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열 / 재미동포 시인

 

연재를 시작하면서

 지난 해 10월, 3주일 동안 북한을 방문했다. 평양을 비롯, 개성, 사리원, 묘향산, 원산, 금강산, 함흥 등 여러 곳을 돌아보았다. 북녘 동포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내가 보고 듣고 느꼈던 생생한 이야기를, 앞으로 스물한 번에 걸쳐 독자 여러분께 들려드릴 예정이다.  분단 70년을 맞는 해다. 한반도의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화해와 통합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해가 되길 바라면서 얘기를 시작한다. / 필자 주

 

10월 8일(수) 맑음. 북한방문 5일째다. 어렴풋이 들려오는 닭 울음소리에 잠이 깼다. 새벽 5시다. 평양 첫날 새벽 닭 울음소리를 듣고 의아했는데, 부근 어느 집에서 닭을 기르고 있는가 싶다. 

대동문 산책에서 만난 풍경들 

▲ 대동강변 공원에 있는 황소 청동상. [사진제공-정찬열]

6시, 대동문 쪽으로 산책을 나갔다. “생산도 학습도 생활도 항일유격대식으로!”란 표어가 보인다. 국보유적 제4호라는 표지 옆에, ‘평양시민위원회’에서 세운 대동문을 설명하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대동문은 6세기 중엽에 고구려가 평양성을 쌓으면서 세운 평양성 내성의 동문으로서 대동강을 건너 남쪽으로 통하는 관문으로 리용되었다. 문루에서 손을 드리우면 대동강의 맑은 물을 떠올릴 수 있다는 뜻에서 일명 <읍호루>라고도 불렀다. 대동문은 우리나라 옛 건축술의 높은 발전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당시 대동강을 건너 남과 북을 오가는 사람과 물자들이 모두 이 문을 통과했다는 얘기다. 을밀대로부터 능선을 따라 이어진 평양성벽이 이곳에서 잠시 멈춘다. 8도에서 모아진 물산이 서해를 통해 대동강을 따라 이곳에 도착한 다음, 이 문을 통해 평양성 안으로 들어갔다. 당시의 왁자지껄 북적였을 강변의 모습은 흔적도 찾을 길이 없다. 대동문 하나 덩그러니 혼자 남아 저렇게 지나간 역사를 증거하고 있다.

  대동문 부근 공원 잔디 위에 한복을 입고 비녀를 꼽은 여자가 가야금을 타고 있는 실물크기의 청동상이 세워져 있다. 멀지 않은 곳에 황소 청동상이 보인다. 앉아있는 황소 등에 망태를 맨 아이가 앉아 피리를 불고 있는 모습이다. 앉아있는 황소가 금방이라도 몸을 툴툴 털고 일어나 몸을 부르르 떨 것만 같다. 소뿔을 가만히 잡고 녀석을 달래주었더니 편안히 눈을 꿈벅이며 꼬리를 흔들어 파리를 쫒고 있다. 조각솜씨가 돋보인다. 어디서 피리소리가 들려오는 성 싶다.

  저런 조각품들이 도시의 품격을 높혀 준다. 스페인 산티아고 길을 걸어가면서 크고 작은 도시마다 전시된 조각품들이 눈길을 끌었다. 특별히 부르고스에 들렀을 때, 그곳 시내 곳곳에 세워진 청동 조각품인 황소상, 밤 굽는 아주머니상, 거리의 악사상, 등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 평양시내 아침 출근길 풍경. [사진제공-정찬열]

큰길을 청소하는 분들이 보인다. 건너편에는 등교길 학생들이 정류소 앞에 길게 줄을 서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큰 길에 자전거 서너 대가 지나가는 한적한 출근 시간이다. 자동차로 북새통을 이루는 서울이나 로스엔젤스 출근길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대동문 앞에 앉아 있는 중학생들을 만났다. 책을 보고 있기에 무슨 공부를 하고 있냐고 물었더니 책과 노트를 보여준다. 고급중학교용 <위대한 수령 김일성 대원수님 혁명력사 학습참고서>라는 책이다. 표지에 백두산 천지 사진이 있다. 노트는 한자로 英語簿라고 쓰여 있고 아래에 에펠탑 그림이 실려 있다. 호기심으로 노트를 열어보았더니 네 줄이 그려진 노트에 영어를 한국어로, 한국어를 영어로 번역한 문장들이 빽빽하다.

