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전 경희총민주동문회 사무국장)

지난 2008년 가을 평양과 백두산 등을 참관했던 이창훈 전 경희총민주동문회 사무국장이 방북기를 본사로 보내왔다. 필자는 뒤늦은 방북기를 쓰게 된 이유를 나날이 악화되고 있는 남북관계 탓에 혹시라도 새 세대들이 통일에 무관심하게 될까 하는 우려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연재는 매주 토요일에 걸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1편 : 프롤로그 - 나와 DPRK
2편 : 인천공항과 순안공항
3편 : 평양이야기 (상/하)
4편 : 백두산이야기 (상/중/하)
5편 : 묘향산과 못 다한 이야기들
6편 : 에필로그

천지에서의 아쉬움을 삼지연에서 달래다

▲ 삼지연 물에 손을 넣었다. [사진-이창훈]

'삼지연'을 '천지연'이라 잘 못 들었는가? 마치 백두산 꼭대기에서 비탈길을 내려가 천지연못 바로 앞에 선듯하다. 천지에서 못 만져본 천지 호숫물을 여기에서 만져본다. 맑다. 팔소매를 걷고 차가운 물속에 손을 넣어 바닥 모래를 떠 얼굴 가까이 가져와 본다. 지저분한 찌꺼기 하나 없는 고운 모래가 손에 올라져 있다. 이번엔 다른 손의 소매도 걷고 양팔을 물속에 넣어 바닥을 짚은 다음 고개를 숙여 물맛을 본다. 무색무취 천연의 물맛이 느껴진다.

아... 그제야 원시의 세상을 가슴에 담는다.
아... 그제야 우리 민족 근원의 맛을 느낀다.
아... 그제야 더럽혀진 내 조국의 몸을 씻어낼 자리가 바로 이곳임을 깨닫는다.

삼지연의 호수 빛깔도 천지와 마찬가지로 청자 빛이 완연하다. 게다가 저 반대편 호수 끝자락에 드리워진 깊은 침엽수림의 그림자는 또 다른 비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마치 푸른 청자에 새겨진 학과 산야들처럼...

▲ 삼지연혁명전적지에 서 있는 거대한 횃불상과 청년 김일성 동상. [통일뉴스 자료사진]

삼지연혁명전적지에는 너른 광장이 있다. 수만의 군중들이 모여 집회를 열 법도 해 보인다. 조형물도 대단한 규모다. 여기에도 김일성 주석의 동상이 서 있다. 20대 약관의 나이에 이곳 백두산에서 항일전투를 벌이던 청년 김일성 주석의 모습이다. 그 동상은 수만의 군대를 호령하듯 손에는 쌍안경을 들고 군복을 입고 서 있다. 그 뒤로 병풍처럼 백두산 산자락이 펼쳐져 있다.

우리는 겨우 2백여 군상들로 광장에 서 있으니, 초라하기만 하다. 그러나 수만의 인민들이 긴 고난의 행군을 멈추고, 흙 묻은 신발을 털며, 무거운 배낭 짐을 내려놓고, 이곳에 정렬하여 섰을 때, 그리고 집회를 한다고 야영을 한다고 이러 저리 부산스럽게 큰 소리가 오고가고 그 소리가 백두산 계곡사이로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질 때, 아~ 그 감격! 그 장관! 인민 개개인이 하나의 집단을 이루고 그 집단이 다시 모여 나라를 만들고, 그 힘을 느낄 때, 이 삼지연의 너른 광장은 '하나 됨의 광장'일 것이다. 우리 민족이 하나 되는 길도 이러하리라.

백두산 밀영(密營)

삼지연에 가기 전에 백두산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곳을 찾았다. 깊은 숲속이다. 시간 때도 점심 직후인 한낮이다. 햇볕은 강렬하였다. 버스에서 내리니 높다란 침엽수림이 우리를 뒤덮는다. 나뭇가지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빛의 장난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도 분간하기 어렵다.

