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뉴스가 주최하고 평화3000이 후원한 ‘6.15공동선언 11주년 기념 통일뉴스 방북기 공모전’(5.21-6.20)에서 3편의 수상작이 결정됐다. [관련기사 보기]
대상 격인 '민족상'을 받은 박경식 씨의 '개성가는 길'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개선총회사

추석을 며칠 앞두고 단동대표부에서 초청장을 보내왔다. 우리의 상대회사는 민경련 산하 5개 회사 중 광물을 취급하는 명지총회사였다. 그런데 단동대표부에서 보내온 초청장은 개선총회사 명의였다.

민경련에는 명지, 개선, 새별, 삼천리, 광명성총회사 등 5개 회사가 있는데 취급분야가 각각 달랐다. 개선총회사는 원래 농수산물이 전문이었다. 명지총회사가 광업진흥공사와 정촌의 흑연 광산 때문에 업무가 과중하고, 개선총회사가 우리와 일하겠다는 의견을 밝혔기 때문이라 했다.

북측 사업구조는 독특해서 명지총회사, 개선총회사 등 앞에 총자가 붙는 회사는 paper company다. 일종의 무역회사로 아리랑 회사처럼 공장이 있는 것은 아니고 무역거래수수료로 수익을 창출한다.

따라서 분야는 중요하지 않다. 필요에 따라 새별은 섬유, 삼천리는 IT, 전자 등을 맡을 뿐이다. 개선처럼 관계를 중히 여겨 상대회사를 자임할 수 있고 공장을 선정하면 되는 듯 했다.

초청장을 받은 후 현대아산에 부탁하여 숙소를 잡고 방북 신청과 함께 서울세관에 방북 차량 신고도 했다. 세관에 신고하여 필증을 수령해야 승용차로 집에서부터 개성까지 출퇴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통근버스를 타기위해 광화문까지 꼭두새벽에 가야만 한다. 공단 내에서 면세유도 주유받고 참사의 안내를 받아 개성시내를 누비는 즐거움도 더해진다.

출경시간이 되면 출입국사무소는 도떼기시장이 된다. 토목자재를 실은 트럭과 트레일러가 수 십 대, 여기에 하루 여섯 번 씩 들락날락하는 사천강 모래운반용 덤프트럭이 20여 대, 그리고 지원인력, 방문차량이 줄을 잇는다. 그

래서 아침부터 DMZ 통문 앞에는 차량행렬이 시간대별로 꼬리를 문다. 절차에 따라 출발하여 북측 CIQ(출입사무소)에 도착하면 각각 상대관계자들이 마중을 나와 있다. 소속별 참사를 따라 현대는 현대, 시범공단은 공단, 우리는 우리대로 뽀얀 차량의 먼지를 일으키며 일을 보러가게 된다.

간밤에 개선총회사는 우리와 만나기 위해 평양에서 내려와 자남산 여관에서 묵었다고 한다. 손경철 총사장과 성기철 지사장 민경련의 정책실 참사가 동행하여 우리를 맞이하여 주었다.

자남산 여관(子男山 旅館)

우리는 공단을 가로질러 개성시내로 빠졌다. 자남산에서 달려드는 아침은 상쾌한데 시내는 왜 그리 바쁜지. 걸음들이 분주하다. 남대문 앞에서 우회전하여 자남산 여관으로 향했다.

▲ 개성 유일의 현대식 호텔 자남산 여관. [자료사진 - 통일뉴스]
개성의 달맞이 동산인 자남산 기슭에 위치한 개성 유일의 현대식 호텔이다. 민간이나 당국자간 협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4층 건물로 1층에는 로비와 매장, 계산대, 2층은 연회장과 객실, 3, 4층이 객실이다. 건물이 오래되고 낡아 시설수준이 떨어지지만 위치는 아늑해서 정취가 있다. 송악산이 보이며 선죽교가 지척이라 개.증축 하면 입지가 매우 좋은 곳이다.

인사가 끝난 뒤부터 바로 합의서 작성을 위한 협의에 들어갔다. 합의서는 통일부에 협력사업 및 사업자 승인을 받을 때 제출해야 하는 필수서류이다. 우리는 개략적인 합의서보다 구체적인 사항을 명시할 수준의 협의내용을 바랬지만 욕심이 앞섰던 듯 했다. 결국 사업의 명칭과 목적, 규모, 사업주체와 형식, 사업지역의 선정 등의 포괄적인 합의서 작성에 그치고 말았다. 이마저 오후시간으로 넘겨야만 했다.

