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뉴스가 주최하고 평화3000이 후원한 ‘6.15공동선언 11주년 기념 통일뉴스 방북기 공모전’(5.21-6.20)에서 3편의 수상작이 결정됐다. [관련기사 보기]
대상 격인 '민족상'을 받은 박경식 씨의 '개성가는 길'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민속여관(民俗旅館)

협력사업 승인을 받은 후 해가 바뀐 1월, 석재공장의 설계도면을 들고 전기와 철구조물, 기계설비 기술진과 함께 개성을 찾았다. 개선도 룡강의 장철수 사장 등을 동석시켰다. 직전 공화국에서 손꼽힌다는 석재 전문가를 동석시켰었는데 이 전문가는 경험이 풍부하고 해외시찰도 자주하여 폭넓은 지식을 갖추었다. 나아가 체계적인 연구 자료가 많았는데 대표적으로 북측의 각 지역에서 생산되는 화강석 본보기돌 자료를 건네주었다. 이 자료는 광업진흥공사도 확보하지 못한 자료였는지 공사관계자도 눈독을 들일 정도였다.

당일 공장 건설의 당사자들 협의는 사뭇 신중해지고 격렬해져 분야별로 토의내용을 취합하고 정리해야 하는 나도 한동안은 정신이 없었다. 이날은 자주 찾던 자남산려관이 아니라 민속려관이었다. 자남산이나 봉동관, 경협사무소 등이 남북간 협의당사자들로 자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아마 당시가 남북간 사회문화와 경제교류협력이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던 때가 아니었나 싶다.

민속려관은 30여 채의 전통한옥들이 그 모습을 고스란히 갖추고 있는 곳이다. 한국전쟁 당시 개성이 정전협정 장소라서 미군폭격이 적었던 탓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침부터 찌푸렸던 하늘은 기어이 눈발을 흩날리기 시작했다. 민속려관의 날렵한 처마선들이 모여 춤추는 공간 아래에는 냇물이 흐른다. 석축들이 잘 정돈되어 있는데 돌다리 난간이 아취가 있어서 마치 과거로 들어선 느낌이다. 바닥에 깔린 작은 벽돌이 깔끔해서 침묵을 더하고 바둑판을 닮은 담장사이를 걷다보면 한순간 도포 입은 선비가 된 듯한 착각을 하게 되는 곳이다. 때맞추어 눈발은 하늘에 곡선을 그리는데 공간의 처마 곡선과 아득한 조화를 이룬다.

원래 공간에서 점과 점을 잇는 처마선은 속도와 방향, 중력을 포함하며 그 나라의 고유한 문화적 특성을 나타내기 마련이다. 오사카나 교토의 성, 동경고궁 등 일본의 처마선은 기울기가 급하여 가볍고 경솔해 보인다. 그래서 오늘날 긴좌(銀座)나 신추쿠(新畜)의 건물들이 고층이지만 작아 보인다. 이 문화적 특성 때문에 ‘축소지향형의 일본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닐까?

반면 중국은 사뭇 다르다. 북경의 자금성이나 이화원, 천단이 보여주는 처마선은 그 기울기가 완만해서 육중하고 위압감을 준다. 지금도 상해와 북경에 밀집된 건물들은 고층이란 이유보다 뭔지 모르게 무겁고 위압감을 준다. 사람이 살아가는 건물에 위압감이라니?

하지만 조선의 처마선은 중력에 대해 반작용하는 귀솟음이 있어 우아하다. 중력은 반드시 인력(引力)으로 작용한다. 이를 거부하는 귀솟음은 ‘굴종을 거부하는 저항’이다. 조선의 처마선이 보여주는 우아함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준다. 또한 민족적 본성이 바로 ‘굴종을 거부하는 저항’임을 시각적으로 상징하는 것 아닐까?

민속려관 한 복판에서 서울 종로 한복판의 민가다헌(民家茶軒)이 생각났다. 수운회관 뒤에 자리한 한옥인데 명성왕후 민씨의 오빠 집이다. 한옥으로서는 처음으로 화장실이 실내에 배치되어 민속학적 가치가 있다. 해거름 저녁 귀솟음의 선이 하늘과 잘 어울려 아름답다고 소문이 나있다. 지금은 퓨전음식과 와인을 판매하는 까닭에 해질 무렵이면 외교관들이 주로 찾는 곳이다.

