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뉴스가 주최하고 평화3000이 후원한 ‘6.15공동선언 11주년 기념 통일뉴스 방북기 공모전’(5.21-6.20)에서 3편의 수상작이 결정됐다. [관련기사 보기]
대상 격인 '민족상'을 받은 박경식 씨의 '개성가는 길'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개성(開城)가는 길

처음 민족경제협력련합회(민경련) 단동대표부를 찾은 때는 한여름의 태양이 대지를 발가벗기던 2005년 7월말이었다. 부시정권의 집요한 반북정책으로 6자회담은 표류하며 조미관계는 파열음을 냈지만, 남북관계는 개성공단 조성과 함께 교류협력이 조금씩 확장해가고 있었다.

심양에서 단동까지는 자동차로 세 시간여 걸렸는데, 만주 벌판은 가도 가도 끝이 없어 사람을 몹시 지치게 했다. 가는 길에 있던 고구려 유적 봉황산성(鳳凰山城)을 들렀을 때는 한 점도 없던 바람이 불었다. 마치 옛 민족의 숨결인 듯 싶었다.

연암은「열하일기(熱河日記)」에 청(淸)나라 국경 검문소를 지난 것은 의주를 지나고도 여정(旅程)이 며칠 더 흘렀다고 적었다. 혹 봉황산 근처는 아니었을까? 청(淸)은 흑수말갈, 여진, 만주족이라 불리며 만주에서 발흥한 나라, 근본을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조(正祖) 연간에 여기 어디까지는 조선땅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불현듯 역사를 똑바로 알려하지 않았다는 후회가 정수리를 때린다. 강역(疆域)문제보다 제 나라의 역사마저 올바로 알려 하지 않는 사대근성이 있었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분노가 인다.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올바른 역사관을 갖는다. 올바른 역사관은 세계관 정립의 기초다. 덜 뜬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는 사실이 이국땅에서 내 발길을 잡는다.

▲ 단동에서 바라본 압록강단교(오른쪽)와 조중우의교(왼쪽). [사진제공 - 박경식]
해 그림자가 길게 늘어질 즈음 도착한 단동은 압록(鴨綠)의 파랑(波浪)으로 눈부셨다. 철교는 끊겨진 채 날카로움을 물살에 눕히고 조중우의교만이 완전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2박3일간 묵게 될 중린(宗連)호텔은 압록강 단교(斷橋) 바로 앞에 있어 낮에는 의주의 푸른 하늘을, 밤에는 찰랑이는 압록 물결을 불빛에 볼 수 있어 깊은 감회에 젖게 한다.

민경련 단동대표부는 중린호텔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얄루장(鴨綠江)호텔에 있었다. 사무실에는 “민족을 위해 일하지 않는 사람은 어머니, 조국을 말할 자격이 없다”는 액자가 걸려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오광식 대표는 섬유에서 전자, 광물에서 IT까지 두루 해박하고 논리가 정연하며 무역분야에서 체득한 실용적 유연성을 갖춘 한마디로 간단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왜 통일부에서 오대표, 오대표하고 찾는 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통일부에서 그를 다르게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그가 단동에서 남측 기업에 직접 전화하여 민경련임을 밝히고 교류협력을 제의하는 사례 때문이다. 이 전화를 받은 남측 사람들이 진위여부를 묻거나 반북의식과 두려움에 신고하는 경우가 있어 황당한 사람이라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민족의식을 갖고 대담하게 사업해 어머니 조국을 말할 자격이 충분하다는 평을 더 듣는다.

뿐만 아니라 북측에서 자본주의의 교환가치에 익숙하지 않아 발생하는 상품의 불균등 및 포장문제를 쌈박하게 해결해주고 통일부에 직접 전화해서 따질 것은 따지는 사람이다. 그래서 상반된 평가에도 통일부가 곤란하면 찾게 되는 유일한 북측 사람이다.

첫 단동방문에서 오대표와 공식 협의와 동석 만찬 후에는 Fax와 전화로 협의하였다. 그리고 8월 중순, 9월에 민경련 산하 개선총회사와 개성에서 일을 추진하는 것이 좋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 이전까지 우리 상대회사는 민경련 산하 명지총회사였는데 개선으로 바뀐 것이다. 민경련에서 보내올 초청장을 기다릴 때, 현대아산에서 개성시범관광을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우리 회사 관계자들도 이 시범관광에 참여하였다.

8월 28일, 시범관광단 일원으로 개성을 첫 방문한 후 2006년 6월까지 매월 1회 이상, 7월부터는 매주 방문하여 석재가공공장을 완공하였다. 그리고 11월말에는 생산품도 반입하였다. 마지막 방문은 12월 중순이었는데 근 50여회를 방문한 까닭에 개성시내가 머릿속에 훤하다.

돌아보면 큰 진폭으로 흔들리던 북미관계로 인해 탄도미사일 무력시위, 핵실험으로 현대아산조차 개성공단내로 발이 묶였지만 우리는 공단을 넘어 덕평동 공장을 오갔다. 현대아산도 협조를 요청하는 남북의 끈을 이어왔던 것이다. 개성의 달맞이 동산인 자남산 중턱 김주석 동상앞도, 한석봉이 일필휘지로 쓴 남대문앞도 달렸다. 그리고 자남산 여관에서 협의를 끝내고 선죽교 앞을 거닐던 기억은 아직도 선하다. 이제와 예전 메모를 뒤적여 정리하는 까닭은 혹여 남북의 교류로 경제적 후일을 도모하는 사람에게 도움될 지 모르겠다는 생각에서다.

