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뉴스가 주최하고 평화3000이 후원한 ‘6.15공동선언 11주년 기념 통일뉴스 방북기 공모전’(5.21-6.20)에서 3편의 수상작이 결정됐다. [관련기사 보기]
'교류상'을 받은 장연희 씨의 '내 생애 최고의 2박 3일'부터 전재한다. /편집자 주


내가 통일운동을 알기 훨씬 전으로 기억된다.
어느 날 나는 꿈속에서 평양 대동강 위를 달리고 있었다. 대동강 주변으로는 푸른 나무들이 햇살을 받아 더욱 푸르게 빛나고 있었고, 단정하게 정리된 건물들이 나무와 어우러져 경관을 이루고 있었다. 그때 내가 무엇 때문에 평양 대동강 위를 달리고 있었는지, 왜 한 번도 본 적 없는 평양 거리가 꿈에 나왔는지 지금도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그 후 오랜 시간이 흘러 내가 텔레비전을 통해 보게 된 평양의 거리와 어릴 적 꿈속에서 보았던 평양의 거리가 같았다는 것, 그리고 이번 평양답사에서 만났던 평양의 거리가 분명 같았다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오래전 꿈속에서 만났던 그곳, 평양을 다녀왔다.
그토록 그리웠던 평양, 그곳을 다녀온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내가 평양을 다녀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다만 2박 3일간의 꿈속에서 지금 막 깨어난 듯 정신이 몽롱하고 가슴 속에 묵직한 그리움이 들어선 듯 자꾸 시큰 거려올 뿐이다.

이 느낌을 어떻게 언어로 담아낼 수 있을까, 어떤 단어가 나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해 줄 수 있을까... 어쩐지 자신이 없지만 지금부터 내 생애 절대 잊지 못할 2박 3일의 기억을 이곳에 담아보려 한다.

떠나기 전

방북신청을 해놓은 상태지만 떠나기 전날이 되도록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혹시 갑자기 취소라도 되면 어떻게 하지, 내가 정말 평양을 가긴 가는 거야’ 하는 생각에 안절부절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이, 어느새 나는 인천 공항행 버스를 타고 있다. 아직 날이 밝지 않아 어두운 창문 너머로 상기되어 있는 내 얼굴이 비치고, 평양길에 동행한 내 짐들도 덩달아 긴장이 되었는지 여느 때보다 얌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1시간을 달려 구로, 목동, 김포공항을 지났는데도 아직 40여분을 더 가야 한단다. ‘인천공항 가는게 평양보다 멀군...’ 비행기 시간이 늦은 것도 아닌데 마음은 자꾸 초조해 온다. 4시간 같은 40분을 더 달려 도착한 인천공항... ‘공항이 이렇게 생겼구나’하며 약속한 장소를 찾아가니 벌써부터 도착한 사람들이 출입국 신고를 하느라 분주하다.

나도 덩달아 출입국 신고를 하려는데 겨레하나 관계자가 4조 조장이라며 형광색 조끼와 조원들 안내책자, 단일기를 덥썩 안겨준다. 그때부터 매순간 인원점검에 긴장해야 하는 나의 평양행 일정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비행기 안

태어나서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다. 그것도 평양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다행히 창밖이 보이는 자리를 골라잡아 내내 비행기 처음 타본 사람 티를 내며 창밖만 내려보고 가는데, 전날 비가 온 다음이라서인지 유난히 하늘도 맑고, 구름도 예뻤다. 그렇게 내 마음도 비행기와 함께 평양을 향해 날고 있었던 것이다.

앞의 위치 표시기가 조금씩 조금씩 평양과 가까워지고, 조종사가 지금 평양의 날씨가 아주 화창하다며 안내를 해온다. 내가 정말 평양을 가고 있구나...
곧이어 처음 보는 평양의 땅이 조금씩 윤곽을 드러내며, 이곳 저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온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모두가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려 댄다.

▲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평양 인근 모습. [사진제공-장연희]
서서히 비행기가 하강을 하고 이제 곧 평양 순안 공항에 착륙을 한단다. 저만치 논길을 걸어가는 평양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곧 비행기 바퀴가 바닥에 닿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 심장이 멎을 것 같다.