“체육은 수백만 사람에게 즐거움을 준다.(Sports provide____for millions of people), 당신이 늙었을 때 일하는 것을 그만두는 것(retire)” 등의 내용들이다. 사진을 찍어가도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그렇게 하라고 순순히 내어준다. 집이 이 근처라서 새벽에 나와 운동도 하고 공부도 한다고 했다. 사진을 함께 찍자고 했더니 스스러움 없이 세 녀석이 내 곁에 선다.

  여학생이 강가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다. 왼손을 위아래로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아예 통째로 내용을 외우는 모양이다. 누가 보고 있는지 관심조차 없다.

▲ 혁명력사 학습참고서 표지. [사진제공-정찬열]

 
 오늘은 묘향산 가는 날

 오늘은 묘향산 가는 날이다. 아침을 먹고 8시 30분, 묘향산을 향해 출발했다. 고급 아파트가 즐비한 창전거리 앞을 2층 버스가 지나간다. 평양 시내에서 1,2층 버스를 함께 운행하는 모양이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버스 옆면에 큰 글씨로 ‘내나라 제일로 좋아’라는 글이 적혀있다. 모든 시내버스에 저 글귀가 적혀있는 성 싶다. 

▲  창전거리 앞을 지나는 2층 버스.  ‘내나라 제일로 좋아’라는 글이 적혀있다. [사진제공-정찬열]

평양 시내를 벗어나자 가을 들녘이 눈에 들어온다. 시월의 푸르고 높은 하늘 아래 황금빛 넓은 벌판에서 여기저기 추수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벼를 베다 만 논이 보이고, 나락을 베어 논바닥에 눕혀 놓은 모습도 보인다. 볏단을 묶어 논바닥 군데군데 볏단을 쌓아 놓았다. 추수를 끝낸 빈 논바닥도 많다. 눈에 익은 정겨운 모습이다.

  남녁 들판에서는 이제 저런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다. 트랙터로 나락을 베어 알곡은 포대에 담겨지고 볏짚은 둥그렇게 기계로 말아 논바닥에 남긴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하얀 비닐 덩어리가 여기저기 나뒹구는 모습이 요즈음 남녘의 가을 논바닥 풍경이다.

  내 어릴 적 농사지을 때의 풍경이 떠오른다. 나락이 익으면 낫을 갈아 벼를 베어 저렇게 군데군데 볏단을 쌓아놓았다. 지게로 져서 집으로 옮겨 온 다음 홀태를 이용해 알곡을 털어냈었다. 눈에 익은 정겨운 풍경을 다시 보게 되었다.

  밭작물도 가을걷이를 끝낸 곳이 많다. 고구마 순이 밭에 널브러져 있고, 옥수수대를 쌓아놓은 풍경도 보인다. 10월 중순이 넘어야 남쪽에선 한창 수확기인데 북쪽은 아무래도 남쪽보다 철이 빠른 모양이다.

  마을이 보인다. 2,3층 아파트다. 고속도로를 따라 달리는데 한참을 달려도 앞뒤로 차가 보이지 않는다. 길을 전세 내어 달리는 기분이다. 5분이나 10분 만에 드문드문 차 한 대씩 스쳐 지나간다.

 청천강에서의 사색

  청천강에 이르렀다. 차에서 내렸다. 강바람이 차다. 바람을 맞으며 청천강 다리를 건너간다. 강물이 굽이치며 흘러간다. 아, 청천강. 을지문덕 장군은 이 강, 살수에서 수나라 30만 대군을 수장했다. 그 전쟁을 살수 대첩(612년)이라 부른다고 우리는 역사시간에 배웠다. 청천강은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요충지다.

