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연재를 시작하며

지난 6월, 20여일간에 걸쳐 멕시코와 쿠바 일대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일행은 모두 네 명. 70대 초반의 전직 교수, 60대 초반의 현직 내과의 원장, 50대 후반의 인터넷 신문 대표, 그리고 50대 후반의 출판기획자인 필자다.

이번 여행에 대한 각자의 목적이 있었겠지만 나는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앞서 변화하기 전의 쿠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또한 멕시코 고대문명 유적과 ‘멕시코 혁명’ 후예들의 모습도 직접 보고 싶었다.

이러한 흐름에 맞게 멕시코와 쿠바 여행에서 보고 만나고 느낀 것을 소박하게 쓸 생각이다. 이 연재는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 쿠바의 관문 호세 마르티 국제공항. [사진-임영태]

호세 마르티 국제공항에서

쿠바의 호세 마르티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입국수속 절차는 까다롭지 않았다. 칸쿤에서 이미 입국 심사와 짐검사를 그렇게 까다롭게 했는데 여기서도 그럴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세관통관도 간단히 끝났다. 그러나 짐을 찾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수하물 운송과 분류가 자동화되지 못한 탓인 듯 상당히 오래 걸렸다. 아마도 모든 과정이 사람들의 손을 통해 이뤄지는 듯했다.

입국하는데 젊은 직원이 나에게 ‘아프리카에서 왔느냐?’고 묻는다. ‘노, 꼬레아!’라고 했더니 활짝 웃으며 반긴다. 웃음에서 환영하는 느낌이 그대로 전달돼 온다.

짐을 찾아 대합실로 나왔다. 공항 정문으로 나왔다. 정문 바로 정면에 철골들이 어지럽게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언뜻 보아서는 철골 구조물이 공사현장인지 예술작품을 설치해 놓은 것인지 구분이 안 갔다. 공사현장에 있어야 할 팬스도, 비게도 제대로 설치돼 있지 않다. 얼기설기 쇠파이프로 경계를 막아 놓았을 뿐이다. 우리는 이 같은 광경을 아바나에 있는 동안 계속 보게 된다. 아바나 곳곳에서 크고 작은 공사들이 진행 중이었다. 아바나는 ‘공사 중’이었지만, 우리의 공사 현장처럼 먼지가 차단되고 안전시설이 잘 돼 있는 것은 아니었다.

호세 마르티 공항은 국제공항이라기에는 너무 소박했다. 인천공항은 말할 필요도 없고, 김포공항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작다. 제주 국제공항과 비슷한 크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항 주변도 한적한 시골 같은 느낌이다. 공항을 나서면 좌우로 야자수를 비롯한 열대 식물들이 즐비하다. 주변에 다른 건물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공항 밖을 나서면서 ‘아, 드디어 쿠바에 왔구나!’하는 실감이 든다.

우리는 항공기 안에서 한국인 여행객을 두 팀 만났다. 한 팀은 부인이 대학 교수였는데, 그는 중남미 지역학 전공자로 안식년이어서 라틴아메리카를 여행 중이라고 했다. 5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이들보다는 젊은 부부도 한 팀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만나서 반가웠다. 행운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쿠바에 대한 예비지식도, 준비도 부족한 상태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우리는 쿠바에 오기 전 우리를 안내해 줄 가이드를 찾기 위해 몇 군데 알아보았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한국인들에게 잘 알려진 유명한 가이드에게는 메일을 보내 답장까지 받았다. 부탁을 했더니 자신의 일정을 알려주겠노라고 했으나 더 이상 답변을 받지 못했다. 쿠바에 도착한 뒤 아바나 숙소에서 현지인을 통해 그의 전화로 연락을 해 보았으나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 때문에 우리는 완전히 백지상태에서 쿠바 여행을 하게 됐다.