평양을 만나다

비행기가 멈추자 번호순대로 내리라는 안내가 들려온다. 내 번호는 131번... 130명이 나간 후에나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번호가 불려질 때마다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들이 한명씩 빠져나가고 이번엔 드디어 내 차례, 비행기 안에서 나오자마자 북측 안내원이 “번호가 몇 번 이십네까?”하고 물어온다. “반갑습니다, 저는 131번입니다.” 무엇에 이끌리듯 인사를 하고, 고개를 돌리니 평양의 시원한 바람이 심장 속을 파고들며 인사를 전한다.
‘반갑습니다, 어서 오시라요’

그때부터 내가 어떻게 계단을 내려와 평양 땅을 밟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평양 바람이 내 심장을 삼켜 버렸을까, 가슴이 먹먹해 오고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지만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그래, 나는 분명 꿈을 꾸고 있는 거야, 저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로 빛나는 순안공항의 땅과, 반갑게 우리를 맞이하는 저 사람들, 사진 속에서 보았던 저 낯익은 건물과, 글씨를 좀 봐... 그래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야... 내 머리는 자꾸 이렇게 말을 걸어오는 것이었다.

▲ 첫 발을 디딘 평양 순안공항. [사진제공-장연희]
공항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여 밖으로 나오니, 앞에 ‘아리랑 참관단’이라고 붙여진 여러 대의 버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어느 버스를 타야하나, 고개를 두리번거리는데, 한 안내원이 다가와 말을 건네온다.

“저기 4조 조장이 누굽네까?” “아, 예. 접니다.”
“아, 반갑습네다, 내가 4조 안내를 맡았습니다, 리영민 입니다”하며 손을 내민다. 평양 땅에서 처음 잡아보는 안내원의 손,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간다.

곧이어 우리 4조가 버스에 탑승을 하자, 리영민 안내원과 3명의 안내원이 함께 차에 올라선다. 2박 3일 동안 4조 안내를 맡았으니 잘 부탁한다는 것이다. 세상에 이럴 수가... 2박 3일동안 이분들과 함께 움직인다니, 정말 꿈만 같다.

드디어 시동이 걸리고 버스가 평양 시내를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남과 북이 만나니 하늘도 축복하는지 날씨가 이렇게 좋다는 말과 함께 안내원 동무의 평양 거리 소개가 시작되고, 창밖으로는 평양의 들녘이 펼져져 있다. 자로 잰 듯 잘 정리된 논과 그곳에서 가을걷이에 한창인 사람들, 저마다 꽃술을 든 시민들이 활기차게 평양 거리를 걸으며 손을 흔들어 온다. 저 거리, 저 사람들, 맨발로 내려가 뜨겁게 얼싸안고 싶은데 차안에서만 바라보려니 자꾸 명치끝이 저려온다. 땀흘리며 열심히 설명중인 안내원 동무의 얼굴을 바라보는데 괜스레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다.

▲ 평양 곳곳에는 당창건 60돌 축하 구호가 눈에 띄었다. [사진제공-장연희]
평양 시가지와 곳곳에 김일성 주석을 기리는 구호와 당창건 60돌을 축하하는 구호가 눈에 띄고, 말로만 듣던 3대혁명 전시관, 보통문, 인민대학습당, 평양역을 지나 그렇게 우리는 4분 같은 40분을 달려 첫째날 숙소인 양각도 호텔에 닿았다.

대동강 양각도라는 섬에 자리 잡은 양각도 호텔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누구든 이곳을 다녀가지 않은 이상 그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리라... 내 방은 평양 시내가 그대로 내려다보이는 29층, 들어서자마자 창문을 활짝 열어 대동강과 평양의 공기를 한껏 들어 마신다. 아...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를 것 같다.

개선문과 만경대

첫 번째 답사일정은 1945년 김 주석이 항일투쟁을 마치고 평양시민들 앞에서 승리의 연설을 한 기념으로 세워진 개선문에서 시작되었다. 1982년 김주석의 70세 생일을 축하하며 세워진 개선문에는 70개의 진달래꽃과 김일성 장군의 노래, 그리고 승리 연설을 기념하는 벽화들이 세겨져 있다. 낭랑한 여성 안내원의 말솜씨가 참관단의 귀를 하나 둘 삼키고, 간드러지는 노래 소리에 혼을 뺏길 즈음, 저만치서 소년 소녀들의 힘찬 구호 소리가 들려온다. 수백명이 손에 횃불모양을 들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절도 있게 움직이는 모습, 아마도 당 창건 60돌 행사 준비 중인가 보다. 도로 하나만 건너면 저 활기 넘치는 대오 속에 함께 할 수 있을 텐데, 건너갈 수가 없단다. 언제쯤 마음껏 저 도로를 건너갈 수 있을까...