하지만 너나없이 드러난 ‘우아함’을 볼뿐 그 본질을 이해하려 하질 않는다. 이 무지는 근본적으로 민족적 본성을 알려하지 않는데 바탕한다. 그 결과 오늘날 서울 시내의 건물에서는 선이 포함하는 속도와 방향, 중력에 대한 거스름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것을 어찌 무지의 소치로만 탓하랴! 사대매국의 정상배들이 외쳐댄 탐욕에 근거한 무지막지한 근대화가 이면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민족적 본성에 대한 몰이해는 서울의 랜드마크라며 63빌딩을 거론하는 데서 그 극점에 달한다. 굴곡진 선을 끌어댄 것인지 아니면 자본의 탐욕으로 쌓은 높이를 말하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시대를 관통하며 문화적 공간을 채워 온 민족의 본성이 중력(重力)에 함몰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민속려관의 음식은 세 가지 맛으로 먹는다. 먹는 맛, 보는 맛, 이야기하는 재미다. 으뜸으로 호박약밥을 나는 꼽는다. 어른 주먹보다 약간 큰 호박을 씨를 발라내고 찹쌀밥, 불린 대추, 꿀, 마른 감, 삶은 밤, 인삼 등을 넣고 버무려 쪄낸 음식이다. 뚜껑을 열면 알록달록한 찹쌀밥이 윤기가 흘러서 보기가 좋다. 한숟가락을 떠먹으면 입에 착 달라붙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실감 난다.

또 민속려관 김치는 보쌈김치다. 밤, 귤, 배, 사과, 귤, 노란 배추 속을 양념과 버무려서 푸른 배춧잎으로 주먹만하게 겉을 싸서 항아리에 차곡차곡 담아 잘 익혀 내놓았다. 먹을 때는 겉을 풀어보는 재미가 있고 입안에서 새콤달콤한 맛과 향이 오래 남는다. 황해도 연백이 고향인 외할머니가 어릴 적에 담가 주신 적이 있는데 기억과 함께 삼키는 맛은 그 무엇과 견줄 수 없다.

더구나 밤톨만한 꿩고기 완자는 시쿰한 맛이 독특하고, 튀김가루를 묻혀 튀겨낸 토끼고기는 씹는 맛이 살아 있어 입안을 즐겁게 한다. 그리고 민속려관의 산나물은 육류와 조화를 이룬다. 고사리와 말린 버섯, 고구마 순 등 낯선 나물도 있는데 무엇인지 묻지를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현대아산의 관리소장은 여태껏 있어도 민속려관의 백송식당에서 식사해 본 적이 없다며 부러워했다. 모두에게 개성을 방문하면 민속려관 백송식당에서 한 끼의 식사를 맛보라고 추천한다. 호박약밥과 보쌈김치를 꼭 맛보았으면 한다.

봉동역

봉동역은 역사(驛舍)보다 광장이 더 기억에 남는다. 농업용 비닐박막 전달 때문에 봉동역을 방문한 적이 있다. 봉동역 철로를 사이에 두고 이쪽엔 남측 차량, 건너엔 각지에서 온 북측 차량들이 집결해 있었다. 초봄이라 외투를 벗기에는 이르지만 건너엔 개털모자에 건빵바지를 입고 온 사람들이 만원이다. 더 높은 북쪽에서 온 사람들임을 대번 알 수 있다. 고난의 행군시기를 겪은 탓인지 홀쭉한 얼굴에 고단함이 남아 있지만 여정 때문에 지친 건 아닌 듯 했다.

같은 민족의 어려운 사정을 전해 들으며 마음이 무겁지 않다면 이미 그는 민족을 버린 사람이라 할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지구 반대편 다른 민족의 고초를 듣고 인도적 지원에 팔을 걷어붙이는데 하물며 같은 민족의 사정인 바에야 뭐라 달리 말할 수 있을까.

봉동역 광장에는 구경하는 사람 반, 일하는 사람 반이다. 철로를 사이에 두고 모인 차량물결이 동네 조무래기들에게는 신기하기 때문인데 문밖을 어슬렁거리는 아이들이 태반이다. 덩달아 흥이 난 개들마저 난리다. 겨울은 역 주변의 논밭에 황량함을 심어놓았는데 영문 모를 왁자함은 봉동역의 삭막함을 깨운다. 겨울의 삭풍이 오는 봄을 거부하던 2006년 3월의 한 풍경은 기억에 오래 남아있다.

아리랑회사

4월에 우리는 새 상대회사를 추가로 만났다. 개선과 함께 할 생산담당회사다. 봉동관을 운영하는 아리랑인데, 50대 후반의 여사장은 배포가 크고 사업수완이 좋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개성공단의 발전적인 전망을 예견하고 남다른 사업감각으로 개성으로 진출했다고 한다. 더불어 요식업 중심의 사업영역을 면세점과 창고물류업까지 확장할 목표를 세우고 있었다. 투자유치를 목적으로 한 회사홍보 CD를 제작하여 공단 입주기업들에게 배포하는 등 공격적 경영활동을 하고 있었다. 우리도 현대아산을 통해 그 CD를 받아본 적이 있었다.

