ 회냉면. [사진제공-정찬열]

 

▲ 신흥관 앞에서 사진을 찍어주고 돈을 받는 사람. [사진제공-정찬열]

 

▲ 삼륜차가 지나간다. 바퀴가 셋 달린 작은 트럭이다. [사진제공-정찬열]

 

▲ 신흥관 전경. [사진제공-정찬열]

 

울림폭포 가는 길

마식령 스키장을 향해서 출발. 오늘은 그곳에서 머무를 예정이다. 가는 도중에 울림폭포를 들려가자고 한다. 어제 올라왔던 원산 쪽 길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운전사 방 동무가 신흥관 냉면 얘기를 하면서 너스레를 떤다. “빵두 두지, 물만두 나오디, 이것들이 시키디도 않았는데 자꾸 음식이 나와 맛있는 음식을 쓰게 먹었단 말입네다.” “자꾸 나와 야단났다, 그러니 아이스크림이 쓰지 않겠냔 말입네다.” 값이 비싸게 나올까 걱정이 되어 음식맛을 제대로 모르고 먹었다는 얘기다. 모두들 한바탕 웃었다. 
 
소가 달구지를 끌고 간다. 송아지가 따라가는 걸 보니 암소인 모양이다. 함흥지방 농가도 다른 지역과 비슷한 모습이다. 가을걷이는 거의 끝나고, 지붕에는 울긋불긋 농산물들이 널려있다. 지붕에 무엇을 말리는 모습은 남한과 달리 북한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풍경이다.
 
전망 좋은 곳에서 잠시 쉬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야산을 개간하여 밭을 많이 만들어놓았다. 황토밭인데 홍수가 나면 대책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뒷좌석에 앉아 옆 풍경을 보면서 언덕길을 내려간다. 거의 4면이 깊은 언덕으로 둘러싸인 움푹한 마을이 내려다보인다. 20여 채 되어 보이는 작은 동네다. 지붕 위에 옥수수를 말리고 있는 노란 풍경이 한 폭의 그림이다. 차를 잠깐 세워 사진을 찍고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데, 그새 자동차가 언덕을 꽤 내려 와 버렸기에 그냥 지나쳤다. 지금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두고두고 아쉬운 풍경이 되었다.   
 
아주머니 두 분이 길가에서 상자 위에 감을 얹어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감이 많이 나는 지역인 모양이다. 저런 모습은 남쪽에서도 이따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원산 가는 길에서 울림폭포 쪽으로 차가 방향을 튼다. 산속 오지 길이다. 시멘트 길인데 포장한 지 오래지 않아 보인다. 김 참사에게 물으니 군인들이 이 길을 만들었다고 한다. 한참을 가도 사람이나 차가 보이지 않더니, 50대로 보이는 한 남자가 무거운 자루를 지게에 지고 찻길을 따라 힘겹게 언덕을 올라가고 있다. 식량인 모양이다. 이 높은 언덕을 저 무거운 짐을 지고 어떻게 올라갈까 걱정이 된다.
 
남편이 집에 도착하면 눈 빠지게 기다리던 아내가 밥을 짓기 시작할 것이다. 오늘 저녁, 온 식구가 밥상에 빙 둘러 앉아 김나는 밥을 맛나게 먹고 있을, 한 가난한 농가의 저녁 식사 풍경이 눈에 아른거린다.   
 
울림폭포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에 ‘울림명승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20여분 걸어 올라가니 폭포가 보인다. 함께 걸어가던 운전사 방 동무가 한마디 한다.
 
“이 꼬락쟁이 폭포는 나무하러 오는 사람이나 알았지 뭐, 이제는 평양에서도 우야 온단 말입네다.”  
 
김 참사에게 ‘우야’란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 우정, 혹은 일부러 라는 뜻이라고 한다.
 
방 동무 말처럼 이 폭포는 하도 깊은 산속이라 나무꾼이나 알고 있던 곳인데, 2001년 정부에서 관광지로 개발하여 오픈한 폭포라고 한다. 강원도 천내군과 법동군 사이에 있다.
 