▲ 북측 안내원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왼쪽은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 [사진제공-장연희]
버스는 곧이어 우리를 만경대 고향집으로 옮겨 놓는다. 검은색 치마에 흰색저고리를 입은 안내원이 마이크를 잡고 만경대 고향집에 대한 설명을 하는데, 여기 저기 안내원을 사진 속에 담으려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그만큼 안내원의 미모가 뛰어 나기도 하지만 특히 “우리 민족의 진짜 상봉, 조국통일을 위해 우리 모두 노력합시다”로 끝을 맺는 설명을 듣는 순간 가슴이 너무나 뜨거워 온다. 또 김 주석이 항일무장투쟁을 위해 만경대 고향집을 떠나던 날을 회상할 때의 그 유난히도 반짝이던 눈빛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 만경대에서 본 경치. 탁 트인 들판 너머로 평양과 대통강이 내려다 보인다. [사진제공-장연희]
만경대 고향집에서 20여분을 걸어 올라가면 만경대가 나온다. 일만 가지의 경치를 볼 수 있다하여 만경대라 이름지어졌다는 걸 증명하듯 만경대의 경치는 정말 뛰어나다. 탁 트인 들판 너머로 평양과 대동강이 내려다보이고, 하늘과 숲은 어찌 저리도 푸르기만 한지...

아, 아리랑!

호텔로 다시 돌아와 저녁을 먹고 버스에 다시 탑승을 했다. 이번에 우리가 갈 곳은 5.1 경기장... 출발 전부터 버스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경기장에 입장하며 외칠 ‘우리민족끼리 조국통일’ 구호도 연습하고, 단일기도 힘차게 힘들어 보자며 모두가 다짐을 한다. 그러나 그 다짐은 5.1경기장을 들어서는 순간, 조국통일을 연호하며 인사하는 수만 명의 북동포들 앞에서 수포가 되고 만다. 목청껏 조국통일을 따라 해야 하는데, 목소리는 자꾸 기어들어가고, 어느새 조국통일은 눈물이 되어 흘러내린다.

지난 8.15때 상암에서 북측 대표단을 맞이하는 우리의 모습은 어땠을까? 그들 가슴에도 이렇듯 벅찬 감동을 안겨줄 수 있었을까...

▲ 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 공연 모습. [사진제공-장연희]
가슴이 채 진정되기도 전, 드디어 대집단 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이 시작된다.
‘누구든 이 꽃바다에 몸을 실으면 10년은 젊어질 것이니, 순간을 놓쳐 평생을 후회하지 말고 아리랑 꽃바다에 몸과 마음을 적셔보라’했던가, 과연 10만이 혼연일체가 되어 펼치는 장대한 서사극 앞에서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저 것이 정말 사람의 힘으로 가능하단 말인가. 이 세상에 어떤 민족이 저렇게 아름다운 집단 예술을 만들어 낼 수 있단 말인가.

일제 식민지하에서부터 시작된 우리민족의 수난과 항일무장투쟁의 역사, 외세와의 전쟁위기, 고난의 행군을 거쳐 강성대국의 길로 더 높이 더 빠르게 전진해 가는 우리 민족의 힘과 자긍심, 그 가슴 벅찬 감동이 아리랑 공연에 그대로 녹아 있었다.

특히 마지막 장인 <통일 아리랑>에서 ‘우리는 하나’에 맞춰, 풍습도 하나, 언어도 하나, 핏줄도 하나라는 배경대가 이어지고, ‘우리민족의 힘으로 통일의 문을 활짝 열자’는 구호와 함께 닫혔던 통일의 문이 활짝 열리는 순간, 정말 우리 안에 남아있던 그 모든 통일의 장벽과 시련이 모조리 사라지는 듯 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단일기를 흔들고, 목청껏 ‘우리는 하나다’를 외치니 진정, 이 순간만큼은 우리 모두가 하나였던 것이다.