6.25전쟁 때에도 이 강을 중심으로 중공군과 유엔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6.25 전쟁에서 결정적인 국면을 꼽아보라면 인천상륙 작전과 청천강 전투를 꼽는 사람이 많다. 인천상륙 작전에서는 유엔군이 승기를 잡았고, 청천강 전투에서는 중공군이 승리했다. 청천강 전투에서 중공군이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에게 승리함으로써 UN군이 평양에서 철수했다. 역사의 현장 청천강, 옛날 옛적에 일어났던 사람의 일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물은 오늘도 저렇게 말없이 흐른다.

  강물이 쓸리는 곳에는 넓은 농토가 생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들판 한 복판 저 멀리에 옥수수대로 만든 움막이 보이고 그 앞에 사람 둘이 앉아서 무언가를 하고 있다. 카메라 줌을 끌어당겨 자세히 보니 옆에 삽자루와 곡괭이가 놓여 있고 병에 무언가를 담고 있다. 들판에 간간히 보이는 원두막 같은 움막은 무슨 용도일까 궁금하다. 

 이 강을 경계로 평안북도와 평안남도가 나뉜다. 강을 건너니 평안북도 영변 땅이다. 길모퉁이를 돌자 왼쪽으로 골짜기 논이 보인다. 차근차근 내려오는 논다랭이마다 누렇게 벼가 익었다. 나락을 베어 눕혀 놓은 논도 있다. 바로 위 산 등성이는 밭작물이 시퍼렇게 보인다. 배추밭인가 보다. 

▲ 몇 십 년 만에 낫을 들고 나락을 베었다. [사진제공-정찬열]

한 논에서 대여섯 명의 여인들이 벼를 베고 있다. 남자 한 분은 볏단를 옮기고 있다. 논두렁을 따라 벼 베는 곳으로 가자 모두들 의아해하며 바라본다. 논둑 따라 세워진 나무 전봇대가 언덕을 넘어간다.

  논둑에 물꼬를 터놓았다. 추수할 때가 되면 물꼬를 터서 논을 말려야 한다. 눈이 바짝 말랐다. 논둑에 베어낸 콩 둥치가 발에 밟힌다. 논두렁콩을 심었나 보다. 누렇게 익은 나락 사이로 여기저기 피가 서있다. 시골에서 살아보지 않는 사람은 ‘피’를 모를지도 모르겠다.

피는 나락 사이에 자라나는 잡초다. 피를 뽑는 일은 논농사에서 중요한 일이다. 판화가 이철수는 <이쁘기만 한데....>란 글에서 “논에서 잡초를 뽑는다 /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 벼와 한 논에 살게 된 것을 이유로 / ‘잡’이라 부르기 미안하다”고 적었다. 짤막한 글 속에 많은 의미가 들어있다.

  물기가 남아있는 논은 벤 벼를 거꾸로 세워놓았다. 저런 모습도 남쪽과 똑 같다. 어느 해는 가을비가 며칠 계속 내려 벼가 물에 잠겼는데 나락에서 촉이 나기도 했다.

 논둑을 걸어가다가 아차 발을 잘 못 디뎌 넘어지고 말았다. 벼 위로 넘어져 그나마 다행이다. 꽤 충격이 있었던지 머리가 한 동안 멍하다. 여행 중에는 순간의 방심으로 위험에 처할 수가 있다. 해남 땅끝마을에서 강원도 고성까지 국토종단 때, 자동차에 치일 뻔한 경우가 세 번이나 있었다.

  일하는 아주머니의 낫을 빌려 벼를 베었다. 타닥 타가닥 타닥, 리듬을 타고 나락을 벤다. 몇 십 년 만에 낫을 들고 나락을 벤다. 옆에 서 있는 아주머니가 “선생님, 전에 많이 해 보신 솜씨입네다. 잘 베십네다”하고 말을 건넨다. 그 분에게 “어째, 살만하십니까” 하고 물으니. 대답은 않고 희미하게 웃는다. 한참을 벴더니 숨이 차다. 아주머니가 자꾸 그만 하고 낫을 달라고 한다.  감독관인 성 싶은 남자도 웃으며 그만 하시라고 만류한다.

  남자에게 올해는 논 한 마지기에 어느 정도 수확을 예측하느냐고 물었더니, 한 정보 당 5톤 정도 수확이 될 성 싶다고 한다. 이곳은 마지기가 아닌 정보로 단위를 계산하는가 보다. 차에 실려 있던 맥주 몇 병을 가져다 함께 목을 축였다. 꿀맛이다. 

