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뉴스가 주최하고 평화3000이 후원한 ‘6.15공동선언 11주년 기념 통일뉴스 방북기 공모전’(5.21-6.20)에서 3편의 수상작이 결정됐다. [관련기사 보기]
'통일상'을 받은 리정애 씨의 '재일조선인 리정애의 조국방문기'를 3차례로 나누어 전재한다.
/편집자 주


▲ 9월 17일 개성에 있는 왕건릉을 찾았다. [사진제공 - 리정애]
9월 17일, 개성에 있는 왕건릉을 찾아갔다. 왕건은 아직 드라마를 못 봤다. 사극은 은근히 역사공부가 된다. 우리 재일동포들은 어쩌면 사극을 보면서 민족의 자부심을 키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왕건릉을 뒤로 하고 고려박물관에 갔다. 고려박물관 건물은 11세기 초에 대명궁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별궁이며 다른 나라에서 온 사자가 머무는 시설로 쓰였고 순천관이라고도 불렸다.

개성에서는 개성 민속려관에서 머물렀다. 모든 것이 완전히 내 취향이었다. 민속려관 이름 그대로 기와집들이 나란히 있고 길에는 돌을 깔아놓았다. 여관 바로 앞에 시내까지 흐르고 있어서 분위기가 완전 끝내줬다. 방안에도 전통적인 분위기로 꾸며놓았다.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여관 둘레를 산책하면서 여기서 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소문으로만 들은 온돌방을 처음으로 맛보기도 했다. 개성은 남쪽에서는 아직 못 가봤다. 1박을 못하고 그냥 와야 하니까 그러면 차라리 금강산으로 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언제 숙박할 수 있는 투어가 생기면 그때 신혼여행 삼아 가볼 것이다.

9월 18일, 분단의 현실을 마주 보게 된 판문점에 들어갔다. 판문점은 원래 마을 이름이었다고 한다. 옛날 개성과 서울을 왕래하는 나그네를 위해 널빤지로 가게를 만들어서 판문점이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그것이 어느새 지명으로 됐다고 한다. 옛날 서울과 개성, 그리고 평양까지 많이 왕래를 했다는 것과, 나라가 하나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옛날이 엄청 그리워진다. 그런데 그런 곳이 분단의 상징으로 되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지 않는가.

▲ 정전회담장 앞에서 친구와 포즈를 취했다. [사진제공 - 리정애]
비무장지대에서 1키로 정도 가면 1951년 12월부터 1953년 7월에 정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사용된 정전회담장이 있다. 회담장 안에는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미국의 수석대표들이 앉은 의자와 책상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다. 그 옆에 정전협정조인식장이 있다. 정전회담이 종결될 무렵에 정전협정의 조인문제가 제기되자 미국은 회담장 옆에 천막을 치고 거기서 조인식을 하자고 했다. 그래서 조선에서 겨우 닷새 만에 900평방미터 건물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정전협정조인식장이다. 건물 내부에는 조인을 한 책상과 의자, 조선과 미국의 국기가 그대로 남아있다.

여기를 보고 느낀 것은 결국은 조선과 미국과의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동족끼리 싸우고 미국이 남쪽을 도와준 것처럼 인식되어 있다. 올해 6.25는 60돌을 맞이한다. 남쪽에서는 북쪽이 먼저 공격했다고 ‘6.25사변’이라고 부르다가 지금은 ‘한국전쟁’이라고 하지만 북쪽은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부른다. 과연 무엇이 진실일까.

여러 국가들의 계략에 의해 우리 땅이 희생된 것이라고 생각하면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다. 전쟁을 일으키고 홀로코스트를 한 나치를 낳은 독일이 분단됐다는 것을 생각하면 식민지지배를 당한 우리가 아니라 일본이 분단되었어야 했다. 그런데 일본은 ‘조선전쟁 특수’로 막대한 돈을 벌었다.