백두산 산줄기에도 소백산이 있다. 소백산(2,171m) 계곡을 흐르는 물이 '소백수'다. 소백수는 소백산 계곡을 따라 흐르다 압록강으로 흘러든다. 얼마나 깨끗하면 산 이름을 따 물의 이름을 붙였을까? 그 소백산 자락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상징하는 정일봉(원래 장수봉, 1798m)이 있고, 정일봉 아래 깊숙한 숲속에 김정일 위원장이 태어났다는 백두밀영이 있다. 백두밀림에는 항일전쟁 때 사용하던 비밀기지(비트) 유적지 몇 곳이 더 있다. 사자봉 밀영, 곰산 밀영, 선오산 밀영, 간백산 밀영 등등... 이 지역 이름이 '백두산밀영노동자구'라고 한다.

▲ 컵에 넣은 소백수. 소백수 백두밀영 옆을 지나는 계곡에 천연 우물이 있다. 안내원동무들이 백두산의 진귀한 약초들의 기운이 다 들어간 샘물이라며 권한다. [사진-이창훈] 

이 백두밀영을 비롯한 여러 밀영들은 김일성 주석이 국내 진공작전을 했다는 증거물이다. 역사적으로 이곳은 항일운동사에서 중요한 지역이 아닐 수 없다. 북녘에서 발간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혁명력사,1992’에는 1937년 보천보 전투 당시 백두산 밀영을 이용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김일성은 1937년 5월 하순 주력부대에서 선발된 우수한 대원들로 원정대를 편성하여 직접 백두산지구 비밀근거지의 곰산밀영에 와 보천보일대를 정찰하고 국내진공작전 준비를 완료했다. 김일성은 무산지구에 진출한 부대가 적의 집중공격으로 포위될 위험에 처하자 예정한 날짜를 앞당겨 보천보에 진격하였다.”

보천보전투 이야기가 나오니, 한 대목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앞서서도 이야기 한 강정구 교수 이야기다. 물론 2001년 당시에도 나온 이야기지만 벌써 십여 년이 지난 이야기이기에 한 번 더 여기에 쓴다.

그러니까 1998년 10월, 북측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김용순 위원장의 초청을 받아 남측 신문 경영인으로는 처음으로 고 김병관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이 ‘동아일보 방북취재단’을 이끌고 방북했다. 이때 김 전 명예회장이 보천보전투의 기사가 담긴 1937년의 신문원판을 순금으로 제작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전달한 사실이 있다.

'만경대 정신'을 방명록에 적은 강 교수와 '보천보 정신'을 순금으로 제작하여 선물로 전달한 김 명예회장은 도대체 뭔 차이점이 있기에 한 사람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감옥에 가야 했을까? 이들이 한 행위가 죄가 분명하다면 다른 한 사람은 '금품수수죄'까지 적용해서 처벌해야 한다.

그러나 '공공의 적' 검찰과 법원은 그러지 않았다. 강 교수의 죄를 증명하기 위해 공안당국은 강 교수의 고매한 학문적 성과까지 거론하였다. 여기에 철면피 동아일보는 당시 ‘강정구 교수는 왜 대한민국에 있는가’라는 제목의 사설을 써가며 친북좌파로 몰아 붙였다.

대한민국의 보수는 논리도 체면도 없는 세력임에 분명하다. 오죽했으면 지금도 북측에서는 남측의 보수신문들의 방북취재를 불허하고 있을까? 이런 비합리적이고 모순적인 사건들로 인해 민족통일이 늦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 가슴이 더욱 답답해진다.

지금 창밖에는 눈이 내린다. 춘삼월을 시샘하는 눈이 내린다. 차라리 저들의 장난질이 시샘수준이라면 눈을 감고 가련만, 분단 50년이 지나도록 무너지지 않는 장벽이 되어 민족의 염원을 가로막고 있으니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답답한 마음에 잠시 눈을 감으니, 지금도 흰 눈에 뒤 덮여 있을 장엄한 백두산 천지가 그려진다. 백색의 순결함 속에 감춰져 있는 어두운 백두산 천지의 산야들이 아름답게 한민족의 조종의 산으로 되살아오는 날은 도대체 언제 오는 것일까?