▲ 논두렁 따라 아이가 염소를 몰고 간다. [사진제공-정찬열]

논두렁 따라 휘어진 길 위로 아이가 염소를 몰고 간다. 막대기 하나로 염소 다섯 마리를 살살 모시고 간다. 손을 흔들어주었더니 씩 웃는다. 여덟 살이나 될까. 천진한 웃음이다.

   멀리 건너편 골짜기 밭에서는 여남은 명이 콩걷이를 하는 모양이다. 경운기도 보이고 달구지도 보인다. 소 한 마리 논두렁에서 풀을 뜯고 있고, 염소 서너 마리도 멀리 보인다.

묘향산에 놀러온 북측 주민들과 술 한 잔 나누다

  묘향산 입구에 도착했다. 천천히 걸어 올라가는 길가에 코스모스가 피었다. 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가늘다. 100년만의 가뭄이라는 실감이 난다. 올라갈수록 물줄기가 약해진다.

  국제친선전람관에 도착. 김 참사와 내가 관람하는 동안 운전사 방 동무가 마을에 내려가 점심을 준비해오기로 했다. 국제친선전람관은 외국에서 김일성, 김정일 부자에게 보내온 선물을 전시해 놓은 곳이다.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대리석으로 지은 7만평 규모의 건물이라고 했다. 거의 지하에 묻혀있고 창문이 없는 건물이다. 선물 20만점 이상이 전시되어있다고 했다. 빌리 그레이엄이 기증한 백합도 있고 수카르노가 선물한 악어모형도 있다. 스탈린이 기증한 기차도 실물로 전시되어있다. 각국에서 기증한 진귀한 물건들로 가득하다.

  관람을 끝내고 나오니 점심을 비로봉 올라가는 근처 냇가에서 먹자고 한다. 가뭄이라 수량은 많지 않지만 물이 맑고 깨끗하다. 나무 한 그루가 바위를 감아가며 자라고 있다. 생존이란 저렇게 치열한 것이다. 

▲ 묘향산 골짜기, 놀러온 주민들과 술 한 잔 나누었다. [사진제공-정찬열]

주차장이 마련된 것으로 보아 이 부근이 쉬는 장소로 지정된 모양이다. 여기 저기 놀러온 사람들이 보인다. 점심 먹을 자리를 잡고 나서 먼저 와 자리를 잡고 철판에 고기를 굽고 있는 7,8명 그룹 쪽으로 건너갔다. 합석해도 괜찮냐고 물었더니 어서 앉으라며 자리를 내준다. 평양에 사는데, 직장 동료들과 회사 창립기념일이라 가족과 함께 놀러왔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저쪽 냇가에 어린 아이들 몇이 물장난을 하고 있다.

소고기, 오리고기를 굽고 있는 중이다. 인삼주를 따라준다. 엑기스란다. 독하다. 한 잔을 마셨는데 숨이 컥 막힌다. 칠색 송어회, 라며 먹어보라고 몇 점을 내 앞으로 밀어준다. 옆에 앉은 아가씨 나이를 물어보니 스무 살이란다. 아가씨가 상추에 고기를 싸서 건네준다. 좀 놀랐다. 미국에서 왔다고 하니 이런저런 질문을 한다. 한동안 얘기를 나누다가 우리 일행 쪽으로 건너왔다.

  어느새 모두들 술이 얼큰해져있다. 노래 가락이 나오기 시작한다. 영변이 고향이라는 22살 아가씨가 노래를 부른다. 점심을 가지고 방 동무와 함께 올라온 아가씨다. 

“나는야 비단처녀 영변의 비단처녀... / 우리의 운명과 우리의 행복은 장군님께 달렸기에 / 장군님의 안녕을 빕니다.”

아버지가 군관인데, 간호학교 졸업 후 간호원으로 1년 근무하다가 호텔로 직장을 옮겼다고 한다. 약산에 대해 얘기를 해달라고 하자, 리향금이라는 영변 아가씨가 “영변군 약산읍이란 말입네다. ‘일봉’이라고 엄지손가락을 닮은 봉우리가 있단 말입네다. 구룡강이 약산을 휘어 흐릅네다...” 말끝마다 ‘네다’가 붙는다.

