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창수 통일맞이 정책실장은 7일 <통일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문익환 목사의 '4.2공동성명' 등 통일론이 재조명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김창수 통일맞이 정책실장은 “하태경 의원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규명하는 이유는 문 목사의 생각을 정확히 말하는 것이 목적”이라며 “왜 당시 문 목사가 논쟁의 한가운데 섰는가 말하겠다”고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쉽게 말하면 문익환 목사가 왜 ‘프락치’로 몰렸는지 짚어보자는 것이다.

김 실장이 먼저 주목한 것은 1989년 문익환 목사가 방북해 김일성 주석을 접견하고 허담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위원장과 공동명의로 발표한 ‘4.2공동성명’이다.

“1989년도에 문 목사가 평양을 방문해서 김일성 주석과 몇 차례 토론하고 당시 허담 조평통 위원장과 4.2선언을 낸다. 4.2선언이 통일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현대적으로도 4.2선언을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4.2선언에서 핵심적인 것은 세 가지다. 당시 쟁점이 됐던 것은 남북관계에서 정치.군사 문제가 우선인가, 교류협력이 우선인가? 북은 정치.군사 문제 우선이라고 하고 남은 교류협력 우선이다. 문 목사가 김 주석과 토론해서 ‘같이 할 수 있다’는 김 주석의 답변을 받는다. 이게 4.2선언에서는 정치.군사 문제와 교류.접촉을 같이 한다고 돼 있다.

▲ 문익환 목사는 1989년 3월 25일부터 4월 3일까지 방북해 김일성 주석과 만났다. [자료사진 - 통일맞이]
그렇기 때문에 1991년도 9월에 열렸던 1차 남북고위급회담의 명칭이 ‘남북 사이의 정치.군사적 문제 해결과 교류협력을 위한 남북고위급회담’이다. 문 목사와 김 주석 사이에 합의돼서 허담과 4.2선언으로 발표된 게 남북고위급회담으로 이어지고 여기서 남북기본합의서를 발표할 수 있었다.

두 번째가 통일방안에 대해서, 문 목사가 김 주석과 얘기하면서 ‘연방제를 천천히 할 수도 있다’는 합의를 해낸다. 4.2선언에서 연방제를 ‘단꺼번에 할 수도 있고 점차적으로 할 수도 있다’고 합의문에 표시하고, 1991년에 북한은 이것을 ‘낮은 단계의 연방제’라고 공식화한다. 당시 남측 정부 당국자들도 ‘북한이 낮은 단계의 연방제로 연방제를 낮춘다면 긍정적이다’는 반응이 나왔다.

세 번째는 문 목사님이 남북(민간)이 합의한 것을 남북 당국에 건의한다, 당국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이것도 역시 지금 보면 중요한 이야기다.”


문익환 목사는 방북을 통해 남북 간의 통일논의를 한 단계 끌어올려 놓고, 도쿄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노태우 대통령과 김대중, 김영삼 야당 총재에게 통일논의 4자회담을 제의했지만 감옥행을 면치 못했다.

병보석으로 잠깐 출소하기도 했지만 결국 93년 3월에서야 자유의 몸이 된 문 목사는 김일성 주석과 합의했던 내용들을 비로소 국민들에게 제시할 수 있게 된다.

“가장 중요한 점은 분출되는 국민들의 다양한 통일열기를 수렴할 수 있도록 폭넓게 통일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큰 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김영삼 정부와도 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1993년 4회 범민족대회 추진본부장이었는데 김영삼 정부에도 초청장을 보낸다. 당연히 안 올 것은 알았지만.

당시 통일운동이 김영삼 정부에 대한 실망에서 반정부적 성격도 분명히 있었는데, 김영삼 정부와도 대화하자고 하고 범민족대회에 초청하자고 하고...

▲ 문익환 목사 석방 모습. [자료사진 - 통일맞이]
▲ '문익환 선생 평양방문 보고 및 환영대회' 모습. [자료사진 - 통일맞이]
문 목사는 국가연합에 대해서도 주장한다. 당시 재야 통일운동단체에서는 연방제안이 대세였는데 북한의 연방제안에 영향받은 것도 있었으나, 저도 통일운동단체에서 정책을 하고 있었는데 체제결합의 방식에서 통일을 하려면 연방제 정도는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국가연합은 통일이 아니라며 대부분의 단체에서 연방제안을 주장하던 때다. 그런데 문 목사가 연방제가 아닌 국가연합을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니 문 목사의 주장이 시대와 불화를 일으켰던 것은 사실이다.