홀로코스트를 맹비난해온 미국 또한 조선 전역에서 대학살을 벌였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너무나 유명하지만 신천대학살을 주제로 한 ‘조선에서의 학살’은 세계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신천에 꼭 가봐야 한다고 생각해서 희망했지만 갈 수 없었다. 조고출신 동무들이 조고시절에 다 갔다 왔기 때문이다. 신천은 언제 내가 북쪽에 갈 수 있게 되면 꼭 가봐야 하는 곳이다. 일제가 한 만행들을 진상규명할 때가 언제인가 꼭 오듯이 미제의 만행을 밝힐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 고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기 하루 전인 1994년 7월 7일자 서명이 새겨진 기념비 앞에서. [사진제공 - 리정애]
정전협정조인식장에서 1키로 더 남쪽으로 가면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바로 그 현장에 들어선다. 먼저 판문각에 올라가 남쪽을 바라봤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남쪽 땅은 어떤 곳일까 상상해봤지만 그때는 솔직히 고향땅이 그리워지는 그런 감정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남쪽에서 프로파간다 방송이 들려와서 정전상태인데도 계속 적개심을 부추기는 남쪽의 태도에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사경계선 위, 가운데에 서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봤다.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감시위원회 회의실이다. 쉽게 부술 수 있을 것 같은 파랑색 프리패브 건물 안에도 분계선은 있었다. 마이크 선이 바로 그 분계선이었다. 참으로 웃기는 일이었지만 웃을 수 없었다. 그런데 창문 밖에서 엿보고 있는 미국 군인과 남쪽 군인이 이쪽을 보고 웃고 있었다. 열 받아서 노려봤지만 뭐가 재미있는지 계속 웃었다. 지금이면 우리말로 욕도 할 수 있는데 그때는 내 우리말 수준이 그 정도까지 안됐다. 증거삼아 사진을 한 장 찍어봤다. 나와 동무 뒤에서 미국 군인이 거만하게 손을 허리에 대고 있다. 내 막내 동생은 반대로 사진을 찍혔다고 한다. 뭐 때문에 그런 짓을 했을까.

처음 남쪽에 왔을 때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무섭게 느껴졌다. 경찰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들의 적이고 나를 잡아먹기라도 할 것 같았다. 지금은 많이 익숙해졌지만 그래도 집에 군복이 있는 것은 역시 싫다. 분단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같은 민족끼리 서로 증오하고 적으로 되어 싸우게 한다.

마이크 선 군사분계선을 넘어 난생 처음으로 남쪽 땅을 밟으려고 하니까 긴장됐다. 그런데 해 보니까 진짜 별거 아니었다. 그냥 마이크 선인 것뿐이었다. 고작 이런 걸로 조국이 분단되어 있단 말인가! 참으로 터무니없었다. 몇 번이나 왔다갔다 해봤다. 회의실 밖에 있는 군사분계선도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거기도 왔다갔다 해보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 '조국강습' 기간 중 이곳 저곳을 여행하며 조국을 배웠다. [사진제공 - 리정애]
9월 19일 평양산원을 견학하러 갔다. 무더운 날씨에 피곤이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내가 싫어하는 우유냄새도 났었다. 내가 튼튼해 보이긴 하지만 약간 허약체질인지 어렸을 때부터 오래 서 있으면 쓰러지곤 했다. 견학하고 있는 도중에 어지러워졌다. 끝까지 봐야 하는데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다. 그렇게 계속 버티다가 더 이상 서 있으면 완전히 쓰러질 것 같아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안내해주고 있는 여의사 선생님이 와서 내 손바닥 혈 자리를 계속 눌러 주면서 견학하러 다녔다. 아프지만 엄청 시원했다. 어느새 나아지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되어있었다. 그 경험 이후로 어지러워지면 손바닥 지압을 하는 습관이 생겼다. 지금 우리 집에 보리출판사의 ‘손 주물러 병 고치기’라는 책이 있다. 우리 민족의 지압법에다가 북쪽의 자료들을 모아서 엮은 책이다. 이제는 어디 아프면 이 책을 참고로 해서 지압하는 습관이 생겼다. 지압은 의료보험이 없어서 병원에 못 가는 나의 생명선이다.