자남산 식당은 민물장어 구이와 소꼬리 찜, 새우튀김과 꿀에 잰 인삼, 야채와 개성고추장, 삶은 돼지고기 등을 여성봉사원이 앞 접시에 덜어준다. 가격은 비싼 편이다.

그래서 그런지 식단보다 반주가 더 관심을 끈다. 봉학맥주와 영정술이 나온다. 영정술은 병 겉종이에 물개가 그려져 있어 물개○술이라 하여 공단 내에서 인기가 높다. 알고 보면 약초를 걸러낸 것으로 물개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도수가 높아도 뒤끝이 없고 부대끼지 않아서 즐겨 찾지 싶다. 좋은 술인 만큼 값이 싸지 않은데 찾는 사람이 많아 구하기가 어렵다.

몇 병을 더 주문하니 참사가 주의를 준다. 남측 세관에서 그림만 보고 청맹과니처럼 혐오주류 딱지를 붙여, 갖고 가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단 출입이 잦은 관계자가 많지 않으니 차 트렁크 구석에 숨겨 내빼는 게 첩경이라 일러준다.

식사 후 가을의 양광을 받으며 선죽교를 걸었다. 표충비 앞에는 그림을 펼쳐놓고 파는 매장이 있었다. 마침 운보 김기창의 동생 김기만의 그림이 눈에 띤다. 형제의 유전자는 분단의 이별에도 동일하게 성장했는지 형은 남측에서, 동생은 북측에서 뛰어난 예술적 능력을 선보였다.

김기만은 독수리와 게, 걸어 등을 잘 그리기로 소문이 나 있다. 독수리 그림은 도약을 상징하여 주로 사무실에 걸고, 게나 걸어는 입신양명이나 부귀를 뜻해서 집에 걸어두는 것이 좋다. 바위에 앉아 막 날아오르려는 독수리의 눈초리가 매섭게 잡아끄는 바람에 가격을 깎아가며 구입했다.

자남산 여관에 돌아와 문구를 수정하고 나머지를 추가로 협의했지만 결론을 내지 못했다. 장비 수송문제가 발목을 잡았는데, 우리는 개성을 거쳐 보내자는 입장이었고 개선은 문서에 적어 확정짓지 말자는 것이었다.

당시 남과 북간에 오가는 모든 물자는 해상으로 운송되고 있었다. 우리 물품은 중장비라서 배를 이용하면 추가비용이 많이 발생한다. 그래서 육상 운송을 명기하자고 공을 들였고 개선은 부서간 협의가 필요한데 특히 군의 동의를 받기가 만만치 않아 못박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 문제가 걸림돌이 되어 합의서 서명은 다음 날로 미루었다.

봉동관

봉동관은 개성공단의 1단계 부지의 경계펜스에 위치해 있는 식당이다. 평양 인민봉사국 소속 아리랑회사가 운영한다. 공단 내에 유일했던 외부 식당이라 공업지구의 임원진들이 외부손님들을 접대하던 식당이다.

▲ 개성 봉동관에서 북측 봉사원들과 여흥을 즐기고 있다. [사진제공 - 박경식]
털게찜과 도라지무침, 해물요리와 시원한 김치맛이 훌륭하며 따로 요청하면 별도의 요리도 차려준다. 자연산 쏘가리 매운탕이나 동태찜을 잘한다. 값이 비싸 눈총을 받지만 노래반주기가 있고 노래와 무용 등 공연을 하기 때문에 제법 인기가 있다. 스물두 명의 봉사원들이 전문대학 등을 나와 무용, 반주, 노래 등 제각기 특기가 있어 쏠쏠한 재미가 있다.

마침 만찬자리에 현대아산 개성사업소 지사장과 현장소장 그리고 개선총회사와 지도총국의 참사까지 참석하여 우리 사업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개성을 통한 장비반출이나 개성에서의 사업협의 및 신규사업 모색 등은 현대아산이나 총국의 도움이 없으면 쉬운 일이 아니다. 말하자면 그날 저녁식사는 사업전망을 위한 포석을 까는 자리였다.

현대아산 귀빈숙소는 40피트 컨테이너 두 개를 이었는데 응접실에는 위성TV, 욕실에는 순간온수기를 놓고 침대와 쇼파까지 놓아 웬만한 호텔 부럽지 않다. 공단에는 각 업체별 숙소나 현장노동자 숙소만 있을 뿐, 현대의 귀빈숙소를 빼면 당시에는 머물 곳이 없었다. 현장소장이 친절하게 맥주 한 박스와 마른안주를 주어 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셨다.

