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언론교류사 다시 쓴 '오익제 인터뷰'
[통일뉴스 백서(2000-2025)] 돋보기⑦ - 김치관
통일뉴스는 창간 25주년을 기념해 『통일뉴스 백서(2000-2025) - 민족통일 정론의 한길 25년』을 발간했다. 백서 내용 중에서 주요사안을 집중 조명한 [돋보기(1~7)]를 순서대로 싣는다. /편집자 주
[돋보기①] 통일운동의 역사를 찾아_이계환
[돋보기②] 통일뉴스 25년의 정신적 지주 김남식과 정수일_이계환
[돋보기③] 역사적 미스테리, KAL858과 천안함 사건_김치관
[돋보기④] 통일뉴스와 함께 설정한 의제들_이시우
[돋보기⑤] 국가보안법을 이겨낸 시간_이정희
[돋보기⑥] 남북 기사교류와 방북취재의 언론사적 의미_정창현
[돋보기⑦] 남북 언론교류사 다시 쓴 <오익제 인터뷰>_김치관
<신동아> 2008년 10월에 ‘전 조선노동당 통일전선사업부 요원’을 자처한 장철현이 “오익제 (전 천도교 교령), 자진월북 아닌 납치…공작원이 쓴 가짜 가족편지로 유인” 기사를 접하고 의아했다. 오익제 전 천도교 교령 월북은 본인은 물론 남쪽 지인들도 모두 ‘자진월북’으로 알고 있던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몇몇 주변 이야기들을 들어봐도 ‘냄새나는’ 기사라는 판단이 굳어졌다. 북한 뉴스의 전형인 ‘아니면 말고’를 넘어 ‘자작 소설’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마침 3차 통일뉴스 단독 방북취재(2008.12.10~13)를 준비하던 중이라 북측에 취재 제안서를 보낼 때 오익제 전 교령의 인터뷰를 포함시켰다. 물론 북측이 수용할 가능성은 낮다고 보았다. <통일뉴스>와 북측 인터넷매체 <우리 민족끼리>를 운영하고 있던 조선륙일오편집사는 2007년 2월 합의서를 작성, 기사교류와 상호지역 초청취재를 지원하기로 했고, 이미 두 차례 방북취재에서 당장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들은 다룰 상황이 아니라는 암묵적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통일뉴스>는 창간 때부터 남측 언론으로서 첫 평양지국 내지는 평양지사를 설립하는 것과 북한 최고지도자의 첫 인터뷰를 성사시키는 것을 염두에 뒀고, 북측 파트너의 초청취재가 성사되자 취재 제안서에 ‘김정일 국방위원장 인터뷰’를 첫 자리에 올렸지만 당연히 물을 먹었다. 북측 파트너는 “이런 건 빼라구”라며 핀잔을 주기도 했다. 그렇다고 물러설 우리도 아니지만.
어쨌든 ‘북한의 문화예술’을 주제로 한 3차 방북취재를 위해 평양 보동강려관에 도착해 여장을 풀기도 전, 첫 업무협의에서 ‘오익제 인터뷰’가 ‘조직’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내심 쾌재를 부르며 표정관리를 해야 할 판이었다. 북측 요청대로 인터뷰 예상 질문안을 작성해 건넸고, 북측이 검토 결과 좋다면서 한 가지만 빼면 되겠다고 했다.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오익제 전 교령이 김대중 후보에게 편지를 보낸 이른바 ‘북풍사건’에 관한 질문이었다.
통일뉴스 취재단은 난감했다. 남측 기자가 최초로 ‘북풍사건’ 당사자와 인터뷰하는 자리에서 이 질문을 던지지 못한다면? 결국 북한이 짜준 틀대로만 인터뷰한 꼴이 돼 인터뷰의 내용까지 신뢰성을 의심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북측의 태도는 완강했다. 인터뷰를 포기해야 할지, 제한된 인터뷰를 수용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 인터뷰는 추진하기로 결정하고 북측에 통보하니, 북측은 그 질문은 절대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는 점을 끊임없이 다짐받았다.
2008년 12월 12일 오전 10시 30분 평양 인민문화궁전 면담실에서 오익제 전 교령과 단독 인터뷰가 시작됐다. 통일뉴스 취재단과 오익제 전 교령, 안내원 1인이 마주 앉았고, 통일뉴스 사진기자와 영상기자가 현장을 담았다. 오 교령은 팔순 고령에 다리가 불편하고 건강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기억력이나 기개는 살아 있었다. ‘납치설’에 대해 묻자 “한 마디로 이것은 날조이고 흰 것을 검은 것이라고 하는 궤변입니다. 한 마디로 이것은 완전히 조작된 음해, 중상이고 모략이라고 말합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오익제씨가 열차 안에서 본처와 딸을 만나던 그 감격적인 순간에, 열차는 이미 서서히 국경을 넘고 있었다”는 <신동아>의 보도에 대해 “저의 아내와 딸은 평양에 와서 한 보름 만에야 만났습니다”라고 구체적으로 부인했다.