나는 2008년 방북기간 내내 그 답답한 마음을 버릴 수가 없었다. 와서 보지 않았으면 이렇게까지는 답답하지 않았을 텐데, 오히려 가서 보고 있잖니 더 억장이 터지는 듯하였다. 매일 저녁 술잔은 비워졌고, 잠자리는 뒤숭숭하였다. 돌아오는 길은 이래저래 불편하였다.

▲ 베개봉호텔 앞 경치. [사진-이창훈]

이제 하루 일정이 마감되었나 보다. 베개봉호텔로 이동한다. 이동 중에 한때 백두산에 국제적인 스키장으로 조성하려던 북측의 의도가 감지되는 건물이 여럿 보인다. 자존심 강한 북은 한민족 ‘조종의 산’인 백두산의 자연환경을 해치지 않으려고 스키장 건설 사업을 중단하였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와 비슷한 사연을 금강산에서 보았다. 금강산의 자연을 해치지 않기 위하여 사람의 대변조차 금강산에 묻지 않고 가지고 내려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백두산 스키장 건설 사업이 중단된 것은 북을 고립무원의 나라로 만들려는 국제적 협잡꾼들의 농락 때문이다.

높다란 나무숲 사이에 아담한 삼각지붕을 한 건물이 우뚝 서 있다. 백두산 산자락의 베개봉아래 한 전원호텔이 여행에 지친 우리를 반가이 맞는다.

썩어도 먹고 얼어도 먹는 감자

▲ 베개봉호텔 식당에서 나온 감자. [통일뉴스 자료사진]

지정된 방에 짐을 풀고 몸도 씻고 나니, 저녁시간이다. 식당으로 가서 착석을 하니 봉사원동무들이 음식을 가져다준다. 음식을 보니 국수가 있고, 지짐이 있고, 떡도 있다. 그리고는 감자를 갈아 계란 익힌 것과 섞어 마치 아스크림처럼 한 숟가락씩 퍼 담아낸 음식도 있다. 모든 것이 감자요리다. 재미난 것은 남측에서 장작불에 구어 낸 구운감자를 북녘에서는 '숯감자구이'라고 부른 다는 것이다.

학창시절 나는 감자를 구황식품중 하나라고 배웠다. 기근이 들었을 때 척박한 땅에도 손쉽게 재배해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시대에도 감자를 구황식품이라 부를 수 있는가? 북측에서만 해도 감자요리가 200여 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먹을 것이 넘쳐나는 남측에서도 보통의 가정에서 감자 없이 음식을 할 수 있는가? 만약 감자 없이 음식을 한다면 보통의 가정주부가 할 수 있는 음식은 절반으로 줄어 들 것이다.

감자는 일종의 주식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그런 감자가 백두산에는 더더욱 특별한 음식이다. 개마고원에서 감자 재배면적이 서울시의 세 배 면적인 18만ha라고 하니 그 규모가 엄청나다. 이 곳 개마고원의 감자밭을 가본 이들에 의하면, 감자꽃 필 때 그곳에 가면 그 경치를 가히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장관이 펼쳐진다고 한다.

▲ 감자떡. [사진-민족21]

감자 이야기를 하려니, 또 다시 할머님이 떠오른다. 내가 할머님과 같이 보내던 어린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감자음식은 ‘감자밥’이다. 쌀이 부족한 시절이었으니, 감자나 고구마를 쌀과 함께 넣어 밥을 하셨다. 물론 감자떡도 있었고, 감자국수도 있었다. 감자떡과 감자국수의 재료인 감자가루는 썩혀 말린 감자를 부숴 가루를 내었다. 감자가루를 썩혀서 만드는 이유는 보관 때문이다. 감자를 썩혀 가루를 내면 감자의 다른 성분은 죄다 없어지고 녹말가루만 남는다. 그래서 썩히지 않고 오래 보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썩히지 않은 감자가루는 거뭇거뭇하다.