▲ 컨테이너를 이용해 만든 개성공단 현대아산 귀빈숙소. [사진제공 - 박경식]
새벽녘에 숙소 앞 공터에 나오니 밤이 어두워 달빛이 교교하다. 언덕위에 자리하여 1단계부지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흥륜산 아래에선 밤을 밝혀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부지 한 가운데 위치한 크락셔*의 비명소리가 넓게 퍼져간다. 오히려 어둠에 쌓여있는 공단입구가 제 궤도에 오르지 못하는 이곳의 앞날을 상징하는 듯하다.

총국도 사업진척이 더디기에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진즉 이루어졌어야 할 1단계 공단의 개발과 분양이 자꾸 늦춰지는 까닭은 미국의 입김 때문이라고 한다. 미국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은 한반도 어디일까? 아마 줏대를 세우지 않는다면 반도 구석구석 미국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은 없을 것이다.

가을 정취는 한밤중이 제격이라 하는데 그것은 어둠이 깊어 달이 더욱 밝기 때문 아닐까 한다. 어둠이 깊은 것은 날이 밝아올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둥근 달이 푸근해 보인다.

현대아산 직원식당에서 아침을 먹었다. 컨테이너로 급조한 식당이라 좁지만 그곳에서 일하는 봉동 주민들과 이야기 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식재료는 남측에서 가져온다고 한다. 개성 인근에 수천 명이 먹을 재료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기반이 없기 때문이다. 평양을 근거로 하는 아리랑회사가 공단 경계까지 내려와 봉동관을 직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1단계에서 3단계까지 공단이 완료되고 배후도시로써 개성신시가지가 조성되면 개성은 인구 백만 이상을 헤아릴 것이라 한다. 신도시에는 북측 노동자뿐만 아니라 상주할 남측노동자들까지 특정 지역에 거주시킬 계획이다. 그러면 개성 인근의 생산기반시설도 충분하게 확보되어야 한다.

이 때문에 덕평동에 돼지 사육농장이나 배추 등 식재료 생산기반을 갖추자는 각종 사업제안들이 민경련에 쇄도하고 있다. 개성 시민들의 자급적 생산계획과는 별도로 공단공급만을 목표로 한 대량생산기반 조성이 시급하기 때문이다.

북측도 민경련과 개성시인민위원회, 아리랑회사간의 교통정리도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에 개성공단을 관할하는 지도총국, 개성시인민위원회,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들이 연석회의를 열고 생필품 공급을 북측에서 납품받는 문제를 협의하고 있었다. 생필품 공급분야를 확대하고 공급의 안정성과 적기, 그리고 품질을 보장할 데 대한 방안 등이 주로 논의되었다.

아리랑은 식자재와 창고업 진출을 목적하고 있었다. 이미 국토환경성으로부터 부지사용에 대한 승인까지 받아놓았다. 아마 북측 역시 개성을 대상으로 한 각종 도시계획을 치밀하게 마련하지 않았나 싶다.

소장은 현대아산 개성사무소 3층에 펼쳐진 사업계획도와 조감도까지 보여주며 사업을 설명했다. 이는 단순한 건설사업이 아니다. 민족이 다시 쓰는 역사다. 숫자로 표현된 연도와 규모는 구현될 현상만 뜻하는 게 아니다. 수(數)의 이면에서 불어날 민족동질성을 포함한다. 따라서 개성공단의 진척도를 보여주는 수치는 ‘우리 민족끼리’를 나타내는 잣대이기도 하다. 그래서 공단을 둘러싸고 경제적 이해양상이 복잡하게 드러나도 북측이 괘념치 않는 것은 그런 신뢰 때문 아닐까 한다.

그 다음날 꽁무니에 흙먼지를 뽀얗게 매달고 온 개선총회사일행과 만나 합의서를 마무리했다. 운송방법은 합의서에 명기하지 않는 대신에 개성을 거쳐 장비를 보내자고 구두로 보장했다. 서명하고 기념촬영을 끝내니 출경시간이 빠듯하다.

협력사업 및 사업자 승인 신청에 필요한 합의서는 마련했으나 추가해야 할 서류는 첩첩이다. 앞으로 계약서와 당국간 보증서도 필요한데 이렇게 밀고 당기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협력사업 승인은 통일부가 하지만 재경부, 국정원과 협의가 필요하여 시간이 걸린다. 그 해 12월 협력사업 승인을 받았다.

*크락셔 : 큰 돌을 잘게 잘라 자갈로 만드는 기계. 컨베이어로 연결하여 큰돌을 중간크기로 다시 잘게 부셔 토목공사용 자갈로 만듬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