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전 경희총민주동문회 사무국장)

지난 2008년 가을 평양과 백두산 등을 참관했던 이창훈 전 경희총민주동문회 사무국장이 방북기를 본사로 보내왔다. 필자는 뒤늦은 방북기를 쓰게 된 이유를 나날이 악화되고 있는 남북관계 탓에 혹시라도 새 세대들이 통일에 무관심하게 될까 하는 우려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연재는 매주 토요일에 걸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1편 : 프롤로그 - 나와 DPRK
2편 : 인천공항과 순안공항
3편 : 평양이야기 (상/하)
4편 : 백두산이야기
5편 : 묘향산과 못 다한 이야기들
6편 : 에필로그

“가슴으로 찾아가는 평양”

“내가 밟고 가는 눈 덮인 들판 길, 조심하여 헛밟지 말지어다. 오늘 가는 나의 발자취에 뒤에 오는 이의 표식이 될 것입니다.”

1949년 4월 김구 선생이 평양을 방문하면서 남긴 말이고, 이후 1989년 3월 문익환 목사는 평양을 찾는 심경을 김구 선생의 심경과 같노라고 인용한 문구이다. 그리고 문 목사는 이어 ‘가슴으로 만난 평양’이라는 방북기를 출간하였다.

그로부터 49년만이고 19년만이다. 나도 이미 눈은 멀고 가슴만 뛰고 있었다. 순안공항에서 버스로 이동하는 사이에 비친 파란 하늘빛과 따가운 햇살은 반나절 동안의 숨 가쁜 일정으로 딱딱하게 굳은 내 표정을 풀어주고 있었다. 십여 대의 버스로 나눠 탄 우리는 평양시내로 향하고 있었다.

▲ 버스 - 우리가 탄 버스가 1989년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당시 재일교포 청년들이 모은 성금으로 마련한 버스라고 한다. 다시 한 번 더 나의 대학시절 전대협 임수경 대표가 평양축전에 참여하던 그 광경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당시 남녘 대학생들의 열망이었다면 지금 우리가 타고 있는 버스보다 더 좋은 것을 기증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고... [사진-이창훈]

나는 차창 밖의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아니 차라리 걷고 싶다. 차에서 내려 흙과 나무와 풀과 어우러져 있는 땅을 밟으며 한없이 걷고만 싶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미지의 세계에 갔다는 증명으로 충분하기 때문이었다.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 속에서 남쪽의 이러저러한 풍경들과 다르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늘을 향해 쭉 뻗은 미루나무 가로수며, 가을걷이가 진행된 논과 밭들이며, 그냥 평양특별시 어디 어디라는 지명만 다를 뿐...

굳이 다른 것이 있다면, 구호가 적힌 간판들이다. 그 또한 인천공항에서 서울로 가는 길에 있는 상업적인 광고판들과 다르지 않고,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있을 법한 일인데, 어쩐지 나는 그것들이 어색하기만 하다. 아마도 아직 내 가슴이 더 열리지 않았나 보다. 어느 외국인이 평양을 방문하고 나서 평양을 한마디로 말하기를 ‘구호의 도시 평양’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 표현에 숨은 의도가 좋고 나쁨을 떠나 평양을 처음 방문하는 나에게 그 커다란 간판들에 적힌 수많은 ‘슬로건과 프로파간다’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 것은 사실이다.

2001년 8.15민족대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북녘땅을 밟은 도종환 시인도 나와 같은 느낌을 받았을까 시인의 방북기에 실린 시 한 수를 옮겨 본다.

“광대한 옥수수밭 위로 노을이 진다/ 맨손으로 일군 땅 위에 금빛 노을이 진다/ 고난의 시절을 함께 걸어오지 않은/ 나는 진정 이들의 벗인가/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 한/ 이들과 험난한 길을 함께 하지 않은/ 나는 이들의 형제인가/ 오늘 이렇게 손잡고 웃지만/ 내일을 위해 오늘을 살 수 있는 진정한 벗인가/ 내일도 함께 웃으며 가진 걸 나눌 수 있는 동무인가/ 평양으로 가는 길/ 폐허의 하늘 위에 뜨거운 노을이 진다”

한 30여분 달렸을 것이다. 평양 시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날씨는 화사하였다. 몹시 따가울 것으로 예상되는 가을 햇볕을 피해 양산을 쓴 시민들이 언뜻 언뜻 보인다. 낯선 거리다. 서울처럼 화려한 간판들이 보이지 않는다. 건물의 외벽들은 별다른 외장재로 치장하지 않은 채 시멘트벽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지상 전차가 이리 저리 혼란스럽게 다닌다. 교차로에는 전차의 전기선들이 사방으로 얽혀 복잡한 도심의 모습을 보여준다.