아무튼 우리는 쿠바에서 숙소를 예약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비행기에서 만난 그 한국인들에게 숙소 문제를 물어보았다. 두 팀 모두 ‘까사’에 예약을 했다고 했다. 교수 부부는 구시가지에 있는 상당히 괜찮은 까사에 예약을 했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들이 묶고 있는 곳의 주소를 좀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주소를 받아 적은 뒤, 우리도 일단 그곳으로 먼저 가보기로 했다. 우리는 공항에 도착한 뒤 다시 보자며 서로 인사하고 헤어졌다. 하지만 그 뒤 한 번도 그들을 만나지 못했다.

▲ 아바나 국제공항 내부 모습. [사진-임영태]

 

▲ 아바나 국제공항 정문에서 바라본 모습. [사진-임영태]

 

▲ 아바나 국제공항 2층에서 바라본 모습. [사진-임영태]

 

아바나 구시가지로 가다

우리는 입국 뒤 바로 택시를 타기 위해 공항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서 타면 싸게 갈 수 있다는 여행서 정보만 믿고 그렇게 한 것이다. 우리가 나올 때부터 쿠바인 한 사람이 계속 따라 다니며 택시 탈거냐고 묻는다. 흥정을 해 보니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비싸다. 그래서 2층으로 올라갔고, 그곳에서 막 공항에 도착해 손님을 내려주는 택시를 한 대 잡았다.

그런데 그 기사가 우리 일행의 짐을 보더니 안 된다고 한다. 짐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갑자기 이곳의 작고 낡은 차에는 우리 일행과 짐을 한꺼번에 다 실을 수 없을 것 같은 불길함이 엄습한다. 무엇보다도 차들이 너무 낡아서 우리 짐을 실으면 주저앉을 것 같은 생각이 들 지경이다.

안 되겠다 싶어서 우리는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 공항 정문 왼편에 택시 승강장이 있다. 그 뒤에 택시들이 즐비하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택시 기사들은 차에서 내려 느긋하게 서 있다. 승강장에서는 제복을 입은 한 여성이 손님, 기사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 공항직원인지 경찰인지 구분이 잘 안 갔지만, 어쨌든 공무원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여성이 택시 배차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일행을 보더니 그녀가 누군가를 소리쳐 부른다. 도로 건너편에서 건장하고 키가 큰 흑인(뮬레토)이 한 사람이 나온다. 우리에게 저기로 가라고 손짓을 한다. 짐이 많아서 여기 줄서 있는 택시에는 탈 수 없다고 한다. 우리는 가방을 맨 채 카트리지를 끌고 도로를 건넜다. 길을 건너니 우리의 콜벤과 유사하게 생긴 승합차 모양의 택시가 서 있었다. 비용은 30꾹(CUC)이라고 한다. 보통 20꾹이면 되지만 우리의 짐이 많아서 비용이 비싼 큰 차를 타야 했던 것이다.

다른 대안도 없으니 따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차 트렁크에 캐리어를 모두 싣고 가방을 들고 좌석에 앉았다. 앞좌석에는 네 명 중 상대적으로 덩치가 가장 큰 내가 앉았다. 그동안 멕시코에서 택시를 탈 때도 그랬고, 앞으로도 쭉 그렇게 했다. 그 바람에 나는 여행 동안 편안하게 지냈다. 택시도 그렇고 침대도 그랬다.