내가 할머님이 만든 감자떡과 베개봉호텔에서 맛본 감자떡이 똑같다는 이유는 바로 썩힌 감자가루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뽀얀 감자떡은 떡 속에 들어간 콩이 보일 정도로 투명하고 먹으면 쫀득쫀득한 맛이 난다. 감자를 그냥 갈아 가루를 내어 떡을 만들려면 녹말가루가 썩어야 하는데, 그러면 쫀득쫀득한 맛도 없고 뽀얀 감자떡 색갈이 나오지 않는다. 음식연구자가 아닌 내가 조사해본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감자를 썩혀 가루를 내어 떡을 만드는 민족은 우리 민족 외에는 없을 듯싶다.

▲ '언 감자국수'. [통일뉴스 자료사진]

베개봉호텔에서는 또 다른 감자요리법을 듣게 되었다. 바로 '언감자국수'다. 이 국수에는 백두산 유격대원들의 사연이 담겨져 있다. 유격대원들이 백두산에서 흔한 감자를 군량미로 확보했다가, 일본군의 추격이 시작되면 감자를 들고 이동할 수가 없어서 땅속에 묻게 된다. 그 후 일본군이 사라지고 나면 다시 돌아와 감춰둔 감자를 꺼내면, 얼은 감자가 나오곤 했다. 그때 한 유격대원이 언감자를 버리지 않고 갈아 녹말을 만들어 국수를 해먹었다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감자가 얼어도 먹고 썩어도 먹을 수 있는 지혜를 가진 민족이다. 그러니 감히 어느 외세가 센 힘만 믿고 우리 민족을 탐할 수 있단 말인가?

잊지 못할 베개봉호텔에서 본 별

▲ 베개봉호텔에서 바라다 본 베개봉. [통일뉴스 자료사진]

그렇게 감자예찬론을 들으며 저녁만찬이 끝났다. 나는 부른 배를 소화시키려고 호텔 밖으로 나왔다. 맞은편에 베개봉이 보인다. 남측은 이제 가을 중반으로 접어들 날씨지만 이곳은 겨울 초입이다. 벌써 눈이 내렸으니 겨울인 셈이다. 날씨도 쌀쌀했다. 호텔 앞마당을 서성였다. 나는 호텔 앞마당 어느 긴 의자에 아예 누워버렸다. 하늘을 보았다. 별이 보인다. 나는 호텔 불빛을 손으로 가리며 하늘을 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 덕에 온통 별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저 별들 중에는 한반도에서 백두산 자락에서만 볼 수 있는 별자리가 있을 것이다. 그 별의 위치는 아주 멀고도 멀어 이 높은 백두산에 올라야만 그 빛을 희미하게나마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별이 아마도 우리 민족의 운명을 쥔 별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뚫어지게 별만 바라보았다. 너무도 아름다웠다.

한참을 별과 함께 놀던 나는 일어섰다. 춥기도 하지만 같이 온 일행들이 그리워졌다. 전날 평양에서의 뒤풀이를 의식해서 오늘은 자제하리라 마음먹었건만 그리 되지 않는다. 게다가 베개봉호텔에서 술을 접할 수 있는 곳이 2층에 다락방 같은 작은 공간 밖에 없었다. 이번 관광에 참여한 사람들 중 술꾼들은 다 이곳에 모인 것이다.

봉사원들과 여럿 술꾼들은 한 팀이 되었다. 노래를 한다. 봉사원 동무들이 손님을 환영하는 뜻에서 먼저 시작한다. 가냘픈 북측 특유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나도 가슴이 뛴다. 옆에 있던 구로시민센터 김 대표가 “이 동무! 노래 한 가락 뽑으시라우요”하며 농을 던진다. 나는 그 소리가 어찌나 고마웠던지...

그러나 겉으로는 수줍은 듯 여러 차례 마다하는 척! 이윽고 나는 노래했다. 민족의 염원이 담긴 남측 한 작가의 노랫가락을 불렀다. 북녀(北女)의 노랫가락에 화답하듯이 남남(南男)의 굵직한 성악가 목소리를 내고 싶었다.

“아~아 통일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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