거리의 사람들은 각양각색이다. 건물 앞 화단을 정리하는 모습부터, 어딘가 바쁘게 이동하는 시민들, 우리를 알아보고 손을 흔들어 주는 시민들, 아이를 업은 아낙네의 모습, 장난치며 거리를 이리저리 뛰어 다니는 있는 아이들 등등. 대중교통인 전차에는 서울의 지하철처럼 많은 사람들을 타고 있다. 인구 325만의 메트로폴리스가 우리를 반겨주고 있었다.

김일성 주석의 동상이 서 있는 만수대

평양시내로 들어오자 바로 만수대(萬壽臺)가 보인다. 만수대는 북한의 정치 사회 문화 사상의 중심지이다. 우리나라 여의도의 국회의사당이라 할 수 있는 만수대의사당이 있고, 북한 최고의 예술인들을 배출하는 '만수대예술단'이 있다. 만수대의 옛 지명이 '장대(將臺)고개'라고 한다. '장대'는 '성곽 일대를 한눈에 바라보며 군사들을 지휘하는 지휘소'를 말한다.(수원의 화성에 가면 동장대와 서장대 2곳의 장대가 있다)

조선시대 때 이곳에 평양의 군사 지휘소가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또 3.1운동 당시 평양에서 독립선언문이 낭독된 곳이 바로 이곳이라고 한다. 지리적으로도 평양의 한 복판이고 날이 맑은 날이면 서해바다까지도 볼 수 있는 곳이라 하니,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북한 최고의 중심지가 될 만한 터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 만수대 동상에 와서 축하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신혼부부. [사진-이창훈]

그곳에는 높이 23미터의 거대한 김일성동상이 있었다. 그때 이제 막 가정을 꾸린 신혼부부가 나타났다. 예쁘게 꽃단장을 한 신부와 신랑이 고운 꽃다발을 맞잡고 만수대 동상 앞에 선다. 그리고 엄숙하게 그 꽃다발을 올린다. 신혼부부는 한껏 뽐을 낸 고운 자태로 기념촬영을 진행한다. 북한에선 신혼부부들이 결혼을 하면 이곳 만수대 동상에 와서 축하와 함께 기념촬영을 한다고 안내원이 귀띔을 해준다. 우리들은 부부의 연을 맺은 두 사람의 행복을 빌었다. 마치 통일도 그렇게 한순간에 다가 올 수 있다는 상상을 가능케 하는 순간이었다.

만수대에서 양각도 호텔로 이동하는 중에 한참 공사 중인 아파트 공사현장이 눈에 들어온다. 아마도 평양시내 현대화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살림집 10만호 건설사업'으로 보인다. 2년이 지난 지금 언론에서 만수대지역의 살림집 건설사업이 마무리 되어 800여 세대의 입주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대동강

만수대 참관을 마치고 우리는 숙소인 양각도 호텔로 이동하였다. 각자 배정받은 객실에 짐을 풀고 나니 잠시 개인 휴식시간이 주어진다. 나는 객실의 창문을 연다. 34층 객실의 커튼을 열어젖히니, 평양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창문도 열어보니 신선한 바람이 객실 안으로 몰아쳐든다.

총 450.3㎞로 한반도에서 5번째로 긴 강인 대동강! 낭림산에서 발원하여 평안남도의 크고 작은 산들을 휘돌며, 이 물 저 물을 끌어들여 덩치를 키우고, 이곳 평양에 도달하여 아름다운 평양성을 휘감아 돌다 보통강과 만나고, 마지막으로 남쪽에서 발원하여 도착한 여러 강들과 만나 서해로 빠져나간다. 대동강에 모여지는 물들이 얼마나 많았으며 강 이름조차도 대동강이었을까? 고려 고종 때 문신인 최자(崔滋)는 "여러 물이 모여서 돌아 흐르므로 대동강이라 이름했다"(洌水所匯名爲大同)라고 유래를 밝히고 있다.

