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전 경희총민주동문회 사무국장)

지난 2008년 가을 평양과 백두산 등을 참관했던 이창훈 전 경희총민주동문회 사무국장이 방북기를 본사로 보내왔다. 필자는 뒤늦은 방북기를 쓰게 된 이유를 나날이 악화되고 있는 남북관계 탓에 혹시라도 새 세대들이 통일에 무관심하게 될까 하는 우려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연재는 매주 토요일에 걸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1편 : 프롤로그 - 나와 DPRK
2편 : 인천공항과 순안공항
3편 : 평양이야기 (상/하)
4편 : 백두산이야기 (상/중/하)
5편 : 묘향산 이야기와 남은 이야기들 (상/하)
6편 : 에필로그

평양냉면

백두산을 내려오니 온 몸에 기운이 다 빠진다. 다음날 비행기를 타고 역시 개마고원을 지나 평양으로 돌아왔다. 누가 이제 뭘 좀 더하자면 ‘아 못하겠소. 나는 빠지겠소’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내 몸에 또 다시 힘을 불어 넣어 준 것이 바로 '평양냉면'이다.

점심시간이지만 휴일도 아닌 월요일인데, 많은 사람들이 평양 옥류관 입구에 줄지어 서 있다. 안내원 동무의 이야기에 따르면 평일에도 북녘땅 각지에서 원조 평양냉면을 맛보기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한다. 우리 버스가 먼저 줄 서있는 사람들 지나쳐 옥류관 입구 바로 앞에 선다. 아마도 새치기를 할 모양이다. 북녘의 동포들이 남녘에서 온 손님들이라고 순서를 양보한 모양이다.

널찍한 홀이 사람들로 꽉 차 있다. 창문이 대동강 풍경으로 가득한 병풍처럼 보인다. 높다란 천장에는 번쩍이는 샹들리에가 줄지어 매달려 있고, 수많은 원탁은 화려한 문양의 금빛 테이블보로 덮여져 있고, 벽에는 웅장한 인민화 풍의 그림들이 칸칸이 걸려 있다. 어쩐지 이토록 화려한 분위기에서 냉면을 먹는다는 것이 어울리지 않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세계 곳곳에 체인망을 가지고 있는 세계최대의 냉면집! 우리 민족 최고의 문화상품! '옥류관'의 원조집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 민족에게 평양냉면은 고추장, 된장처럼 한민족임을 증명하는 리트머스지 같은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세계적인 음식문화상품으로 만들었으니, ‘세계화’는 자본주의 국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세계화는 충분히 가능한 것이고, 그것은 우리 민족사의 자랑인 ‘열린 민족주의’의 증표라 할 수 있다.

구한말 고종이 좋아했다던 냉면은 일제강점기 시절과 남북분단 시절을 거치며 더욱 유명해졌다. 1960년대에 태어나 7,80년대에 성장한 나는 그 시절 지금과 다른 냉면을 먹었다. 고기국물이 흔하지 않은 시절인 탓에, 겨울에는 얼음이 동동 뜬 동치미 국물에 말아먹고, 여름에는 김칫국물에 입이 얼얼할 정도로 시원한 지하수 물을 퍼 올려 농도를 맞추고 면을 말아 먹었다. 이것이 이북식 냉면이라고 돌아가신 할머님은 말씀하셨다.

이렇게 냉면을 사랑한 민중들은 자신들의 고단한 삶을 냉면에 빗대어 이야기하곤 했다. ‘가늘고 긴 질긴 면발은 민초들의 가늘고 긴 질긴 생명줄 같은 것이고, 살얼음이 동동 떠 있는 육수물은 불안하기만 한 인생사를 말해 주는 것’이라고, 그래서 면을 잘라 먹으면 생명줄이 짧아진다는 속설도 생겼다.