인민군교예극장에서 정교하고 아찔한 몸짓으로 알려진 교예를 구경했다. 러시아 교예를 몇 번 본 적이 있었는데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보고 나서 나의 교예에 대한 인식이 싹 바뀌었다. 옛날 본 것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어떻게 인간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일까. 보면서 엄청 조마조마했고 성공했을 때는 진짜 흥분했다. 긴 말은 필요치 않다. 아직 못 본 사람들한테는 꼭 보기를 권하고 싶다.

가극 ‘봉선화’도 봤다. ‘봉선화’를 들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슬프지만 아름다운 선율과 무용, 그리고 무대장치와 의상의 아름다움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우리 금강산가극단도 참으로 대단하지만 일본 전국을 돌아가면서 공연을 하니까 아무래도 가극이 되면 무대장치를 갖추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본격적인 전통가극을 처음 봤는데 끝나고 나서도 계속 머리와 귀속에 남아있었다. 어찌나 아름다웠는지. 어렸을 때부터 우리학교에 다녔었더라면 조선무용을 배웠을 텐데...

만화에도 나왔지만 ‘봉선화’는 나중에 내가 남쪽에 오는 계기가 된 노래다. 들으면 슬픔으로 가슴이 꽉 차지만 좋아하는 노래 중의 하나다. 일제시대에 금지곡이었는데도 우리 민족이 많이 불렀다는 이야기를 알고 더 애착을 가지게 됐다.

봉선화 노래가 너무 슬퍼서였는지 일정이 너무 바빴기 때문인지 평양에 있을 때 몸이 아파왔다. 조대 담임선생님과 잘 생긴 지도원이 나를 승용차로 병원에 데려다 주셨다. 병원비는 물론 걱정 안 해도 됐다. 조선은 무상의료를 실시하고 있는데다가 우리가 가면 체류비용들은 다 공짜이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치료를 잘 받고 나서 평양려관으로 도로 가는 길이었다. 선생님들이 어디 잠깐 볼 일이 있다고 해서 나 혼자 차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뒷좌석 창문에서 뭔가 이상한 광경을 본 것 같았다. 처음에는 너무 아파서 의식이 가물가물하는 나머지 잘못 본 거라고 생각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다시 봤다.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승용차 창문 밖에 사람 다리만 보이는 것이다. 상상해 보면 그것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보통 승용차 창문 밖에 사람이 서 있으면 가슴이나 허리가 보이지 않는가. 자세히 보려고 들어다보니 지금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어마어마하게 큰 남성이 서 있었다. 꿈인가 생신인가. 과연 이것도 우리나라 매직인가?!

최홍만보다 훨씬 컸다. 그렇다고 내가 최홍만을 만나 본 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하다. 그 남성이 누구였는지는 아직도 애매하지만 아마 농구선수 리명훈 선수였을 것이다. 인터넷에서 알아보니까 키가 235센티미터라고 하니 확실하다. 인사를 하고 같이 사진도 찍고 사인도 받을 걸 그랬다. 평생 후회될 일이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로 현실이었는지 지금도 확신이 안 선다. 꿈을 꾼 것이 아닐까. 그러나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탄 유도의 계순희 선수와 만난 것은 꿈이 아니다. 사인도 같이 찍은 사진도 다 남아있기 때문에...

계순희 선수의 사인과 사진이 소중한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아끼고 있는 것들이 있다. 나는 본디 전통적인 것을 좋아하는데다가 처음 가보는 우리 땅이라 보는 것마다 욕심이 나서 많은 것을 가져왔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이 옥류금이다. 그 당시는 나는 아직 가야금을 연주하지 못했는데 하필이면 왜 가야금인가. 답은 간단하다. 그냥 어머니가 사오라고 하셨기 때문인데 어머니 또한 연주할 수 없었다. 결론은 그 정도로 우리가 가야금을 좋아한다는 것인데 지도원한테 특별히 부탁해서 좋은 것을 구할 수 있었는데 얼마나 아까운 일인가. 그리고 가져오는데 어찌나 힘들었는지. 4년 전 내가 남쪽에서 12현가야금을 배웠기 때문에 옥류금을 케이스에서 꺼내봤는데 현이 다 끊어져서 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다시 평양에 가면 현을 구해 와야 하고 언제 옥류금도 꼭 배워야겠다.