▲ '아리랑' 공연 중 대형 지구본이 등장한 모습. [사진제공-장연희]
그래, 대형 지구본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저 한반도처럼 통일된 우리민족은 분명 세계의 중심이 되리라. 그리하여 온 세상에 당당히 외치리라, 우리는 자랑스런 아리랑 민족이라고...

다시 호텔에서

10시 30분쯤 호텔로 다시 돌아오니 엘리베이터 입구가 혼잡하다. 중국말을 쓰는 사람, 일본말을 쓰는 사람, 피부가 희거나 까만 사람, 모두가 하나같이 케리어를 옆에 들고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여행객임이 틀림없다. 안내원 동무에게 웬 외국인들이냐고 물어보니 아리랑을 보기 위해 찾아온 관광객들이라는 것이다. ‘맞다... 아리랑은 세계적인 공연이었지... 역시 아리랑의 열기가 대단하군...’하는 생각을 하며 내가 찾은 곳은 양각도 호텔 48층에 위치한 회전식 스카이 라운지.(정말 술을 마시고 있으면 어느새 위치가 바뀌어있다) 모두가 내 맘 같은지 평양에서의 첫날밤을 그냥 보내기 아쉬워하는 참관단들이 저마다 자리를 지키고 앉아 술을 마시고 있다.

한 잔 두 잔 술잔이 채워지고 비워지길 반복할수록 사람들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가고, 저마다의 가슴 속에 다시 돌아오지 않을 이 밤에 대한 아쉬움과 감동이 함께하는 듯 웃음과 한숨이 번져 나온다. 여기저기서 ‘동지애의 노래’, ‘심장에 남는 사람’이 나지막히 들려오고 그렇게, 그렇게 평양의 밤이 깊어만 간다.

아, 아직도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언제쯤 이 꿈속에서 깨어나려나...

평양의 아침

▲ 양각도 호텔에서 바라본 대동강과 평양 시가지 모습. [사진제공-장연희]
“따르릉”
깊은 잠을 깨우며, 전화벨소리가 울려온다. 수화기를 드니 조장은 늦으면 안 되니 지금 일어나라는 것이다. 시계를 보니 6시 50분, 앗! 새벽 다섯시에 일어나 대동강변을 거닐자던 나의 계획은 산산이 사라져 버렸군... 아무래도 떠나기 전날 잠을 이루지 못한 탓에 너무 깊이 잠들었나 보다. 그리고 평양의 잠자리가 어머니 품처럼 너무 포근했나 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알람시계라도 가져올 걸...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욕실로 들어서니 샴푸, 린스, 비누, 치약, 칫솔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보기만 해도 정겹고 가슴이 뿌듯하다.

부지런히 식사를 마치고 버스에 오르니 우리 리영민 안내원 동무가 반갑게 인사를 해준다. “잠자리는 어땠습네까? 춥지 않았습네까?”
“네, 너무 잘 잤습니다. 평양물로 씻으니 피부도 너무 좋아졌어요. 근데 저희는 이렇게 다녀가면 그만이지만 매일 안내하시려면 피곤하시겠어요.”
“일 없습네다.”
안내원 동무는 일없다고 얘기하지만 북측 안내원들 대부분이 우리를 안내하느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해 3kg 이상 체중이 줄었다고 한다. 우리가 너무 혹사시키고 있는 건 아닌지 자꾸 죄송스런 마음이 든다.

인원점검이 끝나고 이제 양각도 호텔과 대동강에게도 인사를 해야 할 시간이다.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 아름다운 대동강의 물결과 평양의 하늘과 땅... 이 모든 것을 가슴에 그대로 담아 돌아가야지... 그리고 꼭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동명왕릉, 만수대 창작사, 그리고 평양 단고기

둘째날의 첫 답사지인 동명왕릉은 우리가 잘 아는 고구려 시조 동명왕의 무덤으로 1974년에 발굴되어 1993년에 개축되었다고 한다. 웅장한 무덤, 사람과 짐승을 형상화한 수십 점의 돌조각품, 그리고 정릉사의 고즈넉함이 자연과 잘 어우러져 마치 하나의 화폭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동명왕릉 뒤로 이어진 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니 시원스레 쭉쭉 뻗어 자란 나무들과, 가을 들꽃들이 반갑게 인사를 해온다. 저 따사로운 햇살과 오염되지 않은 공기를 매일 마시고 살기 때문일까. 평양의 꽃과 나무들은 유난히도 푸르고 곱기만 하다.