▲ 평양 옥류관 냉면. [사진-이창훈]

수천 번 망치질로 만든 황금색 놋그릇에 담겨 나온 냉면에 이러 저런 고명과 살얼음이 동동 떠 있는 육수가 더해져 더욱 입맛을 돋우게 한다.

그러나 지금 나는 평양냉면의 맛이 문제가 아니다. 이미 보았듯이 수많은 사람들이 평양냉면을 먹기 위해 줄을 서 있고, 우리는 그걸 새치기 해 먼저 먹고 있으니, 뒤통수가 따가운 것이다.

게다가 나는 맛보다 양이 아닌가? 그래서 시간이 문제다. 한 그릇을 더 먹기 위해서는 빨리 먹어야 한다. 그런데 이게 자장면처럼 한 입에 물고 툭툭 끊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다. 게다가 가위로 잘라 먹으면 생명줄이 짧아진다니 그럴 수도 없고, 먹기도 전에 한 그릇을 더 주문한다. 헉헉대며 두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식사를 마치고 대동강 쪽으로 나있는 난간에 섰다. 부풀어 오른 배 때문에 숨쉬기도 버거운 나를 향해 시원한 대동강 강바람이 불어온다. 아! 나는 음식을 먹은 것이 아니었다. 나의 몸은 '민족의 힘'으로 가득 찼다. 그렇게 기운을 차리고 나니, 다시 평양유람을 가잔다.

평양냉면이 먹고 싶다

평양냉면이 먹고 싶다
지리산 고령토
엉성하게 빛은 뚝배기에
한라산 백록담 백두산 천지연
맑은 물을 길어다
개마고원 갓 나온 하지감자 고구마
꾹꾹 눌러 면발 뽑아 만든

평양냉면이 먹고 싶다
똥값 된 누렁소 등심 몇 점 버물고
고추파동에 눈물 흘리던
영양 청송 풋고추 송송 썰어 다진 양념과
최루탄 지랄탄보다 더 매운
노란 겨자 살짝 곁들인

평양냉면이 먹고 싶다
새벽을 힘차게 열던
내 고향 토종암탉 둥지 틀어 뽑은
뽀송뽀송한 삶은 계란 고명으로 모양내고
두만강 거슬러 오른 삼지연 얼음을 잰

평양냉면이 먹고 싶다
만수대 부벽루에 올라
입가에는 훌훌 매운맛 다셔가며
오래도록 헤어져 살아온 이야기
질긴 냉면가락처럼 얼커렁 슬커렁 버물고

푸르디푸른 대동강 바라보며
뙤약볕 아래 힘겨운 농사일 잠시 잊고
염천더위 일렁이는 오늘따라
가슴까지 식혀내는 얼음물같이 개운한
평양냉면이 먹고 싶다.

- 시인 이경재님의 '원기마을 이야기'중에서

주체사상탑과 조국통일3대헌장기념탑

양각도 호텔에서 대동강 상류를 바라보다가 우측 대동강 남쪽을 바라보면, 불꽃모양의 지붕을 얹은 우뚝 솟은 탑이 보인다. 밤에는 불꽃에 불이 들어와 어두운 평양시내에서 더욱 솟아 보인다. 그것이 주체사상탑이다.

나는 주체사상탑 관람을 간다는 말에 내심 동명왕릉이나 평양성을 둘러보고 싶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막상 안내원 동무의 이야기를 듣고 탑신 내부로 들어서니 상황이 달랐다. 승강기를 타면 불꽃 지붕이 있는 정상부까지 오를 수 있는 것이다. 한 번에 많은 인원이 탈 수 없어 우선 연장자부터 탔다. 기다리는 동안은 탑신 내에 관광상품을 파는 진열대가 있었으나, 대부분 남쪽 세관에서 걸리는 품목들이어서 사지는 못하고 구경만해야 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승강기는 꼭대기 층이 5층인 구조로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높이가 150미터인 탑이 5층이니, 한 층을 오르는데 상당한 시간이 흐른다. 승강기에서 내리자 이미 관람을 마친 사람들이 대기해있다. 우리가 내리고 그들이 탄다.