공항을 빠져나오자 바로 로터리가 나타난다. 좌회전을 하면 아바나 시가지로 가는 길이다. 로터리 정면에 호세 마르티, 카스트로, 체 게바라, 시엔푸에고스의 초상이 들어간 작은 선전 간판이 서 있다. 사람 눈높이에 맞춰 달려 있는 그다지 크지 않은 간판이었다. 쿠바에서 본 초상화는 이 네 사람과 라울 카스트로가 전부였다. 외국인이지만 베네수엘라 대통령으로 지금은 고인이 된 차베스의 얼굴도 종종 볼 수 있었다. 이 중 호세 마르티와 체 게바라는 거의 모든 곳에서 볼 수 있었다. 물론 정부기관 등의 공공건물 내부에는 피델 카스트로와 라울 카스트로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공항을 떠난 택시는 한동안 시골길을 달린다. 아바나를 ‘생태 도시’, ‘녹색의 도시’라고 했던 책 내용이 기억에 떠오른다. 내 눈에는 개발되지 않은 자연 도시, 낙후한 도시 모습이 동시에 겹쳐진다.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모습이 조금은 느긋해 보인다. 특별히 여유가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한국 서울에서 보는 것처럼 사람들이 어딘가를 향해 바쁘게 가는 느낌은 없다. 어린 시절 내가 자라면서 보았던 시골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조금은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도 있다. 개인택시 기사들도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다.

▲ 아바나 공항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들. [사진-임영태]

 

▲ 공항 주변의 모습. [사진-임영태]

 

▲ 공항 주변의 모습. [사진-임영태]

 

▲ 아바나 시내로 들어오면서 본 도로 주변 모습. [사진-임영태]


우연이 만들어준 소중한 인연

공항을 출발한 뒤 50분쯤 달렸을까? 아바나 구시가지로 들어섰다. 택시는 이면도로의 골목길로 들어선다. 비행기에서 만난 한국인 여행객이 적어준 주소를 기사에게 보여주었다. 기사는 주소를 따라 그곳으로 찾아갔다. 하지만 그 집에는 빈방이 없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이 적어준 주소를 찾아갔으나 그곳도 빈방이 없기는 마찬가지. 갑자기 난감해졌다. 어쩌지?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가 걱정하고 있는데 택시기사가 자기가 아는 곳이 있다며 그곳으로 안내하겠다고 한다. 택시기사는 흑인(혼혈)로 키가 185센티미터는 넘을 듯한 건장한 체격에 몸매가 잘 빠진 40대쯤 되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인상이 험하지는 않았지만 아바나 시내로 들어오는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은데다가 얼굴표정이 굳어 있어서 편한 느낌은 아니었다. 그런 그가 친절하게도 골목길을 이리저리 돌더니 구시가지 어느 지점에서 숙소 한 곳을 소개해 준다.

우리나라 택시기사들은 외국관광객을 어떻게 대하는지 잘 모르겠다. 아마 대부분의 기사들은 승객이 처음 요청한 목적지에 도착하면 내려주고 바로 떠나지 않을까 싶다. 만일 다른 숙소를 새로 알아봐야 한다면 거기에 소모된 시간만큼의 비용을 더 지불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비용을 받고라도 낯선 외국 관광객이 숙소를 구할 수 있게 도와준다면 그 사람은 친절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쿠바는 아직도 자본주의적 관행에 덜 익숙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택시 기사가 목적지에 도착해서 사람만 내려주고 그냥 가는 법이 없다. 우리가 탔던 모든 택시의 기사들은 하나같이 우리가 숙소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때까지 도와주었다. 처음 아바나에서 그랬고, 트리니다드와 산타클라라에 갔을 때에도 그랬다. 그렇게 도와준 택시기사들은 처음 계약한 요금보다 더 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들도 그런 과정에서 아는 사람을 연결시켜줌으로써 약간의 이득이라도 얻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의 행위는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관행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공항에서 우리를 태워준 택시기사가 새로운 까사(민박집)를 소개해 주었다. 그 집 주인은 마이클이라는 이름의 30대 후반(혹은 40대 초반)의 머리가 까진 미남형의 백인이었다. 그는 한때 여행계통 업무에 종사한 적도 있어서 그 동네뿐만 아니라 쿠바 곳곳에 친구(쿠바에서는 모두 ‘프렌드’로 불렀다)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는 영어도 잘 하고 쿠바 전역에 발 넓게 인맥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사람과의 관계를 풀어가는 수완도 있었다. 쿠바의 개방이 가속화되고 미국 자본이 본격적으로 진출하면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는 셈이다. 젊은 부인(그녀는 20대 후반의 빼어난 미모를 지닌 미인이었다)과의 사이에 두 아이를 두고 있었고, 현재는 말레꼰 해변에 있는 큰 레스토랑에서 일하고 있었다. 우리는 나중에 그가 근무하는 식당에 놀러가서 랍스터 요리를 안주삼아 생맥주도 한잔 마셨다.