울림폭포에 도달했다. 올해는 가뭄이 들어 물이 예년 같지 않다고 하지만 요란한 폭포 소리가 산을 울리고 있다. 높이가 75m라고 한다.
  
젊은 남자 둘이 가까이 오더니, 그 중 한 사람이 품속에서 산삼을 꺼내 보여준다. 50년생 진짜 산삼이라고 한다. 가만히 있으려니, “진짜인지 가짜인지 뿌리를 라이터로 태워보면 알 수 있습네다. 진짜는 타지 않습네다.” 옆에 서 있는 다른 젊은이가 거든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이끼로 싸여있는 삼이 제법 그럴듯해 보인다. 한 뿌리니 80달러 정도면 드리겠다고 해서, 북한 방문 기념으로 사볼까 싶은데 옆에 서있던 김 참사가 시간이 없다고 내려가기를 재촉한다. 사지 말라는 신호로 이해했다. 

▲ 울림폭포, 75m라고 한다. [사진제공-정찬열]


마식령 스키장, 삭도를 타고 대화봉 오르다
 
다시 차에 올랐다. 첩첩산중이다. 갈지(之) 자로 지그재그를 그리며 산을 올랐다가 내려가자 제법 평평한 들판이 나온다.
 
남정네 두 사람이 냇물을 따라가며 바위를 들춰 고기를 잡고 있다. 망치로 바위를 때려 고기를 기절시켜 고기를 잡는 방법이다. 나무 매나 망치로 물에 잠긴 바위를 꽝 내리친 다음 가만히 바위를 들추면 그 아래 숨어있던 기절한 고기들이 물 위로 떠오른다. 냇물을 따라 크고 작은 바위를 더듬다 보면 한 냄비 분량의 민물고기가 금시 잡혔다. 붕어, 피라미, 메기, 뱀장어 같은 고기들로 매운탕을 끓여 소주 한 잔 마시는 즐거움은 경험해보지 않는 사람은 알 수 없을 것이다. 60대가 넘는 농촌 출신에게는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조금 더 내려가다 보니 짧은 섶 다리가 보인다. 섶 다리는 Y자형 나무로 다릿발을 세우고, 위에 솔가지 등을 깔고 흙을 덮어 만든 임시다리를 말한다. 옛날에는 남쪽에서도 냇물이 흐르는 곳이면 섶 다리를 쉽게 만날 수 있었다. 남이나 북이나 살아가는 방법이 저렇게 비슷하다.
  
평양-원산 고속도로에 진입하자 10여분 후에 마식령 스키장이 나온다. 3시 30분 경 스키장 도착. 호텔이 꽤 크다. 전체객실이 130개라고 한다.
 
좀 늦은 시간이지만 리프트를 타고 꼭대기 대화봉까지 올라가기로 했다. 여기서는 리프트를 삭도라고 한단다. 삭도 타는 값은 1인당 7달러, 스키복은 물론 장비 일체를 빌려서 스키를 할 수 있다. 하루 렌탈 비용이 35달러이다. 김 참사와 방 동무랑 셋이서 리프트를 타고 올라간다. 스키시즌은 아니지만 관광객을 위해 꼭대기까지 리프트를 운행한다고 했다. 바람이 차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병사 세 명이 스키장 가상자리 허물어진 부분을 고치고 있다. 군인들이 관리를 맡아하는 모양이다.
 
대화봉까지 올라왔다. 1,364미터 산 정상에 올라 사방을 둘러본다. 산 넘어 산, 첩첩이 산이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중이다. 안내판에 제1 주로가 5,093미터라고 적혀있다. 바람이 너무 세고 추워서 잠깐 밖을 둘러 본 다음 매점 안으로 들어갔다. 공사 중이라 어수선하지만 간단한 음료와 먹거리를 팔고 있다.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따끈한 커피가 그만이다. 춥다고 하니 종업원 아가씨가 평일에도 봉우리에 구름 낀 날이 많다고, 날이 맑으면 동해바다가 보인다고 한다.
 
