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뉴스가 주최하고 평화3000이 후원한 ‘6.15공동선언 11주년 기념 통일뉴스 방북기 공모전’(5.21-6.20)에서 3편의 수상작이 결정됐다. [관련기사 보기]
'통일상'을 받은 리정애 씨의 '재일조선인 리정애의 조국방문기'를 3차례로 나누어 전재한다.
/편집자 주


▲ 8월 28일 김일성광장에서 중국 군인과 함께 포즈를 취했다. [사진제공 - 리정애]
8월 28일은 축제날이었다. 청년절 5돐 기념공연이 있어서 김일성광장에 나갔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여자들은 화려하고 예쁜 치마저고리를 입고 남자들은 멋있게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있다. 그 속에 키가 크고 엄청 잘생긴 사람이 혼자 서 있었다. 원빈과 닮았지만 더 잘생긴 달콤한 얼굴이었다. 배우 같았다. 그러나 군복을 입고 있다. 낯선 군복이다. 나와 같이 있었던 동무 두 명은 많이 흥분하면서 한번 말을 걸어보라고 서로에게 말했다. 같이 말해보기로 했다. 그렇게 잘 생긴 사람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후광이 비치고 있는 것 같았다. 너무 멋있어서 어지러웠고 눈을 맞추는 것이 쑥스러웠지만 용기를 내고 인사했다.

어떻게 왔는지 물어봤다. 못 알아듣는 표정이다. 원빈은 나보다 어설픈(더듬거리는) 우리말로 ‘중국, 중국’이라고 했다. ‘뭐야!’ 마음속에서 외쳤다. 중국 군인이었다. 군복을 입고 있어서 더 멋있게 보였을 것이다. 후광은 무슨! 광장은 조명 때문에 낮처럼 밝았다. 그래도 기념으로 사진은 찍어야지. 4명으로 사진을 찍었는데 그때 원빈은 내 허리에 왼손을 댔다. 알고 보니 오른쪽에 있었던 동무한테는 그러지 않았었다고 한다. 혹시 모르지. 원빈이 조선사람이었다면 나는 지금 평양에 살고 있을지도...

▲ 묘향산의 보현사 대웅전은 말 그대로 크고 웅장했다. [사진제공 - 리정애]
월 2일, 묘향산을 찾아갔다. 묘향산에서는 등산은 물론, 보현사와 국제친선전람관을 구경했다. 산도 절도 우리 것은 처음이었다. 보현사는 1042년 고려시대에 건립된 절이고 그 대웅전은 말 그대로 크고 웅장했다. 일본 절들과 비슷한 것 같지만 또 다른 건축양식과 뒤에 있는 산과 어울리는 산뜻한 단청 빛깔에 매혹됐다.

나는 어릴 때부터 절을 좋아했다. 가족들과 함께 교토에 있는 절은 거의 다 돌아다녔다. 절에 갈 때마다 어머니는 나에게 절을 비롯한 일본문화의 대부분이 조선에서 온 것이라고 얘기해줬다. 일본학교 역사시간에도 짧은 내용이었지만 그렇게 배운 기억이 있다. 배은망덕이라는 말이 머리에 떠오른다. 보현사는 임진왜란 당시 서산대사가 74살로 5천명의 승병을 일으킨 곳으로 알려져 있고 안에는 나라를 지킨 서산대사를 모신 수충사도 있다.

또한 보현사는 전쟁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인해 14번이나 불에 탔고 많은 유물들이 파괴됐다고 한다. 미국은 문화재가 많은 교토에는 폭격을 안 했다고 하는데 왜 북쪽 땅은 불바다로 만들었을까.

▲ 묘향산에 있는 국제친선전람관. 건축양식에 감탄했다. [사진제공 - 리정애]
옛날부터 건물, 특히 전통가옥에 흥미가 있었는데 국제친선전람관 건물을 봤을 때는 진짜 감탄의 한숨이 나왔다. 청와 팔작지붕에다가 기둥과 같은 서돌에는 단청을 입힌 건축양식이었다. 그것이 묘향산의 녹색과 잘 어울려져 절묘한 느낌이었다. 놀랐던 것은 목조건물로 보이는데 나무를 전혀 쓰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하루 종일이라도 그 건물을 보고 싶었지만 시간관계상 안에도 천천히 구경도 못하고 끝났다. 볼거리가 엄청 많은데도 빨리 이동하니까 일행 뒤를 겨우 쫓아가야만 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등산을 거의 해본 적이 없었다. 일본에서 등산은 그렇게 흔한 것이 아니다. 오사카에서 제일 높다고 하지만 우리 금강산과 비교하면 그 이름을 말하기가 창피할 것인 ‘금강산’과 집에서 전철로 30분 거리에 있는, 우리 재일조선인들이 일제시대 강제징용을 당하고 많이 희생된 이코마산에 몇 번 올라가본 정도였다.