마침 마이클의 집에는 빈방이 없어서 그는 우리를 맞은편 다른 집에 소개시켜주었다. 하지만 한집에 빈방이 하나씩밖에 없어서 우리는 각각 다른 집에 따로따로 묵어야 했다. 이 대표와 나는 1층 방에, 교수님과 원장님은 2층 베란다가 있는 방에 각각 자리를 잡았다. 상대적이지만 우리 방은 약간 허름하고 좁고 더웠다. 낡은 옛집이어서 냄새도 좀 났다. 그래도 샤워장도 깨끗하고 에어컨 성능도 좋았다.

방값은 동일하게 30꾹(37,500원)이었다. 그 대신 아침식사는 마이클의 집에서 하기로 했는데, 1인당 10꾹(12,500원)으로 상당히 비싼 편이었다. 물론 아침 식사는 과일, 밥, 계란후라이, 빵, 커피 등 상당히 잘 차렸지만 그래도 상당한 가격이었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마이클의 부인은 상당한 미인이었는데 친절하고 상냥했다.

마이클과 부인 사이에 어린 두 아이(남매)가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마이클이 재혼해서 두 사람 나이 차이가 제법 났던 것. 마이클의 집에는 가까이 살고 있는 아버지, 어머니와 장모, 처제 등이 수시로 오고 갔다. 마이클의 부친은 배우 조지 클루니를 닮은 잘 생긴 외모에 매너가 좋은 초로의 신사였다. 장모를 보니 부인의 미모가 어디서 왔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마이클의 부인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한류 팬이었다. 그녀의 컴퓨터에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겠지만 한국 최근 드라마들이 잔뜩 다운되어 있었다. 쿠바에는 한류팬클럽도 있다고 한다. 팬들이 모이는 한국박물관(아마도 쿠바에 살고 있는 한국인이 개인적으로 연 공간)도 있다고 했다. 우리는 나중에 거기에 한 번 들러보기로 약속했으나 사정이 생기는 바람에 못 가서 아쉬웠다.

쿠바에서는 특히 배우 ‘김민호’의 인기가 최고라고 했다. 한국에서도 이 비슷한 이야기는 간간히 들었지만 실제로 만나보니 느낌이 달랐다. 그럴 줄 알았더라면 한국 아이돌 가수와 연예인들 브로슈어(사진)라도 좀 가져갔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하지만 뒤늦게 후회해봐야 소용없는 일. 혹 쿠바에 가는 분들이 계시다면 그런 준비를 해가면 좋을 것이다. 대중문화 교류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폭을 넓힐 수 있는 중요한 통로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 택시에서 본 아바나 구시가지 골목길 모습. [사진-임영태]

 

▲ 우리가 여장을 푼 구도시 주변 골목길 모습. [사진-임영태]

 

▲ 우리가 여장을 푼 구도시 주변 골목길 모습. [사진-임영태]

 

▲ 우리가 여장을 푼 구도시 주변 골목길 모습. [사진-임영태]

 

▲ 우리가 아바나에서 만난 마이클의 집 까사 표시. 비행기(집모양)처럼 생긴 까사 표시는 정부에서 허가해준 민박집이라는 의미다. [사진-임영태]

 

▲ 우리가 묶은 까사의 출입구 모습. [사진-임영태]

 

▲ 우리가 묶은 까사의 내부 모습. [사진-임영태]


