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전 경희총민주동문회 사무국장)

지난 2008년 가을 평양과 백두산 등을 참관했던 이창훈 전 경희총민주동문회 사무국장이 방북기를 본사로 보내왔다. 필자는 뒤늦은 방북기를 쓰게 된 이유를 나날이 악화되고 있는 남북관계 탓에 혹시라도 새 세대들이 통일에 무관심하게 될까 하는 우려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연재는 매주 토요일 6회에 걸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1편 : 프롤로그 - 나와 DPRK
2편 : 인천공항과 순안공항
3편 : 평양이야기
4편 : 백두산이야기
5편 : 묘향산과 못 다한 이야기들
6편 : 에필로그

“출장이 다 뭐냐?”

우리 집 앞마당에는 아직 다 쓸지 못한 눈이 그득하다. 첫 눈이 왔을 때, 반가운 마음에 다 쓸지 않고 놔뒀는데, 그 위에 다시 몇 번이고 새로운 눈이 쌓였다. 그때는 이미 늦었다. 처음에 놔둔 눈이 녹아 시멘트 바닥에 딱 달라붙어 눈을 치우기가 불가능해졌다. 이제는 하루빨리 날이 따뜻해져 스스로 녹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겨우내 집 마당에 쌓인 눈얼음과 씨름을 하는데, 한반도에서는 유일하게 일 년 중 서너 달을 빼놓고 눈을 볼 수 있다는 그래서 이름이 백두산인 그곳에서 본 눈이 생각난다.

벌써 2년하고도 4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가본 평양과 백두산에서 보낸 3박 4일은 아마도 평생 못 잊을 것이다.

방북 전날인 2008년 9월 26일 저녁 무렵, 나는 청계천 전태일다리(버들다리)에서 열리는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이동 중이었다. 그때 어머니의 전화가 왔다.

"애비야! 니가 정신이 있는 거냐? 지금 할머니가 저리도 아프셔서 언제 돌아가실지도 모르는데, 출장이 다 뭐냐?"

나의 할머님 고향 평남 순천

나의 할머님은 평남 순천이 고향이시다. 북한이 자랑하는 세계4대 합성섬유 '비날론' 생산공장인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가 있는 곳이다.

▲ 할머님의 고향 순천시. [자료사진 - 이창훈]
할머님은 1922년 이곳에서 태어나 강원도로 시집 와 나의 어머니를 외동딸로 두었다. 외할아버지는 한국전쟁에 징집되었다가 전쟁초기 홍천전투에서 전사하셨다. 할머님은 홀로 외동딸을 키우며 인고의 세월을 보내셨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외할머님의 손으로 키워졌다. 그러다 보니 외할머니이라는 말보다 할머니라는 말이 더 친숙해졌고, 머리가 크면서 조금 배웠다고 외할머니라고 부를라 치면 왠지 죄스러운 맘이 앞서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할머님이 나를 위해 만들어 주신 음식들은 북녘의 음식 맛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고춧가루가 덜 들어간 맛이 간결한 김치며, 삶지 않고 물에 담가 두었다가 쓴 물만 빼내고 간단한 양념으로 버무리는 도라지 무침, 감자와 옥수수를 이용한 다양한 요리들... 이번 방북기간에 맛보았던 여러 음식들에서 나는 할머님의 손맛을 다시 맛 볼 수 있었다. 특히 백두산 관광을 마치고 베개봉 호텔에서 먹어 본, 빛깔이 하얗고 쫄깃쫄깃한 감자떡 맛은 할머님이 만들어 주시던 감자떡 맛과 그리 똑 같을 수가 없다.