묘향산을 올라가면서 우리 산이 일본산들과 달리 바위산이고 아주 험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특히 장수암이라는 어마어마한 큰 바위에는 진짜 놀랐다. 길이 40미터, 폭이 15미터, 높이 20미터에 달하는 큰 바위의 한쪽이 받침이 없이 공중에 뜨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참 멋있긴 한데 지금 돌이켜보면 참으로 신기하다. 어떻게 그 험한 산을 올라갔을까. 한 달에 한 번 6.15통일산악회에서 서울 근교 산들을 등산하는 지금이면 모를까. 그런데 그때는 왠지 그렇게 힘들지 않았던 것 같다. 이것도 조국의 힘일까. 언제 가까운 시기 6.15통일산악회에서 다시 금강산은 물론, 묘향산, 백두산에도 갈 때가 올 것이다. 그날을 위해서도 열심히 산행에 참가할 것이다.

묘향산에서 내려오니 여관 아바이들이 ‘불고기 모임’ 준비를 해주고 있었다. 묘향산려관 뒤에 흐르는 향강가에서 다 같이 술도 먹고(나는 음료수) 노래도 부르고... 참 행복한 시간이었다.

금강산, 내가 어릴 적에 난생처음으로 익힌 우리땅 지명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동네 도서관에서 ‘조선의 민화’, ‘조선의 옛이야기’라는 제목의 책을 모조리 찾아내서 읽었다. 당시 일본학교에서 내 나라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는 전혀 없었다. 나중에 5학년이 되면서 역사 시간에 ‘안중근’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해 단편적으로 배웠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린 마음에도 우리 것을 찾아서 조금이라도 알려고 하는 그런 것이 알게 모르게 있었던 것 같다. 피는 못 속인다는 증명일까.

그 민화 속에서 제일 기억에 남아있는 것이 ‘금강산의 호랑이’, ‘선녀와 나무꾼’이었다. 언제인가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오고 싶어질 정도 아름다운 산, ‘조선의 명산 금강산’에 꼭 가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다. 조국강습 관광일정에 금강산 이름은 없었었던 것이다! 조국강습 기간에 조선의 주된 관광지는 거의 다 돌아봤는데 유일하게 못 간 곳이 금강산과 신천이었다. 예전에는 당연히 금강산은 조국방문 관광코스 속에 들어있었다. 금강산에 꼭 가보겠다는 내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선생님한테 왜 못 가는지 이유를 물어본 거 같지만 충격을 받아서 그런지 기억이 안 난다. 뭔가 공사 중이라고 한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금강산에 못 간 것은 오랜 한이었다.

그때 왜 못 갔는지는 남쪽에 오면서 알게 됐다. 남쪽 관광객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1998년부터 시작된 공사 때문이었다. 그 후로 우리 재일동포들의 관광코스에서 금강산은 빠져버렸다. 많이 속상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남북이 화해를 하고 왕래를 하게 됐다면 이것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을까. 이 정도 희생쯤이야 당연히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이게 무슨 꼴인가! ‘신혼여행은 꼭 금강산에’라고 결정했었는데 말이다. 하루빨리 금강산관광이 재개되고 남북, 해외동포가 함께 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을 간절히 바란다.

9월 6일에 우리 외국어학부 4반 전체로 찍은 사진을 보니까 아무리 봐도 재일동포도 아니고 북쪽 동포도 아닌 남자 두 명이 함께 나란히 하고 있다. 도대체 누구지? 남쪽에서 사는 지금이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남쪽동포 얼굴을 아는 지금이야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남쪽 동포, 그것도 운동권 얼굴이다. 점점 기억이 살아난다. 지금 생각하면 평양에서 남쪽 동포를 만나다니 참으로 반가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때는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았다. 그들이 어디 소속이며 어떻게 왔는지 아마 이야기를 들었을 텐데 기억이 잘 안 난다. 그래도 나름 반가웠던 것은 외우고 있다. 더 반기고 이야기도 많이 나눴어야 했는데. 1996년에 북쪽에 다녀왔다면 남쪽에 와서 엄청 고생했을 것이다. 조대생, 아니 재일조선인과 인사를 한 것만이라도 감옥에 들어가야 하는 그런 시대였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형제자매들끼리 만난 것만으로 사람을 가두는 국가보안법이 정말로 지긋지긋하다. 그런 법이 지금도 아직 남아있다니 참으로 웃긴다... 이렇게 사진을 보면 남, 북, 해외 동포들이 서로 얼굴이나 생김새가 점점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말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듯이 외모도 점점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 참 슬프다.