락원백화점에서 치마저고리를 맞췄다. 여름용 연분홍과 겨울용 진분홍의 두 벌을 만들었다. 예쁜 원단이 많아서 고르는데 엄청 오래 걸렸다. 판매원 언니가 같이 골라준 것이다. ‘언니가 입으면 더 예쁠 텐데’ 그런 얘기를 나눴다. 사진도 같이 찍고 친해졌지만 일정이 너무 바빠서 다시 못 갔다. 이제 결혼해서 아이도 있을 것이다.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겠지. 외국어학부는 졸업 후 주로 교원으로 나가기 때문에 맞춘 것인데 결국 잠깐 일꾼을 하고 민족학급 강사가 됐기 때문에 그때 몇 번 입었다. 결혼식 때 입을 생각도 해봤지만 실현 못했다. 지금 서울집에 안 가져왔지만 다음에 오사카에 가면 꼭 가져올 것이다. 선물로 어린 동생과 사촌동생들 색동저고리도 사갔다. 사이즈를 잘 몰라서 판매원 언니한테 많이 도움을 받았다.

원래 우표에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조선의 그림이 예쁜, 예술성이 높은 우표에 완전히 매혹됐다. 우표집과 우표를 많이 사왔다. 책도 마찬가지다. 매점이 있을 때마다 우표와 책을 찾아서 구했다. 책은 우리말 공부 겸 예쁜 그림들을 보기 위해 그림책을 샀고 조선화 화집 같은 책도 샀다. 고려청자 꽃병이나 공예품 등도 많이 찾았다. 그것들은 지금도 오사카 친정에 남쪽에서 사간 공예품들과 함께 나란히 놓여 있다.

우리 민족은 각별히 미용에 참 관심이 많은 것 같다. 남쪽에서도 여러 대단한 화장품들이 있지만 북쪽 인삼비누는 정말로 끝내준다. 구하기가 좀 어려워서 환상의 인삼비누라고 불리기도 했다. 인삼화장수도 한번 쓰면 다른 것을 못 쓸 정도였지만 계속 구할 수 없어서 참으로 아쉬웠다. 인삼비누와 화장수를 계속 쓰고 있었더라면 나는 분명 북녀가 됐었을 것이다.

조선의 약 또한 약효가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제 돌아가셨지만 외할머니한테는 곰뼈로 만든 신경통 약을, 약을 좋아하시는 아버지한테는 우황청심환을 선물로 드렸다. 옛날 동생이 천식이 있어서 오미자농축액을 선물로 받아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오미자가 뭔지도 몰랐고 약이라 맛없는 줄 알았다. 맛을 좀 볼 걸 그랬다. 병이 귀여워서 내 ‘우리나라 컬렉션’ 속에 들어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예쁜 것들을 컬렉션으로 가지고 있다. 언제 기회가 되면 그런 것을 전시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여담이지만 조국강습 동안 나도 동무들도 오징어, 낙지, 문어가 헷갈린 적이 있었다. 문어야 확실하게 구별이 되지만 뭐가 오징어고 뭐가 낙지인지 모르게 됐다. 최근에 남쪽에서 살면서 또다시 헷갈렸다. 북쪽에서도 헷갈린 일이 생각이 나서 꼼꼼히 생각해봤더니 더더욱 헷갈렸다. 결론은 북쪽에서는 오징어도 낙지도 다 오징어 종류인데 차이가 뭔지 몰라서 그랬던 것이고 남쪽에서는 그것이 아니라 더 헷갈리게 생긴 것이다. 오징어와 낙지의 차이, 다시 까먹었다. 선생님한테 물어봐야겠다.

