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Daum영화]

돌무치. 일자무식 백정이다. 돈 몇 푼의 욕심에 팔려 살인자가 될 뻔했으나 자신도 의식 못한 한 가닥 양심이 그의 발길을 붙들었다. 그러나 한 순간의 욕심은 가족의 몰살이란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하고 자신의 목숨조차 경각에 달려 결국 군도의 일원이 되고 만다. “너로 인해 죽은 이가 몇이냐”며 욕심이 불러온 살생의 업을 깨우쳐 주는 땡초 앞에서 회한에 몸부림쳐 보지만, 그는 끝까지 자신의 인생을 파탄 낸 자는 조윤이라는 미망(迷妄)에서 깨어나지 못한다. 그저 사적인 복수심에 휘둘려 무리의 대업을 그르치지 않도록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려 노력할 뿐, 가난과 무지에 눈이 가리어진 백성이 사람 백정이 될 수도 있다는 자기 성찰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여기 또 한 사람, 어두운 미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이 있다. 조윤. 탐욕스런 나주 지방 대부호 조 대감의 서자로 태어났다. 조 대감에게 후사가 없어 잠시 아들 대접을 받았으나 뒤늦게 본처에게서 아들을 얻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다. 서출 주제에 잠시 조 대감 집 아들이라는 단꿈에 취한 그가 허망한 꿈을 깨지 못한 대가는 가혹하여, 어미를 잃고 아비에겐 ‘짐승만도 못한 놈’으로 낙인찍힌다. 일찍이 홍길동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적서 차별의 폐단에 항의하여 의적의 무리를 이끌고 조선 팔도를 휘저어 놓았건만, 어리석은 조윤은 어떻게든지 아비의 눈에 들어 적자의 자리를 꿰차게 되기만을 안쓰럽게 갈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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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영화는 그리 빠지는 구석이 없다. 영화의 만듦새와 쟁쟁한 배우들의 호연에 대해서라면 여느 영화에 뒤지지 않는다. 적어도 <명량>이 개봉하기 전까지 영화는 승승장구했고, 호흡을 멈출 만큼 아른아른한 여운도 남긴다. 따라서 국민 영화라 일컬어지는 <명량>과 한 주 차이로 개봉하면서 직격탄을 맞은 불운도 있고, <명량>이나 <해적>과는 달리 거대 배급사의 엄호를 받지 못함으로써 스크린 독점의 피해자가 된 측면도 크다. 그러나 영화가 기대만큼 흥행하지 못한 이유가 그게 다는 아니다.

▲ [사진-Daum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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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배경은 조선 제25대 왕 철종 때. 강화도령으로 알려진 철종은 어느 날 갑자기 왕위에 오른 억세게 운 좋은 임금이자, 그래서 재위 기간 내내 제대로 된 왕 노릇을 할 수 없었던 비운의 왕이었다. 세도 정치의 폐단이 절정을 이루어 나라의 기강은 무너져 내렸고, 삼정의 문란은 극에 달해 백성의 삶은 도탄에 빠졌다. 게다가 기근과 한재 등 자연 재해까지 잦으니 하늘도 왕을 돕지 않는 형국이었다. 결국 1862년 1월 경상도의 진주민란을 시작으로 함경도 함흥, 전라도 전주 등지에서 대규모 민란이 일어났고, 같은 해 9월에는 진주민란에 자극받아 제주에서도 민란이 일어나 제주 관아가 점령당하기에 이른다. 민란의 소용돌이는 걷잡을 수 없이 삼남지방으로 번져 가니, 영화의 부제처럼 때는 바야흐로 '민란의 시대'였다.​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남다른 문제 의식을 보여준 감독은 <범죄와의 전쟁:나쁜 놈들 전성시대>에서 그 예리함에 더해 살아 숨쉬는 캐릭터의 강렬함으로 470만 관객을 끌어 모은 바 있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이 1990년 노태우 대통령의 범죄와의 전쟁 선포를 중심으로 1982년부터 2012년 영화 개봉시까지의 시기를 담아내면서 ‘나쁜 놈들 전성시대’라는 부제로 시대의 본질을 압축했듯이, <군도>가 ‘민란의 시대’를 부제로 내걸었을 때, 그것은 의미심장한 선언이었다. 영화는 그 포스터에서 ‘망할 세상, 백성을 구하라’라고 기세 좋게 선동했으며, 그 언명(言明)은 야릇한 흥분과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 [사진-Daum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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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는 부패와 무능의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1997년 외환 위기 무렵 재정경제부의 약자 MOFE에 마피아가 합쳐져 탄생한 ‘모피아’라는 신조어는 세월호 참사 이후 해피아(해양수산부+마피아), 관피아(관료+마피아)를 거쳐 이제는 온갖 ‘-피아’로 무한 복제되고 있다. 국피아(국토교통부+마피아), 철피아(철도+마피아), 금피아(금융감독원+마피아), 정피아(정치인+마피아), 교피아(교육,교육부+마피아), 산피아(산업통상자원부+마피아), 법피아(법조계+마피아), 세피아(국세청+마피아), 복피아(복지부+마피아), 환피아(환경부+마피아) 등 우리 사회에서 마피아 아닌 곳이 없다. 우리는 국가의 보호를 받기는커녕 부패의 온상에서 살고 있다. 눈먼 돈은 챙기는 게 임자고, 작은 이권이라도 걸려 있으면 파리떼처럼 달려든다. 세도 정치의 폐단은 오늘날 행정부의 부패로 그 옷을 갈아입었다.