‘납치설’ 질문들이 대강 마무리되자 “안 여쭤볼 수가 없는데”라며 김대중 후보에게 편지를 보낸 ‘북풍공작’에 대해 물었다. 배석한 안내원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오 교령은 “본의 아니게 김대중 씨에게 피해를 줬는지 모르겠지만, 능히 저는 김대중 씨의 정치적인 능력으로 봐서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라고 당황하지 않고 답변하고 잘 넘어갔다.
아마 예상 질문에 대한 답변을 준비해왔을 지도 모른다. 북측 파트너들에게는 미안했지만 기자로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인터뷰를 마치고 오 교령이 승용차에 오를 때까지 배웅하며 인사를 나눴다. 오 교령은 3년여 후인 2012년 9월 1일 별세했다. 북측 파트너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화를 내고 실망감을 표하기도 했지만 기자가 인터뷰에서 질문하지 못할 금지선이 있겠는가. 그것도 남측 언론, 그것도 <통일뉴스>니 말이다.
사실 북측과 약속을 어겼지만 북측이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은 것은 평소의 신뢰관계가 쌓여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통일뉴스 방북취재단은 통상 오전 취재가 끝나면 식당으로 옮겨 점심식사를 할 때 기사 작성 담당자는 식사도 마다하고 기사부터 써서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에 북측 파트너에게 usb를 건넸고, 북측은 군말없이 사무실로 가져가 통일뉴스 이메일로 즉각 전송해줬다. 따라서 “평양=000 기자” 명의로 당일에 평양소식이 통일뉴스에 실렸다. 오후 취재 역시 마찬가지였다. 통일뉴스와 조선륙일오편집사의 콤비 플레이가 빛나던 시절이다.
당시 북측은 우리가 제출한 취재 제안서를 성심껏 ‘조직’해주는 실력을 보여줬고, 취재 현장에서 우리는 ‘참관’이 아니라 ‘취재’라는 북측 정서에는 익숙치 않은 요구를 강력히 들이밀며 의욕적으로 취재하고 보도했다. 적어도 통일뉴스가 초청 취재의 취지가 무색하지 않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익히 보아 왔을 터이다. 더구나 음주가무를 빼놓을 수 없는 뒷풀이에도 통일뉴스는 여느 언론사나 민간단위와는 달리 술은 마다하지 않았지만 양주를 멀리하고 가무를 찾아 즐기지도 않았다. 서로 품격있는 파트너로서 인정할 만한 행보를 밟아왔던 것이다.
북측 조선륙일오편집사 역시 통일뉴스 측이 제안한 취재를 최대한 보장하기 위해 노력했고, 3대혁명전시관 인공지구위성관과 고려의학과학원 취재, 조선국립교향악단의 환대 등이 기억에 남는다. 통일뉴스 취재단이 모란봉극장 공연장의 문을 여는 순간 조선국립교향악단의 공연이 시작되는 감동적인 순간은 지금도 생생하다. 또한 북으로 송환되기 전에 대담을 나눴던 비전향장기수들과의 평양에서 다시 만나 대담을 나눌 수 있었고, 고인이 된 비전향장기수들의 애국열사릉 묘역도 둘러볼 수 있었다.
어쨌든 오익제 전 교령의 인터뷰에서 북풍 편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남측 언론의 보도가 북측 당사자 인터뷰를 통해 거짓으로 밝혀졌다는 사실이다. 북한 관련 왜곡보도가 ‘아니면 말고’ 식으로 넘어가지 않고 사후 남측 언론의 검증 취재를 통해 반박될 수 있다는 역사적인 사례를 만든 것이다.
물론 남측 언론에서 통일뉴스의 오익제 인터뷰를 제대로 보도한 곳이 드물었고, <신동아>도 어떤 반응도 내놓지 않았다. 그렇지만 ‘오익제’를 검색하면 통일뉴스 기사와 당시 이를 기사화한 <뉴시스> 기사 등이 검색되고, 오 교령 사망기사에는 통일뉴스 인터뷰 내용이 인용된 곳도 많았다. 나아가 ‘위키백과’나 ‘나무위키’의 ‘오익제’ 란에는 통일뉴스의 인터뷰가 반영돼 있다. 자칫 확인되지 않은 ‘납치설’로 미궁에 빠질 뻔한 오익제 천도교 전 교령의 입북이 통일뉴스의 방북취재로 당사자의 입장이 전해지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