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근수 목사가 세상을 뜬지 일주일이 지나고 있습니다. 그는 어느 책에선가 “목사, 박사, 의장, 공동대표, 상임 공동대표, 회장, 선생 등 여러 가지 명칭들은 사람들이 나를 부르는 명칭”이라면서 “나는 이중에서 목사, 그 중에서도 ‘통일 목사’가 제일 좋다”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사실 홍 목사의 생애는 종교적인 면을 제외한다면, 아니 종교적인 면을 포함하더라도 통일, 평화, 민족, 북한 문제로 귀결됩니다. 그가 1986년 말 영구 귀국해 향린교회 담임목사로 목회활동을 시작했지만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게 된 것도 다름 아닌 1988년 총선을 얼마 앞두고 진행된 한 방송의 심야토론에서 발언한 ‘북한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이 시기는 형식적 민주주의 절차의 일환으로 직접 선거를 통해 전두환에서 노태우로 대통령이 이행된 시기로 이른바 민주화 과정이 숨 가쁘게 진행되던 시기입니다. 당시 ‘민주화 과정에서의 이념 문제’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KBS 심야토론회는 좌익과 우익의 대립 형식으로 진행됐는데 홍 목사가 좌익의 한 토론자 대표로 참석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토론에서 그는 “북에는 남에는 흔하지만 없는 것이 많다”면서 “북에는 실업자도 거지도 강도도 없다. 부동산중개인도 없고 기생관광도 없으며 아파트를 60채 가진 사람도 없다”고 북한을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했습니다. 또한 그는 “유럽 여러 나라들처럼 공산당을 합법화시켜야 비로소 민주주의 사회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소신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다음날 세상이 발칵 뒤집혀졌습니다. 그는 졸지에 ‘반미 목사’에서 ‘가장 위험한 목사’, ‘빨갱이 목사’로 불렸습니다. 아무튼 그는 이때의 출연과 발언으로 일약 화제의 인물이 됐습니다. 오죽하면 토론 다음날 당시 여당 대표가 “어젯밤에 평양에서 KBS를 접수한 줄로 알았다”는 말을 했을 정도이니 말 그대로 민주화 이행시기에 일반 사람들, 특히 보수 진영이 받았을 충격이 이해가 갔습니다. 이때 토론회에서의 소신발언이 문제가 돼 홍 목사는 1991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돼 1년6개월의 실형을 살기도 했습니다.

홍 목사는 소신만이 아니라 배짱도 두둑했습니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을 때 검사가 “목회를 빙자해 민족해방운동, 반미자주운동을 했다”고 하자, 그는 “내가 운동한 것은 다 사실인데 ‘목회를 빙자’한 게 아니라, ‘목회의 일환으로’ 한 거라고, 그 말만 고치면 다 인정하겠다”고 말한 것은 유명합니다.

그의 민족의 반쪽 북한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이해를 곳곳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그가 향린교회 담임목사직을 은퇴하기 전인 2002년경에 “나는 평양 김일성대학교 기독학과 교수가 되지 못한다면 개성공단 등에서 통일목회를 하고 싶고 그것도 여의치 못하면 서울에서 재야운동, 특히 통일운동에 남은 심혈을 기울었으면 한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는 종교인이었지만 민족 문제를 동시에 볼 줄 아는 혜안을 지녔고, 남측에서 나고 자랐지만 북측도 함께 볼 수 있는 예지력을 지닌 선지자였고 은퇴 후엔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을 창립해 활동한 단단한 실천가이기도 했습니다. 한반도 정세가 좀처럼 회복되지 못하고 남북관계도 개선되지 않는 가운데 선이 굵은 ‘통일 목사’가 세상을 떴다는 게 영 마음 아플 뿐입니다. 늦게나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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