나에게는 어려서부터 우리 집에 종종 찾아오시던 이모할머님이 한 분 계신다. 할머님께는 이제는 찾아 갈 수 없는 곳이 된 고향이야기를 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셨다. 그러던 중 남북 이산가족상봉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무렵, 이모할머님과 함께 통일부에 이산가족상봉 신청을 해놓았다. 그러나 신청한지 십 년이 다되어가도 상봉소식은 전혀 들을 수 없었다. 또 언제부터인가는 신청순서대로 하던 것을 팔십 세 이상의 고령자를 우선적으로 상봉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그도 몇 해가 지났건만, 상봉한다는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이산가족상봉이 있는 날이면, 할머님은 TV를 켜 놓고 한 없이 눈물을 흘리셨고, 그리고 이모할머님과 통화가 이어졌다.

'아마도 이젠 순천에 허 씨 집안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은가 봐? 전쟁 통에 다들 어디론가 가버린 건가?' 하시며, 두 분의 ‘긴 기다림의 대화’는 길게 이어졌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20대 초반의 처녀의 몸으로 평남에서 강원도로 천리길 시집을 와, 결혼한 지 5년 만에 남편을 잃고, 삼 년 전쟁의 비참함을 겪고, 휴전선으로 고향의 친지들과는 소식이 끊긴 채, 딸 하나만 키우며 살아오신 할머님은 86세의 일기로 그야말로 한 많은 인생을 마감하셨다.

나의 방북은 할머님이 돌아가시기 한 달 전에 이뤄졌다.

전대협 시절 1989년 평양축전

1980년대 후반기에 대학을 다닌 나는, 그 시절 기억 중에 가장 손꼽으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1989년 평양축전에 남한의 대학생 대표로 임수경 씨가 참여한 일이었다. 나는 그때 경찰들의 포위망을 뚫고 한양대에 입성하여 평양축전 환영대회에 참여하고 있었다. 행사가 진행될 무렵 갑자기 마이크에서 “전대협 동지여러분! 방금 전 우리의 전대협 임수경 대표가 평양축전에 참가하였습니다”라는 소리가 들렸고, 이윽고 한양대를 둘러싸고 있던 전경들이 진압작전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페퍼포그의 최루탄 발사소리는 마치 평양의 능라도 경기장에서 고행 끝에 참석한 남측의 대학생을 환영하는 폭죽소리로 들렸던 기억이 있다.

그 뒤로 통일과 관련된 행사가 있다면 빠지지 않고 참석하였다. 고학년이 되어서는 전대협 산하의 '자주적 평화통일과 남북학생회담 추진위원회' 간부도 맡기도 하였고, 사회에 나와서도 통일이라면 밤새가며 술을 퍼마시며,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통일을 이야기했다.

학생운동을 한다면 인생 망치고 감옥이나 가게 된다고 매일 야단이시던 어머님과 할머님도 통일이라면 끔벅 죽으시고, 어쩌다 남북관계가 좋아져 금방 통일이라도 올 것 같은 남북화해분위기가 조성이 되면, 할머님은 ‘이게 다 우리 손주가 고생해서 된 것이여...’ 하며 좋아하셨다. 그런 할머님 때문에라도 나는 할머님 생전에 통일이 와야 한다는 강한 열망을 갖게 되었다.

“아니, 이런 경사가 다 있나!”

할머님이 하루를 알 수 없이 아프다고 하는데도 출장 간다는 아들의 엉뚱한 짓에 화가 나신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더 이상 감추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출장도 출장이지만 혹시라도 할머님이 아프셔서 병원에 가시게 되면, 30일까지 잡혀 있는 방북기간 탓에 급히 귀경할 수도 없는 터라 더 이상 감추고만 있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방북을 하게 되었노라고 사실을 이야기하였다. 전화로 나의 출장이야기의 진실을 알게 되신 모친은 나의 걱정과는 달리 아주 다른 반응을 보이셨다.

“아니, 이런 경사가 다 있나! 그렇다면 꼭 가야지 뭔 소리냐. 할머니가 얼마나 가고 싶은 곳인데, 가야지 암. 몸조심해서 다녀와라! 할머니 걱정은 말고, 이러다 곧 괜찮아 지실거야. 돌아가실 병이 아니니 걱정 말고 잘 다녀와라.”