현대아산은 1단계 공사를 하면서 적지 않은 비용을 석재구입에 사용하였다. 토목에 필요한 잡석은 개성인근에서 조달하였으나 도로 정비에 필요한 경계석이나 볼라드 등은 중국에서 수입했다. 건축용 판석을 포함해 1단계 공사에만 지출비용이 수십억에 이르렀다. 현대는 중국산 수입화강석 대신 아리랑과 함께 화강석 가공공장을 공단 내에 세워 다음 단계 공사에 대비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현대가 석재공장까지 손을 뻗으면 대기업이 교류협력사업 영역에도 문어발식 경영을 한다는 비판이 제기될 것을 우려했다. 현대는 우리의 화강석사업 진출을 진작 알고 있었기에 우리를 앞세우는 게 현실적이라 판단했던 것 같다. 우리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당장 개성공단에 필요한 수량을 생산하기 벅차고 판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니 장기적으로 본 수익 발생이 빠를 수 있다고 쾌재를 불렀다.

우리는 개선과 진행하던 합작사업 외에 현대와 아리랑의 협의테이블에 합세하였다. 그런데 중대한 변수가 발생하였다. 현대 내부에서 시작된 경영권 문제가 외부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소위 YK문제였다. 현정은 회장이 김윤규 회장을 경질하고 윤만준 체제를 출범시킨 것이다. 현대 내부의 복잡한 사적인 이해관계는 배제하고 사업방식만으로 단순화시킨다면 YK의 ‘관계와 의리를 중시’하는 방식에서 급격하게 ‘효율과 성과’ 중심으로 바뀐 것이다.

북측은 사전에 현 회장에게 YK 배제에 대한 우려를 전달했고 현 회장도 수락한 것으로 이해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북측은 이 같은 의사전달의 혼선과정에 몇몇 사람의 농간이 있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 후과는 예상보다 커서 북측은 “현대와 신규사업은 전면 중단한다”는 초강경카드를 뽑아들었다. 석재사업에 대한 현대아산의 속내는 우리와 아리랑이 전면에 나서고 현대는 일부 지분으로 경영을 주도하려 했지 싶었는데 북측의 방침에 따라 아리랑은 현대와 함께라면 더 이상은 협의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곤혹스런 상황에서 우리는 다시 개선과 아리랑, 우리의 3자 협의로 물꼬를 돌렸다. 개성에서 현대의 도움 없이는 사업진행이 어렵지만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칼자루는 현대가 아니라 북측이 쥐고 있었던 것이다. 현대도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또 현대 입장에서 당장 북측과 대화의 끈이 끊어진 상태에서 우리를 통해서라도 관계를 유지해 나간다면 나중에 무언가 실마리를 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던 것 같다.

따라서 현대의 보이지 않는 도움을 받아가며 우리는 협의를 진행하였다. 협의는 원만하게 진행되어서 개선은 룡강군에 공장을 건설하자는 초기 입장에서 선회, 개성에 건설하겠다는 우리 안을 수용했다. 대신 원자재인 돌 채석장은 룡강으로 하고 채석장비 일부를 투입하기로 했다. 처음 개선은 공장부지로 개성시 진입부에 있는 2천 평 정도의 부지를 제시하였다. 그곳은 판문점에서 개성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었는데 개성공단 3단계 부지 예정지와 애매하게 겹쳐 추후 현대와 논쟁 소지가 있었다.

예상되는 문제점에 대한 검토를 하던 중 이번에는 아리랑이 덕평동 부지로 가자고 제안했다. 흥륜산이 철로너머 보이고 1단계 공단부지와 2㎞ 남짓 떨어졌는데 철로 부근이라 현대아산과의 논쟁거리도 전혀 없는 땅이었다. 당시 현대와 냉담함을 유지하던 북측이라 현대를 의식했던 까닭이 부지를 재선정해야 하는 이유가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개성을 오가는 동안 현대와 함께 시작했다가 현대를 배제했던 우리로서는 현대 관계자들을 만나면 껄끄러웠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현대아산에 YK 강제퇴진 여파가 남아 더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상당히 위축되고 조심스러웠다.

반면 아리랑은 사업진행에 아주 적극적이었다. 사업영역의 확장에 관심도 많아 봉동관에는 아리랑과 협의하려는 남측 손님들이 끊이지 않았다. 우리는 공단 내에 입주한 토지공사, 우리은행, 한전 등의 개성지사장이 봉동관에 방문하면 괜히 주인행세 하며 어울릴 수 있었다. 이는 우리 사무실과 공장에 통신이나 전기공급을 받으려는 얄팍한 욕심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공단 내에 사무실이 없던 우리는 봉동관 옆 부지에 컨테이너 몇 개를 치장하여 사무실 및 숙소로 이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단경계와 인접해 있지만 공단 밖이라는 이유로 통신이나 전기를 지원받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공단과 더 먼 현대 개성지사는 공단 밖인데 전기와 통신을 공급받고 있는 불평등이 존재했다. 발전기를 돌려서 전기를 자체 조달하는 우리는 아쉬운 게 많은 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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