▲ 9월 7일 드디어 백두산에 올라 해돋이를 맞이했다. [사진제공 - 리정애]
9월 7일, 드디어 백두산에 갈 날이 왔다. 과연 우리 겨레가 성산으로 모실만한 성스러운 산이었다. 새벽에 버스로 올라가서 정상에서 해돋이를 맞이했다. 해가 천지를 비추는 모습은 참으로 숭엄했다. 석굴암에 갔을 때 그 숭고함에 눈물이 나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는데 그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 신비로움은 도저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안타깝게도 그날은 강삭철도가 공사 중이라서 천지에 내려가지 못했다. 언제인가 꼭 다시 찾아가서 천지의 물을 마시고 말 것이다.

몇 년 전, 남쪽에 와있을 때다. 왜놈들이 백두산 꼭대기에서 말뚝을 박고 있는 사진을 봤다.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전혀 몰랐던 또 다른 진실이었다. 일제는 우리 민족의 넋을 완전히 허물어 버리려고 했다. 최근에 어머니한테 들은 얘기다. 나는 백두산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우리땅의 산이라는 산에는 다 그렇게 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지리산에서 만난 분은 일제가 조선민족의 기를 빼기 위해 지리산 곳곳에 박은 말뚝을 뽑으면서 다니고 있었다. 이런 참으로 바보 같은 수를 써서라도 우리 민족을 말살하려고 했고, 여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일제의 실체를 재확인한 얘기였다.

▲ 백두밀영에서 친구와 함께. [사진제공 - 리정애]
그러나 우리 민족은 불굴의 정신을 허물어 버릴 수는 없었다. 백두밀림에 있는 청봉숙영지에는 구호가 새겨진 나무가 유리 케이스 속에 보존되어 있다. 항일무장투쟁시기 열사들이 나무껍질을 깎고 숯으로 구호를 새긴 것이다. ‘조선독립 만세!’ 그 구호를 보면서 추울 때면 영하 47도를 넘는 험한 백두산에서 목숨을 바쳐 싸운 열사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혹시 내가 그 당시 살아있었더라면 과연 항일무장투쟁을 할 수 있었을까. 내 자신에게 스스로 물어보기도 했다.

백두밀림에서는 야간행군을 하기도 했다. 항일열사들과 고난의 행군을 하고 있는 조국과 함께 하려는 것이었다. 깜깜하고 울창한 밀림 속을 동무들과 함께 손을 잡으면서 행군했다. 곰이나 호랑이가 나올 것처럼 무시무시한 숲이었지만 전혀 안 무서웠다. 열사들이 지켜주고 있는 것 같았다. 나에게는 일제에 맞서 싸운 민족의 훌륭한 피가 흐르고 있다는 자존심이 더더욱 확고해졌다.

백두산이라고 하면 최근에 생각하는 것이 있다. 최근에 백두산이 언제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뉴스가 있었는데 그 후 우연히 백두산 탄생 설화 ‘백두산 이야기’라는 그림책을 봤다. 아주 먼 옛날, 백두거인과 흑두거인이 있었는데 백두거인은 조선백성을 보살펴줬고 흑두거인은 이웃나라를 부추겨 조선민족을 침략했다. 결국 치열한 싸움 끝에 백두거인이 승리했고 세월이 흐르면서 잠든 백두거인은 거대한 산으로 변했다. 이 거대한 산을 백두산이라 부르게 됐다. 또 다시 나라에 커다란 재앙이 닥칠 때 백두산이 또 다시 깨어날지도 모른다는 내용이다. 흑두거인은 바로 이 나라를 침략해온 외세이고 지금이야 나라에 재앙이 크게 닥치고 있는 바로 그때가 아닐까. 가까운 미래 나라가 안정되지 않으면 백두산이 또다시 깨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지를 비롯해 리명수, 삼지연과 같은 자연이 만든 기막힌 조형물을 눈앞에 하면 그것이 단순한 설화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 삼지연에서 단체 기념촬영. [사진제공 - 리정애]
삼지연에서 본 백두산 전경은 커다란 파노라마였다. 그렇게 장대하고 아름다운 경치를 본적이 없었다. 리명수는 꼭 한번 겨울에 가보고 싶다. 엄청 춥겠지만 겨울이 더 끝내준다고 하니까.