평양려관에서 내 방은 528호실이었다. 그런 자세한 것까지 다 외우고 있다니 참으로 대단하지 않는가. 그런데 실은 지금 입고 있는 잠옷바지에 ‘五二八’이라고 자수되어있기 때문에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평양려관에 있는 동안 객실 담당 아주머니가 청소는 물론, 빨래까지 해주셨는데 그때 구별하기 위해 아주머니가 빨래에다가 다 자수를 넣으신 것이다. 이 잠옷바지는 본디 헌 옷인데다가 20년 가까이 입고 있기 때문에 거의 누더기가 다름없지만 평생 버릴 수 없다. 겉으로는 아무 것도 없는 숫자 나열로 보이지만 나는 이것을 볼 때마다 조국의 추억과 함께 매일 깨끗하게 청소와 빨래를 해준 아주머니 얼굴이 떠오른다.

10월 4일, 절대로 맞이하고 싶지 않는 날이 왔다. 약 1달 동안 돌봐주신 호실 담당 아주머니에게 감사의 인사와 조그마한 선물을 드리고 같이 사진을 찍었다. 드디어 평양려관을 떠나야 하는 날이 온 것이다. 평양려관을 떠난다는 것은 곧 조국과의 헤어짐을 뜻했다. 지금은 평양호텔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지금도 계실까. 이제 은퇴하셨겠지...

이대로 남아서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전혀 없었다. 갑자기 어디가 아파지거나 뼈가 부러지지 않을까.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 그날에 갑자기 태풍이 와서 배가 못 나가게 될 것이다. 그런 예측도 해봤다. 그날이 오기 며칠 전부터 계속 그 생각만 하고 살았다. 며칠이라도 좋으니까 갑자기 연장되지 않을까. 예전에 조국방문을 한 선배들은 연장될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그런 행운은 끝내 오지 않았다.

▲ '우리나라 매직'의 정체를 나는 아직 해명하지 못했다. [사진제공 - 리정애]
8월말에 왔을 때는 한창 진한 녹색이었던 산들이 단풍이 들고 있었다. 단풍도 일교차가 심해서 그런지 일본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아름다웠지만 그것을 즐길 여유는 없었다. 오직 일본으로 안 가도 되도록 기도했다. 우리는 조국에서 일본으로 도로 갈 때, ‘돌아간다’는 말을 절대로 쓰지 않다. 일본은 가족들이 다 살고 있지만 내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은 극비이지만 특별히 가르쳐드리려고 한다. 우리 재일동포들이 ‘우리나라 매직’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조국에 갔다온 재일동포들은 누구나 다 그 매직에 걸린다. 재일동포만인가, 그 매직에 걸린 일본사람, 미국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다 그 매직에 걸리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마음이 깨끗하고 순수해야 한다. 학생들이 특히 걸리기 쉬운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매직에 평생 걸리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평생 가는 사람들은 극히 소수고 거의 대부분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짧으면 만경봉호를 내린 순간에 깨어난다. 나는 아직 그 매직의 정체를 해명 못했다. 도대체 무엇인지 참으로 궁금하다.

결혼하기 직전에 뒤늦게 깨달았던 것이 하나 있다. 이제 남쪽에서 살게 되면 통일되는 그날까지 조국 땅을 밟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것을 왜 이제야 알았을까. 왠지 그 생각을 미처 못 했던 것이다. 아니, 그전에 남쪽에 들어오게 된 대신 북쪽에 못 가게 됐다. 조국 땅에 한 번이라도 갔다오면 이제는 고향땅에 들어올 수 없었다. 많이 후회했다. 이러면 나는 국적을 버린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많이 고민했다.

▲ 북쪽에서 지낸 시간들이 나에겐 소중하고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됐다. [사진제공 - 리정애]
그러나 북쪽에서 지낸 시간들이 나에게 소중하고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남쪽에서의 시간들 또한 참으로 소중하다는 것을 재인식했다. 여기에는 통일의 길을 함께 걸어 나가는 동지들이 있다. 나는 재일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북과 남에서 사랑을 받게 됐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우리말로 글을 쓰고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조국과 조직 덕분이다. 나는 그 은혜와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도 앞으로도 열심히 살아나갈 것이다.

내 조국강습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낸다. 기회가 있으면 그때 못 간 금강산 얘기를 하고자 한다. 나는 조선국적으로 아마도 처음으로 남쪽에서 금강산에 갔다온 사람이다(그것도 두 번이나!). 금강산 얘기도 조국강습 얘기 못지않게 재미있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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