잠시 미로(迷路) 같은 복도를 따라 가니 관람대가 보인다. '와~'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평양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대동강 물줄기가 훤히 들어나 보이고, 강남 쪽은 현대식 건물들이 질서정연하게 즐비하게 들어서 있고, 강북은 현대식 고층건물들과 복잡한 도심이 얽혀 있었다.

서울에도 남산타워 전망대가 있다. 아직 그곳에는 가보지 못하였지만 이곳과 그 경치가 사뭇 비슷할 것이다. 한강의 물줄기가 훤히 보일 것이고, 강남은 초현대식 건물들과 고층아파트들이 질서 정연한 도심이 보일 것이고, 강북은 초현대식 건물과 이러 저런 건물들이 얽혀 복잡한 도심을 보여 줄 것이다. 어쩌면 이리도 서울과 평양은 닮은꼴일까?

▲ 주체사상탑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평양시가지. [사진-이창훈]

한 나라의 수도로 지정된 것도 서로 다르다. 한쪽은 2천 년 전에 대륙을 무대로 살던 나라가 정한 것이고, 한쪽은 다시 몇 백 년이 흐른 뒤에 반도를 무대로 살던 나라가 정했으니, 선정 과정은 엄청난 시대적 차이가 있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서로 다른 사상과 체제를 가진 두 나라가 생겨나자마자, 각각의 수도를 지정해서 살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어쩌면 이토록 똑같은 생김새의 수도를 가지게 되었는가? 아무리 원수라고 싸우고 치고받고 해도, 그렇게 부지불식간에 같은 핏줄임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북에서 말하는 ‘조국통일 3대헌장’이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서에 명시되어 있는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 등 조국통일 3대 원칙’과 ‘고려민주연방제국가 창립방안’, ‘전민족 대단결 10대 강령’을 말한다. 이를 북에서는 그들의 확고한 통일원칙으로 삼아 기념탑을 만들었다. 또한 건립시기가 2000년 8월 14일이다 보니, 그해 성사된 ‘6.15남북공동선언’의 의미를 담아 높이를 ‘6.15미터’로 했다고 한다.

▲ 조국통일3대헌장기념탑. [사진-이창훈]

이 기념탑을 보고 있으려니 내가 남측의 대학생으로 1989년 세계청년학생평양축전 참가투쟁에 참여하던 젊은 청춘시절이 생각난다. 그 시절 ‘1974년 남북공동성명’, ‘고려연방제 통일방안’, ‘남북이 내놓은 통일방안들의 차이점’ 등등 그리고 통일노래들까지 빼곡히 적힌 작은 수첩모양의 인쇄물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다니며 읽고 토론하고, 서로 퀴즈도 내며 즐거워하던 기억도 나고, 분홍색 반팔 티에 각종 평양축전포스터의 그림을 찍어 참가기금을 만든다고 팔기도 하고, 물론 종로 신촌 서대문 홍제동 등에서 ‘가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의 거대한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가지는 못하였지만, 당시 젊은 청춘들은 그대로 물러서지 않고, 대학의 민주광장 통일광장에 모여 못 다한 통일노래를 불렀다. 눈물도 많이 흘렸다. 너무도 억울하기도 했다.

태어나서부터 '북한은 우리 땅이다. 만주도 우리 땅이다'라고 가르쳐 놓고, 모르는 놈은 매로 쳐가며 배우라고 해놓고, 막상 만나러 간다고 하니, '북한을 모른다. 젊은 혈기가 어떻고 저떻고..., 배후에 빨갱이가 있어 순진한 대학생들을 포섭했다니...' 별 시답지 않은 이유로 가지 못하게 하는 그들이 ‘못난 어른들이’ 너무 밉고 답답했다.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탑 사이로 늦은 오후의 태양빛이 찾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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