  다음은 운전사 방 동무가 “장군님 가까이에 병사가 있다네”란 노래를 부른다. 그러고 보니 저쪽 사람들도 노래판이 벌어졌다. 여기도 노래, 저기도 노래, 골짜기에 노래가 울려 퍼진다. 우리 민족의 핏속에 가무를 좋아하는 인자가 있는가보다.

 “진포리 사랑” 등 몇 곡을 돌아가며 부르는데 모두가 비슷비슷하게 ‘장군님을 칭송하는’ 노래다. 어떻게 저런 노래를 부르면서 흥에 겨워 놀 수가 있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그런 내 심사를 읽기라도 한 듯이, 김 참사가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를 내놓는다. 날더러 한 곡을 부르라기에 ‘진도아리랑’을 불렀다.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덩실덩실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다.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와 어떤 분에게 노래 얘기를 했더니, “종교에 심취한 신자들이 찬송가를 흥겹게 부르듯이, 오랫동안 장군에 관한 노래를 부르면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반문한다. 생각해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진다.

 저쪽 놀러온 일행들도 한바탕 술자리가 끝났는지 끼리끼리 얘기를 나누는 사람, 물장난을 하는 아이들,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는 사람 등. 각자의 시간들을 즐기고 있다. 묘향산 골짜기 가을 단풍이 붉게 타오른다.

    어느새 냇물 건너편에 있던 소풍객은 돌아가고 우리 일행만 남았다. 해가 어스름할 무렵 우리도 보현사로 향했다.  

▲ 보현사 대웅전 전경. [사진제공-정찬열]

 

북한은 시골이나 도시나 선전 구호가 참 많다

  보현사 입구에 산뽕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4백년 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산뽕나무라고 안내판에 적혀있다. 높이가 14.5m, 둘레가 3,9m라고 한다.

  관람객을 맞은 안내원이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무슨 책이냐고 물었더니 표지를 보여준다. “36년아”라는 책이다. “비전향 장기수 얘기입네다. 이 이야기에서 생각할 게 많습네다.” 책을 사진 찍을 수 있냐고 묻자, 고개를 흔든다.

  안내원이 안내를 시작한다. 수려한 산세, 좋은 장소를 골라 이곳에 절을 지었단다. 서산대사가 임금의 허락을 받아 이 절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살생을 금하는 게 불가의 법도가 아니냐고 하자, 작은 살생을 통해 큰 살생을 막는 것은 당연한 세상의 이치라고 하면서, 구렁이가 둥지에 든 어린 새들을 잡아먹으려 하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어야 하느냐고 설득시켰다고 한다. 오래전 전남 해남 대흥사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도 서산대사를 모시고 있었다. 이곳에 8만대장경을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책에서 배웠는데 이렇게 현장을 답사하게 됐다.

   묘향산호텔은 하루저녁에 3등실이 2백 달러, 한 사람 추가할 때마다 100달러를 더 내야한단다.  멀지 않은 향산읍 청천회관을 숙소로 정했다. 방 하나에 70달러다. 

▲  향산읍 거리에 붙어있는 각종 구호. [사진제공-정찬열]

방을 정한 다음 읍내 구경을 나갔다. 구호가 읍내 곳곳에 붙어있다. “인민들의 건강증진을 위하여”, “새 세기의 요구에 맞게”, “새로운 조선속도로” 등, 여러 가지 구호다. 그러고 보니 북한은 시골이나 도시나 선전 구호가 참 많다.

 아파트 단지 주변에 연탄을 말리고 있다. 공터에 남새밭을 이루어 배추를 심었고, 아파트 베란다에까지 파, 고추를 심어 가꾸고 있다. 길가에 옥수수 말리는 광경도 보인다.

  호텔에 손님이 거의 없다. 우리 일행뿐인가 싶다. 방안에 전구 한 개를 달아놓았다. 작은 글씨는 읽기 어려울 정도로 희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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