날이 저문다. 내려가려고 리프트를 탔다. 공사하러 올라왔던 남자 직원과 함께 내려가게 되었다. 막 출발했는데 리프트가 선다. 정전이 된 모양이다. 전기가 들어오기를 기다려야 한단다. 사방은 어두워지고 바람 소리가 무섭다. 이렇게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밤을 새우는 게 아닐까 생각하니 겁이 덜컥 난다. 스키장은 특별관리 지역이라 정전 되는 일이 드문데 오늘 이런 일이 생겼다면서, 남자 직원이 자기 잘못이라도 된 양 미안해한다. 몸을 웅크리고 바람에 흔들리며, 15분쯤 지났을까. 리프트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미국 스키장에서도 리프트를 타고 가던 중 정지하는 일이 부지기수다. 스키어가 리프트를 타고 내릴 때 넘어지거나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스키 초짜들이 타는 리프트는 멈추는 횟수가 더 많다. 오늘 일 또한 그런 종류의 문제였는지도 모르겠다. 
 
깜깜한 어둠 속을 리프트를 타고 내려왔다. 남자 직원은 산 아래 마을에서 산다고 했다. 매일 스키장에 출근 하는데 내려서 집에까지 걸어간다고 한다. 옷이 좀 얇아 보인다.
 
호텔에 들어왔다. 방 동무가 추워서 혼났다며 몸을 떤다. 김 참사는 내게 있던 여분의 잠바를 주었지만, 방 동무는 옷을 가볍게 입었으니 많이 추웠을 성싶다.  
 
저녁밥을 먹으러 식당으로 갔다. 방 동무가 처갓집에서 가져온 술을 꺼낸다. 삼지구엽초 술이란다. 향기가 좋다. 술이 얼큰해지고 피차에 말이 많아진다. 방 동무가 한 마디 한다. “두 벌 자식, 세 벌 자식까지는 어려운 게 아니겠습네까. 세 살 반짜리 손자가 증조할머니에게는 안 간단 말입네다.”

증손자를 안고 싶은 할머니의 뜻과는 달리 아이가 증조할머니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래도 3대가 함께 살 수 있는 게 얼마나 큰 복이냐며 노상 처갓집 자랑이다.
 
호텔은 1,2,3,등급으로 구분하여 요금을 받는다고 한다. 1등실은 $280, 2등실 $190, 3등실 $145란다. 4등실은 없냐고 물었더니 종업원이 웃는다. 3등급 방으로 정했다. 금강산에서 이용했던 호텔과 비슷한 수준이다.
 
룸에 들어와 보니 비교적 잘 꾸며놓았다. 필요한 게 없으시냐며 종업원이 다녀간다. 두 명이 함께 움직인다. 평양 호텔에서도 보았던 모습이다. 두 명이 함께 서비스를 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 싶다.
 
김 참사가 침대에 벌렁 눕는데 좀 삐걱거린다. 이 모습을 보고 방 동무가 한 마디 한다.  “이거 신혼부부에게 되겠나. 늙은이들이야 뭐 흐물흐물하다가 말겠디만.” 그러자 김 참사가 대꾸를 한다. “아, 늙은이도 늙은이 나름 아이겠나요.”
 
바람을 쐴 겸 아래층에 내려갔다. 프론트에 종업원이 혼자 앉아있다. 이 스키장은 지난해 5월 중순 공사 착수하여 12월 29일 개장했다고 한다. 지난 해 몇 명이나 다녀 갔냐고 물었더니, 통계가 나와 있지 않다고 한다. 작년에는 장군님께서 조선에 와 있는 외국인들 수백 명이 무료로 스키를 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었다고 얘기한다. 이 지역이 다른 지역에 비해 춥고 눈이 많이 내리는 곳이라며 작년에는 10월 15일에 20센티 눈이 내렸단다. 금년에는 첫 눈이 내리면 눈포를 쏘아서라도 바로 개장할 계획이라고 했다.

▲  마식령 스키장 입구. [사진제공-정찬열]

 

 ▲ 마식령 호텔. [사진제공-정찬열]

 

▲ 리프트를 타고 올라갔다. 7달러다. [사진제공-정찬열]

 

▲ 스키장 전경. [사진제공-정찬열]

 

▲ 대화봉에서 내려다본 스키장 전경. [사진제공-정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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