▲ 정릉사 극락전 위로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다. [사진제공-장연희]
햇살 얘기가 나왔으니 이쯤에서 내가 느낀 평양의 햇살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지나가야 겠다. 평양이 우리보다 북쪽에 위치해 있어서 오기 전엔 내심 추울까봐 걱정을 했었는데 의외로 평양의 햇살은 서울의 햇살보다 훨씬 강렬하고 따사로웠다. 마치 대지를 금방이라도 삼킬 듯이... 저 태양 아래서라면 아무리 효과 좋은 햇빛 차단제라도 소용이 없을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보름째 안내를 맡고 있는 우리 안내원 동무들의 얼굴은 대부분 까맣게 변해 있었다.

보수단체 사람들이 북 인권을 운운하며 북 사람들은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해 피부가 까맣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곧잘 하곤 하는데, 무슨 소리... 당신도 저 거짓 없는 태양 아래 한 번 서 보시라. 어느새 붉게 상기되어 있는 당신의 얼굴과 팔뚝을 만나게 될 것이니...

저 맑고 따사로운 햇살의 비밀, 아마도 그것은 평양이 훼손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가득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자꾸 태양도 이곳 사람들 가까이 내려와 함께 호흡하며 이야기 나누고 싶어 하는 건 아닐까...

혁명미술 창작의 산실이라 불리우는 만수대 창작사는 북 최대 규모의 창작단체답게 건물 주변부터 예사롭지가 않았다.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주제로 한 벽화와 동상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고,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와 같이 남에도 많이 알려진 구호들이 길 양쪽에 돌 글씨로 새겨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내가 평양 거리에서 만났던 모든 벽화와 천리마 동상, 만수대기념비, 주체사상탑 등 대부분의 작품이 바로 이 만수대 창작사의 작품이라고 한다. 작은 돌맹이 하나에서부터 깊은 산 속의 바윗돌도 이들 손만 거쳤다 하면 순식간에 뛰어난 예술작품으로 변신하고 마는 것이다. 이렇듯 모든 것을 집단의 힘으로 창조해 내는 힘, 그 힘은 과연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만수대 창작사에서 여러 예술작품들을 감상한 후 리대명 공훈 예술가의 붓글씨를 받아 차에 올랐다. 이번에 우리가 갈 곳은, 그 유명한 평양 단고기집. 아, 여기서는 안내원들과 점심을 함께 먹는 것이 허락된단다. 리영민 안내원 동무와 꼭 식사 같이 하자고 다짐을 하며 단고기집에 자리하는데, 리영민 동무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연세가 지긋한 선생님께서 옆자리에 턱~(내 가슴 내려 앉는 소리) 앉고 마신다. 뒤늦게 나타난 리영민 동무... 기웃거리다 어쩔 수 없이 다른 자리를 찾아 간다. 아, 하늘이시여...
이 안타까운 마음을 부드럽고 연한 평양 단고기의 맛으로 달래본다.

묘향산으로 가는 길

평양에서 묘향산까지는 2시간이 걸리는 거리, 1박 2일 참관단은 결코 맛보지 못했을 묘향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니... 그뿐이랴, 2시간 동안 우리 안내원 동무와 차분히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보장 된 것이 아닌가... 생각만으로도 출발 전부터 가슴이 설렌다.

“평양의 3대 자랑이 뭔지 아십네까? 평양의 3대 자랑은 무상교육, 무상의료, 무상주택입니다.”
“요즘 남측의 청년들은 어떤 투쟁을 벌이고 있습니까?”
“지난 8.15때 저도 남측을 방문했었습니다. 그때 상암 경기장의 열기가 대단했지요?”
주위 사람들이 안내 좀 하라고 해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안내원 동무와 내가 한창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버스는 이미 평양을 한참 빠져나와 있었다. 시원스레 뻗어있는 길과 이제 제법 가을 분위기를 내는 나무들, 그리고 오고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고, 변함없이 푸른 하늘도 버스와 함께 달리고 있다.