초행개성(初行開城)

시범관광 출발 전날 밤 나는 잠을 설쳤다. 설레는 마음보다 돌아가신 외할머니와 어머니 생각이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분 모두 고향이 이북이다. 외할머니는 황해도 연백, 어머니는 경기도 장단. 어머니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 한국전쟁을 만났는데 전북 익산으로 피난을 나오셨다. 가끔씩 어릴 때 배운 노래를 부르며 추억에 잠기는 모습을 보았다.

장단은 지금 민통선 안이다. 허가된 사람만 출입하며 작은 마을 하나를 정책적으로 조성했다. 옛날의 장단은 비무장지대만은 아니었다. 오늘의 행정구역과 많이 달랐기 때문에 어쩌면 어머니 고향은 공사중인 개성공단을 포함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개성 길에 어머니 흔적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두 분 모두 고향땅을 다시는 밟아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그러기에 개성행이 우연은 아니라고 여겼다. 운명을 믿지 않았지만 내 유전자에 새겨진 수구초심(首丘初心)이 발길을 그 곳으로 향하게 한 것은 아닐까?

현대물리학은 하나의 현상에 복잡한 요인이 작용하므로 인과론(仁果論)을 부정한다. 하지만 중심 원인은 있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도 흔적은 남아있듯, 분단이란 시공의 일시적인 점유일 뿐 인간의 유전자에 새겨진 공동의 상념은 지울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날 밤 나는 어머니 노래를 들었다.

“행길가에 떨어진 조각빗 하나
어느 색시 머리에 꽂혔던 걸까
길가는 사람들이 발길로 찰 때
옛 님 잃은 색시는 풀이 죽겠네”

출발하던 날 꼭두새벽, 일산에 살던 나는 행여 시간을 놓칠까 저어하며 경복궁으로 허겁지겁 달려갔다. 여름인데도 새벽이라 말하기 무색하게 어둠이 짙었다. 지방 사람들은 아예 근처 여관에서 밤을 지새고 하나 둘 까만 그림자가 되어 모여들었다. 현대아산 현정은 회장과 임원진, 통일부 당국자들이 1호차, 기자들은 2호차, 개성 실향민들이 3호차, 교류협력사업 관계자들은 4호차로 차량이 모두 10대였다. 역사적인 첫 개성시범관광단이라고 TV카메라까지 행차하여 간단한 식전행사를 가졌다.

▲ 2005년 8월 28일 개성시범관광 출발에 앞서 포즈를 취한 필자. [사진제공 - 박경식]
행사를 마치니 어느새 날이 밝아 서대문 고가도로를 넘어 연대 앞을 지날 때는 버스 몸체에 붙은 펼침막을 보고 손을 흔들어주는 시민들도 많았다. 하지만 개성관광 진행과정을 아는 사람들은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왜냐하면 본관광에는 걸림돌이 많아 후일을 장담하기 어려운 걸 알기 때문이었다.

자유로

서울에서 임진각까지 쭉 뻗은 자유로 입구에는 행주산성이 있다. 그 곳을 지나 한강을 바라보면 수중보와 삐죽한 철근무더기가 보인다. 그것들은 강물의 속살을 드러나게 하고 물길을 이완시켜 물의 흐름을 더디게 한다. 그 까닭에 서해 바닷물의 역류를 용이하게 한다. 역류는 주변 펄의 생태계에 영향을 미친다. 짠 물을 견뎌내는 수종을 형성하고 그 숲을 무성하게 했다. 분단의 철조망이 여전한 까닭에 변형된 생태환경 보전이라도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는 걸까?

그럼에도 살풍경한 이유는 철조망과 참호, 초소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화려한 외형의 일산 신도시 바로 건너에 존재하는 살벌함은 교류협력의 이면에서 끊임없이 반북과 대결을 강요하는 국가보안법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조금 더 달리면 강물과 강물이 만나는 교하(交河)가 나온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두물머리에서 합수(合水)하여 흘러온 지는 백오십여리가 넘는다. 한강은 서울을 적시고 김포를 지나 강화에서 임진강을 만난다. 그래서 교하다.

왜 옛 사람들은 봉하(逢河)나 합하(合河)라 하지 않고 교하(交河)라 했을까? 「삼국사기(三國史記)」고구려조 지리(地理)편에 교하(交河)라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적어도 천년 이상을 그렇게 불려왔다. 뜻을 새기며 물을 보면 두 물길은 서로 접(接)하되 부서지지 않고 서로 합(合)하되 스미어 들 뿐이다.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일심(一心)으로 융화되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세계다.

원효는 융일이불이(融一而不二)라고도 했던가? 모든 생명체가 어울리되 같기를 강요하지를 않는 이치를 알았기에 교하라 한 것이리라. 현대생물학의 기념비적 성과는 “생명계의 본질은 차이를 좁혀가는 균질화(均質化)에 있으며 복잡한 차이와 동일성을 끊임없이 다시 생성하고 좁혀가는 순환과정임”을 밝혀낸 데 있다. 그러고 보면 옛 사람들은 과학적 진리를 정관(正觀)을 통해 이미 깨쳤다.

하지만 분단의 세월은 교하의 의미를 지워버렸다. 뜻은 사라지고 소리만 떠돌고 있다. 수중보와 철조망에 물살이 흩어지고 생명은 찢긴지 오래, 과연 교하(交河)라고 할 수 있을까. 고도(高度)의 정치.문화적 생명체란 민족마저 갈라져 이제는 교하(橋下)가 되어버린 지금, 말의 의미가 되살아나기를 꿈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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