백두산에서 유명한 음식은 역시 들쭉이다. 나는 들쭉이 즉 블루베리라고 오랫동안 믿고 의심치 않았는데 식물박사 김익 씨가 둘 다 산앵도나무에 속하지만 다른 것이라고 가르쳐줬다. 집에 가져가는 선물로 들쭉쨈을 몇 개 사서 비행기로 평양에 돌아갔다. 평양려관 방에서 여행가방을 열어봤더니, 세상에! 내 베개가 아름다운 보라색으로 염색되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잠깐 설명을 해야 할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로 웃기는 습관이었지만 예전에는 예민해서, 아니 섬세해서 어릴 적부터 써온 날개베개가 없으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물론 조대에도 그 베개를 가져갔었고 방학 때 오사카 집에 갈 때도 도로 가져갔었다. 그래서 조국강습 때도 당연한 것처럼 가져갔었다. 맛있게 생긴 들쭉쨈을 한 번 보려고 뚜껑을 열었다가 제대로 안 닫혀있어서 기압으로 터진 것이다. 그때는 베개를 가져간 것을 많이 후회했지만 지금은 너무 좋은 추억이다. 베갯잇을 바꿀 때마다 들쭉 맛이 생각난다. 그 예쁜 보라색도 15년이 지난 지금은 갈색으로 변했다. 나와 함께 일본 곳곳과 조선까지 여행한 그 베개는 아직 한 번도 서울에 와보지 못했다. 언제 데려와야 한다.

▲ 9월 14일 조선사 시간에 배웠던 단군이 묻힌 단군릉을 찾았다. [사진제공 - 리정애]
9월 14일,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할아버지의 능을 찾아갔다. 단군릉을 찾아가는 것도 4년 동안 기다린 일이었다. 단군에 대해서는 편입반 조선사 시간에 배워서 알게 됐다. 실존인물이 아니라 그냥 신화 속 이야기라는 설도 있었는데 1993년에 조선에서 단군릉을 발굴해서 단군이 실존인물이라는 것이 확증된 것이다. 내가 1학년 때인 1994년, 단군릉이 준공됐다는 뉴스가 <조선신보> 1면에 나왔다. 역사적으로 아주 의의 깊은 일이었고 3년 후에는 그 현장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어올랐다.

과연 우리 민족의 시조답게 참으로 훌륭하고 커다란 능이었다. 능 안에 안치된 유골을 직접 볼 수 없었던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으나 문화재 보호 입장에서 보면 어쩔 수 없었다. 나중에 동명왕릉도 가봤는데 드라마 ‘주몽’을 보고 나서 다시 가고 싶어졌다. 초등학생 때 ‘사회견학’으로 300년대에 재위했다는 제16대 일본 천황 능에 갔는데 그때는 아무 느낌도 없었다. 그런데 우리 조상들을 마주하는 느낌은 사뭇 달랐다. 절이라도 올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지금 집 근처에 경종의 능인 의릉이 있는데 거기도 참 좋은 곳이긴 하지만 문제가 있다. 몇 년 전, 서울 체류 중에 1960년대 왕릉의 일부를 훼손해 중앙정보부 청사를 만들었다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나라가 귀중한 문화재, 그것도 왕의 묘지에 건물을 세우고 연못까지 만든다는 염치없는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국정원이 이전하고 나서 그 자리에 학교까지 들어 왔으니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 아닌가. 그때는 어디에 있는 어느 왕릉인지 알 수 없었는데 나중에 김익 씨가 거기서 공익근무를 하게 되면서 알게 됐다. 2010년에 왕릉들은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는데 그때 유네스코가 이를 지적했다고 한다. 참으로 창피한 일이 아니겠는가!

지금 현재 훼손된 능역에 대한 복원사업을 하고 있다고 하지만 한 번 훼손된 문화재는 절대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리고 7.4공동선언을 발표한 강당은 그대로 보존하기로 됐다고 한다. 기회가 있어서 한 번 들어가 봤지만 아무 감동도 못 느끼는 으스스한 건물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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