아바나에서의 첫날 밤

짐 정리가 끝나고 저녁 식사를 했다. 마이클이 마침 숙소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식당을 소개시켜 주었다. 우리는 그 뒤에도 마이클의 소개와 정보망에 많은 부분을 의존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가 소개한 곳은 대부분 비교적 수준이 있는 곳이었다. 아무튼 쿠바에 아무런 사전 연고도 확보하지 못한 우리들에게 마이클은 만난 것은 우리에게 일종의 ‘행운’이었다. 우리는 사실 멕시코에서도 그랬지만 쿠바에서도 많은 우연과 대면해야 했는데, 그 우연이 대부분 행운으로 다가왔다. 물론 모두는 아니었지만.

식당은 대성당 광장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날 저녁에는 몰랐지만 다음날 보니, 그곳은 바닷가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쿠바 시가지를 따라 나 있는 말레꼰 해변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4층짜리 낡은 건물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규모는 제법 컸다. 건물 전체가 식당이었으니까.

정확히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국영식당이 분명했다. ‘LA MONEDA CUBANA’. ‘쿠바의 부(돈)’라고 번역할 수 있을까? 스페인어 moneda는 돈, 화폐, 통화를 뜻한다. 간판에는 ‘Fundado En 1924’라고 돼 있다. 1924년에 식당이 시작됐다는 이야기인 모양이다. 식민지 시대의 단절과 전쟁이라는 초토화를 경험한 우리나라에서는 100년의 전통을 가진 기업이나 식당, 건축물을 찾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쿠바에서는 이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2층, 3층을 지나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에는 우리 외에도 여러 팀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소고기(비프스테이크)+밥, 생선+밥, 새우야채볶음+밥 등 세 가지를 시켰다. 소고기는 아주 부드러웠다. 소스는 별로였지만 그래도 나는 맛있게 먹었다. 생선은 맛이 별로였던 것 같다. 생선을 좋아하는 이 대표였지만 너무 퍽퍽하다고 했다. 새우야채볶음도 맛이 좋았다. 맥주도 작은 병이지만 6병이나 마셨다. 후식으로 초코렛과 크림케익, 아이스크림, 커피(에스프레소)를 먹었다.

식사비용으로 모두 92꾹(115,000원)이 나왔다. 생각보다 가격이 비싸다. 주 메뉴가 각기 18꾹(25,000원) 내외였던 걸 감안할 때 생각보다 많이 나왔다. 아마도 맥주값(1병에 4꾹)과 아이스크림 등 후식으로 먹은 비용이 상당했던 것 같다.

식사를 하면서 보니 저 멀리 불빛이 보인다. 산 같은 곳에 불빛이 있어서 아마도 산동네이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보니 우리가 있던 식당의 약간 앞쪽 어두운 곳은 바다였고, 그 건너편에 있던 성터와 유원지, 식당 등이었다. 그걸 확인하고는 사람의 상상력이란 것이 참으로 형편없다는 생각을 했다. 한편으로는 사람의 선입견이 무섭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핸드폰과 사진기를 충전하기 위해 콘센트를 찾았다. 그러나 충전기를 끼울 자리가 하나밖에 없었다. 할 수 없이 주인에게 말했더니, 마음씨 좋아 보이는 주인장은 젊은 아들을 불러 문제를 해결한다. 아들은 20세 정도나 됐을까? 아저씨가 겉으로 봐서는 60대 중반은 돼 보이는데 자녀들(딸은 20대 초반인 듯 보였는데 아이가 있었다)을 보면, 그 보다는 젊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아들이 어디서 낡은 콘센트를 하나 구해 와서 연결해 주었다. 그걸 보니까 콘센트나 전선 하나 구하기도 힘들었던 우리의 60년대, 70년대가 생각났다.