게다가 이제 서민 증세의 막이 올랐다. 담뱃값 인상을 통해 간접세 인상의 카드를 꺼내더니 주류세 인상안도 솔솔 나오고 있다. 이미 주민세, 자동차세 등 지방세 인상도 예고되었다. ‘증세 없는 복지’라는 실현 불가능한 장밋빛 구호로 대중을 현혹한 정부는 경기 부양이란 명목 하에 법인세, 양도세, 증여세, 상속세 등의 영역에서 꾸준한 부자 감세를 추진해 온 반면, 부족한 세수는 서민들의 호주머니를 털어 메꾸려 한다. 부자 감세, 서민 증세라는 이 불공정한 세금 부과는 현대판 삼정의 문란이라 부를 만하다.

▲ [사진-Daum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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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영화는 시의적절했다. 영화가 올여름 최고의 기대작으로 선정된 데는 감독의 노련한 솜씨에 대한 신뢰와 함께, 가슴 속에서 불붙어 오르는 민란의 기운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망할 세상에 대한 의분이라도 시원하게 풀어헤쳐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감독은 ‘오락 영화가 추구하는 재미’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감독이 설정한 영화의 배경처럼 ‘탐관오리와 부패한 양반의 가렴주구가 판치는’ 이 첨예한 현실에서 감독은 오히려 맹렬한 행보를 한 걸음 늦추었다.

영화는 팽팽한 긴장감과 숨막히는 분노를 덜어내는 대신, 서부극의 음악을 깔고 내레이션을 삽입하고 화려한 액션에 공을 들여 영화를 오락적으로 치장했다. 그 결과 처연한 서사와 비장미는 백성의 적(敵) 조윤의 몫이 되었고, 양반의 술수에 놀아난 돌무치의 아둔함은 희화화되었다. 이야기의 중심은 조윤이 맡고 화려한 활극은 군도의 차지가 되었다. 세상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영화가 처절한 싸움의 전선에서 살짝 물러서는 순간, 현실의 비참함은 한낱 배경으로 추락해 버렸다.

▲ [사진-Daum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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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이 그러하듯 때로 한 방울의 웃음도 거두어야 하는 순간이 있다. 철종 시대, 민란이 소용돌이치던 그 즈음, 1860년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은 학정에 시달리던 민중의 호응을 받으며 빠르게 교세를 넓혀 나갔고, 만민 평등을 주장하는 천주교 사상 역시 양반층에까지 침투할 정도로 그 기반을 넓혀 가고 있었다. 양반과 탐관오리의 착취와 횡포에 더해 서구 열강과 일본의 침탈이라는 급변하는 시대의 파고까지 가세하니 민심은 불안하고 화적떼는 들끓었다. 그리하여 1894년, 고부민란이 일어난다.

영화에서 군도가 나주 관아를 습격하여 탐학한 사또를 처형했지만 새로 부임한 사또 역시 지방 토호와 손잡고 더 간악하게 백성의 고혈을 짜냈듯이, 전라도 고부도 그러하였다. 군수 조병갑의 가렴주구를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관아를 습격하여 조병갑을 몰아냈지만, 조병갑이 떠난 자리는 안핵사 이용태의 패악으로 채워졌다. 농민들은 분노한다. 갑오농민항쟁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올해는 갑오농민항쟁이 일어난 지 120년이 되는 해이다.

사회의 적폐(積弊)를 일소하고자 했던 농민항쟁은 실패했다. 대신 외세를 동원하여 무력으로 농민들의 폐정개혁(弊政改革) 요구를 진압한 고종은 국가 대혁신을 주창하니, 바로 갑오개혁이다. 적폐의 중심이 혁신의 중심을 자임하고 나서다니, 이 적반하장이 결국 조선의 운명을 어떻게 침몰시켜 가는지는 이후 역사가 말해 준다.

참고로, 세월호 특별법을 거부하는 대신 적폐 일소와 국가 대혁신을 내세운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해 말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120년 전 갑오년에는 갑오경장이 있었다. 120년 전의 경장은 성공하지 못했다”고 자신의 개혁 정책이 ‘신갑오경장’임을 시사한 바 있다. 그리고 올해 초 홍준표 경남도지사는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박근혜 대통령의 갑오개혁이 성공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 [사진-Daum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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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능적으로 아기의 생명을 지킨 조윤의 한 조각 선의, 그 선의에 감응하여 그의 머리를 거두지 않은 돌무치의 자비가 분노를 버린 영화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있을까. 그나마 조선 최고의 검술 실력으로 “자신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칼을 들어본 자가 아니면 감히 나에게 맞서지 말라”며 백성의 목을 겨누던 조윤이 결국 착취와 수탈의 운명 앞에 떨쳐일어선 백성의 죽창에 최후를 맞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가 검을 겨누어야 할 상대는 ‘힘 있는 자가 약한 자를 핍박하고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를 착취하는 세상’의 질서가 낳은 적서 차별의 폐단이었지, 그 질서에 편승하여, 같은 핍박자 백성의 가슴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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