한 한 시간쯤 달렸을까. 갑자기 버스를 도로가에 세우더니 안내원들이 여기서 소변 볼 사람들은 소변도 보고 잠시 쉬어 가잔다. 그러고 보니 평양에서 묘향산 가는 길에는 휴게소가 따로 없다. 그래도... 여성들은 어쩌라고...^^
버스가 멈추기 무섭게 남성 참관단들이 우르르 내려 나무 뒤로 사라지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여성 참관단들은 서로 마주보며 조용히 웃고만 있다. 나는 어디에 눈을 둬야 하나 고민하다 창밖으로 보이는 들국화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바람의 움직임을 따라 한들한들 움직이는 들국화, 그렇게 나도 이곳의 들국화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문득 해본다. 그 들국화 옆에서 서로 담뱃불을 붙여 주는 남측과 북측 남성들의 모습도 이제는 자연스럽기만 하다.

묘향산에서

묘향산 자락에 자리잡은 보현사는 조선시대 5대 사찰 중의 하나로 고려시대에 건설되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열 번이 넘는 미군의 폭격을 받았음에도 보현사는 그 수려한 아름다움을 맘껏 뽐내고 있었다. 북쪽으로는 룡주봉이 솟아있고, 서쪽으로 백화산 줄기가, 동쪽으로 청룡산 줄기가, 앞쪽으로는 아미산이 자리하고 있으니 과연 서산대사가 이 아름다움에 흠뻑 취했을만 하다.

▲ 보현사 안내원이 보현사에 얽힌 설화를 들려주고 있다. [사진제공-장연희]
보현사에서 만난 여성 안내원 동무, 보현사에 얽힌 재미난 설화를 조곤조곤 들려주며 우리들 웃음보따리를 풀어 놓더니, 이번에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자작시를 낭송해 준다. 어쩌면, 저들은 저렇게 하나같이 소박하고, 아름답고, 하나의 신념으로 똘똘 뭉쳐 있을까.

정말 그랬다. 버스 운전기사 동무에서부터, 개선문에서 만났던 안내원 동무, 만경대에서 만났던 안내원 동무, 동명왕릉에서 만났던 안내원 동무, 평양 단고기집에서 단고기를 나르던 접대원 동무까지, 그들은 정말 모두가 하나처럼 소박하고, 아름다웠으며 언제든 조국을 위해서라면 목숨조차 두려워하지 않을 이들이었다...

보현사에서 내려와 드디어 묘향산을 오른다. 시간이 늦어 정상에 오를 순 없지만 그래도 묘향산을 오르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더없이 뿌듯하기만 하다. 조선 8경중 하나로 꼽히는 묘향산, 서산대사는 이 묘향산을 보고 “금강산은 수려하나 장엄하지 못하고, 지리산은 장엄하나 수려하지 못하고, 묘향산은 장엄하고 수려하다”며 극찬을 했다고 한다.

그만큼 아름다운 산이기에 김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묘향산에 수많은 금이 묻혀 있는데도 이 산을 금광으로 개발하지 않고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인민들에게 선물하라 했다 한다. 정말 그 선택은 탁월했던 듯싶다. 만일 묘향산이 금광으로 개발되었다면 우리는 후대에 길이 남을 민족의 명산 하나를 잃을 뻔 하지 않았는가...

묘향산의 아름다움에 한창 취해있는데 날이 어두워지니 이제 내려가야 한단다. 휴...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며 안내원 동무와 하산 하는 길, 조금씩 조금씩 가슴 속에 알 수 없는 그림자가 밀려들기 시작한다. 이제 돌아 가야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나 보구나...

마지막 일정

북에서의 마지막 밤, 향산호텔 1층 로비에서 가는 시간을 붙잡으려 술잔을 나누고, 가슴으로 아리랑을 함께 불러보고, 또 우리들 노래소리에 하던 일 멈추고 말없이 따뜻한 눈길을 보내주던 안내원 동무들이 있었지만, 시간은 야속하게 흐르고 흘러 어느덧 마지막 아침이 밝고야 말았다. 묘향산의 산해진미들이 아침상에 올랐지만 어쩐지 입에 넘어가지 않고 목이 메이기만 한다. 그래도 아직 일정이 남았으니 기운을 내야지...

이번 평양참관의 마지막 일정은 국제친선전람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세계 각국으로부터 받은 선물을 전시해놓은 이곳을 북에서는 ‘영광의 박물관’, ‘세계의 보물고’라고 부르고 있다. 도대체 어떤 선물들이 이 안에 있는 것일까...