순간 울컥하는 마음에 가슴은 아려오고 눈에 눈물이 고여 드는 듯했다. 손자의 방북소식을 듣고 기뻐도 하시겠지만, 또 다시 고향 생각에 가슴 아파하실 할머니를 생각하니, 집안어른들을 속이려한 나의 잘못이 더욱 크게만 느껴졌다.

뒤늦은 방북기를 쓰는 이유

2008년의 나의 방북은 한평생 통일과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다가 불치의 병으로 돌아가신 고 제정구 의원의 미망인 신명자 여사가 이사장으로 있는 '평화 3000'과 경희총민주동문회의 주동욱 님의 도움으로 이뤄질 수 있었다.

'평화 3000'은 오랜 기간 동안 평양에 콩우유공장을 건설하여 북녘 땅의 어린 아이들이 건강을 위해 노력해온 단체이거니와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건 이후 남북의 평화교류가 단절될 무렵이어서 방북이 쉽지 않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어렵사리 방북을 성사시킨 단체이다. '평화3000'의 방북이 이명박 정부 들어서 대규모 민간인 방북이 마지막이었다는 점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부족한 언문으로 글을 쓸 용기를 갖게 된 것은 나날이 악화되고 있는 남북관계 탓이다. 나의 가장 큰 걱정은 이렇게 남북의 긴장관계가 오랫동안 지속될 경우 혹시라도 자라나는 새 세대들이 통일에 무관심하게 되지 않을까하는 점이다. 그들이 혹시 통일은 ‘귀찮은 것’, ‘복잡한 것’, ‘씨끄러운 것’이라 치부하고, ‘부모님 세대의 일’로 규정하지는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나의 조그만한 기억이라도 통일에 보탬이 된다면 들춰내놓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나의 북한방문 일정 (2008년)

8월 말경 - ‘평화3000’ 방북 일정에 참가하기로 함
9월 초경 - 9월 18~28일로 예정된 방북 일정이 예정 없이 연기됨
9월 중순경 - 9월 27~30일까지로 방북 일정이 확정됨

9월 26일 밤늦게 - 모친과 방북이야기를 나눔 

       27일 오전 7시경 인천공항 도착
                 8시반경 인천공항 출발
                 10시경 순안공항 도착
                 10시반경 만수대 참관
                 12시경 양각도 호텔 도착 - 환영만찬 진행
                 오후   2시경 만경대 관람
                 4시경 대동강 쑥섬 방문
                 6시경 평양단고기집에서 저녁식사
                 8시경 양각도 호텔 귀가

      28일 오전 6시경 기상
                7시경 순안공항으로 출발 
                9시경 삼지연공항 도착
                11시경 백두산 천지에 버스로 도착
                오후 1시경 백두산 백두밀림 자락에서 도시락으로 점심 식사
                2시경 백두밀영과 삼지연 관광 
                5시경 베개봉호텔 도착 

      29일 오전 6시경 기상 후 식사
                8시경 삼지연공항에서 순안공항으로 이동
                10시경 콩우유공장 방문 
                12시경 옥류관에서 평양냉면으로 점심식사
                오후 1시경 평양시내 관광 - 주체사상탑과 조국통일3대헌장 기념탑
                6시경 양각도 호텔로 귀가 후, 환송만찬 진행

      30일 오전 6시 기상 후 식사
                7시경 묘향산으로 출발 
                9시경 묘향산관광 - 국제친선전람관과 보현사 방문
                12시경 향산호텔에서 점심식사
               오후 3시경 평양순안공항 도착
               4시경 김포공항으로 출발
               6시경 김포공항 도착 
               7시경 할머님이 계신 구의동 혜민병원으로 이동

10월 27일 할머님 돌아가심.

▲ 방북시 사용했던 각종 지참물들. [자료사진 - 이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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