문 목사는 당시 통일맞이 주장, 새로운 통일운동을 하자는 것이고, 범민련을 대체하는 새로운 통일운동체를 주장했다.”

당시 통일운동진영의 보편적 주장에서는 수용되기 쉽지 않은, ‘시대와 불화’를 일으킬만한 주장들을 내놓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조직으로서 새로운 통일운동체(새통체)를 추진함으로써 문 목사는 첨예한 갈등의 중심에 섰다는 것이다.

김 실장은 “하태경 의원 주장대로라면 문 목사는 북한에서 프락치라고 몰리고 돌아가신 비운의 통일지사가 되지만, 과거 문 목사가 시대와의 불화 속에서 주장했던 것이 많은 부분 현실화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문 목사의 통일운동론을 정리하면, 당국 간 회의 하자는 것은 그 다음에 당국간 대화로 이어졌다. 6.15정상회담 이후에는 남북장관급회담, 당국대화가 활성화되면서 통일운동이 당국간 대화 활성화와 맥을 같이 하면서 두 개의 수레바퀴처럼 되어간 측면이 있다. 문 목사의 주장이 시대를 앞서 갔으나 이후 기정사실화된 측면이 있다.

▲ 김창수 실장은 문 목사의 통일론이 오늘날에도 유의미하다고 강조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문 목사가 주장한 통일방안에 관한 것은 북한의 통일방안의 수준을 낮췄던 측면이 분명히 있다. 문 목사 방북 이후 남한에서도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다. 노태우 대통령이 1989년 9월 국회연설에서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만들어낸다. 이 방안의 핵심은 ‘남북연합’이라는 중간단계를 설정한 것이다.

문 목사가 남북을 오가며 북의 통일방안의 수위를 조절하고 남한에 영향을 미쳐서 남북연합이 만들어지는데 결국은 6.15선언 2항에서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디딤돌이 된 것이다.

그래서 6.15선언이 만들어지고 이후 남한의 통일운동이 활성화됐던 것이다. 문 목사의 통일방안에 대한 논의는 남북 당국 사이의 합의를 만드는 바탕이 됐다.

문 목사는 당국의 역할을 인정하자고 얘기했다. 또 당국과 함께 민간이 같이 가야 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민간이 통일을 준비할 수 있게 폭넓은 통일운동을 하자는, 그런 틀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지금 보면, 남북연합이라도 빨리 해내야 한다는 공감대가 통일운동 내에서 널리 퍼져있고, 또 다음 정권에서 남북 정상회담을 해야 하고 여러 번 해야 한다는 것, 이를 위해서는 시민참여형 통일운동을 해야 한다는 데 대해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다.”

결국 이같은 문익환 목사의 시대를 앞선 혜안과 감옥을 마다 않는 헌신이 통일운동사에 중요한 디딤돌을 마련했지만 정작 문 목사가 추진했던 이른바 ‘새통체’인 민족회의도, 이에 맞섰던 범민련도 현재는 존재감이 미미한 상황이 됐다.

김 실장은 “민족회의 주장의 핵심은 남한의 통일운동의 대중화”라고 정리하고, 현재적 과제로 “시민참여형 통일운동”을 제안했다.

“범민련 주장의 핵심은 3자연대이고 민족회의 주장의 핵심은 남한의 통일운동의 대중화다. 둘 다 맞는 말인데 지금 시점, 6.15 이후에는 균형적으로 가야 하는 문제다.

당국 간에 6.15 정상선언을 했고 이후에는 3자연대와 남한 민간 통일운동의 대중화가 같이 가야 한다. 그런데 이게 제대로 안됐다.

그래서 범민련이나 민족회의나 현재 시점에서 존재감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범민련은 더더욱 불법화됐고 민족회의는 존재조차도 애매한 상황이 됐다.

왜? 돌이켜보자면 6.15선언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통일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남북 공동행사에 참여했다. 이게 1차 범민족대회 열리던 1990년과 비슷하다.