우리가 묵은 까사(민박집) 주인아저씨는 매우 친절하고 순박해 보였다. 우리만 보면 활짝 웃으며 ‘올라’라며 인사를 했다. 우리도 ‘올라’하면서 즐겁게 인사했다. 그는 이제 막 영어를 조금씩 배우기 시작한 상태여서 우리와 의사소통이 쉽지는 않았다. 이 대표와 내 영어실력도 엉망이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그는 우리와 뭔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 했지만 몇 마디 하다가 바로 벽에 부딪치곤 했다. 우리는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우리는 쿠바인들의 생활, 삶, 고민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도무지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정말 꼭 필요한 현안문제와 관련된 것만 영어, 스페인어, 손짓, 몸짓을 섞어서 해결했다. 우리가 밖에 나갔다 돌아오면 어김없이 망고주스를 4잔씩(다른 집에서 묶고 있는 두 분 것도 함께) 만들어서 제공했다. 처음에는 그게 너무 맛있었지만 나중에는 시원하지 않은 상태에서 너무 진한 망고주스 맛이 속을 오히려 불편하게 했다. 그래도 우리는 망고주스는 끝까지 잘 먹었다.

저녁에 샤워 후 빨래를 간단히 했다. 그런데 방안에는 빨래를 늘 곳이 마땅치 않았다. 벽에 옷걸이를 걸 곳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할 수 없이 옷걸이에 걸어서 방 이곳저곳, 그러니까 냉장고, 옷장과 문고리 등 옷걸이가 걸리는 곳마다 매달아 놓았다. 다음날 주인아저씨의 안내로 그 집 안쪽 공간에 빨랫줄이 있다는 걸 알고서 그곳에 걸어놓을 수 있었다.

잠을 자야 되는데 잠이 안 온다. 저녁에 식당에서 에스프레소 커피를 너무 마신 때문인가? 핸드폰을 보니 문자가 와 있다. 친한 후배가 부친상을 당했다. 꼭 문상을 가봐야 할 곳이지만 어쩌겠는가. 후배에게 문자로 조전을 보냈다. 조의금은 다른 친구에게 부탁했다. 작년 베트남 갔을 때도 이런 일이 있었다. 해외여행도 별로 가지도 않는데 이런 일이 생긴다. 다른 사람들이 오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 12시 30분이다. 이젠 정말 자야겠다. 아내에게 간단한 문자를 보내고 잠자리에 누웠다. 쿠바에서는 인터넷이 안 돼 다른 통신수단은 사용할 수가 없었다. 문자도 아바나에서만 됐을 뿐, 다른 지역에서는 아예 안 됐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나보다는 일이 많은 이 대표는 조금 더 불편했겠지만 그도 어쩔 수 없었다. 정말로 필요한 내용은 아바나에서 문자로라도 주고받을 수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 아니겠는가.

▲ 우리 숙소 주변 동네공원의 세르반테스 동상. [사진-임영태]

 

▲ 우리가 아바나에서 첫날 저녁을 먹은 식당 건물 모습. [사진-임영태]

 

▲ 우리가 아바나에서 첫날 저녁을 먹은 식당 간판. [사진-임영태]

 

▲  우리 숙소 주변의 대성당. [사진-임영태]

 

▲ 우리 숙소 주변의 광장. [사진-임영태]

 

▲ 식당 옥상에서 본 밤거리 모습. [사진-임영태]

 

▲ 식당 주변의 밤거리 모습. [사진-임영태]

 

▲ 다음날 아침 확인하게 된 건너편 언덕. [사진-임영태]

 

▲ 쿠바에는 올드카가 많다. 길거리에 지나다니는 많은 차들은 수령이 수십년씩 된 오래된 차들이다. [사진-임영태]

 

▲ 고물을 끌고 가는 사람 옆에 개가 친근하게 서 있다. 아바나 구시가 길거리 곳곳에 개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어느 집에 매여 사는 것 같지 않았다. 아바나의 개들은 자유로웠고 온순했다. [사진-임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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