▲ 묘향산 국제친선전람관 모습. [사진제공-장연희]
과연 전람관은 겉모습부터가 범상치 않다. 나무를 쓰지 않았는데도 나무로 지은 것처럼 보이는가 하면, 창문이 없는데도 창문이 있는 것처럼 보이고, 빛과 습도까지 자동적으로 조절된다고 한다. 본관과 1관, 2관으로 나눠진 전람관에는 세계 170여 개 국에서 보내온 21만점에 가까운 선물이 대륙별, 나라별, 연도별로 전시되어 있는데, 안내원의 설명에 따르면 이 선물을 1분씩만 봐도 일 년 반의 시간이 걸릴 거라고 한다. 입이 절로 벌어지는 대목이다.

선물중에는 국보급 선물에서부터, 기차, 최고급 승용차, 글씨로 만든 초상화에 이르기까지 정말 세계의 보물들이 그대로 이 곳에 옮겨져 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우리 남측의 알만한 기업가, 언론사 사장, 그리고 역대 대통령들이 보내온 선물들이다. 보천보전투 기사를 금으로 만들어 보낸 동아일보 사장, 최고급 가구를 보내온 모 가구회사의 사장, 은담배와 재떨이 케이스를 보내온 대통령 등 정말 이렇게 뒤에서 선물을 보내고 있으면서 아직도 국가보안법을 운운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처구니없어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전람관에서 마지막으로 들린 방은 김 주석이 사망한 후 중국에서 만들어 보냈다는 밀랍상이 전시되어 있는 곳, 푸른 강과 나무를 배경으로 서있는 김 주석의 모습이 마치 실물과 같아 나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다른 참관단들도 실물과 같은 그 모습에 깜짝 놀란 듯 밀랍상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조용히 방을 빠져나가고 있다.

다시 순안공항으로 가는 길

이제 모든 일정이 끝나고 공항을 향해 다시 버스를 타야 할 시간, 호텔 입구에서 잘 가라고 손을 흔들어 주는 향산호텔 접대원들을 바라보는데 심장이 바늘에 찔리기라도 한 듯 자꾸 콕콕 아파온다.
이내 묘향산의 푸르름이 눈앞에서 점점 멀어져가고, 2박 3일 사이 정든 북녘의 대지와 하늘, 나무들이 하나둘 스쳐 지나가며 그렇게 버스는 다시 순안공항을 향해 달리고 있다.

▲ 리영민 안내원(왼쪽)과 보현사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제공-장연희]
“남에서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지만 장 선생이 가장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아쉬운 내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리영민 안내원 동무가 따뜻하게 말을 건네준다.
1월부터 지금까지 집에 들어간 날이 28일밖에 안 될 정도로 조국과 통일을 위해 온몸 바쳐 뜨겁게 살아가고 있는 리영민 안내원 동무... 평양에 도착하던 날 가장 먼저 뜨거운 손 맞잡으며 환영해 주고, 2박 3일 나의 든든한 짝궁이 되어주었던 리영민 동무... 이제 북을 떠올리면 리영민 동무가 가장 먼저 떠오를 것 같다. 그래, 이제 리영민 동무는 나의 심장에 남는 사람이 된 것이다.

떠나오며

“더 올라가면 눈물이 날 것 같으니 여기서 그만 헤어지자요.”
“빨리 통일해서 꼭 다시 오겠습니다. 꼭 다시 오겠습니다.”

탑승시간을 앞두고 안내원 동무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데 바보처럼 내 입에서는 “다시 오겠습니다”라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은데, 가슴속에서 수많은 이야기들이 이렇게 일렁이고 있는데... 드디어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리고, 기약 없는 만남을 약속하는 서로의 손이 말로 대신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나누고 있다.

다시 비행기가 인천공항을 향해 날아오르고 조금씩 조금씩 평양의 모습이 멀어져 갈수록 가슴 속 깊은 곳에 묵직한 그리움이 하나 둘 들어서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그리움의 정체는 결코 눈물만은 아니리라. 이번 평양길에서 너무나 듬직한 또 하나의 내 조국을 만났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저만치 다가와 있는 ‘조국통일’을 보았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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