당시 1차 범민족대회추진본부에는 유사 시민단체, 이익단체나 취미단체 비슷한 데도 참여했고 그걸 제대로 추스르지 못했는데 6.15 이후에도 비슷했다고 본다.

저도 6.15선언 이후 통일운동 했던 사람으로서 반성적 성찰인데 운동성이 실종됐던 것 아닌가 생각한다. 문 목사 주장은 ‘민과 관이 함께 가야 된다’는 것이었는데, 관에 의해서 만들어진 통일공간에서 민의 운동성, 야성이 상실돼가는 과정이었다 생각한다. 당국과 대화를 통해서 만들어진 틀 속에 민의 운동이 안착돼가는 과정이었다.

▲ 재야의 거목, '늦봄' 문익환 목사. [자료사진 - 통일맞이]
특히 6.15 이후 민간 통일운동이 두 가지 축으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남북 간에 사회문화교류, 행사하고 교류하는 것. 또 하나는 대북인도적 지원. 통일운동이 두 축으로 되면서 운동성을 가지는 통일운동이 약화되고 실종되는 과정이었다.

남북 사회문화교류라는데 어찌보면 남북 민간연대 비슷한 것인데 정부로부터 주어진 틀 속에서 진행되면서 남한의 다양한 계층과 북한의 다양한 계층이 만나는 것을 증폭시키지 못하고 제한된 이벤트 행사로 가면서 남북연대도 성명서 교환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이것은 시대적 한계도 있었으나, 통일운동이 대북지원과 사회문화교류 위주로 되면서 정치성, 운동성과 역동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게 활기 있게 진행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6.15 이후에 민과 관 두 축이 확실히 서야 하는데, 관의 당국대화는 확실한 축으로 섰는데 민이 약화된 것은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차기 정권에서 제3차, 제4차 정상회담이 되면 마찬가지로 민간교류나 대북 인도적지원도 해야 하는데 이것 말고 남한 내에서 운동성과 대중성을 지니는 걸 해야 하는데 이게 바로 시민참여형 통일운동을 해야 한다고 본다.”

김 실장은 “문 목사 돌아가신 것도 이제 역사가 됐다”며 “문 목사 돌아가신 일도 팩트에 입각해서 봐야 하고 문 목사 삶과 죽음의 의미가 뭔가에 대해서 엄밀한 시각에서 봐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문 목사 1주기 때 새통체 추진위원장을 맡고 있던 박순경 박사가 “문 목사 죽음은 통일운동의 분열에 대한 대속(代贖)적인 죽음”이라고 정의내린 데 대해 “그 원고를 보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꼈다”고 밝혔다.

또한 문익환 목사가 1976년 명동성당 3.1구국선언으로 첫 감옥살이를 하면서 단식 중 지은 ‘마지막 시’를 그의 장남 호근(작고) 씨가 면회 후 필사본으로 남겨두었다며 ‘죽어야 산다고 그러셨지’라는 시구를 지목했다.

이 구절은 문 목사의 스승 김재준 목사가 성경구절을 “멋있게 번역”한 대목이었고, 문 목사는 이 시를 늘상 암송하곤 했다는 것.

▲ 아들 호근 씨가 면회를 다녀와 기록한 문 목사의 옥중 시들. '마지막 시'도 여기에 포함돼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박순경 박사가 문 목사 1주기를 맞아 1995년 1월 18일 자필로 쓴 추모사. "문목사님은 십자가의 대속적인 죽음을 생각하셨음에 틀림 없고..."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김 실장은 “박순경 박사가 문 목사의 죽음이 통일운동의 분열에 대한 대속적 죽음이라 하셨고, 문 목사의 시에 ‘죽어야 산다’는 구절을 보면서 박순경 박사의 말과 교차됐다”며 “문 목사는 늘 자신을 민주화운동의 제단에 바치려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구나 생각 들었다”고 말했다.

김창수 통일맞이 실장이 하태경 새누리당 의원에게 들려주고 싶은 한 때 둘 모두의 스승이었던 문익환 목사의 삶과 죽음의 진실은 바로 문 목사가 생전에 늘 암송하던 ‘죽어야 산다’에 담겨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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