▲ 대동강. [사진-이창훈]

모래 채취하는 배들과 유람선이 눈에 들어오고, 강변에는 낚시꾼들이 간간이 보인다. 평양은 보통강과 대동강이 수백리 길을 달려오며 모아온 퇴적물로 만들어진 펑퍼짐한 너른 땅이다. 대동강을 바라보던 시선을 들어 올리니, 아까 보았던 만수대 전경이 한눈에 보이고, 좀 더 지나 시내 중심부를 바라보니 공사가 중단된 류경호텔도 보이고, 고려호텔이며 평양시내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방향을 틀어 동쪽을 바라보니, 저 멀리 우리에게는 '모란봉'으로 널리 알려진 금수산과 통신탑도 보인다. 그 옆으로 한번에 1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는 능라도에 위치한 5.1경기장이 보인다. 대동강에도 한강처럼 여러 섬들이 있다. 양각도, 능라도, 쑥섬, 두로섬, 벽지도, 봉래도 등 여섯 개의 섬이 있다고 하니, 현재 한강에 남아 있는 섬의 개수와 똑같다.

파란 가을 하늘을 비추고 있는 푸른 대동강을 바라보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잖니 서러운 마음이 더욱 더 해진다. 고려 인종 때 김부식과 정치적으로나 문학적으로 대립각을 세웠던 정지상(鄭知常)은 대동강을 바라보며 ‘대동강 물은 언제나 다 마르나 大同江水何時盡 / 해마다 이별의 눈물이 푸른 물결에 보태질 텐데 別淚年年添綠波’라며 젊은 청춘의 이별을 노래했다. 이토록 즐거운 여행에 슬픔은 어울리지 않겠지만, 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된 조국에 사는 서러운 백성은 저 많은 대동강 물에 또다시 눈물을 보태고 있었다.

▲ 대동강수계도. 브래태커니 캡처. [사진-이창훈]

환영행사

3박4일 동안 우리의 편안한 휴식처가 될 양각도 호텔의 첫 행사는 환영행사다. 바쁜 일정에 점심이었지만 음식은 저녁 만찬 이상의 수준으로 차려져 나온다. 아, 처음으로 맛보는 평양의 밥상이다. 배고픈 식객은 행사를 뒤로 한 채 음식에 눈이 먼다. 나는 배고프지 않다. 단지 반세기 만에 만나보는 형제들이 권하는 음식에 마치 며칠을 굶은 철없는 객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식전에 간단한 음식들이 나온다.

호텔의 종업원들이 음식을 내려놓자마자 젓가락을 집어 들어 이것저것 찍어 먹어본다. 음.. 김치다. 할머니의 김치 맛이다. 남쪽의 김치처럼 고춧가루가 많이 들어가지 않은 배추의 시원한 맛을 간직한 김치다. 짜지도 않다. 김치 한 종지의 국물까지 홀락 마셔도 괴안타! 앗, 평양소주다. 남들은 건배사를 위해 한잔을 준비하고 있지만 나는 벌써 두잔 째다.

앞에 앉은 구로시민센터 김성국 대표가 눈치를 준다. 그러더니 갑자기 그도 따라 건배사 전에 잔을 들이키며 다시 잔을 채운다. 음~ 감이 온다. ‘이 인간은 나하고 같은 부류구나’ 하는... 철없는 객의 행동은 그저 수백 명 중에 한 명일뿐, 행사는 나름대로 진행된다. 다음은 함께 동행했던 <통일뉴스> 김양희 기자의 기사 일부분이다.

“.... 양각도 호텔에는 백두밀영의 대형 벽화가 그려진 식당에서 우리 ‘평화3000’ 참관단의 환영오찬이 준비돼 있었다. 조선카톨릭교협회 장재언 위원장은 환영사에서 “이번 방북기간 동안 민족의 성산 백두산을 답사하는 평화3000 참관단은 조국의 자주통일과 번영에 기여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며 “10.4 선언 받들고 조국통일 앞당기길 위하여 노력하자”고 말했다. 이에 ‘평화3000 신명자’ 이사장은 답사를 통해 “그동안 ‘평화3000’이 진행한 콩우유 공장, 두부공장, 평양축구장 건립 등은 서로에 대한 동포애적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며 “6.15, 10.4선언에 기초해 남북공동번영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화답했다. 장 위원장과 신 이사장은 ‘통일과 민족 번영을 위해 건배하자’며 참가자들에게 건배를 제안했다...”

나는 벌써 취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남쪽에서 공식행사를 수십 년째 진행해본 나로서는 이번 방북에서는 행사관계자도 아니거니와 참가자 수백 명 중의 한 명인지라, 게다가 몸과 마음은 평상심을 회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나는 공식행사에서 항상 삐딱선을 타던 못난 나의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어느새 환영행사가 끝나고 다음 행선지로 이동한다. 나는 그곳에서 또다시 통일을 생각해야 했다. 술꾼의 통일이야기는 대수로울 것이 없겠지만 우리를 안내하는 동무들의 언담은 진지하기만 했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